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 그 여자의 부엌 - 부엌에서 마주한 사랑과 이별
오다이라 가즈에 지음, 김단비 옮김 / 앨리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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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제가 부엌에서 마주한 사랑과 이별 <그 남자, 그 여자의 부엌>이었다. 부엌이란 장소는 참 신기하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 같지만 누군가 그 안에 들어가 무언가를 하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1년에 네 번 정도, 그러고 보니 봄, 여름, 가을, 겨울 대전에 사는 친구 집에 찾아가 하루를 머물다 온다. 서울에서 내려간 두 명이 초인종을 누르면 함께 사는 다롱이(반려묘)가 야옹 하고 먼저 나와 반겨주었는데 이제 그 녀석도 나이가 들었는지 올해는 우리를 슬쩍 한 번 쳐다보고 말았다. 손을 씻고 식탁에 앉으면 친구는 저녁과 후식, 차까지 코스로 준비해놓는다. 우리는 식사를 하며 그 동안 있었던 일을 주고받는다. 올 봄에 함께 가기로 한 스페인 여행 준비와 얼마 전에 읽었던 책에 대한 이야기. 또 조카들과 고양이에 대해 말하고, 직장 생활에 대한 스트레스도 털어놓는다. 나도 모르게 마음속에 들어있던 이야기들이 술술 나오고 만다. 그렇게 우리는 친구에서 밥을 함께 먹는 식구가 되었다.

 

…… 그곳에는 반드시 크고 작은 이야기가 있다. 부엌이란 참으로 희한한 공간이다. 첫 만남임에도 부엌에서 마주하면 마음 깊숙한 곳에 묻어둔 응어리와 고충을 털어놓게 된다. 과거의 쓰라린 이별이나, 현재의 고민과 골칫거리를 토로하는 이도 있다. …… 왜 이토록 부엌에는 사람 냄새 나는 이야기가 가득할까. ……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운이 있는 날이나 없는 날이나 밥을 지어야 한다. 언제 어느 때건 부엌에 서서 무언가를 만드는 행위는 변함이 없다.

(5~6.p)

 

  언젠가부터 집으로 사람들을 초대하여 밥을 함께 먹는 일들이 사라졌다. 손님들을 초대하여 음식을 대접하고 즐거운 시간을 나누며 서로의 삶을 나누던 우리 부모님 세대와 다르게 대접을 하거나 모임을 가질 때, 대부분 음식점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다보니 서로의 민낯이나 속마음을 나누기 더더욱 힘들어졌다. 적당히 분위기를 맞추고 주어진 시간을 잘 보내면 서로가 시간을 함께 보내었어도 그들의 삶으로 들어가기가 어렵다. 집이란 그만큼 사적이면서도 내밀한 공간이고, 집 안에서도 부엌은 더더욱 속살을 보여주는 것처럼 모든 것을 드러내는 공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집으로 초대하고 자신이 늘 이용하는 부엌에서 익숙한 재료로 음식을 만들어 대접받는 일이 귀하고 아름답다. 초대하는 이도 초대받는 사람도 우리는 서로에 대해 마음을 나누며 함께 기뻐하고 슬픔을 나눌 수 있는 사람임을 말하지 않아도 알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내내 나도 그들의 부엌에 초대받은 느낌이 들었다. 그들의 식탁에 앉아 함께 식사를 하며 삶에 대해 나누는 것 같았다. 인스턴트와 술을 마시고, 과식을 한 뒤 약을 먹는 남편의 이야기를 들으며 현대 직장인 남자들의 현실적인 모습을 보는 것 같았고, 채식을 권하는 부인과 싸우는 모습에 아 저들은 곧 헤어지게 되겠구나 생각했다. 그런가 하면 54년이란 긴 시간을 한 공간에서 만들어낸 음식을 먹고 살아온 노부부의 이야기를 통해 사람의 관계 속에 세월이 쌓이고 서로에게 스며드는 나 아닌 또 다른 나를 그려보았다. 같은 음식을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들도 인식하지 못한 채 서로를 닮아가게 된다. 그 모습이 신기하면서도 아름답다.

 

 

  부엌에 서서 음식을 만든 시간이 짧든 길든 혹은 혼자 먹는 것이나 함께 먹는 음식이나 그것을 직접 만든다는 것은 실제로 만지고 볼 수 있는 몸을 가진 존재들과 시간과 마음을 나누겠다는 또 다른 표현이 될 것이다. 그래서 나와 타인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일이 음식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는 그렇게 만들어진 음식을 먹고 지금까지 살아왔기 때문이다.

 

 

  조르바 처럼 말하고 싶다. “당신이 먹는 음식이 무엇인지 말해주시오,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 주겠소.” 나의 친구는 우리를 위해 밥도 하고, 떡국도 끓였다. 모이면 즐겨 마시는 와인과 함께 요리한 불고기를 내놓은 다음 자신이 평소에 먹는 김과 김치 등 반찬을 꺼냈다. 식사를 마치고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내가 좋아하는 감바스를 뚝딱 만들어냈다. 좋아하는 홍차도 예쁜 다기에 담아 내놓았다. 다른 사람의 손을 거쳐 내게 온 음식들이 맛있어서 행복했다. 불이 꺼지지 않는 부엌은 온기가 있고 따뜻하다. 그리고 힘들고 지친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 그래서 요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한 번쯤은 그곳에 서고 싶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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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과 물 배수아 컬렉션
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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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뱀과 물>은 처음 읽은 배수아의 작품이다. 작품에 대한 호불호가 확실하고 마니아층이 형성될 만큼 영향력 있는 작가이기에 호기심을 갖고 소설을 읽었다. 소설 속 이미지들은 강렬하면서도 담대하고 섬세하다. 전통적 서사구조를 벗어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화자가 소설을 이끌어간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누군가 내게 20센티미터쯤 되는 뱀을 건네주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도 뱀은 징그러웠고 받자마자 손에서 놓쳐버렸는데 그것이 목옆을 스르륵 지나가는 섬뜩한 기운을 느꼈다. 그만큼 이 작품은 메시지보다 이미지가 더 크게 다가왔다.

 

 

난 너를 알아. 1972년에 넌 전학생이었잖아. 우리는 같은 책상에 나란히 앉아서 수업을 들었고……

 

  소설은 나를 안다는, 내가 모르는 사람에게 전화를 받는 것부터 시작된다. 전화를 받은 인 김길라가 어린 소녀가 되어 전학서류를 건네러 가고 여교사 김길라를 만난다. 그리고 운동장 가운데에서 늙은 길라를 만나며 끝이 난다. 시간을 초월한 세계 안에서 방황하고 폭행당하며 현재를 벗어나고자 하는 많은 김길라가 중심에 서있다. 이들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등장하고 이야기하고 꿈을 꾼 뒤 죽어간다. 한 사람 안에는 그 사람이 살아온 날 만큼 부딪치고 깨지면서 쌓여진 역사와 아픔, 고통이 있다. 콜레라와 같은 전염병, 폭탄과 핵무기, 전쟁 그리고 무서운 소문들 앞에서 우리들은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고 떨게 된다. 그런 인간의 심리 속으로 길라가 되어 한없이 들어가다 보면 물과 뱀에게 둘러싸여 악몽을 꾸는 여교사 김길라를 만날 수 있다. 물과 뱀은 여교사 김길라에게 끔찍한 폭력을 휘두르고 그 안에서 빠져 나오 지 못하는 그녀는 마지막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그들의 존재를 마주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것만은 제발 안 된다고.

 

 

날 죽여줘. 소리도 없이. 직관도 없이.

하지만 뱀과 물은 여교사를 죽이지 않았다. 아니, 그러기 전에 그들은 마지막 의례를 치르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여교사의 양쪽에서 나란히 서서, 천천히 마스크를 벗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여교사는 극도의 패닉에 빠졌다. 지금까지의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금까지는 자비로운 전희에 불과했다. 그녀는 제정신을 잃었다. 머리를 움켜쥐고 쓰러지며 발광했다.

안 돼, 안 돼! 마스크를 벗으면 안 돼! 그건 안 돼! 너희들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 날 계속 때리고 모욕해! 날 강간하고 살해해도 좋아! 날 고기 가는 기계에 넣고 갈아버려! 내 껍질을 벗기고 피와 기름을 끓여서 비누로 만들어버려! 하지만 제발 부탁이니 마스크는 벗지 마! 마스크는 벗지 마! 내가 너희의 얼굴을 보게 하지는 마! 너희가 누구인지 알게 하지는 마! 216~217.p

 

  꿈속에서 여교사 김길라는 뱀과 물에게 자신의 육체와 영혼을 내던져 준다. 그것만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처럼. 그러나 그들이 마스크를 벗고 얼굴을 드러내려고 했을 때 제발 그것만은 감당할 수 없다며 멈추어 달라고 애원한다. 그녀가 두려워했던 것은 무엇일까? 어쩌면 폭력을 당하는 가 폭력을 휘두르는 와 만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은 아닐까? 고통의 가장 밑바닥, 그 근원을 마주대할 용기가 우리에게는 없다. 아니 그것과 마주하는 것은 자신을 분해시키는 가장 큰 형벌일 것이다. 우리는 예의와 규칙, 법과 상식 안에서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지만 어떤 상황에서 자신도 몰랐던 악의가 튀어나오고, 끔찍한 상상을 하며, 믿을 수 없는 일을 저지르는 모습들을 많이 보아왔고, 또 잊었다.

 

 

어린 시절. 그것은 막 덤벼들기 직전의 야수와 같았다고 여교사는 생각했다. 모든 비명이 터지기 직전, 입들은 가장 적막했다. 시간과 공기는 맑은 술처럼 여교사의 갈비뼈 사이에 고여 있었다. 염세적인 사람은 일생에 걸친 일기를 쓴다. 그가 어린 시절에 대해서 쓰고 있는 동안은 어린 시절을 잊는다. 갖지 않는다. 사라진다.

223.p

 

 

  <뱀과 물>을 읽다가 미궁 속을 헤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계속 읽고 무슨 말이라도 쓰고 싶었다.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내 안에 있는 것 중 내가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생각하면서 말이다. 내 안에도 수많은 내가 존재하니까. 그렇지만 나또한 내안의 어두운 무언가를 마주하기란 두렵고 무섭다. 나를 바라보는 나의 눈이 제일 무섭다. 뱀과 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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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외출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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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좋은 시간을 많이 쌓아가고 있는 중에 읽게 되어 기쁘다. 사람은 태어난 순간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순간순간 과정에 충실하며 빛나는 시간을 많이 만들어낼 줄 알아야 한다. 이렇게 잘 알고 있으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나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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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손홍규 지음 / 교유서가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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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크리스마스 이브 날, 손홍규의 두 번째 산문집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과 노트북을 들고 카페로 갔다. 오늘만큼은 많은 커플들이 손을 꽉 잡은 채 자기들만의 언어로 속삭이고 있을 줄 알았는데 여전히 커피 잔을 옆에 놓고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눈이 내리는 것 같더니 그마저도 시시하게 그치고 말았다. 특별한 날이지만 각자 여전히 하고 있는 일들을 마무리해야 하고, 시간이 정해져 있는 순서대로 처리해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다 그러할 것이다.

 

  『다정한 편견이후, 손홍규의 두 번째 산문집을 읽게 되어 기뻤다. 그의 산문은 투박하지만 인정 많은 말투로 이야기를 건네는 시골 여인을 닮았다.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에게 그의 정서가 따뜻하게 다가오는 것은 세상과 타인을 대하는 진심이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그의 산문을 읽지 않고, 이상 문학상 수상작인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를 읽었다면 나는 작품 안에 담긴 그의 가난한 마음과 고단함, 세상 사람들을 향한 애틋한 감정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소설 속에 녹아 있는 작가의 진심이 산문을 읽으면 더욱 생생하게 다가온다.

 

  나는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을 읽으면서 고향과 가족, 읽었던 책들과 여행, 대학시절과 문학에 대하여 친구와 마주앉아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듯 했다. 그 중에는 많은 부분 겹치고 공유되는 경험이 있어 나도 이야기를 건네는 것 같았다. 예를 들면 시골 할머니댁과 사촌들과의 추억,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과 볼라뇨의 칠레의 밤, 그리고 이스탄불과 당나귀는 당나귀답게의 아지즈 네신에 대한 작가론까지 나의 오랜 지인과 대화를 나누는듯 책을 읽어나가는 기쁨을 느꼈다.

 

 

어린 시절 나는 한 마리 소를 사랑했다.

아버지는 내게 물었다. 그래, 소설이라는 것을 쓸 테냐. 아버지는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거다. 이래도 소설이라는 걸 쓸 테냐. 나는 고개를 저었는데 무엇을 부정하는 거였는지는 아버지 역시 확신할 수 없었으리라. 쓰고 말고 할 게 있나요, 나는 이렇게 대답했으나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거다. 제기랄, 소설은 이미 소가 다 써버린걸요. 세상이 들려준 이야기를 받아 적는 것만으로도 소설이 되는 비장하게 희극적인 삶을 삭제할 수 없는 나로서는 여전히, 문학은 소다.

1<절망을 말하다> - ‘문학은 소다중에서 

 

 

  첫 글에서부터 작가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근간으로 글을 쓰며 살아갈 것인지 밝히고 있다. 어린 시절 외동으로 자란 작가가 마음을 다해 사랑했던 소는 인공수정 후 송아지를 낳은 뒤, 병들고 지친 몸으로 자신의 등록금을 위해 팔려갔다. 그렇게 그의 소는 소설가로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소만큼 인간들과 함께 하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동물이 있을까. 커다란 눈망울과 무언가를 꾸준히 우물우물 씹고 있는 얼굴은 수많은 사람들을 닮아 있다. 그의 글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하고 끝난다. 수없이 절망하고 흔들리는 사람들, 흔들리며 견디고 버티는 사람들, 흔들리다 우리 곁을 떠나간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날카롭고 강렬하지 않지만 수심 깊은 곳에서 울리는 진동처럼 한편 한편의 글 속에는 진심과 마른 울음이 섞여 있다. 그것이 읽는 이의 마음을 잡는다.

 

 

사실 나는 절망을 말하고 싶다. 절망한 사람을 말하고 싶다. 절망한 사람 가운데 정말 절망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많지 않은 이유를 말하고 싶다. …… 오래전 내 꿈은 소설가였고 지금 나는 소설가인데 여전히 내 꿈은 소설가다.

1<절망을 말하다> - ‘절망한 사람중에서 

 

 

  이 마지막 문장이 절망하고 또 일어서고, 또 절망하다 쓰러지지만 여전히 나는 글을 쓰고 싶다는 말로 들렸다. 문학은 바로 그곳에서 시작해서 사람들을 향해 걸어가는 행위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나는 이미 터키를 떠나 한국으로 돌아갔을 때 몹시도 그곳을 그리워하게 될 것임을 알았다. …… 내게 여행이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자리에 잠시 주저앉아 높이가 다른 세상을 일별하는 것과 비슷하다. 익숙한 세계가 순식간에 낯설어지고 낯선 세계가 하염없이 밀려들어와 뜻밖의 사건처럼 내 안에 자리잡고 나와 함께 거주하게 된다. …… 문학은 서로 다른 언어로 쓰인 공통의 기억이다. 아지즈 네신의 소설에 깃든 날카로운 풍자를 알아보지 못할 수가 없으며 야사르 케말의 소설에 깃든 비참하게 아름다운 인간성을 해독하지 못할 수가 없다. …… 자본주의와 타협하지 말라. 문학은 바로 네가 선 그 자리에서 시작하는 거다.

2<문학은 네가 선 자리에서 시작하는 것> - ‘이스탄불에서 마음을 놓치다중에서 

 

  이스탄불은 사람을 매혹하는 도시이다. 내가 여행을 갔을 때는 아직 아지즈 네신이나 야사르 케말에 대해 알지 못했지만 도시와 그곳에 사는 사람들로 인해 어렴풋이 가지고 있었던 환상과 편견이 깨지고 새로운 인식과 애정이 쌓이고 있었다. 작가가 두 발로 다니며 알려주는 이스탄불 곳곳에서 내가 함께 했던 친구들은 물론이고, 지금보다 조금 더 젊고 힘이 넘쳤던 나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어서 독서가 주는 또 다른 즐거움을 누렸다.

 

  소설과 달리 에세이를 읽다보면 글을 쓴 사람의 마음을 엿보게 된다. 그만큼 작가도 자신의 속마음을 들킬 각오를 하고 글을 써나갈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에세이는 읽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래서 소설을 읽기 전에 그 작품을 쓴 소설가의 에세이를 찾아 읽는다. 그러다 보면 이해하기 어렵거나 공감하기 힘든 작가의 소설도 애정을 갖고 읽게 된다.

 

  문학은 사적이면서도 공적인 것이다.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과 가치관을 담고 있지만, 그가 그런 경험을 하고, 생각을 하게 만든 당대 사회의 물과 공기를 소가 여물을 먹듯 작가가 마시고 소화시켰기 때문이다. 글을 읽고 쓰는 사람들은 그래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작가와 독자는 서로에게 낯선 사람들일지라도 서서히 닮아 가게 되는 것 같다. 절망하는 상황에서도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내고 속내를 기꺼이 보여준 작가를 응원하며 그 다음을 기대하게 만드는 것을 보니 말이다

 

이야기는 실제 삶을 불안에서 건져주지는 못하겠지만 그 불안을 무사히 건너갈 수 있게 도와주기는 한다. 만약 이게 최소의 원칙이라면 좋은 문학은 이 최소를 넘어서는 것이어야 하며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해내는 것이어야 한다. 어떤 존재든 그 존재의 의미는 그의 내부에 있지 않다. 의미는 그에게 허락된 것을 넘어서는 순간 태어난다. …… 이야기꽃은 남루한 삶 한가운데서 피어나 우리의 사연이 어떤 의미인지를 보여주는 꽃이다.

4<슬픔과 고통으로 구겨진 사람> - ‘이야기꽃중에서

 

 

  이제 내일이면 새로운 해를 맞이하게 된다. 올해 우리가 피어낸 이야기는 무엇이며,  새해에 피어내야 할 이야기는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나를 생각하게 만든 것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이야기와 사연을 담고 있다.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절망하고 있더라도 모두가 복된 새해를 맞이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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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박상영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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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편이라고 하기에 분량이 꽤 많았던 표제작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긴 제목에서 느껴지는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들, 그것을 하나씩 풀어나가는 인물들의 섬세한 몸놀림, 넘어지고 상처받는 사회에서 한 개의 작은 점으로라도 남고 싶어 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접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소수자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과장하거나 동정심을 유발 하지 않은 채 그대로 그려내고 있다. 낯선 세계에 대한 낯설지 않은 그의 글이 작품을 읽는 사람들을 흡수한다. 우리는 이 사회를 이루고 있는 한 개의 점이라고. 아이러니한 유머가 절망의 습기를 머금고 작품 곳곳에서 올라오지만 어둡거나 음흉하지 않아 좋다. 결국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 하나의 인생을 살다가 떠나갈 사람들이니 점으로 남은 사람들도 언젠가 지워지고 말 것이다.

 

현대무용입니다. 작품의 제목은 나는 세상의 아주 작은 점이다.’

……

우리는 세상의 작은 점조차 되지 못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우리는 세상의 아주 작은 점조차 되지 못했다. 점은커녕 그 어떤 것도 되지 못했다. 인생을 걸고 했던 일들은 모두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되어버렸다. 칸영화제를 가기는커녕 제대로 된 퀴어 영화를 찍지도 못했고, 내가 누구인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어영부영 나이만 처먹었다. 동성애자이면서 제대로 동성애를 하지도 못 했고 그것도 모자라 이성애자들로부터 마이크 하나조차 제대로 훔치지 못했다.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들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215.p

 

세상이 놀랄만한 영화를 찍고 싶었으나 이제는 성인영화를 복사한 불법 사이트 관리자에게 항의 메시지를 보내는 일을 하고 있는 와 세상에 한 점이 되고 싶었다는 무용가 왕샤는 우습게도 자이툰 부대에서 만나 서로의 몸을 탐하고 좋아하게 된다. 세상에는 자신들을 거부하는 것뿐이며 이루고 싶었던 일들은 시간과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하루하루 고요하고 지루한 일상이 지나가는 것 같지만 세상에서 소외된 것 같은 두 사람은 끊임없이 몸부림치다가 쓰러진다. 여전히 하나의 점이 되지 못한 채.

왕샤처럼 작가가 그려내고 있는 인물들은 가난과 편견, 무너진 꿈을 부여잡고 있는 나약한 자신과 벽 같은 현실에 가로막히고 있다. 그러면서도 피할 수 없는 가상의 세계에 자신의 욕망을 심어놓지만, 결국 삶도 관계도 뒤죽박죽 알 수 없는 허공 속에서 부유한다. <중국산 모조 비아그라와 제제, 어디에도 고이지 못하는 소변에 대한 짧은 농담>와 제제의 이야기이다. ‘는 제제가 게이전용 마사지 숍에서 일하는 것이 불안하지만 그를 막지 못한다. ‘는 제제가 잠들기 전에 들려주는 우스운 이야기에 기대어 외로움을 이겨내려고 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패리스 힐튼을 찾습니다><부산국제영화제>는 하나의 연작소설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잃어버린 개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모습이 마치 블랙코미디 영화를 보는 것 같다. 그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고 부산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또다시 위선으로 가득한 친구들을 만나고 서로의 관계를 생각한다.

 

…… 우리는 그 많은 추잡한 일들을 공유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가장 내밀한 부분에 대해서는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하긴 상대방에게 진실을 숨긴 채 다른 것들을 욕망하며 사는 우리의 관계야말로 지극히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커플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부산국제영화제> 123.p

 

철저히 연출된 모습만 보여주고 행복을 연기해 보지만 결국 그들에게 남는 것은 손에 쥐어보지 못한 꿈과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인지 구분하기 힘겨워진 텅 빈 자신들이다. 한편 <조의 방>. ‘는 조와 함께 머물렀던 그의 방에서 젊음과 사랑과 신뢰를 빼앗겼다. ‘는 손님에 따라 유나가 되기도 하고, 또 다른 누군가가 되며 과거의 자신을 잊으려고 한다. <햄릿을 아십니까?>10대와 20대 초반까지 연습생 시절을 보내며 결국 데뷔도 하지 못한다. 인심 쓰듯 찾아온 방송국 관계자의 서바이벌 오디션 나이 많은 연습생 캐릭터를 제안을 받고 출연하지만 결국 다시 내려오고 만다. 알 수 없는 미래를 위해 흘린 땀과 빚을 지면서 바꾼 얼굴은 현재의 삶에 절망과 포기만을 안겨주었다.

사람들은 참 많은 노력을 하면서도 많은 것을 잃으며 살아간다. 그래서 아프고 무덤덤해지고 외로우면서도 혼자이기를 바라게 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안보윤의 <소년7의 고백>은 읽는 내내 불편했고, 박상영의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는 이해하기 다소 난해했다. 그럼에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것은 황현산, 허수경 선생님이 걸어간 길에 동행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앞 세대와 다음 세대가 또다시 만날 수 있다는 믿음을 안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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