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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롯 - “예수는 정치적 혁명가였다” 20년간의 연구로 복원한 인간 예수를 만나다
레자 아슬란 지음, 민경식 옮김 / 와이즈베리 / 2014년 3월
평점 :
품절
성서 속에는 유대인의 역사가 있다. 역사는 성서를 낳았다. 그렇다면 성서는 역사 책인가. 아니다. 성서는 복음서다. 신을 찬양하고 받들며 예수의 종교적 메시지를 전하는 책이다. 동시에 성서는 시대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기록 속에서 역사를 축출하는 일에는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폭넓은 지식이 필요로될 것이다. 성서를 해석할 수 있는 언어적, 문화인류학적 기반지식과, 역사를 해석하고 종교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통찰력, 그리고 무엇보다 숭숭 구멍뚫린 기록의 부재를 틈 빈틈 없이 막아낼 수 있는, 정교한 논리로 무장한 상상력이 필요하다. 수십년동안 이런 작은 단서들을 한줄씩 꿰어 모아 맞춘 퍼즐을 역사라고 부르려면 논리와 감동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기술이 필요하다. 2천년 동안 문명과 문명을 통해, 문화와 문화, 민족과 민족 사이, 대륙을 넘고 대양을 건너 뿌리내린 종교적 믿음을 뛰어넘을 수 있는 빈틈없고 단단한 논리와 설득이 필요하다. 이란 태생, 작가이면서 종교학자, 복음주의 기독교에 심취했다가 이슬람으로 개종한 저자 레자 아슬란은 이 일에 도전했다.
실존했던 예수, 역사 속의 예수를 당시 사회, 종교, 정치적 맥락에서 바라본다면, 거기에서 드러나는 예수의 모습은 우리가 알고, 기대했던 모습과 다를 수 있다. 성서의 기록 속에는 2000년 동안 숭배받아온 한 사람의 행적과 그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적혀 있다. 그의 메시지는 전파되고 기억되고 확장되어 어떤 하나의 종교적 세계 속에 사람들을 하나로 묶었다. 이 책은 그 과정을 역사적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선언한다. 역사속에서 예수는 혁명가였다고.
종교냐 역사냐. 때로 이 둘은 상충한다. 그래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가 있다. 이 둘이 합치하지 않을 때 선택은 믿음의 양과 학문적 진실이라는 잣대 사이에서 부유한다. 성서의 목적은 복음의 전파이고 역사서의 목적은 전체 맥락에서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것이다. 목적이 다르면 사건을 기술하는 방법, 사건에서 골라낸 장면이 다르다. 어린 아이들에게 영화를 보여주고 나서 줄거리를 말해보라고 하면 아기들은 영화의 전체 맥락보다는 자기가 기억하는 부분, 인상깊었던 부분만 이야기한다. 영화중 극히 일부분, 아주 사소한 장면 하나가 아이에겐 기억과 재생의 전부가 된다. 응 자동차가 방귀를 뿡 꼈는데 놀랐어. 신발을 물 속에 빠뜨렸는데 잡으려고 뛰어갔는데 신발이 키득 키득 자꾸 자꾸 도망가서 못잡았어. 어른들은 언제 자동차 경적 소리와 관련된 씬이 있었는지, 언제 신발을 가지고 노는 씬이 있었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 그러나 아이들이 영화를 보고 말하는 장면은 유일하게 재생가능한 장면, 유일하게 기억하고 기록 가능한 장면이다. 그러니까 영화 전체의 줄거리와 맥락이 역사 라고 한다면, 6세 짜리 아이가 유일하게 기억하고 다시 말로 기억을 재생해낼 수 있는 몇몇 장면들은 성서 속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저자의 역사적 맥락으로 해석하는 나사렛 예수와 성서 속 예수 그리스도의 차이를 그렇게 이해했다.
이렇게 말 해도 될까. 나는 종교에 대해서 말할 때 조심스럽다. 누군가가 본 것을 내가 못 보았다고 '그것은 없다'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다른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본인이 두 눈으로 확실히 보았을 때 본 사람은 단호하게 '그것은 있다'라고 말한다.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차이가 극명해서 충돌은 불가피하다. 조금 있는 것과 많이 있는 것, 조금 없는 것 많이 없는 것 사이에는 수많은 타협이 채워질 수 있지만,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는 타협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나는 내가 보았는지 안 보았는지, 안보였는데 보았다고 얘기 하는 것인지, 보아 놓고 못봤다고 시침떼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함구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 불확실하고 혼란스런 종교를 떠난 이유는 보이는 것과 보았다고 리드하는 사람이 추구하는 세계와의 모순 사이에서 갈등했고 언젠가 봤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꺼라던 꿈을 잠시 접었기 때문이었다.그런데 정말? 정말 내가 종교를 떠났을까? 다른 말로, 내가 떠났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그곳에 속해 있었고, 그곳에 속해 있었다고 말 할 수 있을 만큼 그러니까 부활한 예수의 모습을 보았던 것일까? 다시 다시. 내가 뭘 보았거나 말았거나 내가 정말 떠나기나 한걸까. 나는 거기 미련이란 걸 두고 껍데기만 빠져나와 홀가분히 잊어버리고 말면 될 것이었나.
이 책은 역사서이다. 적어도 세 개의 파트 중 첫번째 파트는 완전히 역사서이다. 예수가 태어나가 약 1세기 전부터 십자가 사건이 있고 난 후 1세기 후까지 팔레스타인 지역의 로마 점령과 유대인들의 저항등의 고대 역사를 매우 흥미롭게 전하는 대중을 위한 역사서다. 책의 반을 역사에 할애하는 이유는 성서 속 예수가 살았던 시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다. 예수를 역사적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시대적 배경을 정확히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저자 아슬란은 그 시대의 역동적인 역사적 배경을 흥미롭게 그려냄으로써 역사적 인물로서의 혹독한 변혁의 시대를 살았던 역사적 예수를 독자에게 설득하는데 이미 반쯤 성공했다. 여기에 역사의 본질이 있다. 개인을 보면 답이 안나오는 것도 역사 속에서 보면 한 줄기 빛처럼 개인의 행보에 대한 그 목적과 의식이 선명히 보인다. 역사속에서 유대의 지도자들, 대제사장들과 귀족 계급들은 개인의 영달을 위해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고 그들의 개가 되어 민중을 픽박하고 대대손손 부귀영화를 누리려 신과 예법을 이용했다(특히 신성모독과 압제에 대한 저항으로 400년만에 이민족의 통치에서 벗어나 겨우 한 세기 동안 자기들의 '신성한 땅'을 스스로 통치한 하스모니아 왕가의 후손들은 스스로 나라를 로마에 바쳤다.) 백성들은 민족의 새로운 지도자가 필요했다. 로마 총독과 점령군을 몰아내고, 썩어 빠진 유대 종교 지도자와 유대 귀족들을 파멸시키고 민족을 해방시키고 그들의 통치할 실제적 왕이 필요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혁명가가 되어 메시아를 자처하고 민족의 해방을 꿈꾸며 대중을 선동하고 지배계급에 폭력적으로 저항하며 다녔고 그러다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거나 석형에 처해졌다. 예수도 그들 중 하나였다.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형에 처해진 수많은 혁명을 꿈꾸던 사람 중 하나였다. 그것이 레자 아슬란이 역사속에서 찾은 진실이고, 단호하게 내린 결론이다.
보이지 않는 것 두 개의 상반된 견해. 모순되고 상반된 견해들이 공존한다면, 개인의 선택에 따라 진실은 편리하게 공존한다. 개인이 직접 볼 수 없다면 믿는 것이 진실이 되고, 개인이 직접 보았다면 본 것이 진실이 된다. 어떤 한 개인이 보았다는 사실이 역사와 논리에 모순된다면 개인이 본 것은 쉽게 허상이 될 수 있지만, 많은 집단이 2천년을 넘게 보았다고 믿어왔을 때, 그것이 역사와 논리에 모순된다면 역사는 시간 속에 묻혀버린다. 어쨌든 과거는 시간 더미 속에 묻혀버렸다. 나는 궁금하다. 진실을 본 사람들은 이 책을 읽고 본 것과 믿는 것의 차이를 떼어낼 수 있는지. 음성을 듣고, 방언을 하고, 십일조를 내고, 월급보다 많은 건축 헌금을 내고, 평온한 주말 집집마다 벨을 눌러 아침잠을 깨우고 말씀을 전하러 다니는 선량한 교인들 하느님의 자식들, 또 대형교회의 비리와 목사직의 제왕적 세속을 지지하고, 더 큰 파이 조각을 갖기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 그들이 진정 본 것. 그들이 들은 진짜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