만들어진 생각, 만들어진 행동 - 당신의 감정과 판단을 지배하는 뜻밖의 힘
애덤 알터 지음, 최호영 옮김 / 알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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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혹은 자주, 은유는 은유가 아니라 진실 혹은 실제와 가깝다. 온도가 뜨겁다는 말을 사랑과 열정과 같은 격한 감정에 실어보낼 때 우리는 그 뜨거움이, 실제 감정의 뜨거움과 신체적으로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안다. 격한 사랑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할 때, 몸에서는 열이 난다. 빨간색의 열정은 문학적 표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빨간색에 노출되면 몸에 변화가 생겨, 열정 호르몬이 상승된다. 뜨거운 사랑이 시가 아니라 과학이 되는 순간이다. 분홍색에 노출되면 힘이 빠지고 안정되며 빨간색과 검은색은 실제로 몸 속의 테스토스테론 홀몬을 증가시켜 흥분 상태에 가깝게 한다. 저자는 올림픽과 월드컵 경기에서 빨간색 옷을 입고 뛰는 경우, 우승을 하는 확률이 많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왜 도핑 테스트에 운동복 색깔을 넣지 않는지 의아해 해야 될 정도로가 지적한다.

 

길거리의 게시판, 신문,  텔레비전 광고 등을 통해 수많은 상징에 노출되는 현대인들은 어떤 한 상징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더라도 의식의 밑바닥에서 은밀하게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지배당하고 있다. 실험에 의하면 우연히 부정적인 상징을 봤던 학생들은 나중에 그 사실을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그 상징에 의해 채택된 인상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단적인 예로 우리 주변의 애플 로고는 그 로고가 미처 머리속에서 로고를 인식하지 못할 만큼 빠르게 화면속에서 언뜻 스쳤을 지라도 학생들의 창의력에 영향을 미쳤고, 통찰에 대한 은유로 알고 있던 백열전구의 빠른 노출 역시 학생들의 통찰력을 증가시켰다. 쉽게 말해 애플 로고가 가진 창의적 상징이 그것에 직접 노출되지 않더라도, 스치듯 빠르게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무의식 속에서 실제로 창의력을 향상시킨다는 것이다. 어찌 놀랍지 않은가.

 

우리는 모두가 예스 라고 말할 때 자신의 의지가 맞다면 당당히 노 할 수있는 소신과 용기가 필요하다는 영혼없는 가르침을 이곳저곳 종교지도자나 공익광고 같은 쪼가리 캠페인을 통해 배운다. 그것은 이상적이나, 현실에서 그러면 왕따된다. 소신이라 생각하는 것은 똥고집일 수 있고 진리라 믿고 있는 것이 사실은 나의 근시안적 색맹의 눈으로 보는 착시 이미지일 수 있다. 사회적 동물인 우리는 남들 따라 하는 게 속 편할 때가 많다. 여럿이 함께 갈 때는 생각 없이 엉뚱한 곳으로 가더라도, 자신있게 가는 사람을 따라 우루루 몰려다니는 것이 인간이다. 이것은 길거리 신호등 빨간 불이 오랫동안 바뀌지 않을 때 종종 경험한다. 차가 지나다지지 않을 때 빨간불이 오래 켜져 있으면 누군가 건너기 시작해야 비로소 우루루 건넌다.

 

평소 개성과 독립이라는 개인주의적 가치를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미국인들. A B C 세개의 선 중 왼쪽 그림과 같은 것을 찾으라고 했을때 너무나 빤한 답을 주위 사람 모두가 틀리게 말하면 30퍼센트가 이에  동조하여  자신들도 똑같이 틀린답을 대답한다. 집단주의 문화가 발달한 나라에서는 이 동조성 효과가 극적으로 더 강력하게 나타나서 일본인은 경마 50%라고 한다.  도덕과 관습도 다수의 행동방식에 따라 정해졌을 것이다. 한  끼 끼니를 때우더라도 파리 날리는 식당보다는 줄을 서더라도 북적거리는 곳을 들어가고, 옷장에 옷이 가득해도 다시 또 남들이 많이 입는 유행하는 옷을 사고, 내 의견이 다른 사람과 조금 달르더라도 내색하지 않고 다수의 견해에 대체로 맞서지 않는다. 애덤 알터는 학계에서 대체로 인정하는 근거라며 이러한 집단주의적인 생각이 유럽과 북미 등지에서보다 한,일,중 등의 동양적 사고 체계를 반영한다고 말한다.

 

이름은 사람의 나이, 성별, 시대, 인종 등을 반영하고 때때로 사회 경제적 지위까지 유추하게 한다. 도로시는 1920년대 가장 흔한 이름이었지만 지금 새로 태어나는 아기에게 그런 이름을 지어주는 사람은 없다. 반면 에바는 21세기 이전엔 거의 전무한 이름이었으나 최근 흔해진 이름이다. 인구조사에 따르면 에바는 대개 백인이고 페르난도는 라틴 아메리카계, 알리야는 흑인일 가능성이 높고 한발 더 나가 루시엔과 어데어는 부유한 백인인 경향이, 엔절, 미스티는 가난한 백인일 가능성이 통계적으로 많다는 것이다. <괴짜 경제학>의 저자 레빗과 더브너는 어머니의 교육 수준과 그 자녀의 이름 사이의 상관관계를 발견했는데, 예를 들어 리키나 바비의 어머니는 샌더나 기욤의 어머니보다 교육 수준이 낮다는 주장 같은 것들이다. 개인적 경험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는 대개 작명소에서 짓는 이름은 조부들이 짓는 이름에 비해 시대에 뒤쳐지지 않고 세련된 이름이 많다. 그러고 보면 아예 길한 이름을 짓겠다고 생년월일 같은 것들을 작명소로 보내 그 이름이 한 인간의 운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을 믿든 안믿든 전문가의 손에 맡겨 버리는 풍습도 어찌보면 현명한 선택같다. 상업적인 작명소인 만큼, 이런 저런 나름대로의 이론이 있을 것이며, 불리우기 쉽고, 시대가 요구하는 이름일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발음이 쉽고 백인 경향의 이름은 경력이 부족해도 입사시 서류전형에 합격할 확률이 50퍼센트가 높았고, 발음하기 유창한 이름을 가진 변호사가 승진할 확률도 높았던 이 예를 우리나라에 적용하면, 가령 순자, 용자와 같이 일제시대풍의 이름을 21세기에 지어준다면, 그 아이가 어른이 되어 패선 디자인 회사에 응시했다면 같은 조건의 서연과 같은 종류의 최신 경향의 이름에 서류 전형에 떨어질 가능성이 커보인다. 쉬운 이름 성공 법칙은 회사 이름, 상장 코드 등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쉬운이름을 가진 회사의 주가가 어려운 이름의 회사에 비해 상장한 지 일주일 동안 평균 상승폭은 두배 이상 컸으며 주가코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신의 감정과 판단을 지배하는 뜻밖의 힘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 <만들어진 생각, 만들어진 행동>의 원제는 Drunk Tank Pink이고 원부제는 번역서의 부제와 거의 비슷한데, 원제의 원뜻 drunk tank pink의 뜻을 나는 잘 모르겠다. Drunk tank는 주정뱅이 유치장? 세단어의 합성이 무엇을 말하는 지 누군가 설명해 주면 좋겠다. 부제는 책의 내용을 압축한다.  우리 인간이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 보이지 않는 깊숙한 것들을 꺼내다가 사람을 대상으로 실험을 하고  그들이 보여준 행동을 유의 깊게 관찰하고 해석한다. 

 

<상식밖의 경제학>과 <거짓말하는 착한 사람들>로 잘 알려진 댄 애리얼리가 대표적인데, 말콤 글래드웰이 추천을 한 이 책은, 말콤 글래드웰의 책에서도 이미 접한 비슷한 내용도 다수 포함한다. 이런 류의 책들이 재미 있는 이유는 실험자들을 마치 몰래 카메라처럼 특정 반응을 관찰할 목적으로 설계된 상황에  처하게 한 후 그들의 반응을 관찰하고 그로부터 연구자들이 세운 가설에 따라 관찰 결과를 해석하는 방식으로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연구실에서 인간을 대상으로 한 심리 실험은 몰래 카메라만큼 재미있으면서 우리의 생각, 우리의 행동이 무엇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고 우리를 움직이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물론 이런 책을 읽지 않아도 뻔하게 알고 있을 법한 내용도 많다. 예를 들면 체스를 둘 때 미인 앞에서 더욱 호전적인 수컷들, 사람 눈 사진을 크게 붙여놓은 무인 커피 판매 시스템의 수입이 크게 늘어나는 것, 종교적 상징 앞에서 조금 더 양심적이 되는 것 등이다. 많은 내용을 담다 보니, 실험과 해석에 있어 신뢰 수준에 대한 의구심이 생기는 부분도 없지 않았다. 그런 것까지 일일히 짚어주다간 자칫 딱딱한 논문이 되어 버릴 수도 있으므로 일부러 쉽게 풀어쓰고 학술적 기반지식이 필요한 부분도 모두 생략한 듯하다.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라 해서 전편을 다 읽은 말콤 글래드웰과 댄 애리얼리와 비슷한 내용들이 많아 굳이 비교를 하자면, 말콤 글래드웰은 어떤 일관된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다양한 소스에서 가져와 스토리를 서로 엮음으로서, 소설을 읽는 것과 같은 흥미진진함을 주는 데 비해, 애덤 알터는 실험실의 내용을 훨씬 다양하고 많은 사례들로 한데 엮었다. 정보가 더 많은데. 그 만큼 깊이는 조금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일장일단이 있는데, 댄 애리얼리가 한 가지 주제에 대해 끝이 없이 변형된 실험을 하면서 조금씩 가설을 증명하고 이론을 발전시켜 나가는 데 비해 알터의 주제는 조금 더 넓고,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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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 - 명작 동화에 숨은 역사 찾기
박신영 지음 / 페이퍼로드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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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중 음악듣기는 동석자/운전자와 취향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 기묘한 긴장감 갈등을 동반한다. 달리는 고속도로에서 라디오 시끄러운 광고를 피해 주파수 맞추기는 밀리는 교통 체증 만큼이나 지루하다. 오디오북은 최상의 선택. 요즘 전자 도서관에서는 e북 뿐만 아니라 오디오북도 대여가 가능하다. 오디언 이란 프로그램을 다운받아 자주가는 도서관을 등록하면 그곳에 있는 오디온 북 대여가 대략 5일 정도 5권까지 가능하다.  전문적으로 트레이닝된 아나운서의 너무 강하거도 너무 약하지도 않은 적당한 톤에 문맥에 따른 명확한 끊어 읽기와 정교한 액센트가 가독성? 아니 청독성이라고 해야 하나 을 높여준다. 이렇게 완전히 풀로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주면 참 좋을텐데, 축약본이다. 예스24에 찾아보니 완독본도 있다. 그런데 이 책, 알고 보니 예스24 블로그에서 활동하는 깜장드레스 라는 분의 책이다. 자칭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작가. 축약본이지만 잘 압축된 책 내용으로 보면 지성은 맞는 거 같고 미모는 사진빨인지 모르겠으나 역시 출중.인정!!


내용은 명작 속 배경이 되는 문화와 역사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책의 제목 <백마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다 다녔을까>와 같이 명작 속 궁금한 역사적 시대적 사실들을 재미있게 풀어놓은 책이다. 아쉬운 점이라고는 축약본이라는 점 뿐이다. 완본을 구해 읽어야겠다는 생각 뿐이지만 이래 저래 언제 읽을 지 모르므로, 제대로 읽기 전 짦막하게 감상문을.


우리는 어릴 적, 신데렐라, 잠자는 숲속의 공주, 등등 공주와 왕자라는 우리 문화와는 전혀 동떨어진 환상을 먹으며 자랐다. 저자는 백마탄 왕자를 고대하는 대신 왜 백마탄 왕자가 그리 많이 떠돌아다녔을까 하고 의문을 품었다. 듣고 보니 그렇다. 어릴 때라도 판타지 정도는 구분할 수 있다. 그래서 그 판타지 속 백마탄 왕자라는 개념 자체가 실존하는 아니 실존하던 인간이며, 먹고 살고 결혼해서 아들 딸 낳고 지지고 볶고 사는 고달픈 현실적 문제들 해결해야 하는 한낱 인간에 불과할거라는 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그건 디즈니를 위시한 어린이 시장이 그냥 거기 옛이야기 속에 궁지에 몰린 공주를 구해줄, 이웃 왕국의 왕자가 어느날 백마를 타고 나타나는 익숙지 않은 환상을 그림으로 칠해 어린이다운 꿈이니 동심이니 이런 말들을 갖다 붙였다. 저 멀리 디즈니랜드에 가보면 아직도 그러고 있다. 그림 속 드레스 옷을 입고 마법 봉우리를 들고 값비싼 디너 테이블에서 아이들과 사진을 찍고..아이들의 꿈이 한낱 이뿐 옷을 입고 왕자한테 시집가는 것이라니... 뭐 아무튼 또 옆길로 새기 시작. 다시 돌아와서. 


책이 좋은 이유는 1. 독자들 대부분이 어릴 때 읽었거나 최소한 내용은 알고 있는 명작 동화속 이야기를 주제로 한다. 2. 그런 명작 동화를 읽으면서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었던 일상을 파헤친다. 늙은 왕비가 날로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져가는 자신을 보호하고자, 거울을 보며 꾸미고 그저 중얼거리던 것들을 보던 주위의 시선, 젊음이 떠난 밸설공주의 미래는 계모의 미래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당대 여성의 위치 그런 것들이다. 3. 문장이 야무지고, 당찬 사고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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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비처네 (반양장) - 목성균 수필전집
목성균 지음 / 연암서가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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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각은 어떤 감각 혹은 인지에 다른 종류의 감각을 연결시키는 것이 가능한 일부 신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만이 가진 고유 능력이다. 가령 숫자에서 고유 색깔을 느낀다던가 음악에서 어떤 그림이나 도형을  연결시킨다거나 지리나 역사를 년도 따위에 선명한 자신만의 풍경을 연관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공감각을 가진 사람들은 풍부한 감성 암기력 등의 비범한 두뇌 활동을 갖게 되고, 특히 예술가인 경우가 많다고 알려져 있다. 공감각을 가진 사람들이 참으로 부러웠던 나는 누비처네를 읽으며 어떤 빛바랜 사진 같은 이미지가 푸르스림한 흑백에 가낀웃 청록빛같은 색상으로 히미하게 떠올랐는데 이것이 실제로 능력자들이 가진  공감각과는 다르겠지만, 이제껏 다른 글에서는 볼 수 없는 색상을 가진 것만은 확실했다.

 

목성균의 글들은 사후에서야 조금씩 알려졌다. 이 책을 받고,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살아서 널리 인정받지 못한 예술가의 삶이 고흐의 마지막처럼 쓸쓸하고 외로웠으리라 여겨져 괜한 감상에 젖었었다. 그러나 목성균님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살아서 인정받지 못한 천재적 예술가들의 비참한 말로와는 달리 정겨운 추억과 따스한 가슴으로 마음 가득 그리움 마저도 애잔한 풍요로 품은 행복했던 작가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비처네에 실린 글들은 세월이 지워버린, 지금은 존재하지 않을 아련한 옛 것들, 옛 산골에서의 일상, 옛 물건, 옛 어른들, 옛 풍속, 옛 친고와 옛 시절, 옛 사건과 하루 하루 지나왔던 소박했던 지난날들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들이 주를 이룬다.

 

성장만 하면 되는 여름은 무모하다.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은 존재의 치열한 향일성들은 아픔도 모르고 세포분열에 주력한다. 아 그리운 시절 그 여름날들. <그리운 시절> 중

 그가 쓰는 글은 가끔은 국어 사전을 찾아봐야 하리만큼 생소하지만 때때로 어렴풋 어릴때 할머니가 썼던 것 같은 정겨운 우리 고유의 옛말과 어휘를 담고 있다.  그래서 마치 그리움은 빛바랜 어린 시절의 회색빛 사진들처럼 우리에게 그대로 언어를 타고 전해져 온다. 살강, 살포, 다랑논배미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정겹고 말캉거리는 순수한 우리말들을 우리는 얼마나 홀대하고 외면하고 떠나 보냈나. 그가 흘러가고 사라진 풍속과 시간을 회상하는 방식은 그가 사라져 가고 있는 언어를 회상하는 방식 같다.

어찌 보면 두 남녀가 이루어 가는 우리라는 단위의 인생은 단순한 연출의 노력에 의해서 발생되는 것인지 모른다. 약간의 용기와 성의만 있으면 가능한 연출을 우리들은 못하든지 안 한다. 구닥다리 세간에 대한 아내의 애착심은 그것들이 우리의 인생을 연출한 소도구이기 때문이다. 이제 아내의 애착심을 존중해야지, 누비처네를 보면서 생각했다. <누비처네> 중

다랑논을 보면 삶이 행복하다 불행하다 말하는게 얼마나 건방진 수작인가 싶다.  다랑논은 삶의 원칙 같다 . 다랑논의 경작은 삶에 대한 애착의  일변도 같다. <다랑논>

글모음 속에는 한 편의 동화를 보는 듯 아련하고 따뜻한 이야기들이 많았다.  살을 에는 추위를 견디며 얼음물을 깨어 황태를 씻던 촌 아낙네들이 들러 황태 한 꾸러미씩을 주고 가던 강원도 영동 지방의 어느 겨울 그의 아내가 그 고되고 정직한 노동으로 눈덮힌 추운 하루를 보내는 아낙들을 위해 눈내리는 진부령 산맥 한 자락 작은 불빛 아래 밤새 털목도리를 짜는 풍경은 어떤 흑백 뮤직비디오처럼 아름답고 처연하기까지 하다.

저녁때 눈발이 서는 동네로 들어서는 아주머니들이 똑같은 색깔의 똑같은 크기의 목도리를 목에 감고 있는 것을 보면 행복했다. 밤을 지새워 목도리를 짜는 아내 곁에서 산맥의 겨울 바람 소리를 듣던 생각을 하면 추위가 얼마나 따뜻한 것인지 새삼 그립다. 인생의 과정들. 어느 하나인들 소중하지 않은 것이 있을까.<목도리>

때때로, 시처럼 포근한 언어. 여울물 소리를 베고 선잠을 자는 시골 풍경이 한 장의 선명한 풍경화처럼, 자근자근 노래하는 음악처럼 그렇게 내게로 전해져 옴을 느낀다.

 

똑같은 음자리로 자근자근 노래하는 여울물 소리를 베고 선 잠을 잤다. <선배의 모습>

그가 산문 속에 풀어 놓는 그의 젊은 시절, 서슬퍼런 군부 정권의 말단 공무원으로 밥을 벌어먹고 살던 그 어두운 시절 정서적으로 힘겨운 일들을 해내었어야 했던 회상 속에서도 선배, 동료 등 인간을 향한 따스한 시선은 한 편의 동화처럼 애잔하다. 그는 눈발이 소복히 쌓인 정월 초하루 이브날, 가족과 어린아이를 보기 위해 도망자의 긴장을 늦추고 들렀을 도벌꾼을 체포하러 눈덮힌 산길을 올라 그를 잡았지만, 느슨해진 경계를 틈타 도망가는 도벌꾼을 그 자리에서 놓치고 만다. 아이는 소리 내 울고, 아내는 소리 죽여 울고. 우는 아내와 아이를 뒤로 하고 도망가야 했던 도벌꾼을 대신해서 아가에게 건네는 동료선배의 한 마디. 아가야 아빠 까까 사러 갔다. 이일로 그들은 직무 유기로 위기에 처하지만 다행히 시말서 한 장 쓰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때 권 주사가 울고 있는 도벌꾼 아내와 어린 것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아가야 아빠 까까 사러 갔다."

나는 지금도 가끔, 문득 그 말이 생각나서 목젖이 뜨끔 하다. <어떤 직무 유기>

늦가을 산정 육백마지기라는 고원에서 방화선 보수작업을 하는 열흘동안 묵은 늙은 심마니들의 통나무집에서 알게된 어린 소년과의 인연을 회상하는 <약속>이란 글은 30년간 지키지 못한 약속을 가슴에 묻어둔 사연이다. 눈보라치는 겨울 산정에서 친구도 없이 겨울을 나야 할 소년의 참담한 고적이 태산같이 그의 앞길을 가로 막자 내년 봄에 산불을 감시하러 다시 와야 하기 때문에 내년 봄에 꼭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떠났으나 충북 도청으로 발령이 나는 바람에 가지 못하게 되었다. 글을 쓰는 시점에서 30년 전 이야기였다.  

아저씨 대신 산림 경찰관 노릇을 잘 하고 있으면 뽀얗게 바람꽃 이는 이른 봄에 꼭 오마고 약속을 했다. 그제야 소년은 길을 비켜 주었다. 중략. 지는 가을 햇빛이 드러난 조그만 한 점 외로움의 실체가 눈물겨워 차마 숲속으로 난 길을 들어설 수가 없었다 낮에는 중중한 산봉우리와 밤에는 별들이 고작 소년의 동무일 뿐인 산정에서 소년은 긴 겨울을 어떻게 살 것인지. 중략. 소년은 내가 목에 걸어 준 그 호각을 떼쓰듯 불고 있었다.  아저씨 꼭 바람꽃 일면 와야돼. <약속>

 작가가 적고 있는 그리움은 시간의 흐름에 대한 인식이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절에 대한 기억이고, 현재를 과거와 구분짓는 방법이다.

 

삶이란 가증스러운 이중인격의 출중한 연출이다.라는 삶의 괴리로 시계의 노예가 되어 살았다. 지금은 시계를 안찬다. 필요가 없다. 자유의 반을 얻은 줄 알았는데 아니다. 자유의 반을 잃은 데 불과하다. 시간에 도외시당한 삶은 형기를 채우는 수형자처럼 부자유하다. <기둥시계>

그의 글은 시대의 아픔을 함께 기억한다. 6.25가 나던 피난 행렬을 따라가던 중 만난 사나운 강에서 가까와지던 포성 소리를 뒤로 하고 열세살 작가 목성균을 등에 업고 물살을 헤치던 기억이 그것이다. 거기에서 그는 아버지 등 뒤에 박힌 점을 본다. 그리고 떠내려 죽는 사람들을 목격하며 아슬아슬 초인적인 힘으로 위기를 넘기고 강을 건넌 아버지가 우는 모습을 처음으로 본다.

 

강변 모랫바닥에 엎드려 오른쪽 어깨 죽지의 검붉은 반점이 들석거리도록 소리없이 우시던 아버지의 아픈 한 시대는 그 흐린 강물처럼 흘러갔지만, 아버지의 반점은 그때 그 아픈 강과 더불어 분명하게 내 머리속에 남아 있다.<아버지의 강>

이 책은 두고 두고 어릴적 아껴 숨겨놓은 초콜릿을  하나씩 하나씩 꺼내 먹듯 한편 한편 작가의 시대를 떠올리며, 그 흑백사진같은 풍경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머리 속에 그리며 한편 한편 읽으면 더 좋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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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께끼에 싸인 미술관 - 비밀스러운 작품과 미술가에 관한 36가지 이야기 시그마북스 미술관 시리즈
엘레아 보슈롱 외 지음, 김성희 옮김 / 시그마북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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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속에는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들이 있다. 남겨진 예술은 영원한 듯 정지해 있지만, 시간은 흐르고 시대는 변하고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방식 문화 사회적 규범과 의미도 모두 변한다. 게다가 '위대한' 예술, 값비싼 회화들은 자본을 따라 이태리의 수집상에서 일본의 사무라이에게로, 삼성왕국의 후계자들에게로 중국의 떼부자들에게로 동서양을 넘나들며 공간이동을 한다. 예술이 나타내고자 하는 텍스트들을 읽어내려면 시대의 사회 문화적 맥락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의 갭을 통과해야 한다. 그것은 어렵다. 그래서. 많은 예술들은 신비에 싸여있다. 


인간의 풀 평균 수명이 70세라면 인류가 남긴 예술은 예술의 종류에따라 길게는 1만년전의 구석기시대에서부터 오랜 세월을 거쳐오면서 100~200년전의 그림에 이르기까지 길고 긴 세월을 견디며 숱한 운명과 마주쳤다. 전쟁과 화재, 자연 재해와 같은 재난에 의해 파괴되거나, 종교적, 정치적 목적으로 사장당한 것들도 있고, 위작 논란에 휘말리거나, 불가사의하게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그림도 있다. 


이스터 섬의 거대 석상인 모아이 상들의 평균 높이는 6미터에 달하며, 그 수는 886개가 넘으며, 그 석상 작업이 1000년부터 1650년까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어떤 기술에 의해, 어떤 이유로 만들어졌으며, 왜 이것들이 원주민들 스스로에게조차 보호받지 못했는지는 숱한 추측만을 남겨둔채 영원한 미스터리 속에 있다.


루벤스에 의해 스케치의 모작만 남아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앙기아리 전투>는 메디치 가의 주문으로, 그리기로 했던 벽화였으나, 물감이 흘러내리고 교회의 종이 화구를 뒤엎는 바람에 미완인 채 실패로 끝났으나, 평소 다빈치를 존경하던 조르조 바사리가 같은 벽면에 <마르치아노 전투>를 그릴 때, 그의 그림을 보호하기 위해 어떤 조치를 세웠을 지 모른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바사리의 작품에 미세한 구멍을 내고 내시경을 이용하여 바사리오 그림 벽 뒷편에 검은 물감의 안료를 발견하였으나, 이 역시 앙기아리 전투의 존속 여부에 답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강동화의 <나쁜 뇌를 써라>에 의하면, 전형적 하이퍼그라피아 증세를 보였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는 빈센트 반 고흐는 자살하기 직전 아를에 있던 1888~1889년 한 해 동안 200점이 넘는 작품과 200점의 스케치를 남겼으며, 작품에 대한 내용을 매일 동생 테오에게 최소 6페이지가 넘는 편지에 자세히 기록하여 보냈으며 그가 남긴 서신은 1700페이지가 넘는다. 하이퍼그라피는 글을 쓰고자 하는 주체할 수 없는 욕구를 가리키는 의학적 용어이다. 오르셰 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는 <디기탈리스 가지를 든 가셰 박사의 초상>은 자신의 작업 하나하나를 지나치게 자세히 편지로 보냈던 1890년에 그려졌다지만,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는 그 그림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1996년 부유한 일본인 사업가가 경매 사상 최고가에 사들인 이후, 그의 사후에도 다시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가셰박사의 또다른 초상인 <가셰박사의 초상, 1890년>에 대해서만 자세히 설명되어 있을 뿐이다.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에 언급이 없다는 점 이외에도 가셰의 소장품이 위작 투성이인 점과, 그림이 허술하다는 점 등을 들어 고흐의 전문가들은 오르셰 박물관의 작품은 위작이라고 주장하나, 진실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이 책은 총 36장의 수수께끼에 쌓인 예술품이 주로 회화를 중심으로 대형 판본의 크기의 책자를 가득 채운 크기의 사진과 설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책의 구성은 운명의 수수께끼, 정체성의 수수께끼, 창작의 수수께끼, 의미의 수수께끼로 나뉜다. 작품 자체에 대한 미술사적 해석보다는, 작품의 시대적 배경 속에서 해당 작품이 갖는 의미와 수수께끼, 그리고 그 작품의 운명에 대해 다룬다. 미술사나, 미학을 직접 다루지는 않지만, 미술 속에 들어있는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주제로 하고 있으며, 해당 미술을 해석하는 여러 입장들을 소개한다. 그림 사진이 충분히 크고, 그림 읽기를 좋아하는 독자들을 충분히 배려한 책이다. 직접 보기 힘든 귀한 작품들을 좀더 자세히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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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시간을 지배할 것인가 - 시간에 쫓기는 사람에서 시간을 리드하는 사람으로
클라우디아 해먼드 지음, 이아린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2월
평점 :
품절



기억과 시간이라는 주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주제이다. 기억의 영속성은 자아의 많은 부분을 형성한다고 믿는다. 순간이 완전히 상실되고 기억하지 못한다면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멈추어 있는 것과 같으리라. 해머가 손상되면 그렇게 된다고 한다. 모멘토와 같은 많은 영화들이 기억과 시간을 다룬다.


시간이 흐르면 현재라고 느끼는 것은 기억으로 바뀐다. 기억 속에서 재생될 현재의 시간은  상상과 회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미래를 느끼게 한다. 우리는 시간을 쪼개고 나누고 측정하고 과거, 현재, 미래를 구분지어 추상적 개념을 명확하게 밖으로 끌어내지만, 사실 시간은 그렇게 자로 대듯 명확하게 구분되는 게 아니다. 현재 속에는 과거와 미래가 항상 혼재되어 있고 시간인지 기능은 기억의 재생과 상상 속에서 떠돈다.

 

장기기억장치로 보내지 않고도 붙잡을 수 있는 시간은 3초이다. 그러니까 순간의 단위는 3초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어떤 짧은 단위의 시간동안 혹 순간이라 불리우는 시간동안 극도의 강력한 경험을 하게 되면 그 짧은 동안 멈춘 것 같은 시간 속에서 매우 긴 시간을 느낀다. 내가 미국에 잠시 머물던 때에 음침한 블랙 프라이데이의 밤 빗길에서 양차선 방향의 차로가 일방차선인지 순간적으로 혼동하면서 좌회전을 하다가 머뭇거리는 사이 속도를 줄이지 못하고 달려오던 차에 받쳤고, 차가 빙글빙글 돌아 한쪽 구석에 처박혔던 그 짧은 순간동안, 나는 아주 길고 긴 생각이 떠올랐었다. 아 이 먼 땅에서 죽는구나, 나의 어린시절, 청춘이었던 시절, 힘들었던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고 곧 다시 또 죽으면.. 장례식은 어떻게 치러질까. 한국의 부모와 친구들은 얼마나 황당할까. 아이는... 아아 내 잘못으로 아이는 어떻게 될까. 그리고 살게 된다면 어떠한 모습이 될까..내 차가 잘못이므로 뒤차에 인명 사고가 있으면 나는 감옥에가고 보석금을 내고 풀려나게 될까..이런 많고 많은 생각들이 그 짧은 순간 나와 아이가 말짱하고 다행히 2차 사고 없이 부상 없이 끝났다는 걸 알게 된 그 짧은 순간에 내가 느낀 시간은 아주 길고도 또 길었다. 마치 슬로우 모션 카메라로 사고 당시의 시간만을 천천히 늦춘 것 같았다. 그 이후로. 시간을. 사람이 시간을 인지하는 것은 시계가 가는 것과 차이가 있다는 나만의 생각을 확고하게 믿고 있었다. 


시간이라는 개념은 째깍째깍 정교하게 깎아 나눈 완벽한 양적 치수가 아니라 인간이 겪는 시간의 질에 따라 그 느끼는 양이 좌우되는 것이다. 우리가 갈라놓은 시간의 경계는 우리의 뇌가 인식하는 시간의 경계와 다르다. 어릴 때에는 1년이라는 시간이 지금 10년을 느끼는 것만큼이나 매우 긴 시간이었다.  비례이론은 이러한 현상을 단순히 수학적으로 설명한다. 예를 들어 40세는 한 해가  일생의 40의 1에 불과하지만 8세 때는 한 해 전체가 훨씬 더 중요한 1/8로  느껴지기 때문이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례이론은 시간 지각에 상당한 영향을 주는 것으로 알려진 관심과 감정을 무시한다.

 

지난날을 되돌아 보면서 특별히 행복했던 경험이나 나쁜  경험 한 두 가지를 떠올리라고 하면 그 기억은 15세에서 25세 사이의 기억일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이 시기에 발생한 경험에 관한 기억들이  많은 사실을 회고절정이라 부른다. 회고절정이 가진 열쇠는 새로움이다.  이 시기에 우리는 첫관계, 첫 직장, 부모로부터의 독립, 첫 여행 등 기억에 남을 만한 인생의 새로운 일들을 많이 경험하고 기억한다. 또한 이 시기는 정체성이 형성되는 시기어서 생생한 기억을 각인시킨 후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그런 기억들을 평생 간직하게 되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마음속으로 시간여행을 하여 과거로 되돌아 갈 수 있는 능력은 정체성에 관한 심오한 기능을 제공하여, 각자의 개성을 가지고 한정된 인생의 의미를 찾는데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반면 성인이 되었을 때는 두드러진 순간들이 적기 때문에 훨씬 더 시간이 빨리지나 간다고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매일 매일 새로운 세계를 경이로운 눈으로 받아들이고,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새로운 곳을 찾아 다니고, 새로운 것들을 배우면서  수많은 사건들이 촘촘하게 지각과 인지 기능을 활성화시키던 어릴적 1년은 작은 단위의 시간 시간을 긴 시간이라 느낄만큼 많은 밀도 높은 경험들로 풍부하게 채워 넣었기 때문에, 매일 똑같은 사람들과 딱히 기억나지 않을 행동들을 하며 매일 마주하는 풍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일상을 사는 어른이 되어 느끼는 1년보다 훨씬 더 강렬한 자극들로 시간 시간을 가득 채운다. 반면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비록 하루 하루 순간 순간은 별 변화없는 무료한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처럼 느낄지라도 결국은 어느새 시간은 쏜살같이 가버려 엊그제 같았던 1년전을, 한달전 같았던 2년전을 느끼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저자는 홀리데이 패러독스라고 명명하였다. 휴가를 즐겁게 보내고 있을 때는 시간이 금세 지나가는 것 같지만 휴가를 마치고 돌아오면 한참 만에 다시 돌아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이유와 어린 아이들을 키울때 하루하루가 더디게 흘러가는 것 같은 데도 어느새 일 년이 금방 지나가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이유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하루에 59번 혹은 깨어있는 시간 동안 16분마다 미래를 생각한다고 한다. 망상, 멍때리기, 공상, 상상 이런 것들은 이미 일어난 과거의 일을 재생하는 것보다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 혹은 일어날 가능성이 없을 미래의 것일 가능성이 많다.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우울증에 걸리면 시간 개념이 왜곡되어 미래를 상상하지 못한다고 한다. 아이가 최대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15분이라는 말이 성인에게도 해당되는가 보다.  매 16분마다 미래를 공상한다면 우리에게 시간 개념의 현재 축을 넘어가는 미래를 상상하는 것은 어쩌면 삶의 본질과도 같다. 현재를 사는 것의 의미가 어떤 일의 집중하는 일부의 시간을 제외한다면 미래를 생각하는 것에 바쳐진다면, 현재를 사는 것이 미래를 사는 것과 다르지 않다. 말, 추상, 개념 이런 것들 속에서 다만 언어적 분리만 있을 뿐. 그런데 이것이 깨진다면,  미래가 전혀 상상되지 않는다면, 이 비루한 현실을 벗어날 길은 미래로 걸어가는 게 아니라 걸음을 멈추고 삶을 끝내는 것일 게다.

 

기억력의 저하는 또한 아직 다가오지 않은 시간을 상상하는 능력의 저하를 수반한다. 과거를 떠올리는데 이용되는 뇌 부위는 대부분 미래를 상상하는데 이용되는 부위와도 겹친다. 결국 기억은 재구성과정인 것이다. 

 

우리는 멋진 곳에 휴가를 가서도 그곳의 현재를 온전히 현재로서만 향유하지 않는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 머물렀다는 사실을 훗날 기억하게 될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현재는 이미 과거가 된다. 여행지의 어디를 가볼까 어디에서 밥을 먹을까 하는 생각들. 과거에 대한 기억이나 미래에 대한 기대에 정신을 빼앗기지 않은 채 마음을 먼 곳으로 떠나 보내지 않고 현재에 충실할 수 있기를 희망한 근사한 휴양지에서조차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 축을 오가며 현재의 순간들을 소비한다. 그러니까 생각이라는 것이 무언가에 깊이 몰두하지 않는 한 과거와 현재가, 현재와 미래가 뚜렷한 경계를 갖지 않은채 자유롭게 교차하는 뇌의 작용상 현재는 순수하게 완전히 현재이거나 혹은 현재가 완벽하게 미래나 과거에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음속의 시간 여행은 오르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공감각은 특별한 사람들한테서 만 볼 수 있는 능력이지만 보통 사람들도 대개는 시간을 공간적으로 상상한다. 많은 언어에서 시간을 거리를 나타내는 언어로 길다 짧다 멀다와 같이 사용하고  많다 적다와  크다 작다와 같은 양적 표현을 쓰고, 3차원적으로 그린다. 가자 지구에 억류되어 있던 앨런 존스톤처럼 시간은 흐르는 강물이라 생각한다면 갇힌 채 반복되는 공허 한 낮과 밤 속 끝없는 순환을, 계속해서 앞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과 결국 어느 날은 어딘가에 도달 할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해준다. 그는 시간의 바다 위에 놓인 자신의 배가 널판지로 만들어진 뗏목이라고 상상했다. 억류된 상황에서도 시간을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으로 상상함으로써 시간이 자기 자신을 앞으로 데려가 결국 미래에 도달하게 될 것이라는 상상은 우리에게 하루 하루가 비참하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는 희망을 주었다.


저자 클라우디아 헤먼드는 작가이자 방송인으로 보스턴 대학교 심리학 강사이다. BBC 라디오에서 뇌와 행동의 관계를 파헤치는 프로그램 <All in the Mind>과 20세기 심리학의 발전을 소개하는 프로그램 <Mind Changers>를 진행하고 있다고 소개되어 있다. 그의 글은 읽기 쉽고, 어려운 전문적 용어는 피하면서도 시간이라는 개념과 시간 인지에 대한 지식을 다양한 소스를 이용하여 다양한 각도로 접근한다. 제목을 보면 시간을 다루는 방법이라는 측면의 자기 계발서에 가까와 보이지만, 인문 교양적인 통찰력이 풍부하고 흥미하고 재미있는 생각거리를 많이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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