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 소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6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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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셀로나의 골목을 거닐고 있을 때 성당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일요일 아침과 수요일 오후, 온 동네로 울려 퍼졌던 교회 종소리. 그 소리가 나면 교인들은 동네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던 교회로 모여왔다. 특히 수요일 오후, 부동산을 운영하던 친구 엄마도 겉옷을 챙겨 입고 교회로 갔고, 한의원과 내과를 운영하던 원장도 가운을 벗고 교회로 갔다. 서울 한복판에 교회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나는 파란색 성경책을 들고 친구들과 교회로 몰려가기도 했었다. 청각이 어린 시절을 소환한 사실에 놀랐다. 소설도 그럴 것이다. 더 이상 종소리는 울리지 않는다. 어린 시절 언제부터인가 시끄럽다는 이유로 종은 울리지 못하게 되었고, 차츰 내 머릿속에서도 잊혀갔다. 그런데 어른이 되고 외국의 낯선 도시를 여행하다 그 소리를 들었을 때 저절로 떠오른 것은 종소리가 울리던 그때의 동네 모습과 사람들, 재미있게 읽었던 어린이 잡지와 만화책 등등 이었다. 사람 안에 축적되어 있는 수많은 감각과 추억은 어느 정도일까. 그것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얼마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일까.

 

 

 앨리스 먼로의 <거지 소녀>를 읽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중학교 때, 선생님 몰래 친구들과 돌려 읽었던 하이틴 로맨스. 지금 생각해 보면 표지를 벗긴 영어 사전만한 작고 얇은 로맨스 소설을 교과서 사이에 두고 반 친구들과 돌려 읽었던 그 짜릿했던 순간에 어린 소녀들이었던 우리 마음속에 로즈와 같은 상상은 시작되었던 것 같다. 거지 소녀가 품은 당당함과 무지에 가까운 자신감은 규율과 형식 속에서 살아온 왕의 마음을 훔칠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가진 젊음과 힘으로 얼마든지 거대한 존재를 상대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은 저마다 모습만 달리 한 채 각자의 가슴에 자리했다. 처음에는 그 마음으로 로즈를 따라갔다. 가난하지만 성적이 우수하여 장학금을 받으면서도 강한 자존심때문에 습관적으로 순종이 몸에 밴 다른 가난한 장학생 그룹에 끼지 않으려는 로즈.

 

 

 그런 자신을 좋아해 주는 패트릭이 백화점을 운영하는 부잣집 아들인데다 주변 여자들과 고향 사람들까지 자신을 질투하고 부러워하고 있다는 마음에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결혼을 하게 된다. <코페투아 왕과 거지 소녀>속 왕은 소녀의 어떤 모습에 이끌려 왕관을 버리겠다고 결심하게 되는 것일까? 마찬가지로 패트릭은 로즈의 무엇에 이끌리어 그녀를 사랑하고 삶을 바꾸어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사람들은 자기가 생각하고 결정한 일에 절대적 자신감을 드러낸다. 나는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내가 실수를 하더라도 선택한 그와 무언가가 그것을 보상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앨리스 먼로의 간결하면서도 세밀한 문장과 섬세한 묘사, 독자의 마음을 빨아들이는 흡인력 있는 심리와 서사는 쉽게 다가가 갔다가 그 자리에서 가슴을 건드리고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힘을 발휘한다. 인생은 내가 결정한 대로 흘러가는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때로는 이유도 조짐도 없이 행복이, 행복의 가능성이 나타나 그들을 놀라게 하곤 했다는 의미다. 그런 때 그들은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다른 외피를 두른 것 같았고, 눈부시게 상냥하고 순결한 로즈와 패트릭이 각자의 평상시 자아의 그림자 속에 거의 눈에 띄지 않는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그때, 그에게서 자유로워진 상태로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열람석 안을 들여다보았을 때 그녀가 본 사람은 바로 그 패트릭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그때 그를 내비뒀어야 했다.

178.p <거지 소녀> 중에서.

 

 

 눈앞에 정확한 그림이 그려져 있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렇게 바라볼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이 어리석은 길이라고 해도, 혹은 내 힘으로 얼마든지 해결해 나갈 수 있다는 믿음이 확고한 상황에서는 어떤 일이 닥칠지 몰라도 달려가 부딪쳐봐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 로즈도 그런 사람 중에 한 사람이다. 눈앞에 파도가 몰려오는 것을 보고 감탄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 파도 속으로 달려가 온몸이 흠뻑 젖도록 파도를 타는 사람이 있는데 로즈는 후자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가 만들어 낸 인생 속에서 얼마 정도는 그런 로즈 같은 삶을 지나온 사람이기도하다.

 

 

  앨리스 먼로의 거지 소녀속에 나오는 <장엄한 매질>부터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까지 작품들 한 편 한 편이 완성도 높은 단편이면서도 로즈와 그 주변의 사람들과의 삶을 한 올 한 올 촘촘하게 짜내어 삶이란 연작으로 만들어냈다.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내고 견뎌가는 가운데 인생이란 긴 시간을 만들어낸 것처럼 말이다. 그 속에서 로즈와 우리는 돌아가면 다시는 하지 않을 부끄럽고 후회스러운 일들을 벌이기도 했고, 무모하고 어리석은 선택을 통해 삶을 뒤죽박죽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모두 우리가 했고 그래서 힘들었지만 그로 인해 조금씩 인생에 연연해하지 않게 되었던 순간들. 때로는 서글프고 씁쓸하지만 그렇다고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지금. 그런 것들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었다. 그리고 앨리스의 소설이 참 아름답다는 것을 깨달았다. 설명할 수 없지만 인간과 삶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은 문학이 주는 위로고 힘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미스 해티가 로즈에게 했던 질문을 계속해서 곱씹는다.

 

 

네가 시를 잘 외울 수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고 생각해선 안 돼.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

자신이 도대체 뭐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은 것이 로즈에게 평생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사실은 그전에도 단조로운 징소리처럼 자주 귓전을 울리던 말이었기에 그녀는 그 말에 신경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제야 미스 해티가 가학적인 선생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353.p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중에서

 

 

  좋은 질문이다. 다만 좋은 대답을 찾기에 오래 걸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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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리새우 : 비밀글입니다 - 제9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 문학동네 청소년 42
황영미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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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펼치고 한 번에 읽어버린 4시간 동안, 나는 잊고 있었던 청소년 시절의 내 모습과 마주했다. 그냥 과거의 학창 시절이 떠오른 것이 아니라 영화를 보는 것처럼 눈앞에서 나와 내 친구들이 생생하게 움직이고 말을 했다. 나도 다현이처럼 무리 속에 있기도 하고, 혼자이기도 했으며, 내 마음을 감추고 친구들과의 공통 화제에 맞춰 이야기 나누는 데 많은 에너지를 쏟느라 피곤해 했다. 가고 싶지 않았지만 빠지지 않고 참여했던 생일모임이나 감정의 극심한 변화를 겪고 있는 친구와 이유 없이 멀어지기도 했고, 서로 모함을 주고받으며, 한 순간 이상한 아이가 되기도 했던 우리들. 시간이 지나 지금은 눈이 부시게 아름답고 빛났던 시절이라고 이야기 하며 되돌아보지만, 그 안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입시와 친구관계 때문에 속을 앓으며 나름 처절하게 버티고 서 있는 우리들이 있었다.

 

 

  시간은 많이 흘렀지만 인간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또래 집단에 끼지 못한 사람은 극심한 외로움에 시달린다. 무리에 끼지 못했다는 것은 낙오자와 같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작품 속에도 자신의 아픔을 숨기기 위해 다른 친구를 아프게 해야 했던 미성숙한 청소년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펼쳐지고 있어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

 

 

노은유는 왜 미운털이 박혔을까? 하긴 그게 뭐 중요한가. 그냥 싫은 사람도 있는 거지. 어쨌든 내 친구들이 너무너무 싫어하는 아이랑 내가 짝이 되었다. 환장하시겠다          14.p

 

원래 그렇다. 누구 한 명이 그 애 좀 이상하지 않아?’ 이렇게 씨앗을 뿌리면, 다른 친구들은 이상하지. 완전 이상해.’라며 싹을 틔운다. 그다음부터 나무는 알아서 자란다. ‘좀 이상한 그 애로 찍혔던 아이는 나중에 어마어마한 이미지의 괴물이 되어 있는 것이다. 52.p

 

 

  그러고 보니 나 또한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친구들이나 주변 사람들이 싫어하니 분명히 무슨 문제가 있거나 나쁜 사람일거라는 선입견을 갖고 타인에게 감정의 폭력을 휘둘렀던 때가 있다. 등장인물들과 함께 나의 민낯을 보는 것 같아서 부끄러웠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각자의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 감싸 안고 성장하는 친구들을 보며 공감할 수 있어서 기뻤다.

 

 

  한때 왕따의 경험을 겪었던 다현이는 예전의 외로웠던 시절로 절대 돌아가기 싫어한다. 그래서 아람이가 싫어하고, 뒤를 이어 다섯 손가락 친구들이 싫어하게 된 은유를 무작정 미워하며 가까워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카톡방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시간을 보내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이 순간이 너무너무 좋기 때문이다. 이제는 외톨이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도 친한 친구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 청소년들에게는 그것이 매우 중요하다. 친구들의 무리가 그들의 세계이고, 그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 것만으로도 소속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청소년기는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무서울 것이 없는 때이기도 하다.

 

 

매일이 축제 같았다. 우리 다섯이 뭉쳐 다니니 함부로 나를 대하는 아이가 없었다. …… 등교할 때 영혼을 집에 두고 나온 거라고. 이렇게 소중한 친구들을 다시 잃을 순 없다고.

그런데 순둥이로 살기로 작정하니 다른 문제가 생겼다. 아무래도 어떤 사람들한텐 내가 만만해 보이는 것 같다.

…… 어른들은 학원에 다니지 않는 아이는 성적이 바닥이거나 지독하게 가난할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어른들의 그 단단한 오해를 깨뜨릴 자신이 없고, 무시당하기도 싫다. …… 33.p

 

  다현이는 친구들 안에서 안정을 찾고 행복해 하지만 한편으로는 직감적으로 무언가 잘못된 것 같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사람은 자신의 뿌리를 깊이 내리고 서서 버틸 수 있는 힘을 키워야 한다. 그것은 누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란 존재를 내 자신이 다독이고 홀로 설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야 한다. 시간 앞에 홀로 서서 견뎌본 사람은 그만큼 성장하고 강해진다. 그 힘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상대방을 존중하게 되고 건강한 관계를 형성하게 만든다. 다현이가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고 체리새우 블로그에 글을 남기는 것이나 은유가 영화를 좋아하여 다른 사람들이 침범할 수 없는 자신들의 영역을 넓혀 가는 것처럼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뿌리를 깊이 내릴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많이 아프고 힘들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다섯 손가락 안에서 포지션을 잃고 설아와 친구들에게 처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다현이가 대견스러웠다. 이제 서서히 혼자 서는 연습을 하며 조금씩 강해지는 다현이를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우리 모두는 나무들처럼 혼자야. 좋은 친구라면 서로에게 햇살이 되어 주고 바람이 되어 주면 돼. 독립된 나무로 잘 자라게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 그러다 보면 과제할 때 너희처럼 좋은 친구도 만나고, 봉사활동이나 마을 밥집 가면 거기서도 멋진 친구들을 만나. 그럼 됐지 뭐.” 156.p

 

 

  은유의 말처럼 아픔을 딛고 조금씩 강해진 다현이가 다른 친구들에게 햇살과 바람이 되어 주는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나도 우리도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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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언수 소설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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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청 억울하고 고통스러우면서도 재미있다가 눈물이 나는 슬픈 소설을 이제야 읽었다. 제목이 주는 밝고 희망적인 느낌 때문에 소설을 읽는 동안 받게 된 아픔은 두 배가 되었다. 그러나 김언수의 소설에서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본다. 소설이 우리의 삶과 닮았으면서도 극적이라 책을 덮고 나서도 오래 기억에 남는다

 

 

눈을 떴을 땐 자동차 안이었다.

……나를 어디로끌고 가는 것일까? 아니다. 대체 나를 끌고 가는 것일까? (117.p)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누군가에게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하지도 않은 일을 진술해야 하는 등 일방적으로 무차별 폭력을 당하는 삶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을지 모른다. 오늘도 운 좋게 살아남아 편안한 일상을 살고 있지만, 그 일상을 깨고 뒤흔드는 일이 내게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그저 편안한 하루가 지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에 대해 안심하고 가슴 조이며 살아갈 뿐이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자기 자신을 향해 수많은 질문을 던지지만 답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공포와 두려움 속으로 집어넣은 누군가와 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요구받은 것을 완벽하게 해 나가는 것 밖에. 그때의 나는 진짜 내가 아닐지도 모른다. 소설 속 스티로폼 라면 용기 만드는 일을 했던 평범한 가 감금된 후 장비에 다시 올라가지 않기 위해 그들이 원하는 대로 진술서를 깔끔하게 써내려 가는 것처럼. 김석산을 죽인 암살범이 되어 말이다.

 

 

진짜 극한의 고통이 오면 인간은 비명조차 지를 수 없다.

……면도날로 신경을 한 꺼풀씩 벗겨내는 것 같은, 갈기갈기 찢어놓은 신경을 다시 염산 속에 담가놓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130~131.p)

 

  고통의 기억을 안고 있는 한 는 또 다시 그 속으로 들어가지 않기 위해 거짓과 진실을 따질 겨를 도 없이 진술서를 써내려 갈 수밖에 없다. 내가 세월호사건 이후 제주도를 갈 때 마다 배를 타고 갈까라는 말을 꺼내지 못하는 것처럼. 극복되지 못한 아픔이 행동과 사고의 한계를 만들고 거짓된 삶을 만들어 가는 것이 무섭다. 사람들이 두려움을 잊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하루하루 주어진 일에 몰두하는 것이다. ‘는 자신의 회사 책상과 비슷한 환경을 만들어줄 것을 요구하고 진술서를 쓰기 시작한다.

 

 

탁자 위에 가득 놓인 검정, 빨강, 파랑 볼펜들과 일곱 가지 색의 형광펜, 포스트잇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노라니 어쩐지 갑자기 행복해진 느낌이었다. (140.p)

 

 

  그 순간 그는 마음이 편안해지기 시작한다. 카키양복이 보내주는 칭찬과 당근을 먹으며, 자신의 쓴 진술서의 주인공이 되어간다. 단련되고 훈련되어진 그의 글 솜씨도 날마다 일취월장한다.

 

 

나는 날마다 진술서 속의 이야기들을 상상하고 느끼고 호흡했다. 그러자 나는 진술서의 세계가 점점 좋아졌다. 아무런 의혹도 모순도 없는 세계! 이처럼 논리적이고 명확한 곳 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지! 하고 나는 중얼거렸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더 이상 나에게 암살범이라는 가짜 암시를 주지 않아도 되었다. 나는 암살범 그 자체이고, 진술서 그 자체였다. 나는 이제 자료만 준다면 어떤 진술서도 열두 시간 안에 완벽하게 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143.p )

 

 

현실에서 벌어질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도 안 되는 일을 겪게 되다보니 오히려 상상의 세계가 더 현실 같고,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비현실적인 일처럼 보이게 되는 아이러니를 느끼게 된다. 이제 가 살아가는 세상은 현실이 아니라 그가 쓴 진술서의 세계이다. 그곳에서 그는 대단한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두었고, 자기 자신 또한 냉정한 암살범이 되어 있다. 진실과 왜곡이 한 몸이 되어 가고 있는 과정이 눈앞에서 펼쳐지지만 그것을 가려낼 힘이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그런 곳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소설 속에서 벌어진 일들을 우리의 일상생활 속 그 무엇에 빗대어도 이야기는 진행될 수 있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받는 수많은 일들을 물론이고, 입시와 미래의 불안에 시달려 본 사람들은 좁은 교실 속에서 교과서와 성적의 세계에 매달리며 편안함을 찾을 수 있다. 가끔씩 주어지는 성적과 비교, 자존감 상실과 왕따의 공포에 대한 두려움만 피해갈 수 있다면. 언제 직장에서 쫓겨날지 모르는 비정규직에게도 소설의 내용이 무관하지 않다. 물질로 인한 갑과 을의 횡포, 가정폭력과 수많은 차별, 그 차별 뒤에 숨어있는 일상 속 공포들이 불쑥불쑥 얼굴을 드러낼 때마다 우리의 삶이 마냥 해피엔딩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거침없는 문장과 한편의 연극을 보는 것 같은 소설 속에서 세상은 마냥 상식과 질서로 돌아가는 평화롭고 권태로운 곳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것을 아는 것에서부터 희망을 갖게 되지만 그래서 더 서글퍼진다.

이 소설은 전체가 은유덩어리이다. 리뷰를 쓰고 있는 나에게도 말이다. 싸구려 감성은 버리고 냉정하고 명료하게 경제적으로 써야 하는데 생각이 많아진 나는 그렇게 하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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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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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로가 모르는 사람

김영하의 <여행>

    

 

 

 한 번 끝난 인연이 무엇을 확인하기 위해 다시 만나야 하는 것일까? 한때 연인이었으나 이제 더 이상 연인이 아닌, 남남이 된 수진과 한선은 마지막으로 여행을 가기로 한다. 한선의 일방적인 계획에 결혼을 앞둔 수진은 꺼림칙했으나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알겠다고 약속을 했다. 한선에게도 어린 애인이 있다. 9세 연하의 중국인 유학생 친친. 그러나 그에게 친친은 그냥 가벼운 인스턴트 같은 상대이다. 당장의 허기와 나트륨의 짭조름한 맛을 즐기기 위한 딱 그 정도의 관계. 솔직히 한선에게 그 정도의 관계도 과분하다. 수진의 생각대로 캠퍼스의 늙은 어린이 같은 존재인 그에게 말이다.

 

 

  한선은 아무리 기다려도 수진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자 그의 온 SNS를 뒤지기 시작한다. 그것이 개인의 사생활 침해이자 스토커적인 행동이라는 것은 인식하지도 못한 채 그녀가 미국에서 이혼한 백인 남자와 유학생 등을 사귀다 지금의 애인을 만나 결혼에 이르게 된 것과 결혼식 날짜와 장소까지 알아낸다. 그리고 한선은 그녀의 집 주소까지 찾아내어 무작정 찾아간 다음, 당사자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순식간에 바닷가 시골 마을까지 차를 몰아왔다.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겠지만 결과는 그녀를 납치한 것과 같은 상황이다. 수진쪽에서도 그를 포스트잇같이 부드럽고 유연하고 뒤끝 없는 관계라고 믿지 않았다면, 자신의 인터넷 세계를 헤집고 다니며 은밀한 개인정보와 살고 있는 집까지 찾아내는 한선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면 아마 쉽게 그의 차에 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근데 오빠.”

?”왜 나하고 여행을 가려고 해? 그러니까 나 같은 애 말고도……

한신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우리 옛날에 여행 많이 다녔잖아.”

그랬었나?”

경주도, 설악산도, 제주도도…… 콘도에서 맛있는 것도 해 먹고 참 좋았는데.”

에이, . 주로 라면이었지. 회 좀 떠다 먹고. 오빠는 만날 술 먹고 뻗었잖아.”

그땐 꿈이 있었던 것 같아.”

지금은 없어?”

인생을 실패한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 이제 돌이키기엔 너무 늦었다는 생각.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이상하게 네 얼굴이 떠올라. 네가 내 가장 중요한 것을 빼앗아간 것 같아.”

(41.p)

 

 

  한선은 왜 그녀와 여행을 가려고 했던 것일까? 정말 수진이 자신의 중요한 무언가를 빼앗아갔다고 해도 그것은 이미 지난 과거일 뿐이다. 그의 말은 마치 앞이 보이지 않는 모래구멍 속에 자기 혼자 남겨두고 너만 잘 살기위해 탈출 할 수 있냐고 그녀에게 떼를 쓰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미 두 사람은 완벽한 타인이다. 과거는 과거일 뿐 현실을 부정할 수 없다. 그것은 수진이 위기 상황에서도 냉정한 태도를 잊지 않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 전혀 실감이 나질 않았다. 시공간 이동이라도 한 것 같았다. 백오십 킬로미터를 넘나드는 위태로운 운전도 남의 일 같았다. 나는 이딴 일로 죽지는 않을 거야. 수진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49.p)

 

 

  그녀는 애초에 한선이란 모래구멍 속에 빠질 마음이 없다. 그와는 이미 지나간 사이일 뿐, 함께 사막을 건널 사이는 아니니까.

 

 

그 만 멈추어 달라는 수진의 요구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페달을 밟으며 달려갔던 한선에게 분노와 두려움을 느낄 겨를도 없이 두 사람 앞에 또 다른 존재가 등장한다. 예기치 않는 상황의 연속이다. 그는 갑작스럽게 나타나서 공포분위를 만들어내며 음흉하게 농을 던지다 가차 없이 폭력을 휘두른다. 그 느닷없는 폭력 앞에 두 사람은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들이 차에 다다랐을 즈음에는 무슨 공포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가 벌써 와 있었다. 한선이 수진을 젖히고 앞으로 나서 뭔가 말하려는 찰나, 고무장화가 아까부터 손에 들고 있던 막대기를 벼락같이 휘둘렀다. 채찍으로 짐승의 등을 때리는 듯 한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한선이 모로 쓰러졌다. 고무장화는 쓰러진 한선의 머리를 거듭하여 찼다. 거센 발길질에 한선의 몸이 범퍼 아래로 구겨져들어갔다.

(56.p)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정해진 규칙처럼 잘 진행되어 가다가도 한순간 어디에서 날아오는지도 모르는 돌덩어리들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질 수 있는 곳이다. 언제 그러한 순간을 맞이하게 될지 혹은 그 순간 내 손을 잡고 함께 구급차에 올라가줄 사람은 누구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한선에게 수진은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그에게 수진은 느닷없이 찾아와 여행을 가자고 고집을 부리고, 그녀의 의사와 상관없이 먼 길까지 와서 그녀를 공포와 두려움 속으로 몰아넣는 고무장화와 다르지 않는 모르는 사람일 뿐이다.

 

 

전 안 가요.”

, 보호자 아니세요?”

대원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수진은 단호하게 다시 한번 반복했다.

정말 잘 모르는 사람이에요.”

(59.p)

 

 

  끝 난 인연은 이미 다른 길을 가는 사람이고 공포와 두려움을 몰고 온 사람에게 신고를 하거나 도망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

 

  김영하의 문장은 매끄럽고 거침이 없어 소설 속 상황이 바로 앞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생생하다. 로맨스와 코믹인가 하는 순간 무서움으로 바뀐다. 그것이 <여행>을 읽는 동안 더 공포감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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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링 인 폴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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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폴에 관한 이야기다. 더도 덜도 말고 딱. 내가 아는 만큼의 폴에 관한 이야기. 이것이 폴이라는 한 인간의 실체인가 하면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타인과 조우하고, 그 사람을 다 안다고 착각하며, 그 착각이 주는 달콤함과 씁쓸함 사이를 길 잃은 사람처럼 헤매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던가. 나는 그것을 폴에게서 배웠다. 폴 자신은 내게 그런 것을 가르쳐준 일 없노라고 고개를 저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므로 나는 폴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63.p)

 

 

  ‘는 사랑에 빠졌다. 폴에게 말이다. 그래서 나는 폴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그것은 폴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이다.

 

 

나는 도대체 어쩌다가 폴에게 빠져버린 것일까.

(63.p)

 

 

  ‘가 폴에게 빠져버린 것은 규칙적으로 일주일에 한두 번씩 만났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만나서 서로의 시간과 삶을 나누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공적인 업무로 만났고, 여섯 살 차이 나는 선생과 제자로 생각했다고 해도 그들이 나눈 시간과 익숙함은 무시할 수가 없다. 원래 사랑이라는 것이 만남을 가져야지만 시작할 수 있다. 물론 상대방이 서로 좋아하게 된다면 그야말로 기적이겠지만 큐피드의 화살이 어긋났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물이 흐르듯이 마음이 가는 곳까지 바라볼 수밖에. 그래서 폴의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결국 이것은 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는 폴을 만날 즈음부터 교사 일에 염증이 났다. 몸도 마음도 가장 지치고 힘들 때 옆에 있어준 사람 폴. ‘가 상대방의 힘든 이야기를 들어주며 상담을 해주었지만, 자신도 불연 듯 현재의 고충과 힘든 마음을 그에게 기대었을 것이다. 그런 만큼 폴과의 만남은 포근했고, 안정감을 주었으며 새로운 돌파구가 되었을 것이다. 자신의 마음과 같은 마음을 폴이 유리꼬에게 보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

 

 

…… 한국말도 사랑에 빠지다, 이렇게 말하는 거라면서요. 영어도 fall in love인데. 선생님, 저 사랑에 빠진 것 같아요. 언젠가 유리꼬를 향한 그의 사랑을 알게 됐던 날 느꼈던 상실감이 다시 가슴을 차갑게 베고 지나갔다.

(73.p)

 

 

  그전까지 확실하게 깨닫지 못했던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기에 는 더욱 참담했고, 고독했고, 괴로웠다. 그래서 몇 번 맞선을 보았고, 번듯한 직업을 가진, 머리숱이 적고 배가 나온 단정한 사람이 어떤 계기로 한국어 교사가 되셨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나는 어쩌다 한국어 교사가 되었는가를 스스로에게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폴을 몹시 그리워했다.

 

 

  평범하고 극적일 것 하나 없는 사랑의 서사를 작가는 담담하면서도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아버지의 고향집 벽에 두 부자가 오줌을 누는 장면을 보여주었을 때 아련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폴을 향한 의 마음은 이런 서정적인 장면을 지나 간다. 그리고 마음이 커지든 말든 폴은 그녀에게 유리꼬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가족들이 결혼을 반대해도 헤어질 수 없다는 것 등을 쏟아놓는다. ‘의 마음을 알았다고 해도 아마 폴은 그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서울에서 자신의 고민과 아픔을 들어준 사람은 유리꼬가 아니라 그녀였으니까. 그것은 두 사람이 쌓아놓은 시간과 비례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사랑은 참 잔인한 면이 있다. 사랑을 하는 쪽이나 받는 쪽이나 함께 한 시간 속에서 키워온 마음과 행동을 무시할 수 없다.

 

 

…… 설혹 그림책의 한 장면처럼 달빛 아래 함께 오줌을 눌 수 있었다 해도 현실은 언제나 우리의 바람과 달리 아름다운 엔딩을 갖고 있지 않은 법이니까.

…… 삶이란 신파와 진부, 통속과 전형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말해질 수밖에 없는 것들에 의해 지속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그러자 내게 실연을 안겨준 그가 더 이상 원망스럽지만은 않았다. 실연당한 여자의 자기 위안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어쩐지 그가 해준 이야기가 내 초라한 사랑에 대한 그만의 응답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

 

…… 한 번도 그럴듯하게 명명된 적이 없는 초라한 내 사랑.

(85~86.p)

 

 

  아주 짧은 세월 “Junchan”이라고 불렸다가 이 된 남자를 사랑한 나의 이야기는 그렇게 끝이 났다. 사랑은 끝났어도 인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므로 는 다시 누군가를 만나면 조금은 더 두려워하고, 진력을 내기도 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다 가끔 사랑에 빠졌던 이 생각나기도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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