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괜찮은 눈이 온다 - 나의 살던 골목에는
한지혜 지음 / 교유서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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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한지혜의 <<참 괜찮은 눈이 온다 나의 살던 골목에는>>

 

내가 뛰어 놀았던 골목

 

  <<참 괜찮은 눈이 온다 나의 살던 골목에는>>을 읽었을 때 내 마음속에는 참 따뜻한 단어들이 떠올랐다. 골목, , 엄마, 아빠, 떡볶이, 놀이터, 나무, 소풍, 촛불, 광장 뭐 그런 단어들이었다. 작가의 산문이 나의 어린 시절을 소환하고 그리운 얼굴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중 제일 마음에 남는 것은 골목에서 놀던 날과 아빠였다. 어렸을 때 우리 동네 골목은 모든 소식이 모이는 곳이자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차가 다닐 수 있는 큰길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 크고 작은 골목들이 많았다. 그 골목 곳곳에는 집이 있었고, 적어도 두 가구 이상 모여 살았으며, 그런 집에는 어김없이 5~10명 정도의 아이들이 있었다. 주인집이나 세를 사는 사람들이나 각 가정의 대소사에 기뻐하고 안타까워 해주는 이웃이었다. 어느 집이나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부모님께 혼나는 소리가 담을 넘었다. 같은 골목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들었으며, 상대방에게 곤란한 내용들은 모른 척 티를 내지 않았다.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어렸을 때부터 암묵적인 배려를 배웠다.

 

  길 건너 내 친구(아들만 넷이던 집의 셋째였다.) 집 앞에는 골목이라고 말하기엔 쑥스럽지만 10여명 정도의 아이들이 모여서 고무줄 하기에 적당한 공간이 있었다. 나는 이곳에서 엄청나게 뛰어 놀았다. 우리가 주로 즐겼던 놀이는 당연 고무줄 놀이였다. 세 명만 모여도 개인전으로 고무줄놀이를 했다. 인원이 많을 때는 스무 명이 넘는 아이들이 편을 나누어 검은 고무줄을 사이에 두고 목청껏 노래를 부르며 뛰고 또 뛰었다. 그 노래 속 가사에는 이순신도 있고, 통일도 있고, 개나리와 엄마도 있었다. 내 친구는 고무줄을 끊지 않았으나 다른 곳에 가서 놀라고 참견을 했고, 우리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따로 운동을 하지 않았지만 매일 뛰어 놀았던 덕분에 우리들은 건강했고, 무럭무럭 자랐다. 우리 동네 아이들은 학원에 다닌다 해도 고작 피아노나 주산 학원 정도였다. 공부하는 시간보다 노는 시간이 더 많이 차지했다. 만약 지금 우리 집 앞에서 동네 아이들이 모여 시끄럽게 뛰어논다면 나는 참아낼 수 있을까. 솔직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나는 눈 한 번 휘두르면 끝이 보이는 넓은 길에서 오히려 막막하다. 꿈마다 내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너무 좁아 담벼락이 어깨를 스치는 바로 그 길이다. 걸을 때마다 길 위에서 길이 그리워 나는 더러 눈물이 나기도 한다. (42.p)

 

 

  그러고 보니 경제적으로 부족하고 불편한 생활을 하였지만 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시간이 내 마음속에 숨어 있다가 가끔 오후 3~4시쯤 태양이 반짝 빛을 발하며 눈앞의 모든 것들을 황금빛으로 비출 때, 진한 그리움을 동반하며 떠오른다. 특별한 대상이나 시절에 대한 것은 아니다. 어떤 날은 서울 사는 사촌오빠들과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외갓집에 갔던 일을 생각나게 했고, 방과 후 집에 먼저 가지 않고 친구네 놀러 갔다가 엄마한테 혼날까봐 걱정하며 돌아오는 날이기도 했다. 가끔 책상에 앉아 있다가 문득 고개를 들고 창밖을 보며 멀리 어디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날 같기도 하다. 그 햇살의 기운과 빛은 여전하다. 내가 뛰어 놀았던 골목은 사라졌다. 작가와 마찬가지로 내가 놀던 곳도 재개발이 되었고, 함께 놀던 친구들도 다른 곳으로 떠나갔다.

 

 

아빠, 사랑하는 우리 아빠

 

 5월에 우리 아빠가 돌아가셨다. 폐렴 때문에 병원에 입원했다가 담낭에 이상 소견이 있어 정밀검사를 받았을 때, 담낭암 말기라는 말을 들었다. 우리 가족은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친할머니가 100세를 앞두고 살아 계셨으며,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도 모두 90대 후반의 나이에 돌아가셨다. 젊은 의사는 만약 우리 아빠가 자기 할아버지라면 항암치료를 하지 말고 드시고 싶은 것 마음껏 드시며, 가족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시라고 말할 것이라고 했다.

 

  아빠는 두 번의 항암 치료를 받으시고 그만 두셨다. 그리고 엄마와 우리 네 자매, 때때로 조카들까지 데리고 맛집을 찾아 다녔다. TV에서 60세를 맞이한 여자 연예인들이 자전거를 타고 남해 여행을 하는 것을 보고 처음으로 우리들에게 저곳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동안 배낭여행이며, 산티아고 순례길까지 모두 걸었던 나는 아빠와 제대로 여행 한 번 가지 못한 것이 죄송했다. 시간은 흘러갔고, 음식을 못 드시게 된 아빠는 한 달 동안 호스피스 병실에 입원해 계시다가 엄마와 봉사하시는 분들이 깨끗하게 목욕을 시킨 다음날 돌아가셨다.

 

…… 내일 당장 어떤 상황이 생긴다 하더라도 오늘 하루의 자존과 존엄과 일상을 잃지 말아야 했다. 환자도 그렇지만, 그 옆을 지키는 가족은 더더욱 그러해야 했다. 웃고 울고, 휴가를 즐기고, 일상을 살아야 했다. 슬픔과 고통은 어떠해야 한다고 당사자도 아닌 타인이 만들어놓은 매뉴얼 따위는 신경쓰지 말아야 했다. (129.p)

 

 

  결혼보다 너 하고 싶은 일 실컷 하며 살라고 말하던, 요즘 젊은이들보다 더 세련되고 앞서갔던 아빠였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 우리는 물론이고 손자들과 카톡으로 대화하려고 밤새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연습하고, 스타벅스가 뭐하는 곳인지 궁금해 들어갔다가 주문하다말고 내게 전화를 걸었던 아빠였다. 딸만 넷을 키우면서 보수적인 생각을 버리고 보다 진보적이고 여자들 편이었던 멋진 아빠. 당신에게 시간이 6개월 밖에 남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두려웠을까. 그러면서도 내게 1년 전부터 약속해 두었던 해외여행을 다녀오라고 말하고, 할머니의 백수 잔치가 끝날 때 까지 견디고 웃음을 잃지 않았던 아빠가 책을 읽는 동안 내내 그리웠다. 오늘 하루의 자존과 존엄과 일상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아빠는 우리 가족을 끝까지 지켜주었고, 그리움만 남기고 떠나셨다.

 

  내가 뛰어놀았던 골목도, 산 같던 아빠도 이젠 없다. 그러나 앞으로 나는 예전보다 조금은 더 열심히 살아갈 것을 안다. 조금은 착한 일도 하고, 불의한 일에 목소리도 내며,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그래도 더 살만하다고 말하며 살아갈 것이다. 물론 문득 보고 싶은 얼굴 때문에 눈물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럴 수 있는 힘은 내가 믿는 신에 대한 믿음과 그리운 시간들, 또 그 시간을 만들어준 사람들, 그것을 간직하고 있는 내 마음 때문이리라. 내 삶에도 참 괜찮은 눈이 왔다가 사라졌다. 그렇지만 또 내릴 것을 안다

 

 

아프고 괴롭고 불안하고 막막한가. 그렇다면 그것은 당신의 삶이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다. 도망치지 마라. 원래 희망은 아프다. 그래서 꽃이 피는 것이다. (28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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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 100호 - 2019.가을
문학동네 편집부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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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진은 어렵게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영화감독으로 살아간다. 그녀가 놓지 못하고 있는 감독으로서 더 이상 보여줄 수 있는 그녀만의 이야기가 아직은 없다. 아니 팔 수 있는 것이 없다.

 

미진은 남자 프로그래머의 얼굴을 뜯어봤다. 그녀는 앞에 서 있는 이 사람의 표정을 기억하고 싶었다. …… 이제 더 팔 게 없겠네요.” …… 뭘 팔아요? 미진은 되묻지 못했다. 대신 그를 따라 희미하게 웃었다. 85.p

 

그녀가 계속 팔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미진은 자신이 선택한 삶의 경계선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지만 타협할 수 없기에 힘들게 버티고 있다. 그런 미진의 일상을 따라 그녀가 들려주는 지난 시간을 들여다본다. 얼마나 많이 좌절하고 우울했을까. 무엇이 그녀의 발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을까. 예수는 사람이 빵으로만 살 수 없다고 했지만 역설적으로 빵이 인간의 삶에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말해 주었다.

 

미진은 돈을 벌지 않았다. 그녀는 당분간 아무것도 팔지 않기로 했다. 살아가는 데에 그리 큰돈이 들지 않았다. 살아졌다. 86.p

 

실은 영화를 제쳐두고, 어디에서든 일을 한다면 어머니에게 빌붙지 않고 최소한의 사람 노릇을 할 수 있을 터였다. 물론 그것도 뭐든 팔 게 있을 때나 가능할 테지만…… 87.p

 

가난한 예술가는 사람 노릇을 할 수 없다는 말처럼 들렸다. 그러나 그것은 팔아야 할 것을 더 이상 찾지 못 했을 때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예술가는 가난할 수 있어도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무언가를 찾아내야 하고, 찾아내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야 예술가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자기 자신과 싸워 강해질 수 있어야 한다. 지난 시간 동안 자신도 모르게 쌓아 놓았던 위선과 거짓을 벗어내도록 애쓰지 않으면 안 된다. 진실한 자신과 마주할 수 있을 때까지 싸우고 견디고 이겨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힘들지라도.

 

젊지도 늙지도 않은, 그렇다고 아마츄어도 번듯하게 내세울 수 있는 필모그래피를 쌓은 프로도 아닌 애매한 중간 어디쯤에 서있는 예술가에게 타인과 현실은 냉혹하다. 그 매서운 바람을 맞으며 끝까지 견뎌내야 하는 것은 오로지 그들의 몫이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상처받을 것이다. 우리가 사랑했던 아름다움으로부터…… 90.p

 

그래서인지 이 두 개의 문장이 유독 가슴이 와 닿고 아프게 한다. 사람은 각자 타인과 다른 자신만의 고유한 존재이며, 다양한 재능을 갖고 있다. 저마다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나게 만드는 분야도 다르다. 마음을 들뜨게 했던 것을 쫓아가다가 어느 순간 다른 이들과 너무 멀리 왔고,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아버렸을 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남아있을까. 그때 한 번도 상처 받지 않은 것처럼 계속 가라고 말하고 싶은데 선뜻 입에서 그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렇지만 상처받을지라도 사랑했던 아름다움이 존재했다는 것만으로 위로가 될 수 없을까. 태어나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하고, 갖지도 못한 사람들이 더욱 많을 테니까. 그것으로 퉁 치면 안 되는 것일까.

 

나는 아마 내 멋대로 살다가 죽겠지.”

포기하는 기분으로 아무 말이나 중얼거렸는데, 이상하게 힘이 났다.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이 지겨운 것들 중 소중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105.p

 

몽골을 여행했을 때, 태양과 가까운 고산지대라 식물이 양지가 아닌 음지에서 자라는 것을 보았다. 뜨거운 태양이 그것들을 태우기 때문이었다. 의심하지 않았던 상식이 한순간에 깨졌다. 고단하고 지친 일상 속에서 많은 예술가들에게 위로를 받으며 살아왔다. 음지처럼 차갑고 어두운 곳에서도 생명은 힘이 있어 자라게 되어 있다. 그들이 서 있는 자리가 그런 곳일지라도 그들 멋대로 자기답게 살다가 죽어가길 간절히 바란다. 예술가의 삶만큼 모든 이들의 삶도 고단하고 힘이 들긴 마찬가지이니까. 그 말이 힘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문장과 가난한 예술가의 회피할 수 없는 현실, 그럼에도 꿋꿋하게 아무것도 팔지 않고, 아무에게도 밥을 차려주지 않는 인생을 살아 갈 것이라고 말하는 캐릭터를 품은 작품을 만날 수 있어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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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7
J.D. 샐린저 지음, 공경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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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J.D.Salinger

문학작품 속 미워할 수 없는 찌질이 TOP5중 한 사람,
홀든 콜필드

그의 말투와 행동을 따라 가다보면 짜증이 나지만, 무게 잡는 인간들을 비웃어 줄 땐 짜릿하기도 하다.

우울하다고 끊임없이 외치고 있는 그가 안쓰럽고 불안하지만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는 콜빌드를 응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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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 - 권여선 장편소설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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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이 찾아왔을 때 그 사건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끊임없이 비극일 수 밖에 없다는 작가의 말에 공감한다. ‘납득되지 않은 경험은 계속되는 고통을 만들어낸다.‘ 지금도 납득되지 않은 아픔을 안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에 작은 위로와 힘이라도 보태고 싶었던 작가의 깊은 사랑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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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늙은 여자 - 알래스카 인디언이 들려주는 생존에 대한 이야기
벨마 월리스 지음, 짐 그랜트 그림, 김남주 옮김 / 이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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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과 서문을 읽으며 두 늙은 여자가 어떤 고난을 당하였고,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였는지 궁금했다. 고난 극복의 열쇠를 자기 부족에게만 전수해 준 것 같아 호기심이 생겼고, 다 읽고 나면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책을 다 읽고 나의 생각은 바뀌었다. 다른 사람의 고통과 아픔을 통해 고작 지혜나 배우겠다는 자세는 잘못된 것이었다. 부족과 가족의 배신을 견디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싸워야 했던 처절한 몸부림이 삶에 경외감을 느끼게 했다. 무엇보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라는 멋있는 말을 스스로 증명해 준 두 여인이 고마웠다. 그리고 포큐파인 강과 유콘 강이 합쳐지는 둑 위 텐트 속에서 어머니의 말을 듣던 딸의 고백처럼 나도 그렇게 강인하게 늙고 싶다고 생각했다.

 

  <<두 늙은 여자>>는 알래스카 인디언이 들려주는 생존에 대한 이야기이다. 알래스카라는 말만 들어도 몸이 오그라들고 강추위와 매서운 바람, 하얀 설원이 떠오른다.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디언들은 살기 위해 이동하고, 사냥을 한다. 생명을 가진 모든 생명체는 살기 위해 자신보다 약한 존재를 죽이고, 먹을 수밖에 없다. 특히 추운 겨울은 식량도 부족하고 기후와 상황이 더욱 열악해져 건강한 사람들도 쓰러지기 쉽다. 부족을 책임지고 이끌어야 할 족장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자기 부족 사람들을 굶기지 않고 겨울을 나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가장 힘없고, 나약하며 돌봄을 필요로 하는 두 늙은 여자-칙디야크와 사-를 버리고 떠나는 것이다.

 

- 그러니까 사람들도 생존을 위해 이따금 짐승의 방식을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젊고 힘센 늑대들이 늙어서 힘이 없어진 옛 우두머리를 달가워하지 않는 것처럼. 19.p

 

  혹독한 고통과 시련 앞에 사람들은 다양한 선택을 한다. 선택한 것에 대해 무엇이 옳고 그르다고 평가할 수 없다. 각자의 입장에서는 선택한 것이 가장 최선의 방법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부족의 젊고 힘 있는 다수의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잉여라고 생각한 두 늙은 여자를 버렸고, 버려진 두 사람은 자신들의 앞날을 놓고 또 다른 선택을 해야만 했다.

 

-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야 할 때는 아직 멀었어. 하지만 그저 여기 앉아서 기다리기만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죽고 말 거야. 사람들에게 우리의 무력함을 증명하게 될 거라고. 28.p

 

- 그래, 사람들은 우리에게 죽음을 선고했어! 그들은 우리가 너무 늙어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여기지. 우리 역시 지난날 열심히 일했고, 살 권리가 있다는 것을 그들은 잊어 버렸어! 그래서 지금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거야. 친구야. 어차피 죽을 거라면 뭔가 해보고 죽자고.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게 아니라 말이야. 29.p

 

  두 사람은 살기를 선택했다. 가만히 앉아 죽는 것은 그들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뭔가 해보고 죽자는 여인의 말에 눈물이 났다. 어쩌면 그들이 무언가를 한다고 해도 살아남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그래도 살기 원한다면 사는 쪽을 선택하고 살기 위한 방법들을 생각해야 한다. 그동안 살아온 경험을 떠올리고, 현재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해야 한다.

 

  다른 이의 경험을 듣고 그들의 삶의 의지에 대해 박수를 보내는 것은 쉽다. 그러나 그 고난을 당한 주체가 내가 된다면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순간순간 떠오르는 배신감과 추위, 배고픔, 두려움과 외로움이란 괴물이 달라붙어 하루하루 힘든 싸움을 해야 하며 버텨내야 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그 고통은 누구의 책임일까.

 

  버려진 사람들도, 무거운 침묵 속에 그들을 버리고 떠나야만 했던 부족 사람들도 모두 행복하지 못했다. 아니 더 깊은 절망과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져 방황하고 주저앉아 죽음을 생각해야만 했다. 모두 다시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잘못 선택했던 순간으로 돌아가 잘못된 것을 바로 잡고 다시 시작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며, 또 다른 선택을 해야만 하는 순간이다. 더욱 신중해야 하고 그만큼 선택한 것에 대한 강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 이 책에서 벨마 윌리스는 말한다. 삶에서 자신이 진정으로 해야 할 바를 성취하는 데에는 사회에서 평가하는 능력이나 나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능력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이가 왜 안 중요하겠는가. 마흔 개의 여름이 어떻게 여든 개의 여름을 이기겠는가. 마흔 살에게 마흔한 번 째 봄은 미지의 시간이지만 여든 살에게는 무엇으로도 쓸 수 있는 단단한 기억인 것을.

시간이란 길이의 문제가 아니라 깊이의 문제이고, 그림을 그림이게 하는 것 역시 원근이 아니라 깊이(메를로 퐁티)라는 것을 칙디야크와 사가 그들이 본 여든 한 개의 여름과 일흔 여섯 개의 가을로 확인해준다. - 171.p

 

  저자의 말이 무엇보다 마음에 와 닿는 요즘이다. 지난 역사를 보며 묻고 배울 수 있게 되기를. 1919411일 임시정부수립을 기준으로 본다고 해도 백 개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오천 여개의 사계절을 어떻게 이길 수 있겠는가. 겸손한 마음으로 5천여 번의 사계절에게 묻고 또 물을 수밖에 없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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