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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한 차별주의자 (30만부 기념 거울 에디션)
김지혜 지음 / 창비 / 2024년 12월
평점 :
‘선량하다’의 ‘선량’은 착하고 어진 성품이란 뜻이다. 그에 비해 ‘차별’은 둘 이상의 대상을 각각 등급이나 수준 따위의 차이를 두어서 구별하고 나눈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이 책의 제목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어질고 착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등급이나 수준에 따라 나누고 구별한다는 것인데 이것이 성립될 수 있는 말일까? 그러나 역설적으로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 제목만큼 우리 사회의 민낯을 보여주는 말은 없을 것이다.
나에게도 이러한 경험이 있다. 20대때 집 근처 복지관에서 꽃꽂이 강습을 받았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꽃을 손질하고 아름답게 꾸미다 보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순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날은 졸업 시즌이라 장미꽃 스무 송이를 빨간 종이 상자에 담아 포장하는 패키지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때 수업 내내 창밖에서 우리가 꽃을 다듬고 포장하는 것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수업이 끝나고 바쁜 일이 있어서 제일 먼저 밖으로 나왔는데 우리 수업을 지켜보던 그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휠체어를 탄 젊은 남성이었는데 나를 보자 다가오더니 꽃다발 상자를 볼 수 있냐고 물었다. 문제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나의 반응이었다. 나는 그 순간 “꺄악!” 소리를 지르며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 나는 왜 놀라서 소리를 질렀을까? 지금 같았으면 오히려 그에게 꽃이 담긴 상자를 기꺼운 마음으로 내어줄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아마 그 사람의 눈빛보다 그가 타고 있는 커다란 휠체어와 성별이 내게 먼저 다가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 나의 행동에 대해 지금까지 후회하고 있다. 분명히 그렇게 소리를 지를 마음은 아니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차별을 받으면 받았지, 내가 누군가나 어떤 집단을 차별하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차별은 나쁜 것이고, 그것은 힘이 있고, 권력을 가진 집단이나 사람들이 하는 행동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현재 편안하게 누리고 있는 권리에 대하여 특권이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너무나 당연해서 누구나 누리고 있으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게으르거나 무지하다고 함부로 판단했다.
“장애인이 버스를 타면 시간이 더 걸리니까 돈을 더 많이 내야 하는 것 아닐까요? 26.p
라고 말한 학생과 생각이 조금 다르지만, 시간이 촉박할 때 마침 휠체어를 탄 사람이 버스를 탔던 적이 있었는데 시간을 끄는 상황에 짜증이 났던 일이 있었다. 나처럼 비장애인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게 된 것 이면에는 그들에게 유리한 속도를 외면하고 효율성을 기준으로 삼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혹 누군가는 ‘차별’하는 것이 왜 나쁘냐고 반감을 나타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민주주의 사회와 그 제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적절한 질문일 수 없다. 우리는 과거 귀족과 평민, 노비에 따른 신분 차별과 성별, 피부색 등으로 평가하는 야만적인 사회의 제도와 관념을 깨고, 현재 민주주의 사회로 발전해 왔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받았던 혜택과 자유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평소에 책 읽기를 매우 좋아하는 데 집 가까이 걸어서 갈 수 있는 도서관이 많이 있고, 상호대차 서비스까지 받을 수 있어 편하게 독서 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편리한 서비스가 대한민국 전 지역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울과 경기도만 해도 그 차이를 확연히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전체적으로 범주화하고, 단순화시키면 한 지역이나 도시에 몰려있는 서비스가 숫자상으로는 전체가 특권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판단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좀 더 객관적이고 면밀하게 이 사회를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차별은 어떻게 시작되는 것일까? 인간은 예전부터 기준을 정해놓고 타인들을 구분하거나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 신분에 따라 옷의 색깔과 길이, 장식의 제약을 두고 어기는 사람에게는 큰 불이익을 주었으며, 글을 아는 사람들만이 수많은 정보와 기회를 선점했다. 그것이 점점 쌓이다 보면 나와 네가 다르다는 인식이 저절로 싹틀 수밖에 없다. 과거 남아공에서는 굳이 백인과 흑인 아이가 같이 노는 것을 강제로 억누르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 흑인 구역에는 하수도 시설과 화장실을 만들어주지 않았다. 흑인 구역 아이들은 지저분하고 역한 냄새가 났을 것이다. 백인 아이들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알아서 그들과 어울리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도 이런 차별적인 행동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아파트 단지 안에서도 임대와 일반아파트를 구분하고, 다른 곳에 사는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빈부와 성적으로 나누는 차별은 더욱 견고해지고, 그대로 발현되고 있는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내 안에도 차별적인 시선과 가치관이 나도 모르는 채 내재화 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생각과 행동으로 수없이 차별적 행동을 했었던 것을 인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상황이 역전되고 자리가 바뀌게 되면 그때 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배려와 당연히 행해져야 할 일들이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된다. 나는 산에서 넘어져 발목에 골절 사고를 당하여 수술한 경험이 있다. 수술 후 다시 예전 상태로 돌아오기까지 6개월 정도 걸렸는데 목발을 하고 밖에 나갔다가 작은 턱도 넘지 못하여 힘들어했던 일이 생생하다. 우리 사회가 소수자와 약자에 대하여 배려하지 않았다는 것을 몸을 느낄 수 있었다.
‘화장실은 그 사회의 평등 수준을 가늠하게 하는 꽤 훌륭한 척도다.’ 172.p
나는 평소에 우리나라 공공화장실의 시설과 청결 상태를 높이 평가했었다. 이것 또한 다수가 사용하는 화장실에 국한된 평가라는 것을 깨닫고 나의 시선의 한계를 느꼈다. 동성애자나 게이, 레즈비언 등을 나는 한 명의 존재자로 바라보았는가. 아마 생각에서 아예 배제하고 남자와 여자, 어린아이와 성인으로만 구분하였던 것같다. 그들도 인간으로서 존중받고 권리를 누릴 수 있는 높은 인식이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사람이 화장실을 이용하는 일에 있어서 불편과 수치심을 느낀다면 그것은 개조하고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 그것이 인간에 대한 예의이자 당연한 절차이다. 우리는 경제적으로 높은 수준에 이르렀으나 나를 포함하여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 아니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에 대하여 깊이 이해하며, 객관적 시선을 유지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의 가치관과 타인을 대하는 태도, 사회를 향했던 나의 시선 등을 다시 되돌아볼 수 있었다. 저자의 연구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차별적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것 같아 놀랐다.
‘차별에 민감하거나 둔감할 수 있는 자신의 위치를 인식하며, 너무나도 익숙한 어떤 발연, 행동, 제도가 차별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가? 내가 보지 못한 차별을 누군가가 지적했을 때 방어하고 부인하기보다 겸허한 마음으로 경청하고 성찰할 수 있는가?’ 189.p
다양하게 제시된 사례와 질문 앞에서 나는 잠시 책 읽기를 멈추고 고민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차별금지법에 대해서도 차분하게 사유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나 또한 대한민국의 기독교인으로서 차별금지법에 대하여 이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무례하게 굴었던 일부 보수 기독교계로 인해 상처받은 소수자들에게 사과하고 싶었다. 또 짧은 뉴스 기사나 SNS를 통해 단편적으로 접했던 사회 문제를 긴 호흡으로 읽고 들여다보며 다른 사람들과 의견을 나누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기도 했다.
앞으로 내가 지녀야 할 태도는 어떤 것인가? 그리고 우리 사회에 만연한 차별에 대하여 나는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 할 것인지 여전히 과제와 고민이 가득하다. 앞으로 모든 분야에서 사회적 담론과 상황에 따른 깊은 사유와 공부, 연대가 필요할 것이다. 물론 고민하고 목소리를 높인다고 해도 한국 사회가 빠르게 변화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함께 고민하고 목소리를 내며 부딪치면서 해법을 찾아 나갈 것이라 믿는다. 우리는 언제나 차별하는 자에서 차별당하는 자로 자리를 바꾸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