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Q84 1 - 4月-6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권 읽기가 끝났다.

인간의 이성과 감성을 사로잡고 마비시키는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 개인의 의지와 자유와는 상관없이 힘이 없거나 약하다는 이유로 타인이 강요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자들이 너무 많다.
인간은 약한 존재이다.
그러나 할 수 있다면 작은 힘이라도 발버둥치며 살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상의 마지막 오랑캐
이영산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018, 몽골에 도착하자 공항에서부터 알 수 없는 꼬릿한 냄새가 났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그건 양 냄새였다. 몽골 깊은 곳곳마다 이 냄새가 배어 있었고, 당연히 여행 중 내 몸에도 몽골의 냄새가 묻어갔다. 처음 갔던 몽골은 친근하면서도 낯설었다. 울란바토르 도로 위로 ㅇㅇ유치원, **학원, ***갈비 등 알록달록한 한글글씨로 도배된 다인승 차들이 질주하고 있었고, 살짝 검게 그을리긴 했지만 우리와 생김새가 비슷해서인지 현지사람들에게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햇볕이 내리쬐는 한여름이라 뜨거웠지만 습기가 없어 그늘로 피하면 쾌적하고 상쾌했다. 10시가 되어야 해가 졌기에 덤처럼 주어진 한낮의 빛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지금은 울란바트로의 공기가 서울만큼 나빠졌다고 하지만 그 당시 처음 접한 하늘은 끝도 없이 넓고 푸르러서 나와 일행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몽골의 하늘은 낮보다 밤에 보아야 한다. 특히 도시를 떠나 시골에서 올려다 본 하늘은 까만 융단 위에 눈 대신 별들이 내리고 있는 것 같았다. 몽골의 하늘은 내가 서 있는 거리와 매우 가까웠다. 살면서 그렇게 커다란 카시오페아와 북두칠성은 본 적이 없다. 낮에는 구름이 그늘이 되어 줄 정도였다. 차를 타고 초원을 달릴 때 비지아같은 목동들이 모는 양떼들을 만나면 잠깐 멈추고 사진을 찍으며 좋아했다. 비가 잘 오지 않은 나라인데 우리가 도착하고 밤새 비가 왔다며 마을 사람들은 좋아했다. 나와 일행들은 땅에 고인 깨끗한 빗물로 세수를 했지만. 테를지의 에델바이스는 아직도 널리 피어있을까. 내게 말 타기를 가르쳐 주던 토야도 잘 살고 있을지 궁금하다.

 

 

  7월에 엄마가 큰 수술을 받았는데 당번이 되어 간호를 했던 밤이면 <<지상의 마지막 오랑캐>>를 읽었다. 몽골여행에 대한 추억을 되새기고 내가 겪지 못했던 몽골의 다양한 모습들을 상상했다. 나는 책을 읽으며 엄마가 빨리 회복되기를 기도했고, 몽골의 하늘과 대지, 비지아와 그를 닮은 유목민들은 병실에서 밤을 보내는 나를 위로해 주었다. 병실 창밖으로 네온싸인의 불빛이 빛나고 있는 한강을 바라보며, 몽골에 유학 갔던 친구가 추운 겨울엔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 때문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져. 뜨거운 찜질방에서 푹 지져야 하는데라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어두운 밤, 병실 창밖으로 보이는 한강은 가로등 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초원을 떠나 도시로 간 유목민들은 참 답답했겠다. 광활한 몽골의 대지를 사랑한 사람들은 차보다 말을 타고 달리는 게 더 어울린다.

 

 

곡식이나 야채 대신 고가만을 먹고 살아야 했지만, 그렇게 유목민은 자칫 텅 비어서 공허가 됐을 유라시아의 심장부를 채움으로써 하나로 연결된 지구를 완성했다. 실크로드나 스텝 루트니 하는 중세의 교역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오늘날 지구가 손바닥 만해진 데에는 유라시아를 인간의 땅으로 만든 유목민의 공로를 외면할 수 없다. 초원에서 게르 하나를 만나도 반가운데, 그 천지가 다 비어버렸다면 인간은 그 광막한 대지를 여행하기는커녕 말조차 들여놓을 수 없었을 것이니 지구적 시각으로도 감사할 일 아닌가. - 126.p

 

 

  18년 전 내가 경험한 몽골의 모습과 사람들, 환경은 많이 달라져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말을 타고 누비며 달렸던 땅과 하늘, 사람들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는다. 뻥 뚫린 초원을 앞마당처럼 누비며 달려가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내 마음도 시원해지고 광대해지는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광대하고 게으르게
문소영 지음 / 민음사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광대하고 게으르게사이에는 어떤 단어들이 있을까. ‘광대하게속에는 무슨 내용들이 들어 있어서 등장부터 무거운 느낌을 주는 걸까. 의구심을 품고 책을 펼쳤는데 제목과 다르게 <게으르게>로 시작한다. 우리의 광대한 포부는 멀리 있지만 게으른 자신은 바로 코앞에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처음 만나는 첫 번째 소제목도 마음에 들었다. 늦게 꽃핀 대가들이라니. 나도 혹시 늦게 꽃필 수 있지 않을까.’(11.p)하는 문장에 밑줄을 치며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았고, 한편으로 고맙고 위로가 되었다.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또 있구나. 만약 <광대하고>가 먼저 나왔다면 나는 아마  끝까지 이 책을 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광대하고 게으르게>>는 미술 전문 기자인 문소영씨가 삶속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과 예술, 책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써나간 에세이다. 1게으르게로 시작하여 불편하게’, ‘엉뚱하게’, ‘자유롭게’, ‘광대하게’, ‘행복하게로 총 6개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작가 개인의 감정에만 머무르지 않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와 문화 전반에 걸친 깊은 사유가 담겨 있다. 그림과 영화, 사진, 책 등을 단순히 스토리위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다양한 고민과 새로운 도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차분한 어조로 말하고 있다.

 

  책상에 앉아 첫 장부터 작가의 생각에 공감하며 읽다보니 어느 새 하루가 저물었다. 책의 중간마다 밑줄 쳐진 문장과 그 옆에 써 내려간 나의 글들이 흔적처럼 남아 있었다. 작가가 언급한 그림과 책, 영화들 중에는 내가 보고 읽고 공감했던 것과 같은 것들이 많았다. <케빈에 대하여>를 보며 새로운 모성에 대한 저자의 생각에 공감이 갔고, 유행하는 먹방에 대한 해석과 위장과 심장을 동시에 건드리는 소박한 음식에 대한 작가의 말에 나도 그렇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블랙페이스에 대하여 나조차 크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점도 발견했다.  사소한 것 같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인종차별주의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는 동안 물방울처럼 사라진 나의 생각들을 붙잡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남았다. 스페인 여행 중 티센보르네미서 미술관에서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hotel room', 1931을 보고 당시에 느낀 기쁨을 단 몇 줄이라도 적어 놓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리듬에 맞춰 발을 까딱거리며 보았던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에 대한 감상을 남겼다면 나의 생활은 좀 더 달라졌을까. 20년 동안 새벽 4시부터 묵묵히 빵을 만들어 살아온 제빵사의 이야기를 듣고 오던 날 들었던 다양한 생각을 정리만 했더라도 나의 마음이 조금은 성숙해질 수 있었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록하지 않았기에 추상적으로 머릿속에 머물다 떠난 것은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다. 엉성하더라도 나만의 그물을 짜 놓았다면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비교하고 공유하며 삶의 좋은 자양분이 되었을텐데 하고 아쉬움이 남았다.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크고 넓은 세상에서 명성을 떨치기를 꿈꾸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참으로 게으르다.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할 것이 많지만 몸의 한계는 너무나 뚜렷하고 절망적이다. 그렇다고 금방 포기하거나 외면할 자신도 없다. 그 동안 작게나마 성취한 검험의 달콤함이 머리와 가슴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할까. 프랭크 매코트의 계속 끼적거리세요! 뭔가가 일어날 겁니다.(Keep scribbling Something will happen).”(20.p)라는 말을 지도삼아 지금 내가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들을 계속 해 나갈 수밖에 없다. 때로는 게으른 내 자신과 싸우다가 가끔은 타협하게 되더라도 매일 조금씩 무언가를 해 나간다면 그것이 쌓여서 어떤 일이 일어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머릿속에 맴돌고 있는 우리의 생각이 각자의 가치관이 되고, 실천의 동력이 되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것들을 어떤 형태로든 표현할 수 있어야 하니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매일 무언가를 한다가 될 것이다. 이 책도 작가가 게으른 자신과 싸우거나 혹은 다독이면서 만들어낸 결과물이라 생각한다. 꾸준하게 천천히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무언가 커다란 것을 이루어 내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간과 공간 속에 많은 사람들과 다양한 것들이 찾아오고, 또 스쳐지나 간다. 그중에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하기도 하고, 가벼운 목례만 하고 지나쳐 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또 차를 마시거나 산책을 하며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때가 있다. 혹시 그런 휴식 같은 시간이 찾아왔을 때 <<광대하고 게으르게>>에 대해 함께 읽고 이야기했으면 좋겠다. 충분히 우리의 시간을 내어주어도 아깝지 않은 좋은 생각들이 많이 담겨 있는 책이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떤 풍경을 뒤에 두고 살고 있는가

김애란의 <<풍경의 쓸모>>

 

  사진을 찍을 때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걸 알려준 사람이 누구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무척 평범한 사람, 좋은 일은 금방 지나가고 그런 날은 자주 오지 않으며, 온다 해도 지나치기 십상임을 아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니까 그런 순간과 만났을 땐 잘 알아보고, 한곳에 붙박아둬야 한다는 걸 알 정도로…… 나이든 사람 말이다. 150.p

 

 

 차를 타고 가다가 우연히 바라본 하늘이나 산은 평화롭기만 하다. 한 번 만나고 헤어질 타인들은 아무 이해관계 없이 만나 웃으며 인사를 나눈다. 자연스럽게 스치는 풍경들은 나와 멀리 떨어져 있기에 아름다워 보인다. 때로는 마음도 편안하게 해준다. 나와 상관없지만 늘 그 자리에 있어주며, 언제든지 내가 원할 때 바라볼 수 있어서 풍경으로써 쓸모가 있다. 그러나 그 풍경 속으로 가까이 들어가는 순간 더 이상 풍경이 될 수 없게 된다. 그 속에 들어가면 주체와 객체가 서로 감추고 싶은 어떤 것들을 들키거나 공유해야 하는 상황이 오고야 만다. 그것은 누구하고나 공유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더 이상 풍경이 제 역할을 할 수 없게 되고, 어떤 관계를 맺을지 선택해야 된다. 평생을 함께 하며 관계를 맺고 관리를 해야 하는 대상이 되거나 아니면 그 속에서 완전히 사라지도록 손을 쓸 수밖에 없다.

 

 

 세상은 기본적으로 불행한 곳이다. 삶은 불행의 연속이며 행복은 불행의 휴지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다시 말하면 불행, 불행, 불행 사이 잠시 행복이 끼어 있다가 다시 불행해지는 것이 인생이라고. 그 잠깐의 행복을 영원히 남기기 위해 사람들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사진을 찍는다. 순간의 행복을 박제처럼 만들고 그것을 바라보며 위안이라도 얻어야겠다는 다짐을 하는 듯 전투적으로 사진을 찍고 남긴다.

 

 고속도로 주변에 펼쳐진 풍경을 보며 좀 심란했다. 여행 중 몇 번 오간 길인데도 그랬다. 풍경이 더 이상 풍경일 수 없을 때, 나도 그 풍경의 일부라는 생각이 든 순간 생긴 불안이었다. 서울 토박이로서 내가 중심에 얼마나 익숙한지, 혜택에 얼마나 길들여졌는지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그 때문에 내가 어떻게 중심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지 잘 보였다. 158.p

 

 

 정우의 아버지는 엄마와 아들을 버리고 다른 여인을 향해 떠나갔다. 아버지는 그렇게 스스로 떨어져 나갔고, 두 사람에게 풍경처럼 자리만 남았다. 아버지는 풍경답게 정우가 자라는 동안 기념할 일이 생길 때나 선물을 보내왔고, 아들의 결혼식 때도 딱 풍경에 맞는 역할만 했다. 가족이었으나 더 이상 가족일 수 없는 사람들. 끊어진 관계라고 생각하지만 마지막까지 아주 가느다란 관계의 끈으로 엮어진 사람들은 더 집요하게 끊어지지 않는다. 그 사람들이 서로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미약한 것 같으면서도 울림이 크고, 어떠한 방향에서 날아올지 모르는 아픔과 분노에 무방비로 서있게 만든다. 정우에게 아버지와 곽교수가 그러했다. 아버지는 사라졌다고 생각한 존재였으나 엄마의 아들의 아름다운 풍경을 빼앗아 혼자만 누리고 있는 사람이었고, 곽교수는 정우 자신이 기대고 만들어 나간 풍경이라고 생각했으나 그 또한 허상과 착각으로 만들어낸 거짓 풍경이 되고 말았다.

 

 

 누군가를 향해, 그 누군가가 원한 미래를 향해 해상도 낮은 미소를 짓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사진 속에 붙박인 무지, 영원한 무지는 내 가슴 어디께를 찌르르 건드리고는 한다. 우리가 뭘 모른다 할 때 대체로 그건 뭘 잃어버리게 될지 모른다는 뜻과 같으니까. 무언가 주자마자 앗아가는 건 사진이 늘 해온 일 중 하나이니까. 151.p

 

 

 곽교수는 어느 날 우연히 정우에게 다가와 아름다운 풍경이 되어 주었다. 그와 함께 있을 때 정우는 자신도 멋있는 풍경이 되었다는 착각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누구나 마찬가지이다. 능 력과 영향력 있는 사람과 친분을 유지하고, 은밀한 비밀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저절로 우월감을 갖게 되기 마련이니까.

 

 

 강의를 마치고 돌아올 때 종종 버스 창문에 얼비친 내 얼굴을 바라봤다. 그럴 땐 과거가 지나가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차오르고 새어나오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나를 지나간 사람, 내가 경험한 시간, 감내한 감정 들이 지금 내 눈빛에 관여하고, 인상에 참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표정의 양식으로, 분위기의 형태로 남아 내장 깊숙한 곳에서 공기처럼 배어 나왔다. 어떤 사건 후 뭔가 간명하게 정리할 수 없는 감정을 불만족스럽게 요약하고 나면 특히 그랬다. ‘그 일이후 나는 내 인상이 미묘하게 바뀐 걸 알았다. 그럴 땐 정말 내가 내 과거를 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소화는, 배치는 지금도 진행중이었다. 173.p

                                                                             

 

 

 작가는 인간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시기와 질투, 분노, 가장 극에 달할 때 오히려 담담하게 뻔뻔해질 수 있는 냉정한 마음을 표현해 주고 있다. 다른 여인과 평범한 행복을 누리며 찍은 아버지의 사진을 보게 되었을 때, 정우는 자신과 어머니에게 없는 사랑과 환희의 순간을 가진 아버지에게 배신감과 시기, 질투를 느꼈다. 그것은 분노와 부러움의 또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가을 풍경 속에 안긴 두 사람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쩐지 두 사람이, 좋은 일은 금방 지나가고, 그런 순간은 자주 오지 않으며, 온다 해도 지나치기 십상임을 아는 사람들 같아서였다. 182.p

 

 

 나는 어떤 풍경을 뒤로 한 채 살아가고 있을까. 혹시 나도 모르게 내가 만들어내는 허상과 이기심의 풍경을 배경으로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는지 두려워지곤 한다. 내가 스쳐간 많은 풍경들, 그 속에서 만난 사람들과 몸과 마음으로 부딪치며 경험한 상황들이 나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이승환이 부르던 노래처럼 부조리한 현실과 불확실한 미래에 내 안에 숨지 않게 나에게 속지 않게 나에게 물어 보며 살고 있는지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살아서 가야 한다
정명섭 지음 / 교유서가 / 201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조선은 힘이 없다. 임금과 사대부는 후금과 명나라의 싸움에 우리 군사들을 보낼 수밖에 없었고, 그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적군의 포로가 되었다. 이야기는 흥미롭게 술술 읽힌다.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머릿속으로 영상이 그려진다. 시간이 흘렀지만 국민의 안위보다 명분과 사대의 예를 더 중시하는 정치권, 약삭빠르게 돈의 냄새를 맡고 움직이는 장사꾼들의 모습은 바뀌지 않은 것 같아 씁쓸하다. 그러나 소현세자나 인조의 삼전도 굴욕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강은태와 황천도 같은 작은 개인의 고통스러운 삶을 들여다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들은 포로로 잡혀가 짐승과 같은 생활을 하며 힘겹게 하루를 버티며 집으로 돌아갈 날을 꿈꾼다. 모두에게는 집으로 돌아가야 할 이유가 있다. 그게 무엇이든 말이다.

 

 

  돌아가기 위해서는 살아야 한다. 조선에서 노비로 살던 사람들은 낯선 땅에서 비슷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어렵지 않다. 그러나 양반으로 살던 사람들은 더 이상 양반이 아니다. 그로 인해 이중적 아픔이 가해진다. 어쩔 수 없이 체념하며 고통과 모욕의 시간을 견뎌야 한다. 그저 패배한 포로로서 주인을 위해 일해야만 한다. 양반에서 포로로, 포로에서 노비로 신분이 바뀌고 삶의 방식도 바뀌었다. 생각과 가치관도 바뀔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긴 했지. 출정할 때 아버님이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이니 그들의 뜻에 따라야 한다면서 날 이곳으로 보냈네.”

정말입니까? 양반 중에서도 자기 자식을 출정시킨 사람이 있었군요.”

아버지는 나보다도 가문을 더 사랑하시는 분이니까. 날 이용해서 가문의 살길을 찾으신 거 지.”

어쨌든 죽지 않고 살아났으니 돌아갈 날이 올 겁니다.”

……

아무리 그래도 양반이신데 어찌 형제도 아니고 친구가 됩니까?”

여긴 조선이 아니잖아. 양반이니 백성이니 하는 건 부질없는 구분이야.”

감옥 너머의 황량한 벌판을 바라보며 말하던 강은태가 덧붙였다. (84~85.p)

 

 

  노비였던 황천도와 양반이었던 강은태는 서로를 의지하며 타국에서의 삶을 견딘다. 언젠가 꼭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강한 의지를 갖고 말이다. 두 사람이 친구로 지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이 조선이 아니었기 때문이고, 포로라는 신분이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돌아가 살고 싶은 조선에서는 같을 수가 없다. 임금이 바뀌고 속환사가 오고가면서 양반인 강은태는 큰돈을 내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지만, 노비인 황천도를 데리고 갈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여기에서부터 인간의 본성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집으로 돌아갈 생각에 친구의 아픔을 헤아리지 않은, 이미 친구 이전의 양반으로 돌아간 강은태나 그를 죽이고 가짜 강은태가 되어 돌아가는 황천도 모두 전쟁의 피해자이자 돌아가고 싶은 욕망이 만들어낸 비극의 주인공이다. 황천도는 순식간에 친구와 그를 데리러 온 사람을 죽이고, 후르사와 거래한다. 큰돈을 얻을 수만 있다면 돌아갈 사람이 누구이든 그는 상관이 없다.

 

 

  강은태가 되어 조선으로 돌아온 황천도는 그의 가족들을 속이며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순간순간이 의심과 염려로 위태롭고 불안하지만 그동안 경험하지 못한 안락함과 부를 누리며, 황천도는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살인과 방화를 통해 사들인 새 인생은 또 다른 계략과 거짓을 통해 죽음들을 부른다. 이기적이고 차가운 그의 마음은 흔들리는 고뇌 속에서도 끝내 가짜 인생을 내려놓지 못하게 한다.

 

 

  아무리 20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지만 아들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동안 나누었던 친구와의 대화를 통해서 집안의 대소사를 처리한다는 설정은 납득이 가지 않았다. 또한 역병으로 죽었다는 오월이가 뒷부분에서 상이와 함께 나오는 부분(286.p)은 치밀하게 퇴고를 하지 않은 것 같은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자신이 살았던 곳을 떠나 일순간 삶과 신분이 바뀌고, 인생의 밑바닥으로 떨어져 짐승과 같은 삶을 살아야만 한다면 우리는 현재의 상식적인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전쟁은 누구를 위해서든 어떠한 명분을 내세우든 정당할 수 없다. 비극은 더 큰 비극을 초래할 뿐이다. 그 속에서 희생당하는 것은 인간일 뿐이다. 그래서인지 강은태로 살아야 하는 황천도의 고민에 마음이 갔다.

 

 

하지만 벌레처럼 살고 있는 아버지 황음치를 떠올린 황천도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 강은태로 살아가고 싶었다. 그래서 아무런 일도 안 하면서도 끼니 걱정을 하지 않고, 솜털처럼 부드러운 비단옷을 입고 따뜻한 솜이불을 덮고 자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완벽하고도 완벽하게 강은태로 살아야 했다. (189.p)

 

 

  이 고민은 평생 그를 따라 다니며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그가 아무리 완벽하게 강은태로 살아간다 할지라도 황천도의 그림자에서는 벗어나지 못할 것이며, 그것은 아마 무척 고통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