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급해졌어, 아름다운 것을 모두 보고 싶어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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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여행은 영원히 진행 중

 

 

1. 마음이 급해졌어, 아름다운 것을 모두 보고 싶어/ 마스다 미리

 

  나는 패키지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침잠이 많기 때문이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나의 패키지여행은 중국 상하이, 항주, 소주를 도는 45일 여행이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7시에 호텔 조식을 먹고, 8시에 다시 모여 출발하는 이른바 678 아침 스케줄이 내게는 강행군이었다. 그 뒤로는 패키지여행을 가지 않았다. 조금 번거롭기는 했지만 직접 여행준비를 하고 현지에서는 오전 시간을 느긋하게 즐긴다. 지금도 나의 국내외 여행은 자유롭게 선택하고 여유를 즐기지만, 이 책을 읽으며 생각을 달리 하게 되었다.

 

아름다운 것을 많이 봐두고 싶다.’

마흔 살이 됐을 때, 왠지 그런 다급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책이나 텔레비전에서 보아온, 세상의 많은 아름다운 것들. 이를테면 풍경이나 축제 같은 것.

봐두고 싶네. 하지만 갈 일은 없을 테지.’

그렇게 동경했던 곳으로 앞으로 10년에 걸쳐 다 다녀보는 건 어떨까?

등을 민 것은 가이드가 동행하는 패키지 투어의 존재였습니다.

- 여행을 시작하며 중에서

 

  아름다운 것을 많이 봐두고 싶다는 소망은 저자만의 것은 아니다. 인간은 아름다움을 탐할 권리와 본능을 갖고 있으며,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하다. 특히 처음에 나오는 북유럽 오로라 여행은 마음을 먹는다 해서 쉽게 떠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은 새벽 두 시가 지났고, 기온은 영하 18도인 세계.’

 

  이 문장을 읽었을 때 나의 마음도 두근거렸다. 코끝이 아릴 정도의 차디찬 밤공기 속에서 발을 동동 거리며 오로라가 나타나주길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들은 저자일 수도 있고, 나일 수도 있으며, 혹은 그 누구일 수 있는, 아름다운 것을 보고 감탄할 수 있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일 것이다. 패키지여행이 있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오로라의 신비함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니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여행객 대부분 60대 이상 부부도 있지만, 여성 그룹이 많아서 재잘재잘 무척 즐거워 보인다. 북극권 여행이다. 춥고 멀고, 상당히 힘들 텐데 지친 기색도 없어서 젊을 때밖에 갈 수 없어라고 생각했던 나를 반성했다. 젊지 않아도 어느 때라도 어디든 갈 수 있는 것 같다. 30.p

 

  애쓰고 수고한 자신을 위해, 육체를 이끌고 새로운 세계까지 걸어 나온 여행자는 장소를 옮길 때마다 다시 태어난다. 젊지 않아도 괜찮다. 나이 들어가는 것에 쫄지 않고, 다가올 미래를 두근거리며 기다리고 싶다면 여행을 떠나야 한다. 낯선 곳에서 새롭게 태어나고 새로워진 나나로 돌아오는 우리는 행복하다. 혼자 참가해서 청승맞아 보일 수 있어도, 시간에 쫓겨 독일 크리스마스 마켓 여행을 35일로 밖에는 다녀올 수 없어도 떠나고, 보고 싶은 것을 보며, 그것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은 총알처럼 빠르게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자신만의 여유로움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벽돌색 지붕의 귀여운 구시가지. 많은 관광객이 그 경치에 빨려들었다. 더 천천히 보고 싶었는데, 투어는 항상 시간에 쫓긴다. 특히 이번에는 독일 35일이라는 총알 투어다.

그런 여행으로는 아무것도 본 게 안 돼.”

하는 의견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무언가는 남을 터. 아무것도 본 게 되지 않는다고, 누가 단정할 것인가? 59.p

 

  자신의 취향에 맞게 자유여행을 할 수 있지만, 모두 그렇게 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춘 것은 아니다. 체력이 받쳐 주던 20~40대를 지나, 힘에 부치는 나이가 되었거나 긴 시간을 낼 수 없을 때, 혹은 동행자 없이 멀고 험한 여행지를 선택해야 할 때는 자유여행이 아닌 또 다른 대안이 필요하다. 그 대안의 중심에 패키지여행이 있다. 또 이 여행은 계속 진화하고 있다. 패키지여행만 있다면 몇 살이 되었든 어디든지 갈 수 있다는 저자의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용기를 내어 떠날 수 있는 사람은 지루한 일상의 자리로도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다. 저자처럼 아름다운 것들을 두 눈과 마음속에 차곡차곡 간직하고 싶은 나도 나이 드는 것이 두렵지 않다.

 

 

2. 걷는 사람, 하정우/ 하정우

 

 

  한때 나의 SNS 아이디는 걸어야 할 이유를 찾다였다. 걷기는 좋은 친구이자 삶의 돌파구였다. 땅을 디디며 두 발로 체중을 느낄 때 라는 사람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지금도 걷기에 대한 말을 듣거나 글을 읽으면 몸이 근질근질해지고 당장 동네라도 한 바퀴 돌고 싶어진다.

 

 대학을 졸업하고 집에서 한량처럼 빈둥거렸을 때, 나를 일으켜준 것은 걷기였다. 늦은 아침에 눈을 뜨면 가족들이 모두 나간 후였다. 오전의 햇살이 집안의 먼지까지 비춰줄 때 나는 느릿느릿 세수를 하고 밥을 먹었다. 그다음 잠시 멍하니 앉아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했다. 내가 좋아하는 무언가를 하고 싶었지만 그 무언가가 어떤 것인지 몰랐다. 무료한 시간을 달랠 수 있는 것이 필요했다. 벚꽃 피는 봄에 가고 싶었던 남산이 창밖으로 보였다. 나는 신발을 주섬주섬 주워 신고 가까운 남산을 향해 걸었다. 차비도 들지 않고 무엇보다 하염없이 시간 보내기에 좋았다. 국립극장 앞에서 케이블카가 있는 곳까지 산책하기 좋은 코스가 있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걷기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것만 같았던 과거의 어느 막막한 날에도, 이따금 잠까지 줄어가며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지금도 꾸준히 나를 유지하는 방법이다. 이 점이 마음에 든다. 내가 처한 상황이 어떻든, 내 손에 쥔 것이 무엇이든 걷기는 내가 살아있는 한 계속 할 수 있다는 것.

 

  영화배우 하정우가 아니라 <걷는 사람 하정우>를 읽었을 때, 화려한 배우의 삶 뒤로 끊임없이 걷고 고민하고 조금씩 나아가는 인간 하정우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의 걷기 예찬을 읽으며 아무 것도 아닌 나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과거의 모습이 떠올랐다. 현재의 나는, 긴 인생을 두고 보았을 때 1년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해줄 수 있지만, 그때의 나는 세상 모든 고통과 우울을 껴안고 있는 사람처럼 굴었다.

 

- 기분은 무척 힘이 세서 누구나 기분에 좌지우지되기 쉽다. 29.p

 

- 나는 나의 기분에 지지 않는다. 나의 기분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믿음, 나의 기분으로 인해 누군가를 힘들지 않게 하겠다는 다짐, 걷기는 내가 나 자신과 타인에게 하는 약속이다. 34.p

 

  그런 우울한 기분은 사람을 병들게 만든다. 20대 초중반의 아름다운 청춘이 잉여 인간처럼 자신의 존재를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것은 참 쉽다. 기분의 힘이 세다는 것을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그때 나는 열심히 걸었다. 걸으면서 산에 핀 꽃들도 많이 보았다. 아기였을 때, 우리는 걷기 위해 얼마나 혼신의 힘을 쏟았던가. 기억나지 않겠지만 온 힘을 다해 한발을 내딛었을 것이다.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앞을 향해 걸으면서 환희의 함성을 질렀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걸으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고 지금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9년 전, 산티아고 순례길에 올랐다. 8키로가 조금 안 되는 배낭의 무게가 인생의 무게보다 더 무겁다는 걸 그때 느꼈다. 발의 중심을 잃고 넘어지는 바람에 오른쪽 팔에 깁스를 했을 때, “너는 다리를 다친 것이 아니고 팔을 다친 것이니 얼마든지 걸을 수 있어.” 라고 말해준 의사 덕분에 열심히 걸어서 목적지인 산티아고에 무사히 도착했다. 배낭과 한 몸이 되어 끝까지 걷겠다는 나의 결심은 운반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으로 대체했다. 삶의 변수는 나의 생각을 조금씩 내려놓고 다른 방법과 타협하는 것을 가르쳐 준다. 나는 조금 불편하지만 훨씬 가벼워진 몸으로 계속 걸어 나갔다. 걸어보니 알 수 있었다. 오롯이 두 발로 걸어간다는 것, 그것이 자유라는 것을.

 

그저 신이 내게 맡긴 길을 굳건히 걸어갈 수 있도록 두 다리의 힘만 갖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삶은 그냥 살아나가는 것이다. 건강하게, 열심히 걸어 나가는 것이 우리가 삶에서 해볼 수 있는 전부일지도 모른다. 내가 아무리 고민하고 머리를 굴려봤자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이렇게 기도한 이후로 이상하게 조금 더 마음이 편해졌다. 무슨 일에든지 더 담대해질 수 있었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어찌해볼 수 없는 일들이 있다는 명백한 사실은, 내게 포기나 체념이 아니라 일종의 무모함을 선물해주었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길을 그저 부지런하게 갈 뿐이다. 291.p

 

  여행이란, 두 다리를 움직여 어딘가로 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걸을 수 있기에, 아니 혹여 걸을 수 없다 하더라도 몸을 움직여 앞으로 나아가기를 소망한다면 지금이라도 우리는 훌훌 떠났다가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걸으면서 방황하는 존재이니까. 걸으면서 시작되고 다시 걸어서 돌아올 수 있는 우리의 여행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3. 영원한 외출/ 마스다 미리

 

     

  내가 포르투갈 리스본에 있을 때, 아빠의 여행은 끝나가고 있었다. 201812, 폐렴으로 입원하신 아빠는 담낭암 4기 판정을 받았다. 아빠는 항암치료를 할 것인지 고민하다가 그만두었다. 담당 의사도 80세가 넘은 어르신께 항암치료 보다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것을 추천했다. 자신의 할아버지도 그렇게 하셨다면서. 그때쯤 마스다 미리의 <영원한 외출>이 나왔다. 마음을 잡지 못해 힘겨워하는 나를 위로해 주는 것 같았다. 누구나 부모의 죽음을 맞이한다. 명백한 사실이지만 애써 외면하고 인정하지 않았던 가까운 미래. 누군가 모두 겪는 일이라고 말해주었을 때 그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깨달았다. 슬픔도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구나. 저자가 담담하게 써내려간 글 속에서 나는 힘을 얻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아버지의 죽음.

아버지의 죽음은 본인에게나 누구에게나 처음이다.

앞으로 하루하루 체력이 떨어질 거란 건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25.p

 

  우리 가족은 마지막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 밀도 깊은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가족티를 맞춰 입고 활기찬 모습으로 가족사진을 찍었다. 주말이 되면 교외로 나가 외식을 했다. 한편으로 나는 1년 전부터 계획해 두었던 스페인포르투갈 여행을 취소하기로 했다. 그러나 아빠는 내가 그렇게 하길 원하지 않으셨다.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라고 여비까지 보태주었다. 자신의 병과 나의 여행은 무관한 것이며, 삶의 계획은 각자 다른 것이라고. 다행히 아빠는 내가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주셨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감사하다. 여행을 떠날 수 있도록 나를 독려해 주신 것과 마지막을 함께 할 수 있게 해주신 것. 그리고 나 혼자 걸어갈 수 있도록 80여 년 동안 내 인생의 여행길에 동행자가 되어 주었던 모든 것이 말이다.

 

사람은 먹으면 힘이 나는 것 같다.

그 핑계로 나는 아버지에게 다가온 죽음을 앞에 두고 일을 하고, 가을옷과 구두를 사고, 카페에서 케이크를 먹으면서 책을 읽었다.

퇴원 후 아버지의 취미는 오로지 식(). 다음 식사 때는 무엇을 먹을까. 하는 것이 관심사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저녁 식사 후, 내일 아침은 어묵을 먹고 싶어. 하고 아버지는 말했다. 우리는 어묵 재료로 어떤 게 좋을까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아버지는 두부, 엄마는 곤약, 나는 무, 평화로운 한때였다. 아버지는 내일 아침 세븐일레븐에 어묵을 사러 가겠다고 선언하고, 침실로 사라졌다. 39.p

 

  어느 날, TV를 보시던 아빠는 푸른바다를 보고 저기가 어디냐고 물으셨다. 화면 속에는 남해바다가 사파이어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를 아빠와의 여행을 준비했다. 아빠와 함께 하는 마지막 여행.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것을 말하지 않았다. 어느 한 때의 봄맞이 여행처럼 하동의 매화를 구경하고, 섬진강 재첩국을 맛있게 먹으며 남해로 내려가 23일을 보냈다.

이제 막 꽃봉오리가 맺히기 시작한 매화나무 아래서 엄마와 나란히 서서 웃고 계시는 아빠사진을 보면, 인간을 향해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깨닫게 된다. 처음 사랑했을 때처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웃음을 잃지 않을 것, 자연의 변화를 함께 느끼며 떠나간 이를 그리워할 수 있도록 주위 사람들에게 곁을 내어줄 것. 어쩌면 우리는 그것을 연습하기 위해 이 세상으로 여행을 떠나온 존재들이 아닐까 생각한다.

 

제작해도 아무도 볼 수 없는 작품.

그 작품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존재를 아는 데 의미가 있다.

 

가지 못해도 좋다. 보이지 않아도 좋다. 아는 것이 아름다움이다. 97.p

 

소중한 사람을 이 세상에서 잃었다고 해도 있었던것을 나는 알고 있다. 알고 있으니 괜찮다. 그것이 흰나비를 대신하는 나의 이야기였다. 이야기의 힌트는 바깥에, 사람 수만큼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 98.p

 

  비록 핸드폰 영상 통화와 메시지로 보낸 동영상뿐이었지만, 아빠는 내가 바로셀로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 있을 때 함께 계셨고, 포르투의 동루이스 다리에서 맞았던 바람 소리도 함께 들었다. 지금은 곁에서 함께 할 수 없지만, 나는 아빠가 내가 가보지 못한 세상을 여행 중이라고 믿는다. 병들고 나약한 노인이 아니라 걱정 없이 상쾌하고 가뿐한 여행자가 되어서 말이다. 먼 훗날 나도 그 여행에 동참하게 되겠지. 우리는 모두 여행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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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1
김은국 지음, 도정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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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에 드는 시집은 여러 번 반복해서 읽을 수 있지만, 소설은 여간해서 반복하여 읽기가 힘들다. 대신 기억에 남는 장면과 문장, 이야기가 주는 매력과 위로로 작품을 기억한다. 그런데 김은국의 <<순교자>>는 장편소설이지만 예외였다. 이 소설은 대학시절 갓 입학한 신입생인 나와 친구들에게 교수님이 내준 과제였다. 지금은 절판된 을유 출판사에 나온 회색 바탕의 <순교자>, 소설을 읽고 그 내용과 감상을 오픈 북 테스트로 중간고사를 보았었다. 당시 스무 살도 채 안 된 나는 시험 보기 직전까지 조바심 내며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내 답안지에는 신과 성도들을 배신한 12명의 목사들은 순교자의 영광을 얻고, 끝까지 자신의 신앙을 지킨 두 명의 목사들은 배신자로 낙인찍힌 채 살아가는 기독교 소설이다가 주 내용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게 시험을 끝내고 나오면서 무언가에 끌린 듯 다시 시간을 갖고 깊이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책보다 재미있고 짜릿했던 대학 생활에 그 호기심은 금세 잊혀 졌었다.

 

  그러다 20년도 훌쩍 넘어버린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 새롭게 디자인 되어 나온 세계문학전집 중에서 <<순교자>>를 만났다. 한국 작가가 쓴 글이 세계문학 속에 들어있다는 것과 김은국이란 작가의 이름이 아주 옛날 기억을 소환했고, 2019년 가을, 책상에 앉아 시험을 공부를 하듯 탐독한 <<순교자>>는 내가 기억하는 소설과 전혀 다른 작품이었다. 그 시절 나는 무엇을 읽었던 걸까? 세월이 흐르면서 사유의 능력은 조금씩 변하고 성숙해졌다. 그동안 꾸준한 독서가 이해와 감동의 폭을 넓혀 주기도 했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낮아진 마음과 독서에 대한 애정이 읽게 되는 작품들과 그것을 쓴 작가에게 존경심을 갖게 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기독교 소설이란 좁은 카테고리 속에 가둘 수 없었다. 기독교와 전쟁을 의지하고 있지만 오히려 인간에 의한, 인간에 대한 소설이라고 말하고 싶다. 혹은 신을 가진 인간과 이성을 의지하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까. 또한 진실을 밝히려는 자와 감추려는 자에 대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쪽으로 선택하고 해석하든 전쟁이란 고통의 역사 속에서 신음하고 고통당하나 쉽게 전멸하지 않는 인간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대학에서 인류문명사를 강의했던 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육군 대위가 되어 평양으로 파견된다. 그가 평양에 도착하여 처음 본 광경은 전쟁으로 파괴되고 부서진 장로교 평양 중앙교회였다. ‘와 대학에서 함께 근무한 박 중위의 아버지가 시무했던 교회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기독교 역사 속에서 평양은 한때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던 곳이었다. 뜨겁게 타오르는 신앙의 열기는 북쪽 사람들의 마음을 새롭게 달구었고, 평양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지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다. 그런 땅에 아이러니하게도 공산정권이 들어섰고 식민지시대와 견주어도 나을 것 없는 심한 박해를 받게 된다. 그런 평양에서 는 장 대령의 명령으로 공산군에게 순교당한 12명의 목사들에 대하여 자세히 조사한 뒤 마무리 짓는 일을 맡게 된다

 

  순교당한 12명의 목사들과 살아서 돌아온 2, 바로 신 목사한 목사이다. 그 중 순교당한 박 목사를 아버지처럼 믿고 따랐던 젊은 한 목사는 무엇 때문인지 정신적 충격을 입고 폐허가 된 교회에서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알 수 없는 기도를 하다가 사라지곤 한다. 그런 한 목사를 마주 했을 때, 이 대위는 북진 초기에 후퇴하던 공산주의자들의 만행을 목격하고, 그 현장에서 경험했던 어떤 분노를 떠올리며 힘겨워한다. 시체와 배설물 속에서 끌어낸 한 사람, 꺼져가는 목숨을 부여잡고 힘겹게 의식을 잃어가는 그에게 수없이 많은 플래시가 터지는 순간이었다.

 

그때 나는 어떤 이상하고도 강렬한 부끄러움에 휩싸였다. 나는 카메라 뒤의 무관심하고 차가운 눈초리들로부터 한 인간이 지닌 고난의 말없는 위엄을 내 온몸으로 지켜주기라도 할 듯 이, 남자의 몸 위로 상체를 구부리고 연옥과도 같은 그의 납빛 눈 속을 들여다보았다. 36.p

 

  인간이란 어떤 존재일까? 비참하게 죽어가는 같은 종족을 향해 세상 어느 생물이 카메라를 누르며 보도를 하고 기록을 남기려고 혈안이 될 수 있는지,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냉정하게 생각하게 된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 이 대위는 부끄러움을 느꼈고, 울부짖으며 카메라를 부수었다. 이 대위가 느낀 부끄러움은 애도 받지 못한 인간에 대한, 나아가 생명에 대한 존엄함이 무시당하는데서 오는 수치심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나또한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나 존엄함을 지니고 있는지, 슬픔과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부조리한 세상에 분노하기보다 그런 상황에 처하지 않기 위해 애써 외면하고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아마 그 누구도 이런 의구심 앞에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적당히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으로 세상을 움직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 우리의 모습이 신의 침묵을 가져왔는지 아니면 내려진 신의 대답을 못 듣게 한 것은 아닌지 짐작해 볼 뿐이다. 그때와 비슷한 부끄러움을 느낀 이 대위는 비틀거리다 쓰러진 한 목사를 부축하여 돌아가는 신 목사에게 질문한다.

 

목사님의 신그는 자기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이 고난을 알고 있을까요?” 37.p

 

  신을 섬기는 목사는 어떤 답을 할 수 있을까? 인간은 신이 아니기에 대답할 수가 없다. 목사 또한 신이 가르쳐주지 않는 이상 알 수가 없다. 고난은 고스란히 인간의 몫이고 그 순간 할 수 있는 일이란 고통 중에서 견디는 것뿐이니까. 어쩌면 고난 속에서 답을 찾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

 

  박해와 억압에 눌려있던 성도들은 광적인 모습으로 순교한 12명의 목사들을 추앙하고, 비겁하게 살아남은 두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간다. 무언가 비밀을 감춘 채 동료 목사들을 잃고, 정신이 나간 젊은 후배를 돌보며 간신히 버티고 있는 신 목사 또한 고난에 대해 대답해 줄 수가 없다. 그는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호소하기보다 모든 것을 떠안고 죄인이라 고백한다. 그런 신 목사에게 진실을 알려달라고 이 대위는 끈질기게 매달린다. 진실이란 과연 무엇일까? 장 대령 또한 굳이 진실을 밝힐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전쟁이 나기 전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오게 된 고 군목 또한 집요하게 진실을 캐고 다니는 이 대위에게 그 젊음과 열정이 부럽다고 말 할 뿐 그가 알고자 하는 진실에 대해서는 답해 주지 않는다.

 

…… 진실을 타협해버릴 순 없어. 진실은 숨겨둘 수 없는 거야. 어쩌면 이렇게 뼈아픈 진실이 교인들에게 찾아온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인지도 몰라.”

……

대령님, 진실은 그것이 그저 진실이기 때문에 밝혀지고 발표되어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진실은 묻어두어도 여전히 진실이야. 그걸 꼭 까발리고 떠들어야 하나?” 152~153.p

 

  진실을 감추고 죄인의 길로 들어가 기꺼이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하는 신 목사와 열 두 명의 순교자들을 빨갱이들에 대한 정신적 승리의 상징으로 둔갑시키려고 하는 장 대령이나 이 대위에게는 진실을 왜곡하는 사람들이다. 과연 진실은 밝혀지고 발표되어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그 진실의 무게를 견디고 이겨낼 수 있는지 고민해 보아야 한다. 반면에 진실은 묻어 두어도 여전히 진실이기에 까발리고 떠들어 대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면 거짓에 짓눌려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영원히 외면하며 살 수 있을지 묻고 또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이 대위는 군인이 아니라 학생들에게 인류문명사를 가르치는 교수로서 역사 속 사건들을 연구하며 인간의 고통에 대해 추상적으로 해석하고 자기 나름대로의 이론을 세워 나갔을 것이다. 열 네 명의 목사들 또한 신에 대한 믿음을 지키며 자신들의 신앙을 살아가며 그들이 밝히거나 숨겨야 할 진실은 또 다른 곳에서 맞닥뜨렸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 속에서 만약이란 것은 가정할 수 없다고 한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어있고 그것을 맞이하는 인간은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진 상황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가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고통은 잔인하지만 인간이 인간일수 있는 이유를 알게 해주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애써 감추려고 했던 진실은 언젠가 드러나게 되어 있다. 시간이 한참 지난 후일 수도 있고, 아니면 아주 우연한 기회에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순식간에 튀어 나올 수도 있다. 상황이 수없이 바뀌면서 각 진영에 유리한 쪽으로 왜곡될 수 있지만, 해석하는 데 차이가 있을 뿐이지 벌어진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평양을 점령했던 국군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상황은 또 바뀌게 된다. 국군은 서울을 버리고 피란을 갔던 것처럼 또 평양을 떠난다. 수많은 사람들은 그 뒤를 따라 고향을 버리고 살고자 남으로 내려온다. 살아온 터전을 버리고 기약할 수 없는 곳으로 떠나가는 동안 사람들은 또 많은 고난을 겪게 될 것이다. 굶주림과 추위에 떨다가 죽어갈 수 도 있을 것이고, 인간이 아닌 짐승처럼 본능만 남은 사람들에게 여자들은 강간을 당하며 공포와 수치심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 누구도 전쟁을 원하지 않았지만 한 번 전쟁 속에 내버려진 인간은 싸우고 견디며 살 수 밖에 없다. 결국 고통은 인간의 몫이지만 그것을 통해 인간은 자신들의 존재를 재확인하게 된다.

 

  어쩌면 인간이 살고 있는 곳곳이 전쟁터일지 모른다. 물리적으로 일어나는 전쟁이 아닐지라도 살고 버티기 위해 매일을 바동거리며 살아야 하는 삶에 진정한 평화가 자리하기란 쉽지 않을 테니까. 마음속에서도 수많은 갈등과 잔인함이 도사리고 싸우기를 반복한다. 그럼에도 인간의 삶이 계속되고 있는 것은 어쩌면 삶의 한순간, 반짝거리며 빛나게 해 주는 환희의 순간을 경험하기 위해서일지 모른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알 수 없으나 한번쯤 주어진 인생 속에 느끼고 나서야 떠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누군가는 그것을 절망에 대한 희망이라고 말 할 수 있고, 또 누군가는 죽음 속에서도 다시 태어나는 생명이라고 할 것이다. 아니면 사랑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확실한 것은 그것은 오로지 한계가 있고 유한한 인간에게만 주어진 것이다. 천사도 악마도 그것은 누릴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그 짜릿한 순간을 온 몸으로 체험하고 느끼기 위해 수많은 고통의 시간을 견뎌왔다고 말하고 싶다. 그것도 아니라면 우리의 삶은 너무 슬프고 무의미하다.

 

신 목사가 다시 소곤거리듯 말했다. “인간을 사랑하시오. 대위, 그들을 사랑해주시오! 용기를 갖고 십자가를 지시오. 절망과 싸우고 인간을 사랑하고 이 유한한 인간을 동정해줄 용기를 가지시오.” 283.p

 

신 목사의 당부 속에서 이성적이던 이 대위도 흔들리게 된다. 당신의 백성들이 고통당하는 것을 신은 알고 있는지 여전히 의문을 떨칠 수 없으나 고통 중에서 힘겹게 버티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는 또 다른 질문을 만들고 애정을 느낀다.

 

사람들은 앞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하고 나는 생각에 잠겼다. 사람들은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그들을 향해 들려오는 두 개의 목소리하나는 역사의 안에서, 또 하나는 역사의 건너편 저 멀리에서 각기 구원과 정의를 약속하며 각각 자기 쪽에 충성해줄 것을 요구하는 그 두 개의 목소리를 듣고 있을 것인가? 310.p

 

신은 끊임없이 인간에게 질문할 것이고, 인간은 그 속에서 방황하며 답을 찾으려고 애쓰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신을 믿지 않는 인간도 고통 속에서 무언가 찾기 위해 발버둥치고, 각자의 진실을 찾기 위해 애쓰며 살아갈 것이다. 생명은 살아가라는 명령이니까. 산다는 것은 역시 무언가를 계속 하는 것일 테니까. 살아가는 한 아무리 죽음과 썩은 배설물 같은 땅을 헤맬지라도 각자에게 주어진 반짝거리는 고유한 순간을 찾으려고 노력할 것을 믿기 때문이다. 인간은 태초에 창조되던 순간 신이 불어넣은 생령을 가진 존재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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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렌드 동백꽃 - 200g, 홀빈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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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에서 나는 꽃향기 궁금합니다. 눈속을 뚫고 올라오는 힘차면서 은은한 향기가 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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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머니 이야기 1
김은성 지음 / 애니북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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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은색 판화로 그려진 만화가 왜 이렇게 아름답고 눈물이 나는 걸까? 아마 작가의 엄마와 그 엄마의 엄마 목소리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함경도 북청 사투리에 담겨 전해졌기 때문인가 보다. 80대 엄마의 이야기를 40대 딸인 작가가 10년 걸쳐 만화로 만들어냈다니 그 자체가 위대한 역사가 된다. 이제 작가의 엄마는 90대가 되었고, 이야기를 끌어낸 작가는 50대가 되었겠지. 호호할머니가 된 엄마도 아기였고, 부끄럼 많은 소녀였던 적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자주 잊어버리곤 한다.

 

 

새집에 다시 고양이가 살기 시작한 것처럼 엄마와 나도 다시 힘을 내서 살아보기로 했다. 이제 엄마는 엄마 일, 나는 내 일을 하면 된다. 엄마는 1927년생으로 팔십 년의 삶을 되짚어보고 있고, 나는 그런 엄마를 만화로 그리기 시작했다. 엄마의 고향은 물장수로 유명한 함경남도 북청이다. 38.p

 

  불과 100여 년 전만 해도 어른들은 아이들을 아주 많이 낳았다. 우리 부모님의 형제도 양쪽 모두 8남매이다. 삼촌, 고모, 이모가 골고루 있다. 우리 엄마는 나를 포함해서 네 명의 딸을 낳았다. 장남인 아빠와 큰딸이었던 엄마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우리 집은 지방에서 올라온 친척들이 머물다 떠나갔다. 가깝고 길게는 삼촌들과 이모들, 멀고 짧게는 아빠의 사돈의 팔촌의 동생 등등 까지 말이다. 우리의 할머니들과 엄마들은 이 많은 아이들에게 어떻게 사랑을 나누어 주었을까. 어렸을 때는 우리 가족만 오붓하게 사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어느 덧 시집 간 언니들과 돌아가신 아빠를 빼고 엄마와 나, 동생, 이렇게 세 식구만 남게 되었다.

 

 

  이제 나와 우리 엄마도 작가가 이야기를 시작한 때와 같이 80대와 40대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아주 어렸을 적, 천안이 고향이었던 외갓집 식구들과 전주가 고향인 친가 쪽 삼촌들이 우리 집에서 천안 북일고와 군산상고의 고교야구를 보며 싸우던 모습이 떠올랐다. 둘째 언니 출생신고가 다르게 되어 있어 학교 들어갈 때, 아빠가 동사무소 직원들에게 얼마를 주고 칼로 긁어 고쳤다는 것과 월남전에 가 있는 셋째 외삼촌에게 또 입영통지서가 나왔다는 엄마 얘기는 항상 쌍으로 등장했다. 나이가 들어 좋은 점은 어른들의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낄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 노인 한 사람이 죽으면 도서관 하나가 사라진 것과 같다고 했지만, 도서관은 너무 작다. 하나의 세상이 사라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만화 곳곳에서 웃음과 눈물이 나지만 내 마음속에 깊은 감동을 준 곳을 꼽으라면 세 장면을 들 수 있다. 제일 먼저 대마씨를 갈아서 만든 국수를 먹고 온 가족이 두둥실 떠오른 장면이다. 부모님과 놋새, 숙자, , 강아지, 삽과 죽부인까지 모든 것이 하늘 높이 둥실 떠서 웃고 있다.

 

  

 

 

! 냉국이 있다! 촌에서는 삼을 키우잖아. 삼씨가 맺히도록 뒀다가 그걸 베어 도리깨질을 해. 그러면 삼씨가 녹두알만한 기 나오거덩. 그걸 볶아서 디딜방아로 찧어. 그걸 첼루 치면 가루가 나와. 그 삼가루를 새암물 질어온 디다 옇고, (오이)를 썰어 옇고 소금 간을 해서 냉국을 풀어. 그걸 먹으면 속이 이상하게 시원해. 삼씨라는 기 먹어서는 아이 될 물건이야. 그걸 먹고 나면 심이 나고, 속이 편안하고 화다분한 기 기분이 얼매나 좋은지 몰라. 123.p

 

 

  이 장면을 읽으며 혼자 깔깔 거리며 웃었다. ‘삼씨라는 기 먹어서는 아이 될 물건이야.’ 정확한 말이다. 가난하고 힘든 그 당시 삶에서 한 번 웃고 넘어갈 수 있는 해프닝이었지만, 먹거리가 부족한 그때, 모든 것이 음식이 되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 너무나 힘든 삶을 살아야 했던 우리 민족의 아픔을 노래한 시인 이용악의 <<그리움>>이란 시와 함께 눈이 내리고 기차가 달리는 장면이다. 그 기차가 달리게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 땅의 사람들이 혹독한 노동에 시달렸을까.

 

 

느릿느릿 밤새워 달리는/ 화물차의 검은 지붕에//

연달린 산과 산 사이/ 너를 남기고 온/ 작은 마을에도 복된 눈 내리는 가//

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 어쩌자고 잠을 깨어//

그리운 곳 차마 그리운 곳//

눈이 오는가 북쪽엔/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174.p

 

 

  눈이 내리고 기차는 달려가고 작가인 나는 글을 쓰고, 그 시대를 온 몸으로 통과해 온 엄마는 아무것도 모른 척 원래 그랬던 것처럼 자를자를 재봉틀만 돌린다. 교과서에서 배운 몇 줄의 시와 역사는 엄마의 재봉틀 박는 소리로 인해 살아난다. 참 힘든 시간을 살아온 우리의 엄마들은 그렇게 역사가 되고, 자식들을 든든히 떠받치고 있는 사랑이 된다.

 

 

죽을 뻔한 엄마가 다 낫자 너무 좋아서. 동네마다 새로 사논 밭을 엄마 손을 꼭 잡고 도던 기억이 나. 그렇기 좋아하던 엄마였는데222.p

 

  <<내 어머니 이야기>>1권의 맨 마지막 문장이다. 그리고 그림의 두 모녀는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고 끝이 난다. “엄마!!”, “엄마가 그렇게 좋니야? 결혼하면 신랑이 더 좋아. 우리 놋새도 이제 시잡갈 때가 됐구나이.” 그렇게 두 사람이 멀어지고 작가와 놋새였던 엄마가 똑같은 대사를 나눈다. 엄마는 부르는 것만으로도 참 좋고, 그리운 존재이다. 놋새는 그렇게 좋아하는 엄마를 똥개 같은 전쟁 때문에 하루 아침에 잃게 된다. 똥개 같은 전쟁!!

 

 

  1권만 읽었는데 2~4권에서 놋새가 겪어야만 할 아픔과 고통이 저절로 떠올랐다. 살아가다 보면 똥개 같은 일들이 너무 많다. 그래도 엄마는 그 똥개 같은 일들에 지지 않고 살아간다. 그리움은 가슴에 묻고 계속 살아간다. “나 같은 사람을 그린 것도 만화가 되냐?”고 말한 어머니들의 삶은 계속 이어지고, 이 땅의 역사가 되고, 사랑이 되어 그게 뭔지도 모른 나 같은 사람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정말 아름답고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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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이야기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9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고봉만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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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무엇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충성할 수 있을까? 자신을 알아주는 한 사람에게 전 생애를 걸고 따르는가 하면 종교적 신념에 따라 세상의 부귀영화를 내려놓고 신의 발자취를 따르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예술, 꿈과 야망에 일생을 걸기도 한다. 주인공 펠리시테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며 사랑한 존재는 오뱅 부인과 그의 가족, 그리고 앵무새 룰루였다. 그들은 펠리시테의 전부였다. 비록 적은 돈의 보수를 받고 하녀의 삶을 살았을지라도 그녀의 헌신은 아름답고 고결하다.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분과 동체이신 귀한 분이시다. 그런 신의 아들이 인간이 되어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와 사람들의 발을 씻겨 주었고, 인간의 몸과 영혼을 구원했으나 외면당하고 배척당했다. 인간들은 신의 아들을 조롱하고 죽였다. 그런 가운데 순전한 영혼의 목소리처럼 펠리시테의 질문이 전해진다.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마구간 짚더미 위에서 태어나고자 하신 그 착한 분을, 사람들은 왜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을까? 26.p

 

 

  펠리시테는 폴이 떠나자 그리워했지만, 비르지니가 성당에 가서 교리 교육을 받는 동안 함께 동행 하며 시중을 든다. 그리고 자신도 비르지니처럼 교리를 외우고 신앙고백을 영적인 환희까지 느낀다. 그런 경험이 그녀를 기쁘게 만들었다. 인간 세상에서는 몰락한 귀족집의 가난한 하녀이지만 신 앞에서는 귀족도 그녀도 별반 다르지 않은 귀한 존재이다. 예수는 귀족인 비르지니뿐만 아니라 가난하고 천한 펠리시테를 위해서도 인간이 되어 죽음을 선택했던 것이다. 신 앞에서는 두 사람 모두 소중한 존재였다.

 

 

  그런 펠리시테에게 처음으로 자신의 소유라 할 수 있는 앵무새가 생긴다. 그녀는 앵무새에게 룰루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룰루는 자신을 버리고 미국으로 떠나버린 라르소니에르 부인과 오벵 부인에게는 귀찮고 버려진 존재이지만, 펠리시테에게 만큼은 가장 소중하고 귀한 존재이다.

 

 

고독한 그녀에게 룰루는 자식이자 애인이나 마찬가지였다. 48.p

 

 

  살아가는 동안 외롭고 힘들었을 그녀에게 룰루는 위로와 힘이 되어준 존재였다. 그녀의 사랑은 인간을 지나 앵무새에게까지 뻗어 간다. 그리고 사라진 룰루를 찾기 위해 자신의 몸이 병드는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중에 룰루가 병에 들어 죽자 박제를 만들어 매일 아침 애도를 넘어 숭배하기까지 이르는데 그만큼 룰루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깊고 뜨거웠다. 다른 사람들 눈에 볼품없고 낡아버린 박제된 룰루였지만, 그녀에게는 한없이 소중하고 아름다운 존재인 것이다. 온통 벌레가 슬고, 한쪽 날개가 부러져 있는 초라한 룰루의 모습과 그녀의 모습은 닮아있다. 그러나 룰루는 임시 제단위에 세워졌고, 펠리시테는 그녀의 세상에서 가장 성스럽고 아름다운 순간에 눈을 감는다.

 

 

푸른빛 향연이 펠리시테의 방까지 올라왔다. 그녀는 코를 벌름거리며 신비로운 쾌락에 휩싸인 채 향내음을 맡은 후 눈을 감았다. 그녀의 입술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마치 샘이 말라 없어져가듯. 메아리가 사라지듯. 심장박동이 차츰차츰 약해지다 아주 잦아들었다. 마지막 숨을 내쉴 때, 그녀는 반쯤 열린 하늘에서 그녀의 머리 위를 활공하는 거대한 앵무새 한 마리를 본 것 같았다. 60.p

 

 

  고통 받고 힘겨웠던 삶을 위로하듯 그녀의 마지막은 평안하고 아름다웠다. 하녀로서의 삶은 가난과 고통, 눈물로 이루어진 듯 보이나 마지막 그녀의 모습은 성녀로 느껴졌다. 다만 이것이 귀족이었던 플로베르의 하층민들을 향한 위로였는지 혹은 순종과 교화로서 작용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나는 펠리시테의 모습에서 거짓과 꾸밈이 없는 순수한 인간의 마음을 볼 수 있었다. 작고 초라한 인간이기에 누구라도 사랑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연약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였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펠리시테가 되고, 룰루가 되어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신이 인간에게 불어 넣어준 순박한 마음을 가지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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