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제일 어렵다 - 남에겐 친절하고 나에겐 불친절한 여자들을 위한 심리학
우르술라 누버 지음, 손희주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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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 중학교 교사인 친구가 내게 반 학생 때문에 너무 힘들어서 우울증에 걸린 것 같다고 말했었다. 우울증이란 말을 들었을 때 나도 모르게 가슴이 서늘해지고 덜컥 겁이 났다. 그러나 친구는 웃으면서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앓고 있는 병인만큼 현대인답게 병원에 가서 상담도 받고 필요하면 약도 먹을 것이니 걱정 말라고 말했다. 친구의 마지막 말에 웃음이 나왔다. 현대인답게라니. 우리는 한 달에 한 번 시간을 내서 자주 걸었던 남산 길 산책을 시작하자고 약속했다. 친구의 말을 조금 과장하면 현대인들은 감기를 앓듯 우울증에 걸린다. 그것은 건강한 사람이라면 쉽게 털어버리고 다시 일어나 평소 생활대로 살아갈 수 있지만, 면역력이 약하거나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 제때 약을 먹지 못하거나 치료를 받지 않으면 더 큰 병으로 번질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저자가 남자(물론 남자들의 우울증도 중요하다)보다 여자들의 우울증에 관심을 갖고 초점을 맞춘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전시대에 비해 수많은 여성들이 사회에 진출하게 되면서 그들이 짊어져야 하는 사회적 역할은 더욱 늘어나게 되었다. 가정과 출산, 육아를 담당했던 부모세대의 여성들과 달리 이제는 직장인으로서의 역할과 동료, 선배, 후배 그 밖에 다양한 사람들과의 관계까지도 짊어지게 된 것이다. 남성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행동하는 일들이 여성들에게는 고민과 갈등 이후에 선택하고 감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 많은 에너지가 소비된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여성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은 크게 진보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구시대적 여성성을 당연시하거나 여성혐오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하고, 성차별과 편견을 내세워 실력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그런 가운데 다소 차이는 있겠지만, 여성들 스스로 가면을 쓰고, 자신을 지키고 살아남기 위해 무척 애를 쓰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바라고 원하는 것을 충족시키는 데만 몰두하지, 실제로 이것을 할 수 있는 시간과 에너지, 흥미가 있는지는 고려하지 않는다. 근심과 피로 그리고 종종 몰려오는 좌절감은, 능력과 완벽함이라는 가면 뒤에 숨긴 채 말이다.

p.28

 

  그러다 보니 아무도 보지 않는 밤에 가면을 벗고, 잃어버린 모습과 힘들었던 관계,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며 우는 일들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불행하게도 많은 여성들이 이것을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저자는 바로 그런 여성들에게 위로와 힘이 되는 말을 건넨다. 울지만 말고 일어나 앉아 자신과의 대화를 시작하라고 말이다. 내 우울의 정체를 파악하고, 몸을 움직여 변신할 준비를 하며, 주위에 도움도 청하라고. 또한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친절하라고 가르쳐준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여성을 너무 한쪽으로 몰아가는 것 같아 저자의 의견에 공감하기 어려웠다. 소수의 사례를 일반화 시키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부정적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소수의 여성이 겪는 어려움은 언젠가 전체 여성의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회는 고리처럼 연결되어 있는 집합체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관계망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개인에게 벌어지는 일들은 곧 공동체의 문제로 번지게 되어 있다. 여성들이 행복하지 못한 사회에서는 남성들도 행복하게 살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들이 먼저 스스로 행복해지고 가면을 벗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주위를 둘러보면 가면을 벗고 싶은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말자. 우울 안에 갇힌 내가 벗어나기 위해 손을 내밀면 이야기를 들어주고 같이 걸어줄 수 있는 친구들이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하자. 그리고 그 첫 번째 친구가 바로 자기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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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나의 느긋한 작가생활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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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다 미리씨에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

<평범한 나의 느긋한 작가생활>

 

  안녕하세요, 마스다 미리씨.

  저는 이제부터 당신에게 세 통의 편지를 보내게 될 것입니다. 지금 쓰는 편지는 <평범한 나의 느긋한 작가생활>이란 책을 읽고 도서관에서 쓰고 있답니다. 아마 두 번째 편지는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를 읽고 제 방 책상에 앉아 쓰게 될 것 같고요, 세 번째 편지는 <주말엔 숲으로>를 읽고 드디어 3년 만에 제주도에 둥지를 튼 친구 집에서 쓰게 될 것 같습니다.

  저는 당신을 크게 성공한 작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평범한 나의 느긋한 작가생활>속에는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일상의 삶을 쫓아가는 평범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로 동시대를 살아가며 같이 나이 들어갈 수 있는 좋은 작가를 만났다는 것이 반갑고 좋았습니다. 당신은 대부분의 일에 크게 흥미를 갖지 못하지만 일단 선택하고 도전합니다. 그리고 곧 흥미를 잃거나 귀찮아합니다. 그래도 가봅니다. 그곳에 당신이 찾고 있었던 무언가가 있을 지도 모르니까요. 저도 그런 적이 많이 있습니다. 호기심과 기대감으로 무언가를 선택하지만, 막상 그 일을 시작하거나 특정 장소에 가기 전에 귀찮아지거나 괜히 선택한 건 아닌가 하는 후회를 할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616일부터 714일까지 5주 동안 남산도서관에서 열리는 남산 목요 인문학 세계 문학 고전읽기에 수강 신청을 한 일입니다. 매주 목요일,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두 시간 동안 강의를 들어야 하는데 친구들이 만나자고 보낸 문자 한 통에 금방 괜히 신청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시간이면 집에 가서 편히 쉬거나 지인들과 약속도 많이 잡히는 편인데, 책을 읽고 강의를 들으러 가다니 정말 내가 잠깐 어떻게 되었던 것 아닌가 하고 후회했었거든요. 그래도 저는 이번 주에 강의를 들으러 갔습니다. 제가 찾고 싶은 무언가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안고서요. 당신이 화려하다고 다 독버섯은 아닙니다.라는 말을 만난 것처럼 저는 그곳에서 햄릿은 복수극인가 복수지연극인가라는 질문을 만났습니다. 찾고 있는 무언가가 그곳에 있었습니다. 기뻤습니다. 당신이 쌍둥이 바람꽃은 5월이 되면 싹 사라집니다.라는 마음 설레는 말을 들었던 것처럼 to be or not to be, 선택지가 있다는 것은 내면을 갖고 있다는 증거다.라는 말에 저도 설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앞으로도 많은 일에 흥미는 없지만 계속 가보기로 했습니다. 당신도 그럴 테지요.

 

  사람들은 보통 꿈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그러면 대부분 자신들이 하고 싶은 직업을 이야기합니다. 저도 제 꿈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았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제 꿈은 구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정말입니다. 물론 지금 당장 현실에서는 불가능하지만 정말 그렇게 살고 싶었고, 언젠가 그 꿈이 이루어지기를 지금도 바랍니다. 딱히 남들보다 뛰어난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나게 잘 하는 것도 없는 것 같기도 해서 무섭게 살지 않고 슬슬 살아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스피치 학원에 다니다가 그만두고 했던 말들이 기억에 남았습니다.

 

- 사람에게는 못하는 일이 있어도 되는 것 아닌가. 못하는 일과 하고 싶지 않은 일, 하려고 했다가 실패한 일, 그것도 역시 그 사람을 만드는 거죠. 잘하는 일만이 그 사람의 전부는 아니에요.

                                                                                                                                                                                                                               p. 99~100

 

 그리고 이 말도 함께요.

 

-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자신을 스스로 지키세요.

p. 112

 저도 세상에 단 하나뿐인 제 자신을 지키고 싶습니다. 어떤 목적을 갖고 높이높이 올라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저는 특별히 뛰어난 재주가 있거나 잘 하는 것이 없어서 책을 많이 읽을 수 있었습니다. 책을 읽다보니 제가 세상에 대해 모르는 일, 가보지 못했던 곳, 겪어보지 못한 사건, 사고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계속 책을 읽으며 글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못하는 일이 있어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올 봄에 한 작가 선생님으로부터 당신이 아직 등단하지 않았어도 꾸준히 작품을 쓰고 있다면 이미 작가이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무언가 찾고 있던 것을 만난 봄날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만약이란 나라에 살면서 이상적인 자신을 상상하고 노트에 그림을 그리고 구체적으로 그렸던 것처럼 저는 제 마음을 기도공책에 적고 또 적으면서 기도합니다. 그리고 조금씩 노력하고 변해가는 제 모습을 보면서 기뻐합니다. 조금씩 달라지는 제 모습을 기대합니다. 앞으로도 쭉~ 제 자신을 응원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도 응원하겠습니다. 평범하고 느긋한 작가생활에 박수를 보냅니다. 우리는 이미 자신만의 인생 속에서 창조적 삶을 살아가는 작가라는 사실을 잊지 않을 겁니다. 평범한 우리의 느긋한 작가생활을 위해 아자아자 파이팅을 외쳐봅니다. 마스다 미리씨 <평범한 나의 작가생활>을 써주어서 고맙습니다.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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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 - 숲과 평원과 사막을 걸으며 고통에서 치유로 향해 간 55년의 여정
배리 로페즈 지음, 이승민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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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는 동안 자연이 베풀었던 위로와 치유, 경이로움, 나를 작고 겸손하게 만들어 주었던, 그래서 행복했고 고마웠던 수많은 순간이 수시로 떠올랐다. 제주도 여행 중 친구와 심하게 다투면서 숙소로 돌아오는 길, 무심코 올려다본 하늘에 쏟아질 듯 끝없이 펼쳐져 있던 반짝거리는 별들을 보며 갑자기 화가 풀리고 함께 웃었던 일, (정말로 그 순간 친구와 싸웠던 일이 별거 아닌 일이 되었다.) 산티아고를 향해 걸어가던 중 넘어져서 어깨에 가늘게 금이 갔지만, 반 깁스를 한 채 천천히 걸어가며 사람들과 나무, 공기, 심지어 북스페인 소들에게까지 받았던 위로와 도움은 나를 끝까지 산티아고를 향해 갈 수 있게 해 주었다.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존재(장소와 기후까지 포함하여)들을 통해 삶을 지속할 수 있는 자원을 얻을 뿐 아니라 한없는 지혜와 치유까지 선물 받고 있다.


 

 저자는 일관되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세계가 생명과 삶이자 동반자임을 말해 주고 있다. 현재의 편한 삶을 추구하며 도시의 삶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우리가 그것을 알거나 보고 싶어 하지 않을 뿐이지만. 자연은 인간을 오래 기다려주고 기다리고 있다. 자신을 바라보라고. 조물주가 심어 놓은 자연 속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을 통해 인공으로 해결할 수 없는 힘을 찾아보라고.


 

아동 성도착자에게 시달린 4년 반, 그리고 우리 세 식구에 대한 아버지의 폭력을 겪고도 어떻게 그런 식으로 캘리포니아를 그리워할 수 있는 것일까? 삶의 방향이 꺾이고 고통에 봉착할 때마다 나는 캘리포니아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다 괜찮아질 거라고 믿었다. 28~29.p



동틀 녘 구슬피 우는 산비둘기 소리, 인적 없는 토팡가협곡과 로렐협곡, 그 사이를 뛰어다니는 산토끼들, 주마와 레오카릴로의 긴 해변들, 그 해변에서 하얗게 부서지던 파도내 눈에는 세상에서 제일 거대했던 파도. 이 소리들과 장소들이 없었다면, 주삿바늘처럼 날카롭게 (또 다른 날에는) 연기처럼 자욱하게 벨리에 쏟아지던 햇살이 없었다면, 갓 맺힌 단추 모양 유칼립투스 꼬투리의 톡 쏘던 내음과 내 손가락에 달라붙던 후추나무 이파리들이 없었다면, 이것들이 없었다면, 아마 나는 소멸되었을 것이다. 짐승의 침대에 축축한 헝겊 인형처럼 팽개쳐져 있다가 다른 문을 통과해버렸을지도. 74~75.p



 저자는 어린 시절 소시오패스의 병적 자아도취자이자 아동 성도착자인 쉰여섯 살의 남자에게 4년 가까운 시간 동안 성폭행을 당했다. 힘없는 어린 남자아이는 자기가 잘못하여 병에 걸린 것이란 협박과 폭력에 대항하지 못했다. 심리적으로 엄마와 어린 동생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과 그에게 벗어나 도망갈 수 없다는 절망에 제압 당한 채 새아버지를 따라 맨해튼으로 이사가 기 전까지 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괴로운 나날을 보냈다. 그때 받았던 고통은 저자가 성인이 된 이후에도 따라다녔고, 수십 년 동안 그의 마음을 괴롭혔다. 그랬던 그가 순간 순간 고통을 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사람이 주는 위로와 치료가 아닌 자연의 경이로움과 동물들이 살아가는 매일의 모습이었다. 저자는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고 상처를 회고해 나가는 글의 소제목을 무섭도록 풍부한 물하늘 한 조각이라고 정하였다.


 

고통 속에 놓여 있는 인간이 숨 쉴 수 있도록 힘이 되어주는 것에 어떤 것이 있을까? 어린 소년에게는 캘리포니아의 물과 햇살, 동물과 나무들, 소리가 구원이자 힘이었다. 자연의 광대함과 성실함, 황폐한 환경과 무언가를 덮친 것 같은 공포를 뚫고 기어이 존재를 드러내는 자연의 구성원들이 소년의 삶을 붙잡아 주었다. 자연은 저자는 그것을 우리에게 글로 남겨 주었다. 나는 그 고백이 눈물 나게 고마우면서도 미안하고 안타까웠다. 물이 상처 입은 소년의 몸과 마음을 촉촉하게 적셔 주길 바라고 또 바랐다.


 

내 안에서 점점 커지는 광막한 사막을, 나를 위협하는 그 무엇을 나도 어떻게든 해볼 수 있을 거라고 물을 찾기만 하면 될 거라고.

알고 보니 나의 물은 보통의 삶이었다.…… 자기 삶 깊숙이 무언가를 간직하려는 보통 사람들의 일상적인 결심이 물이었다. 그것은 한눈팔기를 멀리하는 태도였다. 75.p

 


 사막을 걸어가는 사람에게 물은 생명이다. 그 물이 있어 타는 갈증을 견디고 모래바람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저자가 자연에서 얻은 힘은 그를 앞으로 나아가게 했고, 먼 훗날 고통의 현장에 직면하게 했으며,(물론 너무나 힘겹고 역겨운 고통의 과정이었지만) 몸과 마음을 옥죄었던 과거에서 벗어나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온몸으로 사랑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자연이 준 선물이자 그에 대한 은혜 갚음이다.



 나는 요즘 고래에 대하여 관심이 있다. 고래에 관한 책을 읽고, 다큐멘터리를 찾아보며 글을 쓰고 공부하면서 나 자신부터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얼마나 무지했는지 깨닫고 반성하게 된다.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은 얼마나 많은 수의 종을 멸종 시켜야 사라질까? 그것이 가능하기는 한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인간이 아닌 다른 종에 대하여 알아가면 갈수록 멸종의 끝에 인간이 있을 거라는 사실을 확실하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일이 있기 전에 충분히 그것을 막을 수 있을 거라 교만해 하고 있지만.



 이미 우리가 속한 세상은 많이 부서지고 병들고 부패해가고 있다. 자연 보호와 환경오염에 대해 외치는 것이 너무나 촌스러운 슬로건이 된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그렇지만 우리는 3년의 코로나 시대를 겪지 않았나. 나는 비교적 뒤늦게 코로나에 전염되어 다른 사람들처럼 매우 심하게 앓지는 않았지만 메마르고 갈라진 목을 약과 따뜻한 물로 버티면서 앞으로 또 다른 전염병이 유행하게 될지 지레 겁을 먹었었다. 우리가 다른 종의 영역에 너무 깊숙이 들어가고, 그들의 삶을 파헤치고, 포획하고 죽이기를 반복한다면 자연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반격해 올지 겁이 난다.



 고래를 공부하면서 내가 깨닫게 된 건 우리가 다른 종에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기다려주며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만큼 지구의 다른 존재에 대해 알게 되고, 그들이 자연의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바라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자연은 인간에게 마음을 열고 그들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구라는 공간을 함께 공유하며 살아가는 모든 존재에게 분명히 좋은 일일 것이다


 이 책을 거의 다 읽어 갈 때 나는 엄마와 강릉에 있었다. 저녁을 먹고 식당에서 20분 가량 떨어져 있는 숙소까지 엄마와 함께 바다를 보며 걸었다. 중간 중간에 모래사장에 놓여 있는 나무 그네에 앉아 말없이 바다와 밀려왔다가 밀려가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평안하고 따뜻한 저녁이었다. 멀리 떨어진 깊은 바다에 향유고래들이 서서 잠을 잔다고 한다. 바닷속에서 나무처럼 서서 잠든 향유고래들의 모습이 신비하게 느껴졌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 바다 어디에서도 혹시 잘못 알고 헤엄쳐온 향유고래가 서서 잠을 자고 있지 않을까. 나는 강릉 경포 바다에서 향유고래가 서서 자는 모습을 상상하며 행복해 했다. 그리고 여기 살아 있다는 것이 감사하고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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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열정 (무선)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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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이 경험한 강렬하고 짜릿한 경험을 이처럼 확실한 문장으로 표현해 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말로 쏟아낸 것들은 쉽게 사라지지만 글은 남아서 그것을 복기하고 뒤돌아보게 만든다. 과거 자기의 생각과 상대편을 향해 가졌을 열정적인 감정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주인공의 그 감정은 자신을 옭아맨 줄이었지만, 그로 인해 오히려 달콤한 절망을 느꼈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몇 번이나 사랑을 나누었는지 헤아려보았다. 사랑을 할 때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우리 관계에 보태어진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동시에 쾌락의 행위와 몸짓이 더해지는 만큼 확실히 우리는 서로 조금씩 멀어져가고 있었다. 우리는 욕망이라는 자산을 서서히 탕진하고 있었다. 육체적인 강렬함 속에서 얻은 것은 시간의 질서 속에 사라져 갔다. 17.p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생각해 보면 많은 부분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 순간 순간 변하는 인간의 감정과 모습을 이렇게 기록으로 남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식적인 가면을 벗겨낸 것 같다.



 이 책을 읽을 때는 도덕적 판단이 유보된 상태에서 읽어야 한다고 미리 앞부분에서 말하고 있다. 인간의 삶을 유지 시켜주는 것 중 하나인 도덕과 윤리의 잣대는 잠시 내려놓고 작품에 충실해서 읽어나간다면 인간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욕망이란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다. 누구나 수십 번 머릿속으로 상상한다. 감정이 이성을 통제할 수 없을 만큼 화끈하고 열정적인 사랑을 하고 싶다고. 일상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 확률은 낮지만 말이다. 여기에서 한 발 더 깊이 다루어야 할 것은 그런 감정을 갖고 사랑을 나누었던 시간도 언젠가 과거 속으로 사라져 가고 지워진다는 것이다.


 

어느덧 4월이다. 이제는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곧바로 A의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친 구들과 이야기를 한다거나 영화를 본다거나 외식을 하는 등 일상의 작은 기쁨을 누려보겠다는 생각에도 거부감을 덜 느끼게 되었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열정의 시간을 살고 있다(잠에서 깨어나도 더 이상 A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공언하게 될 언젠가에 비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예전처럼 그렇게 내 일상을 집요하게 차지하고 있지는 않다. 56.p



그러면 무엇이 남는 것일까. 나는 여기에서 작가의 글쓰기에 집중하게 된다. 순간의 감정은 강력하나 사라지기 쉽다. 그것을 붙자고 기록을 남긴다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가 된다. 글을 남기는 과정에서 또 한 번 격한 감정을 느끼고 당장 밖으로 뛰어나가 그를 찾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것을 누르고 한 단어 한 단어 글을 쓴다. 기록을 남긴다. 자신이 느꼈던 욕망과 사랑에 불타던 순간의 느낌을. 그것은 과거의 감정일 수도 있고,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순간의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의 마음을 또다시 괴롭게 하거나 위로하게 될 것이다. 글은 살아서 움직일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은 당신, 나에 대해 책을 쓰진 않겠지.”하고 말했었다. 나는 그 사람에 대한 책도, 나에 대한 책도 쓰지 않았다. 단지 그 사람의 존재 그 자체로 인해 내게로 온 단어들을 글로 표현했을 뿐이다. 66.p

 


우리는 때로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지만, 사람을 사랑하는 감정을 사랑할 수도 있다. 사랑을 하는 시간을 통과한 사람들은 더 이상 예전의 자신이 아니다. 무언가로 꽉 채워진 내면의 생각을 표현해내거나 다른 이들이 표현해 내준 것을 끊임없이 찾아다닌다. 그것을 자기의 것과 비교하고 공감하며 나만의 것으로 바꾸어 채워간다. 긴 여행을 하고 돌아온 사람들처럼.

 


나는 남녀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려는 것이 아니다. …… 우리 관계에서 그런 시간적인 개념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나는 그저 존재 혹은 부재만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언제나어느 날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하면서 열정의 기호들을 모으고 있었다. 그 기호들을 한데 모으면 나의 열정을 좀 더 사실적으로 그려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을 열거하거나 묘사하는 방식으로 쓰인 글에는 모순도 혼돈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글은 순간순간 겪은 것들을 음미하는 방식이 아니라, 어떤 일을 겪고 나서 그것들을 돌이켜보면 남들이나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방식인 것이다.…… 글을 쓰는 데 내게 미리 주어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내가 열정적으로 살 수 있게 해주는 시간과 자유일 것이다. 26~27.p

 


인간은 감정적이고 위선적이며 불완전한 존재이다. 그런 인간이 존재에 대해 고민하고, 가난을 극복하며 윤리와 도덕을 논한다. 우리의 삶이 역설이고 아이러니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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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산책 연습
박솔뫼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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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걷는 우리들

<<미래 산책 연습>>/ 박솔뫼



미래를 사는 것은 어떤 것일까. 우리는 저마다 소망하는 것을 말하고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도 진짜 이루어질 수 있을까 의심한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나의 지나간 과거가, 현재의 삶이 지난 시간 우리의 미래였음을 깨닫게 된다. <<미래 산책 연습>>을 처음 읽었을 때는 조금 헷갈렸다. 갑자기 일본 호텔에서 부산으로, 주인공 수미는 과거, 현재, 미래 중 언제의 수미일까. 그러다 마지막 일본 호텔에서 다시 윤미언니를 만나고, 언니가 떠난 뒤 정승을 만나면서 우리의 삶이 결코 단편적이지 않다는 것을, 각자의 삶과 시간이 서로의 시간에 기대고 얽히면서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니 과거가 곧 미래이고 현재이며, 미래가 또 우리의 과거가 되는 것이겠지.



원하는 미래를 그리고 손으로 만져보기 위해 어떤 시간을 반복해야 할까. 나는 그것을 우선 어딘가에 써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18.p



나는 작가가 어딘가에 써두어야겠다고 생각한 미래를 한 장씩 읽는 것에 몰두할 수 있었다. 물고기 뱃속에서 함께 살던 친구들을 우연히 길에서 마주치고, 서로를 알아보고, 다시 서서히 물고기로 변했다가 다시 젖은 물방울이 되어 길 위에서 사라지는 수미와 동생을 위해 기도하는 윤미언니, 모욕을 모욕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최명환 등을 만났다. 수미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기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곳에 가서 살고 있을까. 서울에서 전세로 빌라에 살고 있는 수미는 부산에서 월세로 오래된 아파트를 얻은 뒤, 두 도시를 오가는 삶을 살아낸다. 그의 즉흥적인 행동과 추진력이 부러웠다. 자신을 아는 사람이 없을 것 같은 부산에서 그녀는 또다시 사람들을 만나고 인연을 맺었지만 말이다. 나또한 원하는 미래를 손으로 만지고 통과하기 위해 어떤 시간을 쌓고 밀도를 더해야 할지 고민하게 되었다.



수미가 부산에서 처음 만나 인연을 맺은 사람은 ‘최명환’이다. 남자 이름이라고 선입견을 갖게 했지만 그는 여자이고, 먹을 것을 챙겨주는 성녀라는 뜻의 ‘마르타’라는 세례명을 갖고 있다. 그래서인지 최선생을 만나거나 그녀의 집에 가면 다양한 음식을 대접받고, 의도하지 않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위로와 쉼을 얻는다.



많은 사람의 이름은 생각해보면 누군가 위에서 높은 곳에서 미리 정해준 것처럼 꼭 맞고 어울렸다. 우리가 이름과 사람을 함께 만나기 때문일까 나는 최명환과 그의 이름이 무척 잘 어울린다고 이유는 설명하기 힘들지만 그렇다고 생각했다. 60.p



우리는 어떤 이름을 갖고 있는가. 또 어떤 이름을 갖고 싶을까. 누군가 지어준 이름이 아닌 나 스스로가 갖고 싶은 이름은 무엇일까. 그러면서 나는 이름에 맞게 살고 있는지, 혹은 살고 싶은지도 생각하게 된다.



- 나를 위해서도 기도해줘.

- 한다. 하지.

- 뭐라고 하는데?

- 바르고 이웃을 생각하는 어른이 되게 도와달라고 한다.

- 더 멋있는 거 없나?

- 그리고 어.

- 뭐?

- 많은 것을 배우는 어른이 되게 도움을 달라고 한다.

- 그래. 그거 괜찮네. 103.p



나는 많은 것을 배우고 배를 타고 먼 곳으로 가는 어른이 될 것이라고 다짐하는 수미가 좋았다. 살아오면서 올렸던 나의 기도는 어떤 기도였을까. 나는 내가 드린 기도에 맞는 어른이 되었는지도 궁금하다. 어른은 되었지만 많은 것을 배우고, 좋은 어른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계속 품고 있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오면 수미는 머무르는 동안 대부분 먹고 걷는 일을 했다. 아파트 주변을 걷고 부산타워에 올라갔다가 그 주변을 또 걷고 시장을 걷고, 미문화원 주위를 걸었다. 다른 동네와 성당을 찾아 걷고 또 걷다가 커피와 빵을 먹고, 술을 마신다. 옆집에서 가져다 준 떡을 먹고, 차이나타운의 식당에서 데운 두유와 튀긴 빵을 먹는다. 통닭을 먹고, 감기에 걸리자 함께 감기에 걸린 최선생 집에 가서 죽과 생강차와 소고기뭇국을 먹는다. 소설을 읽다보면 먹고 기도하고 걷는 주인공이 보인다. 무엇이 먼저인지 알 수 없지만 수미가 살아가는 일상 곳곳에 걷고 기도하고 먹는 일들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최선생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기도하나 잠시 생각했고 또다시 조용히 자리를 잡고 기도하는 사람들을 의식하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나는 겸손한 마음으로 천국의 시간을 반복해보고 그 막연한 시간은 미래임에도 미래처럼 여겨지지 않았고 마치 슬픈 과거 같았다. 140.p



생명을 가진 존재들에게 그것만큼 강력한 일이 또 있을까 생각했다. 걷기 위해서는 먹어야 하고 먹기 위해서는 살아가야 하며, 영혼이 있기에 자신과 또 다른 누군가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살아가는 것이 그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된다. 생명력 가득한 행위를 통해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다.

며칠 전, 전두환씨가 사망했다. 그 순간 내게 현실과 소설이 하나가 되어 눈앞에 펼쳐졌다. 그에게 전 대통령이라는 말을 해야할지 아니면 군부 독재자라는 표현을 써야 할지 아니면 전 대통령으로서 군부 독재를 유지하기 위해 한 도시의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한 인물이라고 써야할지, 모두 사실이고, 그에 대해 알고 있으면서도 입으로 꺼내고 글로 정리하기가 쉽지 않다. 그의 집권으로 수많은 누군가가 엄청난 고통과 아픔을 겪으며 죽었고, 과거와 현재, 미래에도 그것은 계속 되고 있다. 그는 자신이 90세의 이런 죽음을 맞이하게 될지 알고 있었을까. 죽어서도 사과하지 않고, 죽어서도 영원히 많은 사람들에게 미움과 증오를 품게 한다는 것을 알았을까. 하필 그는 2021년 11월, 내가 이 작품을 읽고 있을 때 죽어서 1982년의 광주를 찾아보고 생각하게 만들었을까. 그러니 미래는 과거이고 현재이며 다시 현재와 과거와 미래가 되는 것이다.



무섭고 괴롭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날들이 이어졌는데 그래도 시간은 흘렀고 그럼에도 즐거운 날들이 있었다. 204.p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몇 년 전부터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에 대해 소설로 쓰고 싶었다고 했다. 쓰고 싶은 것을 가슴에 품고 끝까지 써내려간 작가의 시간과 그녀가 만들어낸 주인공을 따라 함께 걷고 먹고 기도했던 나의 시간을 생각했다. 작가와 독자는 현재에 살아서 현재의 시간에 작품을 통해 만났고, 또다시 각자의 삶을 살아가며 서로 다른 미래를 만들어 가게 되겠지. 내가 원하고 바라며 기도하는 나의 모습이 궁금해졌다. 그리고 나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반복해야 할 시간에 대하여 생각하고 써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말하고 쓰는 행위에 힘이 있다는 것을 믿으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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