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의 배신
이노우에 요시야스 외 지음, 김경원 옮김 / 돌베개 / 2014년 4월
평점 :
절판


일본의 의료산업은 한국과 얼마만큼 닮아 있을까. 우선은 그것에 대해 먼저 생각해보고 책을 읽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이 책은 대개 현재의 의료 시스템을 비판하는 내용인데, 그 근거가 일본의 의료 산업과 의료 행위, 매스콤, 의사의 태도, 환자들의 믿음 등에 근거한  비판이기 때문이다. 

 

의료에 대한 믿음은 일종에 신앙 같다.  질병 혹은 어떤 증상에 대한 서로 대립되는 치료 행위는 종종 믿음을 근거로 결정된다. 현대 의학을 맹신하는 사람, 현대 의학을 거부하는 사람,  자신만의 자연요법이 신흥 종교라도 되는 듯 전도에 열을 올리는 사람,  그래서 균형있는 시각으로 의료 체계를 바라 보는 것이 늘  어렵다.


여러 분야의 의사와 전문가가 건강 불안과 과잉 의료의 시대에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건강이고 의료인가 라는 물음에 답하는 형식으로 현재 일본 사회의 의료 및 건강 산업과 건강 염려증을 비판하는 목적으로 쓰여진 기획 도서이다. 각 챕터별로 다른 사람이 썼기에 겹치는 부분도 있고, 문체나 글의 구성 등에 있어 전체적으로 일관성이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의료 현실에 비추어봤을 때, 비판할고 꼬집고 넘어가야 할 요소요소를 골고루  배치했다는 점에서 책의 가치를 찾을 수 있겠다. 다만, 책을 읽기 전, 의료 시스템을 비판하는 서적들 중에는  주장만 있고 근거가 없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알고, 근거가 확실해 보이지 않는 것들은 이런 의견도 있다 라는 시각으로 읽는 것이 중요할 듯하다. 

 

첫번째 두 챕터는 불필요한 CT 검사와 피폭 문제, 충치 예방용 불소의 위험성을 다룬다. 실제 그 분야를 주제로 단행본으로 엮은 저자들에 의해 쓰여져서 내용이 자세하다. 생활습관병의 정체를 밝힌다는 다음 챕텨는 일본 후생성이 위험 인자로 채용한 식습관, 운동습관, 흡연, 음주 등의 위험인자의 수수께끼와 의료업게의 사정에 대해서 폭로한다. 다음 챕터에서는 필요 없는 과잉 검진의 현주소를, 그 다음 챕터는 무라 사회라는 일본 사회의 독특한 구조로 본 의료 사회의 현실을 꼬집는다. 계속되는 챕터에서는 정신의료의 권력성에 대해 건강검진이라는 상품이 소비되는 현상의 준의료 종사자로서의 해석, 그리고 불건강이라는 꼬리표와 싸우며 스포츠클럽에 다니는 일본인의 건강불안 해소 실태를 다루고 마지막으로 의료 과잉에 휘말리지 않기 위한 충고로 끝을 맺는다.

 

의학이라는 것 자체가 수학이나 물리처럼 연역적 방법으로 증명가능한 명확한 자연 법칙이 아니라 확률에 의지한 가능성을 다루고 있기에 그 의학이 의지하는 확률마저도 보장되지 않는 완전 엉터리 치료와 주장이 삐집고 들어갈 여지가 수도 없이 많다. 그나마 우리가 가장 객관적으로 믿고 따르는 이 확률상의 게임 역시 사실 철저하게 독립변인들만의 인과 관계를 밝혀내기에 불충분한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 주장하는, 수돗물에 불소를 함유한 나라에서 암 발생률이 높았다는 주장은 실상은 우리에게 신뢰할만한 정보가 못된다. 두 나라의 암 발생률의 차이는 수돗물에 불소 첨가 여부가 전부가 아니다.  저자는 이러한 연구 사례들이 은폐되고 축소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불소 첨가 여부가 두 나라 사이의 암 발생률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통계적인 주장이 신뢰가 적은 방법으로 분석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음을 항상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렇다고 참조 논문을 일일히 찾아서 뒤져볼 수도 없다. 그들의 식습관, 운동습관, 생활방식,  노동 시간, 주거환경, 위생상태 등 암 발생과 관련이 있는 수많은 요소가 복합적으로 얽혀 두 문화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그런 복합적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역학적으로 인과관계를 밝혔다고 말하는 것은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과학이란 이름으로 선량한 독자를 속이는 것과 다름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의학을 의료행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렇게 생각해 보았다. 가급적 다양한 소스로부터 많은 정보를 접한다. 그리고 나서 무언가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왔을 때 스스로 현명하게 결정할 수 있는 기반 지식을 이용하여 자신의 가치관을 형성해 나가는 것이다. 무엇을 근거로? 확률? 확률은 의사에게 있다. 그리고 의사는 최선을 다해 자신이 믿는 최선의 확률을 가진 치료법을 선택하여 치료를 권장할 것이다. 그러나 그 치료법은 만능이 아니다. 다른 많은 동일한 케이스에 같은 방법을 적용했더니 차도가 생겼으므로 이 경우도 나을 확률이 많으므로 그 방법을 쓰는 것 뿐이다. 9명의 다른 환자들에게 나았지만 1명인 나에게만 부직용이 있을 수도, 병을 악화시킬 수도 있다. 그러므로 확률은 믿고 따라야 할 진리가 아니다. 다른 대안이 없으니 선택하는 것이다.

 

많은 내용이 잡다하게 섞여 있지만 의심과 공감을 동시에 하면서 주목했던 부분이 몇몇 군데 있다. 노화는 병이 아니다. 이 부분은 누구나 인정한다. 사람은 늙으면 반드시 죽는다. 마찬가지다. 따라서 고령자가 되어 발생하는 증상은 질병이 아니다.  병이 아니니까 증을 붙여서는 안된다. 설득력 있다.  따라오는 주장은, 그 대표적인 예가 고혈압 증상이라는 것이다. 고혈압은 증이 아니다. 고혈압 상태는 나이와 더블어 생겨 나기 때문에 병이 아닌 것이라는 거다. 그래서 저자는 약을 먹을 필요가 없다는 거다. 그런데도  고혈압증, 고지혈증, 골다공증처럼 나이들면 생기는 증상에 증을 붙여 약을 팔아 먹으려 드는 것이 요즘 세태다라는 것이다. 늙으면, 기억력도 쇠퇴하고, 피부도 쭈글쭈글 해지고, 작은 글씨들은 보이지도 않고, 미세한 음의 차이를 구분해낼 수도 없게 된다. 그 불편을 이기기 위해 돋보기도 쓰고, 좋다는 크림을 사서 바르고, 뇌에 좋다는 운동과 영양제도 먹지만 병원에 가서 약을 처방받지는 않는다. 늙으면서 따라오는 부수적은 것들은 최대한도로 저항을 하지만 그래도 체념하고 받아들이고 적응해간다. 고혈압? 고지혈증? 골다공증? 이 모두도 노화로 오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약을 먹는 것은 불필요한 것일까. 그것에 대한 결정을 전적으로 의사에게 맡길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1만5천원짜리 책의 일부의 주장에게 그대로 맡길 수도 없다. 어쨌든 자신의 의료 가치 체계 내에서 결정해야 될 문제다. 균형잡힌 시각을 갖출 수 있는 꽤 높은 수준의 지식이 필요하다.

 

자격증도 없는 수상한 사람들 중에 전문가나 전공자가 있을 지도 모르지만, 거기에는 진짜로 수상한 사람도 섞여 있을 수 있다. 문제는 잘못된 건강 상식을 미끼로 취약한 노약자를 대상으로 돈벌이 수단에 이용한다는 사실이다. 무언가가 좋다고 하면 어김없이 매스컴을 타고, 그것을  복용한 후 온갖 고질병과 불치병 심지어는 암까지 나았다는  사례자들이 우루루 쏟아져 나오고 대한민국은  냄비처럼 그 신비한 물질 세상이 되었다가 곧 얼마 안있어 언제 그랬냐는 듯 차갑게 식는다. 그러한 의료 현실은 일본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는 모양이다. 하일루론산을 경구 섭취할 경우 하일루론산 자체가 분해되어 그 성분은 몸속에 도움이 되지도 않는데도, 마치 구세주인양 불티나게 팔렸던 사례가 서장에 소개되어 있다.

 

가장 내용도 충실하고 풍성한 읽을 거리가 있던 부분은 6장 <정신 의료의 권력성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가> 라는 제목의 내용이다.  심리 치료를 위한 의료인과 카운셀러와의 대화는 의뢰인이 무엇을 말하든 경청하고 수용하며 공감을 나타내야 한다는 카운슬링을 위한 특정 규칙에 의해 움직이고,  그 반작용으로 의료도 감정에만 관심을 갖게 됨으로써 문제의 본질이 은폐되는 문제가 수반한다.  또한 현재와 미래의 심리 치료는 문제를 해결하는 쪽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증진적 개입에 의해, 인간의 신체 개조를 꾀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면서, 집중력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고 알려진 정신과 치료제를 일반 사람들까지 함부로 복용하거나 ADHD 아동에게 처방을 내리고, 기억력이 높아진다고 알려진 항우울 치료제 프로작을 일반 학생들이 항시로 복용한다는 사실을 고발하고 있다. 약을 팔기 위해 우선 환자부터 만들고, 내향적인 사람까지 환자로 취급하는 상황을 꼬집고, '인간이란 자기 자신을 자본으로 삼아 경영하는 기업가'라는 모토하에 자본으로서의 인간 능력 향상을 위해 매순간 자신을 갈고 닦는 행위를 24시간 내내 감시당하는 파놉티콘에 비유한다.

 

이 장(6장)에서 소개하고 있는 통칭 바살리아법이라 불리는 이탈리아의 유명한 법률 180호에 대한 내용이 흥미로웠다.  이 법률은 병원 내의 의사와 환자 사이의 권위적 관계가 치료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전국의 모든 정신병원을 폐쇄하고 정신의료센터가 정신병 환자의 지원을 대신하는 것이다. 바살리아는 언제나 '병이 아니라 고뇌가 존재한다'고 말했다. 실존적 고민은 인간 존재의 일부이며, 이를 제거하기 위해 정신병원이라는 제도하에 벽 속에 처박아 두기만 한다고 모두가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철학에서 나온 법률이다. 당시 이탈리아의 거리에는 '가까이서 보면 제정신인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표어를 적은 플랫카드를 여기저기 걸어 놓고 이 법률을 홍보했다고 한다. 흔히 기분이 조금 우울해지면 우울증이라는 표현을 스스로 만들어서 하고, 당장이라도 항우울제를 먹지 않으면 자살 충동이 생길까봐 걱정하는 정신건강염려증에 많이들 걸려 있는데. 그건 병이 아니다. 그냥 우울한거다. 300여명의 어린 아이들을 물속에 수장한 나라에서 안우울하면 정상인가.

 

*리뷰어 클럽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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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lph 2014-05-21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석하게도... 현대의학은 .. 이미..비지니스가 되어버렸습니다. 에스키모에게 냉장고를 팔고.. 아프리카에 양털 코트를 수출하는 그런..
 
런어웨이 - 도피할 수 밖에 없었던 여자의 가장 황홀했던 그날
앨리스 먼로 지음, 황금진 옮김 / 곰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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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그런 날이 있다. 누구에게나. 사라지고 싶은 날. 도망가고 싶은 날. 도피하고 싶은 날. 누구나. 대개 탈출의 꿈은 냉혹한 현실적 장벽에 부딪치기도 전에 상상 속에서 장열하게 전사한다. 그러기 전에 매번 떠나는 걸 시도한다면 역마살에 막장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내가 탈출하고 싶었던 순간이 있다면 그것은 런어웨이 자체가 목적이라기 보다는  남겨질 사람에게 나의 부재를 경험시키고픈 욕망이었다. 나 없는 너. 나 때문이 아니라, 나의 부재로 인해 고통받을 너, 그리고 후회, 참회의 눈물, 그런 종류의 드라마적 상상을 하고 있다 보면 어느새 상상의 나래는 색상을 보태고 갈래를 뻗어버리고 애초의 정당성을 잃으면서 흐지브지 꿈으로 끝나고 결국 너에게 나의 부재를 안겨줘 보지 못하고 나의 존재는 아무 변화없이 갈등은 시간 속에 무디어 지면서 시시하게 끝나는게 우리의 일상이다. 런어웨이에서 칼라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의 짜릿한 도피는 그녀의 남편 클라크에게 그녀의 부재를 경험시켰고 그녀가 그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었는지를 알려주었다.

 

사소한 거짓말이 발목을 잡고 날로 거칠어지는 남편에 대해 회의가 들던 어느 날, 칼라는 뜻밖의 기회를 접한다. 떠날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인 돈과 거처 문제가 바로 해결되는 순간의 그 황홀한 자유. 세상에서 가장 짜릿한 쾌감의 편지 한 줄. 나 떠나. 갑작스런 도피가 진행되던 그 하루동안 맛본 그녀 최고의 젊은 날. 그녀가 현실을 깨달았을 때, 런어웨이가 한가한 상상에서 흘러나온 환상이 아니라 내가 혼자서 부딪치고 살아내야 하는 척박한 현실이 되었다는 급작스런 깨달음과 함께 오는 두려움은 도피 이후의 삶과 집으로 돌아가는 삶 두 개의 현실 사이에서 고민할 가치도 없는 것이 있었다. 결국 그녀에게 잠시의 떠남은 발 딛고 서 있는 현실 속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확인시켜 주는 하나의 성장 과정이었다.

 

클라크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클라크는 칼라의 인생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도망간 길을 마치고 삶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 클라크의 자리는 무엇이 차지하게 될까? 클라크 외에 그 무엇이, 그 누가 생동감 넘치는 도전이 될 수 있을까. 

어느 낯선 휴게소에서 칼라를 데려온  클라크는 칼라를 나무라는 대신 칼라를 부추긴 실비아를 협박하러 찾아가지만, 그가 복수한 대상은 칼라가 마음을 준, 갑자기 집을 나가버려 칼라가 그렇게나 오래 찾아 헤매던 염소 플로러였다. 갈등이 최고로 고조된 순간 두 사람 사이를 유령처럼 나타나서 해결해준 플로러를 클라크는 집으로 데려가지 않았다. 나중에 묘사되는 작은 뼈들이 플로러의 죽음를 암시하지만 플로러의 부재를 묻는 마굿간 고객에게 클라크가 무심히 던지는, 없어졌다며 로키산맥으로 튄 모양이라는 대답이 그의 행방을 클라크의 심리에서밖에 찾을 수 없는 암시의 전부이다.

 

클라크는 칼라가 자신을 데려가달라고 전화했을 때 기꺼이 그녀를 데려왔지만, 안개속에서 칼라가 아끼던 플로러가 나타났을 때 최소한 집으로 데려가지 않았다.  그는 칼라의 탈출 한나절 동안 칼라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그러나 칼라는 평소 소중하게 생각해 왔던 플로러의 부재를 힘겨워 했지만, 귀환한 플로러를 버린 클라크에 대해 어떤 원망도 없다.  클라크는 칼라의 탈출을 플로러의 탈출과 어떻게 연결하고 있었으며 플로러를 어떻게 한 걸까. 왜 집으로 데려오지 않았을까. 이 소설의 제목 런어웨이가 뜻하는 것은 혹시 칼라의 런어웨이가 아니라 플로라의 런어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플로러는 집을 나가 헤매다가 귀환을 바랐으나 영원히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죽임을 당한걸까. 로키산맥으로 가서 자유를 찾았든, 혹은 길에서 죽었든 이 책의 제목이 시사하는 런어웨이에 이른 것은 플로러이다.  우리에게 현실로부터의 탈출이란, 탈출 이후의 단계란, 칼라의 그것처럼 제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아닌 플로러의 그것처럼 다시 집을 찾아 복귀해도 버림받고, 갈 곳 없는, 행방을 알 수 없는, 영원히 미지의 것이라는 걸까. 플로라의 귀환과 클라크의 내침. 혹 클라크는 칼라의 런어웨이를 플로라 대신 단죄한 것일까.  클라크가 플로러를 어떻게 했다는 것을 알게 된 칼라의 이해할 수 없는 무심함 역시 내겐 숙제 같은 의문이다. 이 이상한 행동에 대해 어디에서 어떠 단초를 찾아낼 수 있을까

 

실비아는 칼라의 건강하고 생동감 넘치는 몸을 사랑한다. 실비아가 뭘 어쩌려고 그녀를 도와준 것은 아니다. 그녀가 지나치며 이마에 살짝 입맞춤한 것에 설레고 기쁘지만, 자신이 그리스에서 사다준 값비싼 선물에도 시큰둥한 모습에서 실망하고, 그녀가 울자 그녀를 돕는다. 앨리스 먼로는 이런 동성애적 코드를 설령 동성애를 길길이 반대하는 사람이라도 불편하지 않게 묘사한다. 실비아는 그저 그녀를 보면 설렐뿐이다. 뭔가를 주고 싶고, 보고 싶고, 그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실비아가 딱히 동성애자인 것도 아닌 것 같다.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에 대해서도 종종 비슷한 감정을 받는 모양이지만. 실제 우리가 알고있는 동성애자들처럼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강한 욕망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언젠가 어디선가 인간은 누구나 양성애적 경향이 잠재되어 있다고 들었는데 육체를 탐하지 않는 설레임과 애틋한 감정을 사랑이라 할 수 있는 것인지 그렇다면 누군가를 설레일 만큼 좋아하는데 그 대상이 동성인 경우가 종종 있다면, 그 사람도 광의의 양성애자라고 할 수 있는걸까. 실비아는 자신의 집에 일을 해주러 오는 건강미 넘치고 활달한 칼라에게 느낀 감정이 상대에게도 받아들여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작은 단편이지만, 읽는 내내 마치 스릴러같은 긴장감이 팽팽하게 흐른다.  그러나 대가의 작품이 그 진가를 발휘하는 시점은 읽고 나서 시간이 조금 흐른 후부터 시작되는 여운이 이리저리 생각의 얹어리를 배회할 때부터이다. 칼라를 옥죄어오던 칼라의 거짓말은 한나절동안의 떠남으로 흐지브지 되었다. 칼라의 거짓말에 현혹되어 실비아를 협박해서 돈을 받아내려던 클라크의 계획은 이 짧은 소설에 긴장감을 불어 넣었던 가장 큰 이슈였지만 마치 없었던 일처럼 이슈 자체가 사라져버렸다. 이러한 Subtle함은 혹시 노벨상 작가의 오만은 아닐까?

 

*노벨상을 받은 작가의 작품집에 대해 뭐라 총평하는 것도 우스워 일단 표지의 작품집 제목과 일치하는 첫번째 작품인 런어웨이에 대한 감상만 적는다.  이미 그녀의 문학에 대한 아주 유명 평론가들과 매체의 서평 핵심 문장들은 표지와 띠지 곳곳, 전자책방 홈피 구석구석, 그리고 이 책의 판매 페이지에 수두룩하게 널려 있다.  가령 놀랍도록 아름답다던가, 일상에서 발견되는 진실이라던가. 이미 읽기 전에 그런것들을 접한 후에 소설을 읽었기 때문에, 겹치지 않게 그녀의 소설에 대해서 한마디 보태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판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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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어주는 아이 책비 맛있는 책읽기 30
김은중 지음, 김호랑 그림 / 파란정원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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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는 우리의 일상이다. 우리는 TV로 드라마를 본다. 영화를 본다. 그리고 책을 읽는다. 이렇게 스토리에 이끌리는 것은 인간이 갖는 마지막 로맨스 같다. 옛날에는 스토리에 끌리는 욕구를 어떻게 해결했을가. TV도 없고, 영화관도 없고, 책도 흔치 않아, 일부 지식인들에게만 읽는 것이 허용되던 시절. 그 때에도 스토리는 사람을 한데로 모았다.

 

전기수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있어도, 책비라는 직업 여성이 존재했었다는 말은 처음 들었다. 망설였다. 책이 어른 보라고 만들어진 게 아니라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동화책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궁금했다. 책을 읽어주는 일이 직업인 노비 신분의 여성, 책비. 그 매력적 소재의 이야기에 끌렸다.

 

당시 세책점은 지금으로 치면 사설 도서관 정도 되는 역할을 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백성이 똑똑해지만 지배계급은 피곤해진다. 그래서 그들은 무지랭이 백성이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알고, 논리적 사고관을 갖게 될까봐 전전긍긍했다. 결국 마지막엔 탄압의 칼날은 번창하던 세책점에도 몰아닥치게 되지만, 이량이 신세를 지며 필사를 돕고, 책 배달을 다니는 시절엔 세책점은 최고의 번성기를 누렸다. 최서쾌의 세책점은 여러 루트들을 통해 끊임없이 신간들을 확보하고, 필사하여 권수를 늘리고, 많은 사람들 에게 빌려주었다. 사람들이 책값 대신 맡긴 세간은 집안 가득 쌓였고, 이야기의 힘, 사람들은 도시는 이야기의 매력에 푹 빠졌다.


양반집 규수인 어린 이량이 책비가 되기 까지 이량은 한꺼번에 많은 시련과 역경을 겪게 된다. 붕당의 피해자로 풍비박산난 집안에서 아비는 제주도로 귀향을 가게 되고 어미는 충격으로 세상을 떠났다. 손에 물 한방을 안묻히고 곱게 자란 무방비의 이량은 세책점의 필사와 궂은일을 하면서 세책점의 더부살이를 한다. 팥쥐 엄마같은 광양댁과 그집 딸의 눈총을 받으며 죽지 못해 겨우 살아가던 어느날 이량은 기생집에 심부름을 갔다가 자신이 책비 임무를 맡고 왔음을 알고, 치욕스러워 죽으려 한다. 책비란 노비 신분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곳은 진한 분냄새가 풍기던 기방이었다.

 

치욕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게 된 계기는 두 가지가 있다. 그 중 하나는 먹고 살아야 한다는 삶의 절박함이다. 물동이를 제대로 일 줄도, 냉이를 구분할 줄 모르는 소녀가 남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해 봤자미래는 뻔하다. 자신을 보호하던 피붓이들이 이미 떠난 후 혼자서 스스로 살아 남아야 했으며, 밥값을 벌어야 했다. 두 번째 계기는 우연히 만난 창희와 달희에게 책을 읽어주면서 책을 읽어주는 일의 의미, 그 가치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보따리를 훔쳐 달아난 아이 창희의 동생 달희가 추위와 배고픔과 병마로 죽어가고 있었다. 힘없이 죽어가던 아이는 형에게 이야기를 해 달라고 했다. 이량은 보따리 속의 책을 꺼내 처음으로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었다. 아이는 이야기를 들으며 이야기 속 세상을 상상하며 행복해하며 마지막 눈을 감았다.

 

그녀는 책비가 되기로 결심을 하면서,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차곡 차곡 실행에 옮긴다. 그녀는 책 배달 심부름을 갈 때마다, 주인 마님에게 읽어드리면 좋아할 만한 사씨남정기 같은 책을 골라 함께 가져가서 읽어드렸다.  그녀는 적극적으로 자신이 책비가 되고 싶다고 이야기하고, 견습삼아 읽어드리는 것이므로 사례는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하는 방법으로 조금씩 자신을 알려 나갔다. 예전에 안도 다다오의 전기에서 건축사 자격증도 없이, 대학을 나오지도 않은 그가 설계 일을 맡기 위해, 이곳 저곳 다니며 공터를 찾아 자기 마음대로 건물을 설계하고 주인을 찾아다녔다는 일화를 보는 것처럼 갑자기 부쩍 자란 이랑의 모습이 대견하고 뿌듯했다.


비록 노비 신분이 되었지만, 전문성이 인정되었고, 자신의 능력에 따라 댓가를 받는 최첨단의 직업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아가게 된 이량의 이야기는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춘 동화이지만, 어른을 위한 자기계발서이기도 하다. 나약하기만 했던 어린 소녀가 역경을 딛고 스스로의 꿈을 이루며 살아가는 모습과, 동화로 재현된 조선 사람들의 이야기를 향한 목마름은 고도의 물질 문명과 이야기의 홍수 속에서 진정 감동을 잃게 된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많은 메시지를 던져준다.  

 

책속의 그림이 참 좋았다. 조선시대 다양한 거리 풍경과 이야기 내용들을 동양적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생생하면서도 정겹게 재현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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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
김중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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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은 사람이 죽기전에 체결하지만 계약의 이행은 사람이 죽어야 이루어진다.  죽고 난 다음에 계약자가 그 계약을 이행했는지 안했는지는 죽은 사람은 알 수가 없다. 살아있는 자는 이미 죽은 사람이 죽기 전에 바랐던 죽음 후의 일을 위해, 죽기 전에 남겨 놓은, 삭제되기 바랐던 것들을 찾아 때로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 죽은 이는 죽은 후에 남겨지기를 원하지 않았던 자신의 흔적들이 실제로 지워졌는지 안 지워졌는지 알 길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죽음 후에 그 아무것도 없으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의 무의를 위해 살아 있는 동안 쓸 수 있는 대가를 우선 지불한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남길까. '왜'라는 질문은 필요없다. 누구나 남기고 싶은 것이 있고 지우고 싶은 것이 있다. 죽기 전에. 사람이 동물의 가죽 대신 남긴다는 이름 석 자에 따라다닐 불명예와 치욕과 수치의 흔적을 함께 남기고 가고 싶지 않다는 건 사후 세계를 믿던 안 믿던 인간의 본능일 지도 모른다. 살아있을 때 사랑받고 싶은 것, 죽었을 때에도 좋은 기억으로 남고 싶은 것. 비밀이란 그런 것이다. 수치와 불명예 치욕, 그리고 탐욕스런 자신의 모습...

 

죽으면 없애야 할 물건이라면 살아있을 때 본인이 직접 없애는게 좋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 죽으면 없애야 할 치욕이 살아 있을 땐 마지막 숨을 쉴때까지 붙들고 싶은 욕망이다.  죽으면 없애고 싶은 무의미들이 살아 있을 땐 삶의 이유다. 영혼이 숨을 쉴 때 그 영혼 곁에 찰싹 붙어 자아가 되는 것이, 죽어서 영혼이 없어지면 이름과 함께 하기를 거부하는 것들. 사라져야 하는 것들. 소중하면서도, 무용한 것. 애착이면서도 모욕인 것. 그것이 딜리팅의 타겟이다.

 

살아 있으면서 더 많은 사람에게 사랑 받으려는 마음이 삶을 붙잡 으려는 손짓이라면 죽고 난 후에 좋은 사람으로 남아 있으려는 마음은 어쩌면 삶을 더 세게 거머쥐려는 추한 욕망일 수도 있었다328

비밀의 가치에 따라 비용은 달라진다. 그 비밀을 없애기 위해 얼마나 위험을 무릅써야 하느냐에 따라 가격이 매겨져야 하겠지만, 구동치는 얼만큼의 비용을 지불하고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비밀인가에 따라 가격을 정했다. 그리고 나서 구동치는 삭제하기로 약속한 죽은 사람의 비밀을 완전삭제하지 않고, 자신만의 깊은 우물 속에 숨겨 두었다. 그 우물 속 비밀은 현실의 세계속에서는 삭제되었지만, 구동치에겐 자신만의 비밀이 되었다.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 그들만의 이야기를 숨겨두고, 구동치 자신도 그 속에 침잠했다.  그가 삭제해야 할 물건들을 삭제하지 않고 혼자만 아는 장소에 깊숙히 보관했던 이유를 어쩌면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그의 임무 수행이라는 것이 결국  아무 것도 손에 쥘 수 없는 허무 자체이다. 임무는 완수했으나, 일을 맡긴 고객은 이미 죽어 없다. 그를 잘했다 못했다고 평가해주거나 감사해할 고객은 이미 세상을 떠난 후라야 일에 착수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 불법적인 방법으로, 때로 위험을 무릅쓰고 그런 일을 계속 해야만 하는 데서 느꼈을 공허감을 구동치는 죽은 사람의 은밀함을 공유하는 데서 찾았을까.

 

나는 어쩌다 딜리터가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인가를 없애기 위해 이렇게 힘들게 찾았내야 할 때, 어렵게 찾아서 없앴지만   고마워 해줄 사람은 이미 죽어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불현듯 딜리터로서의  환멸이 찾아 들었다. 손에 쥘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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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은 사람이 죽기전에 체결하지만 계약의 이행은 사람이 죽어야 이루어진다.  죽고 난 다음에 계약자가 그 계약을 이행했는지 안했는지는 죽은 사람은 알 수가 없다. 이미 죽은 사람이 죽기 전에 바랐던 죽음 후의 일을 위해, 죽기 전에 남겨 놓은, 삭제되기 바랐던 것들을 찾아 살아있는 자는 때로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 죽은 후에 남겨지기를 원하지 않았던 자신의 흔적들이 실제로 지워졌는지 안 지워졌는지 죽은 이는 알 길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죽음 후에 그 아무것도 없으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의 무를 위해 살아있는 자는 살아 있는 동안 쓸 수 있는 대가를  죽음 후를 위해 우선 지불한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남길까. '왜'라는 질문은 필요없다. 누구나 남기고 싶은 것이 있고 지우고 싶은 것이 있다. 죽기 전에. 사람이 동물의 가죽 대신 남긴다는 이름 석 자에 따라다닐 불명예와 치욕과 수치의 흔적을 함께 남기고 가고 싶지 않다는 건 사후 세계를 믿던 안 믿던 인간의 본능일 지도 모른다. 살아있을 때 사랑받고 싶은 것, 죽었을 때에도 좋은 기억으로 남고 싶은 것. 비밀이란 그런 것이다. 수치와 불명예 치욕, 그리고 탐욕스런 자신의 모습...

 

죽으면 없애야 할 물건이라면 살아있을 때 본인이 직접 없애는게 좋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 죽으면 없애야 할 치욕이 살아 있을 땐 마지막 숨을 쉴때까지 붙들고 싶은 욕망이다.  죽으면 없애고 싶은 무의미들이 살아 있을 땐 삶의 이유다. 영혼이 숨을 쉴 때 그 영혼 곁에 찰싹 붙어 자아가 되는 것이, 죽어서 영혼이 없어지면 이름과 함께 하기를 거부하는 것들. 사라져야 하는 것들. 소중하면서도, 무용한 것. 애착이면서도 모욕인 것. 그것이 딜리팅의 타겟이다.

 

살아 있으면서 더 많은 사람에게 사랑 받으려는 마음이 삶을 붙잡 으려는 손짓이라면 죽고 난 후에 좋은 사람으로 남아 있으려는 마음은 어쩌면 삶을 더 세게 거머쥐려는 추한 욕망일 수도 있었다328

비밀의 가치에 따라 비용은 달라진다. 그 비밀을 없애기 위해 얼마나 위험을 무릅써야 하느냐에 따라 가격이 매겨져야 하겠지만, 구동치는 얼만큼의 비용을 지불하고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비밀인가에 따라 가격을 정했다. 그리고 나서 구동치는 삭제하기로 약속한 죽은 사람의 비밀을 완전삭제하지 않고, 자신만의 깊은 우물 속에 숨겨 두었다. 그 우물 속 비밀은 현실의 세계속에서는 삭제되었지만, 구동치에겐 자신만의 비밀이 되었다.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 그들만의 이야기를 숨겨두고, 구동치 자신도 그 속에 침잠했다.  그가 삭제해야 할 물건들을 삭제하지 않고 혼자만 아는 장소에 깊숙히 보관했던 이유를 어쩌면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그의 임무 수행이라는 것이 결국  아무 것도 손에 쥘 수 없는 허무 자체이다. 임무는 완수했으나, 일을 맡긴 고객은 이미 죽어 없다. 그를 잘했다 못했다고 평가해주거나 감사해할 고객은 이미 세상을 떠난 후라야 일에 착수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 불법적인 방법으로, 때로 위험을 무릅쓰고 그런 일을 계속 해야만 하는 데서 느꼈을 공허감을 구동치는 죽은 사람의 은밀함을 공유하는 데서 찾았을까.

 

나는 어쩌다 딜리터가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인가를 없애기 위해 이렇게 힘들게 찾았내야 할 때, 어렵게 찾아서 없앴지만   고마워 해줄 사람은 이미 죽어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불현듯 딜리터로서의  환멸이 찾아 들었다. 손에 쥘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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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중혁 작가는 소설가로서 언제 가장 행복했느냐는 이동진의 질문에 소설을 쓰고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초반부는 아직 모든 것이 확실하지 않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지 앞이 잘 보이지 않아 힘이 들고 진도가 잘 안나가지만, 중반을 넘겨 캐릭터들이 각자의 개성을 갖추고 소설적 구도가 자리를 잡고 이야기가 절정을 향해 신나게 질주할 때 가장 행복하다고 했다. 독자로서 느낀 것도 작가와 같았다. 그의 고백은 이 책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이야기 초반 거의 1/3 지점까지 작가가 갈피를 못 잡고 힘겹게 써내려 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딱히 어렵게 읽힐 일이 없는 평이한 문장임에도 불구하고, 비중 없는 인물들이 개연성을 찾을 수 없는 잡담들로 노닥거리는 초반부를 읽어 내려가는 것은 조금 인내심이 필요로되었다.. B1F1에서 보여준 그 천연덕스럽고 능청스런 새롭고 신선하고 패기넘치는 재능 있는 젊은 작가는 어디가고 소재에 목마른 진부하고 피곤한 전업 작가가 대신 앉아 있는 건가 싶었다. 중반부가 넘어가자 이야기의 질주가 시작되었다. 사후 딜리팅이라는 매력적 소재를 충분히 삶과 죽음에 대한 인간의 성찰과 사색적인 문장으로 이어갔다면 훨씬 더 깊이 있는 소설이 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참고로 이 소설은 장르 소설에 가깝다. 조폭들이 활동하는 한국 영화에서 흔히 보이는 이야기 구조다. 전개가 자리를 잡아 가면서 캐랙터들과 친해지고 나면 이야기에도 속도가 붙고, 책장 넘기는 속도도 빨라지며, 흥미로와 지지만 내가 애초 김중혁 작가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었나보다. 마침, 소설의 초반부를 설명하기에 딱 알맞는 문장을 책 속에서 발견했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의 섹스가 발단,전개,절정, 결말을 보여준다면 배우들간의 섹스는 전개와 결말 뿐이다. 수많은 전개들이 계속 이어지다가 어느순간 끝이 난다. 208.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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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롯 - “예수는 정치적 혁명가였다” 20년간의 연구로 복원한 인간 예수를 만나다
레자 아슬란 지음, 민경식 옮김 / 와이즈베리 / 2014년 3월
평점 :
품절


성서 속에는 유대인의 역사가 있다. 역사는 성서를 낳았다. 그렇다면 성서는 역사 책인가. 아니다. 성서는 복음서다. 신을 찬양하고 받들며 예수의 종교적 메시지를 전하는 책이다. 동시에 성서는 시대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기록 속에서 역사를 축출하는 일에는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폭넓은 지식이 필요로될 것이다. 성서를 해석할 수 있는 언어적, 문화인류학적 기반지식과, 역사를 해석하고  종교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통찰력, 그리고 무엇보다 숭숭 구멍뚫린 기록의 부재를 틈 빈틈 없이 막아낼 수 있는, 정교한 논리로 무장한 상상력이 필요하다.  수십년동안 이런  작은 단서들을 한줄씩 꿰어 모아 맞춘 퍼즐을 역사라고 부르려면 논리와 감동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기술이 필요하다. 2천년 동안 문명과 문명을 통해, 문화와 문화, 민족과 민족 사이, 대륙을 넘고 대양을 건너 뿌리내린 종교적 믿음을 뛰어넘을 수 있는 빈틈없고 단단한 논리와 설득이 필요하다. 이란 태생, 작가이면서 종교학자, 복음주의 기독교에 심취했다가 이슬람으로 개종한 저자 레자 아슬란은 이 일에 도전했다.

 

실존했던 예수, 역사 속의 예수를 당시 사회, 종교, 정치적 맥락에서 바라본다면, 거기에서 드러나는 예수의 모습은 우리가 알고, 기대했던 모습과 다를 수 있다. 성서의 기록 속에는 2000년 동안 숭배받아온 한 사람의 행적과 그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적혀 있다. 그의 메시지는 전파되고 기억되고 확장되어 어떤 하나의 종교적 세계 속에 사람들을 하나로 묶었다. 이 책은 그 과정을 역사적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선언한다. 역사속에서 예수는 혁명가였다고.

 

종교냐 역사냐. 때로 이 둘은 상충한다. 그래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가 있다. 이 둘이 합치하지 않을 때 선택은 믿음의 양과 학문적 진실이라는 잣대 사이에서  부유한다. 성서의 목적은 복음의 전파이고 역사서의 목적은 전체 맥락에서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것이다. 목적이 다르면 사건을 기술하는 방법, 사건에서 골라낸 장면이 다르다. 어린 아이들에게 영화를 보여주고 나서 줄거리를 말해보라고 하면 아기들은 영화의 전체 맥락보다는 자기가 기억하는 부분, 인상깊었던 부분만 이야기한다. 영화중 극히 일부분, 아주 사소한 장면 하나가 아이에겐 기억과 재생의 전부가 된다. 응 자동차가 방귀를 뿡 꼈는데 놀랐어.  신발을 물 속에 빠뜨렸는데 잡으려고 뛰어갔는데 신발이 키득 키득 자꾸 자꾸 도망가서 못잡았어. 어른들은 언제 자동차 경적 소리와 관련된 씬이 있었는지, 언제 신발을 가지고 노는 씬이 있었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 그러나 아이들이 영화를 보고 말하는 장면은 유일하게 재생가능한 장면, 유일하게 기억하고 기록 가능한 장면이다. 그러니까 영화 전체의 줄거리와 맥락이 역사 라고 한다면, 6세 짜리 아이가 유일하게 기억하고 다시 말로 기억을 재생해낼 수 있는 몇몇 장면들은 성서 속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저자의 역사적 맥락으로 해석하는 나사렛 예수와 성서 속 예수 그리스도의 차이를 그렇게 이해했다.

 

이렇게 말 해도 될까. 나는 종교에 대해서 말할 때 조심스럽다. 누군가가 본 것을 내가 못 보았다고 '그것은 없다'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다른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본인이 두 눈으로 확실히 보았을 때 본 사람은 단호하게 '그것은 있다'라고 말한다.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차이가 극명해서 충돌은 불가피하다. 조금 있는 것과 많이 있는 것, 조금 없는 것 많이 없는 것 사이에는 수많은 타협이 채워질 수 있지만,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는 타협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나는 내가 보았는지 안 보았는지, 안보였는데 보았다고 얘기 하는 것인지, 보아 놓고 못봤다고 시침떼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함구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 불확실하고 혼란스런 종교를 떠난 이유는 보이는 것과 보았다고 리드하는 사람이 추구하는 세계와의 모순 사이에서 갈등했고 언젠가 봤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꺼라던 꿈을 잠시 접었기 때문이었다.그런데 정말? 정말 내가 종교를 떠났을까? 다른 말로, 내가 떠났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그곳에 속해 있었고, 그곳에 속해 있었다고 말 할 수 있을 만큼 그러니까 부활한 예수의 모습을 보았던 것일까? 다시 다시. 내가 뭘 보았거나 말았거나 내가 정말 떠나기나 한걸까. 나는 거기 미련이란 걸 두고 껍데기만 빠져나와 홀가분히 잊어버리고 말면 될 것이었나.

 

이 책은 역사서이다. 적어도 세 개의 파트 중 첫번째 파트는 완전히 역사서이다. 예수가 태어나가 약 1세기 전부터 십자가 사건이 있고 난 후 1세기 후까지 팔레스타인 지역의 로마 점령과 유대인들의 저항등의 고대 역사를 매우 흥미롭게 전하는 대중을 위한 역사서다. 책의 반을 역사에 할애하는 이유는 성서 속 예수가 살았던 시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다. 예수를 역사적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시대적 배경을 정확히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저자 아슬란은 그 시대의 역동적인 역사적 배경을 흥미롭게 그려냄으로써 역사적 인물로서의 혹독한 변혁의 시대를 살았던 역사적 예수를 독자에게 설득하는데 이미 반쯤 성공했다. 여기에 역사의 본질이 있다. 개인을 보면 답이 안나오는 것도 역사 속에서 보면 한 줄기 빛처럼 개인의 행보에 대한 그 목적과 의식이 선명히 보인다. 역사속에서 유대의 지도자들,  대제사장들과 귀족 계급들은 개인의 영달을 위해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고 그들의 개가 되어 민중을 픽박하고 대대손손 부귀영화를 누리려 신과 예법을 이용했다(특히 신성모독과 압제에 대한 저항으로 400년만에 이민족의 통치에서 벗어나 겨우 한 세기 동안 자기들의 '신성한 땅'을 스스로 통치한 하스모니아 왕가의 후손들은 스스로 나라를 로마에 바쳤다.) 백성들은 민족의 새로운 지도자가 필요했다. 로마 총독과 점령군을 몰아내고, 썩어 빠진 유대 종교 지도자와 유대 귀족들을 파멸시키고 민족을 해방시키고 그들의 통치할 실제적 왕이 필요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혁명가가 되어  메시아를 자처하고 민족의 해방을 꿈꾸며 대중을 선동하고 지배계급에 폭력적으로 저항하며 다녔고 그러다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거나 석형에 처해졌다. 예수도 그들 중 하나였다.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형에 처해진 수많은 혁명을 꿈꾸던 사람 중 하나였다. 그것이 레자 아슬란이 역사속에서 찾은 진실이고, 단호하게 내린 결론이다.

 

보이지 않는 것 두 개의 상반된 견해. 모순되고 상반된 견해들이 공존한다면, 개인의 선택에 따라 진실은 편리하게 공존한다. 개인이 직접 볼 수 없다면 믿는 것이 진실이 되고, 개인이 직접 보았다면 본 것이 진실이 된다. 어떤 한 개인이 보았다는 사실이 역사와 논리에 모순된다면 개인이 본 것은 쉽게 허상이 될 수 있지만, 많은 집단이 2천년을 넘게 보았다고 믿어왔을 때, 그것이 역사와 논리에 모순된다면 역사는 시간 속에 묻혀버린다. 어쨌든 과거는 시간 더미 속에 묻혀버렸다. 나는 궁금하다. 진실을 본 사람들은 이 책을 읽고 본 것과 믿는 것의 차이를 떼어낼 수 있는지. 음성을 듣고, 방언을 하고, 십일조를 내고,  월급보다 많은 건축 헌금을 내고, 평온한 주말 집집마다 벨을 눌러 아침잠을 깨우고 말씀을 전하러 다니는 선량한 교인들 하느님의 자식들, 또 대형교회의 비리와 목사직의 제왕적 세속을 지지하고, 더 큰 파이 조각을 갖기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 그들이 진정 본 것. 그들이 들은 진짜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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