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는 우리의 일상이다. 우리는 TV로 드라마를 본다. 영화를 본다. 그리고 책을 읽는다. 이렇게 스토리에 이끌리는 것은 인간이 갖는
마지막 로맨스 같다. 옛날에는 스토리에 끌리는 욕구를 어떻게 해결했을가. TV도 없고, 영화관도 없고, 책도 흔치 않아, 일부 지식인들에게만
읽는 것이 허용되던 시절. 그 때에도 스토리는 사람을 한데로 모았다.
전기수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있어도, 책비라는 직업 여성이 존재했었다는 말은 처음 들었다. 망설였다. 책이 어른 보라고 만들어진 게
아니라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동화책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궁금했다. 책을 읽어주는 일이 직업인 노비 신분의 여성, 책비. 그 매력적 소재의
이야기에 끌렸다.
당시 세책점은 지금으로 치면 사설 도서관 정도 되는 역할을 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백성이 똑똑해지만 지배계급은 피곤해진다. 그래서
그들은 무지랭이 백성이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알고, 논리적 사고관을 갖게 될까봐 전전긍긍했다. 결국 마지막엔 탄압의 칼날은 번창하던
세책점에도 몰아닥치게 되지만, 이량이 신세를 지며 필사를 돕고, 책 배달을 다니는 시절엔 세책점은 최고의 번성기를 누렸다. 최서쾌의 세책점은
여러 루트들을 통해 끊임없이 신간들을 확보하고, 필사하여 권수를 늘리고, 많은 사람들 에게 빌려주었다. 사람들이 책값 대신 맡긴 세간은 집안
가득 쌓였고, 이야기의 힘, 사람들은 도시는 이야기의 매력에 푹 빠졌다.
양반집 규수인 어린 이량이 책비가 되기 까지 이량은 한꺼번에 많은 시련과 역경을 겪게 된다. 붕당의 피해자로 풍비박산난 집안에서
아비는 제주도로 귀향을 가게 되고 어미는 충격으로 세상을 떠났다. 손에 물 한방을 안묻히고 곱게 자란 무방비의 이량은 세책점의 필사와 궂은일을
하면서 세책점의 더부살이를 한다. 팥쥐 엄마같은 광양댁과 그집 딸의 눈총을 받으며 죽지 못해 겨우 살아가던 어느날 이량은 기생집에 심부름을
갔다가 자신이 책비 임무를 맡고 왔음을 알고, 치욕스러워 죽으려 한다. 책비란 노비 신분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곳은 진한 분냄새가 풍기던
기방이었다.
치욕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게 된 계기는 두 가지가 있다. 그 중 하나는 먹고 살아야 한다는 삶의 절박함이다. 물동이를 제대로 일 줄도,
냉이를 구분할 줄 모르는 소녀가 남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해 봤자미래는 뻔하다. 자신을 보호하던 피붓이들이 이미 떠난 후 혼자서 스스로 살아
남아야 했으며, 밥값을 벌어야 했다. 두 번째 계기는 우연히 만난 창희와 달희에게 책을 읽어주면서 책을 읽어주는 일의 의미, 그 가치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보따리를 훔쳐 달아난 아이 창희의 동생 달희가 추위와 배고픔과 병마로 죽어가고 있었다. 힘없이 죽어가던 아이는 형에게
이야기를 해 달라고 했다. 이량은 보따리 속의 책을 꺼내 처음으로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었다. 아이는 이야기를 들으며 이야기 속 세상을 상상하며
행복해하며 마지막 눈을 감았다.
그녀는 책비가 되기로 결심을 하면서,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차곡 차곡 실행에 옮긴다. 그녀는 책 배달
심부름을 갈 때마다, 주인 마님에게 읽어드리면 좋아할 만한 사씨남정기 같은 책을 골라 함께 가져가서 읽어드렸다. 그녀는 적극적으로 자신이
책비가 되고 싶다고 이야기하고, 견습삼아 읽어드리는 것이므로 사례는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하는 방법으로 조금씩 자신을 알려 나갔다.
예전에 안도 다다오의 전기에서 건축사 자격증도 없이, 대학을 나오지도 않은 그가 설계 일을 맡기 위해, 이곳 저곳 다니며 공터를 찾아 자기
마음대로 건물을 설계하고 주인을 찾아다녔다는 일화를 보는 것처럼 갑자기 부쩍 자란 이랑의 모습이 대견하고 뿌듯했다.
비록 노비 신분이 되었지만, 전문성이 인정되었고, 자신의 능력에 따라 댓가를 받는 최첨단의 직업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아가게 된
이량의 이야기는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춘 동화이지만, 어른을 위한 자기계발서이기도 하다. 나약하기만 했던 어린 소녀가 역경을 딛고 스스로의 꿈을
이루며 살아가는 모습과, 동화로 재현된 조선 사람들의 이야기를 향한 목마름은 고도의 물질 문명과 이야기의 홍수 속에서 진정 감동을 잃게 된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많은 메시지를 던져준다.
책속의 그림이 참 좋았다. 조선시대 다양한 거리 풍경과 이야기 내용들을 동양적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생생하면서도 정겹게 재현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