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연인들
정영수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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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깊어 가던 11월 늦은 밤, 첫눈이 펑펑 내렸다. 눈은 습기를 머금은 채 3일 내내 너무나 많이 내렸고, 애꿎은 나뭇가지를 뚝뚝 부러뜨리기도 했다. 나는 갑상선에 이상이 생겨 입원한 동생과 함께 병원에서 4박 5일을 보냈다. 병원에서의 하루는 단조롭고 규칙적이어서 가지고 있던 정영수 작가의 <<내일의 연인들>>을 꾸준히 다 읽을 수 있었다. 눈 내리던 첫째 날은 일찍 병실 불을 끈 후 복도로 나가 자리를 잡고 앉아 <우리들>과 <내일의 연인들>을 읽었고, 다음 날 수술 직후 약 기운에 취해 깊이 잠든 동생 옆에서 <더 인간적인 말>과 <무사하고 안녕한 현대에서의 삶>, <기적의 시대>를 읽었다. 동생은 수술 후 바로 거동이 자유로웠기에 보호자로서 해줄 일이 그리 많지 않았다. 동생에게 무언가를 해주기보다는 함께 있어 주는 것이 중요했다. 옆에 있으면서 나는 나대로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이 필요했고, 그것이 소설을 읽는 일이었다. 나에게는 모처럼 휴식처럼 찾아온 조용한 시간이기도 했다.    

  

 무언가를 특별히 해주지 않아도 옆에 함께 있어 주는 것은 서로에게 위로와 힘을 준다. 특히 타인과 타인이 만나서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은 연인이라면 그 애틋함은 더할 것이다. 점과 점이 만나서 선이 되고, 선이 된 두 사람은 자기들만의 독특한 도형을 만들어 나간다. 비슷해 보이면서도 각기 다른 모습들, 그렇지만 또 뻔한 우리 사랑의 모습들. 이런 설레면서도 뻔한 사랑 이야기에 계속 마음이 가는 것은 모두의 연애가 그 안에서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사랑과 연애의 담론이자 다양한 연인들의 삶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데, 거창하기보다 오히려 궁상맞고 초라한 군상들의 모습이 밉지 않게 다가온다. 아니 안타깝고 안쓰럽다.     


 우리 매년 여름마다 여기 올까?”

 우리가 단 한 번도 이야기해 본 적 없는 다음 여름에 대해 이야기할 만큼 현수는 그곳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우리가 단 한 번도 이야기해 본 적 없는 다음의 다음또 다음의 여름에 대해 이야기할 만큼 현수는그리고 우리는 그날의 분위기가 좋았던 것이다그 이후 잠시 동안결코 길지는 않았지만 모두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분명하게 정적이 흘렀다매해 여름이란이런 아름다운 계절이 한 번도 아니고 두 번도 아니라 셀 수 없이 많이 지속될 여름이란 우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아득하고 눈부신 말이었다

<우리들>, 35.p     


 깨어질 사랑을 붙잡고 영원을 이야기하는 생명체가 인간 말고 또 있을까. 그러나 바로 그 점 때문에, 사랑은 깨지고 공허함만 남겠지만, 누군가는 슬픈 소망을 갖게 될 것이다. 혼자 남은 외로움 속에서도 지나간 나의 사랑은 어떠했는지 복기하고 기록하면서 사랑했던 나를 존재하게 할 테니까. 그러니 너무 아파하지도 후회하지도 말고, 상처를 준 이들에게는 조금 미안해하면서 살아가기를.      

  

 내가 한때 머물렀던 남현동 산자락의 조용하고 아늑한 빌라의 소유주는 선애 누나와 그녀의 남편으로두 사람은 그곳에서 오 년 정도 결혼생활을 한 뒤 파경을 맞이했다

 - <내일의 연인들> 45.p     


 ‘내가 한때 머물렀던 남현동 산자락으로…’로 시작하는 <내일의 연인들>은 그러니까 한때 누군가의 사랑이 시작되고 끝난 곳에서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연인이 살을 비비고, “넌 정말 대단해.”라는 말로 서로를 구원하며 시간을 보냈지만, 그 공간을 통해 사랑의 기대와 소멸을 지켜보며 자신의 존재를 찾아가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얼마 전, 지인의 조카가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살 수 있는 집을 구하면서 엄청난 부동산 시세를 알게 되었고, 청년주택이나 신혼부부 임대주택 등을 알아보다가 어느새 흐지부지되더니 연인과도 헤어졌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렇다고 연애나 결혼을 포기한 건 아니지만, 마음 놓고 두 사람이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이 연인들에게는 얼마나 매혹적이고 필요한 것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공간에서도 연인은, 부부는 헤어진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정말 어쩌다 헤어졌을까?”     

 창가에서 들여오는 풀벌레 소리가 점점 아득해졌고나는 문득 끝나지 않을 시간에 갇혀서 텅 빈 공간을 떠다니고 있는 사람이 된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왠지 그 밤은 영영 지나가지 않을 것만 같았는데그것은 내게 앞을 다가오거나 다가오지 않을 무수히 많은 행복한 시간들과 외로운 시간들의 징후처럼 느껴졌다나는 비스듬히 누운 채 아직 잠들지 않았을 지원의 윤곽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었다우리는 어쩌면 그들의 유령들이 아닐까생각하면서.

 - <내일의 연인들> 72.p     


 그래도 세상 모든 연인이 행복하기를 바란다. 시간이 그들을 잡아먹기 전에. 사랑이 변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하겠지만, 나는 사랑이 변한다기보다 시간을 통과한 연인이 변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세상에 영원한 것이 있을까. 그래도 많이 사랑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길.     


 지나간 나의 청춘 한때도 그러했었을 것이며, 앞으로의 삶 또한 별반 다르지 않겠지만, 우리가 사랑했던 순간만은 황홀하고 아름다웠을 테니까. 그 뒤 그리움이나 혹은 후회와 상처가 남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또 어떤가. 인간은 사랑하고 아파하며 살아가는 존재인 것을. 노래 가사처럼 사랑을 많이 한 사람이나 한 번도 사랑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사람이나 마음 깊은 곳 어딘가에는 한때를 함께 보냈던 존재에 대하여 미소 짓는 순간이 있을 것이며, 또 이미 지나간 시간을 아쉬워할 테니. 그러니 지금 사랑할 수 있을 때, 마음껏 사랑하길. 그렇지 않다면 사랑하기를 꿈꾸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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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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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는 해방이란 말을 참 많이 들었다. 나에게는 해방이란 단어가 낯설지 않다. 아니 무척 친숙하다. 중고등학교 시절, 내가 누비고 다녔던 서울의 동네 이름이기도 하고, 얼마 전에는 비슷한 제목의 드라마까지 재미있게 보았기 때문이다. 그전까지는 해방이란 단어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묶였던 것에서 풀리고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 정도로만 이해하고 살았다. 단어와 삶이 일치하지 않은 채 고정된 지식으로 자리했던 두 단어가 이 소설을 읽으며 새롭게 다가왔다. 초록색 바탕에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의 모습이 그려진 표지. 그 사람을 따라가다 보면 작가가 말하고 싶은 이야기를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책을 읽었다. 아버지를 묶고 있었던 것은 무엇인지, 그것에서 벗어나 가볍게 날아가는 한 사람의 해방 일지를 몰래 들여다보는 심정으로 말이다.


  이 소설에서 마음에 드는 것은 전체적인 구조였다. 소설을 구성하는 방식은 단순하다. 지리산 빨치산이었던 아버지가 돌아가신다. 아버지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살아가던 외동딸 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찾아온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을 통해 자신이 몰랐던 아버지의 다양한 모습을 알게 된다. 자신이 최대 피해자라고 생각하며 부모를 원망하고 살아왔던 는 친척들과 아버지의 지인들을 만나면서 한 존재로서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다. 슬픔을 대놓고 슬프다 말하지 않고 웃음과 비판을 담아 술술 풀어낸 작가의 내공이 느껴진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이 소설에 대중이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읽으며 웃고, 울 수 있었고, 한 사람의 생애를 통하여 우리의 현대사를 뒤돌아볼 수 있었다. 자유, 이념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인간을 신념을 갖고 살아가게 만드는 것일까 등등 다양한 질문을 스스로 던지게 해 주면서 말이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거대한 질문 앞에 서면 언제나 뒤로 밀릴 수 있는 가족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다.


가족이란 말을 들으면 그리움이 느껴진다. 백석의 시 여우난골족()’이란 시를 읽었을 때 느꼈던 마음, 뿌듯함과 저절로 지어졌던 미소를 기억한다. 명절을 함께 보내기 위해 큰집으로 모인 하룻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밤을 지새우며 나누는 들뜬 목소리, 여인네들이 만드는 음식 냄새가 늦게 잠든 화자의 영혼에 그대로 스며 들어가는 장면이 내 마음속에 깊게 자리 잡고 있다. 정겨운 소리와 향기, 그날의 분위기에서 유대감을 느끼고 그 안에서 보호 받고 있는 편안함을 잊을 수가 없다. 부모와 자녀, 친족의 관계는 개인에게는 정체성의 시작이고 힘이다. 이들은 유전자로 묶여 있고, 같은 성을 쓰고, 생김새와 성격이 닮아있다. 과거와 현재, 미래로 이어진 시간이 끊어지지 않는 끈으로 이어져 있는 것이다. 이런 가족을 어떻게 외면하고 부정할 수 있겠는가.

 

아버지의 평생을 지배했지만 아버지가 빨치산이었던 건 고작 사년뿐이었다. 고작 사년이 아버지의 평생을 옥죈 건 아버지의 신념이 대단해서라기보다 남한이 사회주의를 금기하고 한번 사회주의자였던 사람은 다시는 세상으로 복귀할 수 없도록 막았기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그래서 아버지는 고작 사년의 세월에 박제된 채 살았던 것이다.’ 252.p

 

 4년을 빨치산으로 살았던 아버지 때문에 와 그 가족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너무나 크다. 한 사람의 인생을 놓고 보면 4년이란 시간은 짧다고 할 수 있다. 그 시간이 아버지를 박제 된 인생으로 살게 했다. 그것은 아버지로 끝나지 않고 가족과 친척들의 삶에도 영향을 미쳤다. 아버지가 신념을 품고 살아낸 시간 때문에 그는 동생과 평생 원수가 되었다. 조카인 큰집 오빠는 원하는 대학교에 합격했지만, 입학을 거절 당했다. 아버지의 딸인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앞두고 헤어져야만 했다. 신념을 가진다는 것은 참 무서운 일이다. 그 신념을 지키고 살았다는 이유로 아버지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주고 말았다. 그로 인해 아버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와 역사라는 거창한 존재가 아닌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속박 당하고 거절 당하며 박제 된 시간을 살아야 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받는 원망과 냉대를 그대로 받아내며 견디는 시간 동안 아버지의 삶이 어떠했는지 외동딸인 나는 관심이 없다. 아버지의 인생이 있듯이 나의 인생이 있고, 그것은 각자가 알아서 챙겨야 할 몫이다. 그런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죽었다. 평생을 정색하고 살아온 아버지는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 아버지의 삶을 정리하는 것은 이제 딸인 '나'의 몫이 되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 앞에 많은 사람이 찾아온다. 이제 아버지와 그들이 그리고 내가 서로의 시간 속에 엉키었던 삶을 풀어내야 할 순간이다.

 

천수관음보살만 팔이 천 개인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도 천 개의 얼굴이 있다. 나는 아버지의 몇 개의 얼굴을 보았을까? 249.p


 자랑스럽게 여겼던 형에 대하여 떠벌렸던 이유로 할아버지를 잃고 두려움과 공포에 떨었던 어린 작은아버지는 형의 죽음 앞에서 지난 과거의 시간을 풀어야 했다. 미움과 원망의 대상이었던 아버지가 한때는 작은아버지의 자랑이었다니.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순찰 중에 숨어 있던 사람을 못 본 척 눈감아 주어 목숨을 건졌던 사람이 아버지의 말처럼 공무원이 되어 찾아오고, 심지어 학교 아이들에게 놀림 받고 왕따가 되어 담배를 피우며 방황하는 어린 소녀에게 아버지가 담배 친구가 되어 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자신이 알던 아버지는 누구였을까. 나는 아버지의 새로운 모습과 나약해진 노년의 마지막 모습을 알게 되며 화해하게 된다. 그에게 품었던 원망도 조금은 사라진 듯 하다. 그러고 보면 아버지의 해방 일지라기 보다 아버지에 대한 나의 해방 일지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나의 아버지도 5년 전에 병을 앓고 돌아가셨다. 성인이 된 후 아버지의 손을 오랜 시간 길게 잡아 보았던 때가 바로 그때였다. 지금도 길고 가느다란 아버지의 손가락과 온기 만큼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가족들과 아버지 이야기를 나눌 때면 내가 알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있어 깜짝깜짝 놀랄 때가 종종 있다. 우리는 자신이 보고 싶은 눈으로 사람을 보게 된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욱 그럴 수 있다. 그렇지 않더라도 우리가 함께 하는 시간을 통해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모습만 그 사람일 거라 착각할 때가 많다. 한 사람이 하나의 우주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가장 가까운 사람조차 평생 다 알지 못하고 헤어진다. 그러니 누구에 대하여 잘 안다고 말하는 것은 참 교만한 일이다.

 

아버지는 더 오랜 세월을 구례에서 구례 사람으로, 구례 사람의 이웃으로 살았다

인척이 구례에 있고, 칠십년지기 친구들이 구례에 있다. 아버지의 뿌리는 산이 아니다. 아버지의 신념은 그 뿌리에서 뻗어나간 기둥이었을 뿐이다. 기둥이 잘려도 나무는 산다. 다른 가지가 뻗어 나와 새순이 돋고 새 기둥이 된다.’ 253.p


 화장한 아버지의 뼈는 지리산에 전부 뿌려지지 않았다. 그곳은 아버지의 젊음과 신념이 묻혀 있는 곳이지 오랜 시간 아버지가 살았던 곳은 아니었다. 잠시 머물렀던 곳에는 그 만큼의 뼛가루가 조금 뿌려지고, 또 장소를 옮겨 아버지가 호흡하며 일상을 나누었던 곳곳에 뿌려진다. 육신을 벗어나 자유로워진 아버지의 혼은 해방감을 느꼈을까.


 시간은 흐른다. 사람들은 각각 자신만의 시간을 통과했고, 통과한 사연만큼 시간은 다르게 흘러간다. 그 안에서 이 땅의 현대사는 요동치고 우리의 삶을 흔들어 놓았다. 누구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이념들은 국토를 갈라 놓았고, 사람들의 인생을 바꿔 놓았으며, 증오와 불행을 심어 놓았다. 우리는 아직도 진정으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조금만 애정을 갖고 그 안을 들여다보면 아파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이념이 심어 놓은 유령의 껍질을 벗기면 가족과 친구와 이웃과 울며, 웃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다. 지난 과거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사람을 봐주길 바라는 마음이 글 속에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우리도 다양한 이념과 이야기에 자유로울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해방은 현재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말일지 모른다. 빨치산 이야기를 다루면서 이렇게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왔던 이야기가 또 있었을까. 그것 만으로도 이 책은 제 몫을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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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산책 연습
박솔뫼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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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걷는 우리들

<<미래 산책 연습>>/ 박솔뫼



미래를 사는 것은 어떤 것일까. 우리는 저마다 소망하는 것을 말하고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도 진짜 이루어질 수 있을까 의심한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나의 지나간 과거가, 현재의 삶이 지난 시간 우리의 미래였음을 깨닫게 된다. <<미래 산책 연습>>을 처음 읽었을 때는 조금 헷갈렸다. 갑자기 일본 호텔에서 부산으로, 주인공 수미는 과거, 현재, 미래 중 언제의 수미일까. 그러다 마지막 일본 호텔에서 다시 윤미언니를 만나고, 언니가 떠난 뒤 정승을 만나면서 우리의 삶이 결코 단편적이지 않다는 것을, 각자의 삶과 시간이 서로의 시간에 기대고 얽히면서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니 과거가 곧 미래이고 현재이며, 미래가 또 우리의 과거가 되는 것이겠지.



원하는 미래를 그리고 손으로 만져보기 위해 어떤 시간을 반복해야 할까. 나는 그것을 우선 어딘가에 써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18.p



나는 작가가 어딘가에 써두어야겠다고 생각한 미래를 한 장씩 읽는 것에 몰두할 수 있었다. 물고기 뱃속에서 함께 살던 친구들을 우연히 길에서 마주치고, 서로를 알아보고, 다시 서서히 물고기로 변했다가 다시 젖은 물방울이 되어 길 위에서 사라지는 수미와 동생을 위해 기도하는 윤미언니, 모욕을 모욕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최명환 등을 만났다. 수미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기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곳에 가서 살고 있을까. 서울에서 전세로 빌라에 살고 있는 수미는 부산에서 월세로 오래된 아파트를 얻은 뒤, 두 도시를 오가는 삶을 살아낸다. 그의 즉흥적인 행동과 추진력이 부러웠다. 자신을 아는 사람이 없을 것 같은 부산에서 그녀는 또다시 사람들을 만나고 인연을 맺었지만 말이다. 나또한 원하는 미래를 손으로 만지고 통과하기 위해 어떤 시간을 쌓고 밀도를 더해야 할지 고민하게 되었다.



수미가 부산에서 처음 만나 인연을 맺은 사람은 ‘최명환’이다. 남자 이름이라고 선입견을 갖게 했지만 그는 여자이고, 먹을 것을 챙겨주는 성녀라는 뜻의 ‘마르타’라는 세례명을 갖고 있다. 그래서인지 최선생을 만나거나 그녀의 집에 가면 다양한 음식을 대접받고, 의도하지 않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위로와 쉼을 얻는다.



많은 사람의 이름은 생각해보면 누군가 위에서 높은 곳에서 미리 정해준 것처럼 꼭 맞고 어울렸다. 우리가 이름과 사람을 함께 만나기 때문일까 나는 최명환과 그의 이름이 무척 잘 어울린다고 이유는 설명하기 힘들지만 그렇다고 생각했다. 60.p



우리는 어떤 이름을 갖고 있는가. 또 어떤 이름을 갖고 싶을까. 누군가 지어준 이름이 아닌 나 스스로가 갖고 싶은 이름은 무엇일까. 그러면서 나는 이름에 맞게 살고 있는지, 혹은 살고 싶은지도 생각하게 된다.



- 나를 위해서도 기도해줘.

- 한다. 하지.

- 뭐라고 하는데?

- 바르고 이웃을 생각하는 어른이 되게 도와달라고 한다.

- 더 멋있는 거 없나?

- 그리고 어.

- 뭐?

- 많은 것을 배우는 어른이 되게 도움을 달라고 한다.

- 그래. 그거 괜찮네. 103.p



나는 많은 것을 배우고 배를 타고 먼 곳으로 가는 어른이 될 것이라고 다짐하는 수미가 좋았다. 살아오면서 올렸던 나의 기도는 어떤 기도였을까. 나는 내가 드린 기도에 맞는 어른이 되었는지도 궁금하다. 어른은 되었지만 많은 것을 배우고, 좋은 어른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계속 품고 있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오면 수미는 머무르는 동안 대부분 먹고 걷는 일을 했다. 아파트 주변을 걷고 부산타워에 올라갔다가 그 주변을 또 걷고 시장을 걷고, 미문화원 주위를 걸었다. 다른 동네와 성당을 찾아 걷고 또 걷다가 커피와 빵을 먹고, 술을 마신다. 옆집에서 가져다 준 떡을 먹고, 차이나타운의 식당에서 데운 두유와 튀긴 빵을 먹는다. 통닭을 먹고, 감기에 걸리자 함께 감기에 걸린 최선생 집에 가서 죽과 생강차와 소고기뭇국을 먹는다. 소설을 읽다보면 먹고 기도하고 걷는 주인공이 보인다. 무엇이 먼저인지 알 수 없지만 수미가 살아가는 일상 곳곳에 걷고 기도하고 먹는 일들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최선생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기도하나 잠시 생각했고 또다시 조용히 자리를 잡고 기도하는 사람들을 의식하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나는 겸손한 마음으로 천국의 시간을 반복해보고 그 막연한 시간은 미래임에도 미래처럼 여겨지지 않았고 마치 슬픈 과거 같았다. 140.p



생명을 가진 존재들에게 그것만큼 강력한 일이 또 있을까 생각했다. 걷기 위해서는 먹어야 하고 먹기 위해서는 살아가야 하며, 영혼이 있기에 자신과 또 다른 누군가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살아가는 것이 그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된다. 생명력 가득한 행위를 통해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다.

며칠 전, 전두환씨가 사망했다. 그 순간 내게 현실과 소설이 하나가 되어 눈앞에 펼쳐졌다. 그에게 전 대통령이라는 말을 해야할지 아니면 군부 독재자라는 표현을 써야 할지 아니면 전 대통령으로서 군부 독재를 유지하기 위해 한 도시의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한 인물이라고 써야할지, 모두 사실이고, 그에 대해 알고 있으면서도 입으로 꺼내고 글로 정리하기가 쉽지 않다. 그의 집권으로 수많은 누군가가 엄청난 고통과 아픔을 겪으며 죽었고, 과거와 현재, 미래에도 그것은 계속 되고 있다. 그는 자신이 90세의 이런 죽음을 맞이하게 될지 알고 있었을까. 죽어서도 사과하지 않고, 죽어서도 영원히 많은 사람들에게 미움과 증오를 품게 한다는 것을 알았을까. 하필 그는 2021년 11월, 내가 이 작품을 읽고 있을 때 죽어서 1982년의 광주를 찾아보고 생각하게 만들었을까. 그러니 미래는 과거이고 현재이며 다시 현재와 과거와 미래가 되는 것이다.



무섭고 괴롭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날들이 이어졌는데 그래도 시간은 흘렀고 그럼에도 즐거운 날들이 있었다. 204.p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몇 년 전부터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에 대해 소설로 쓰고 싶었다고 했다. 쓰고 싶은 것을 가슴에 품고 끝까지 써내려간 작가의 시간과 그녀가 만들어낸 주인공을 따라 함께 걷고 먹고 기도했던 나의 시간을 생각했다. 작가와 독자는 현재에 살아서 현재의 시간에 작품을 통해 만났고, 또다시 각자의 삶을 살아가며 서로 다른 미래를 만들어 가게 되겠지. 내가 원하고 바라며 기도하는 나의 모습이 궁금해졌다. 그리고 나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반복해야 할 시간에 대하여 생각하고 써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말하고 쓰는 행위에 힘이 있다는 것을 믿으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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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문진영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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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의 입장에 서본 사람은 그 과정의 고단함과 치열함을 알기 때문에 함부로 혹평을 할 수가 없다. 아마추어 소설가의 소설 속에도 마음에 남아서 맴도는 문장이 있기에 나는 독서를 할 때는 형광펜이나 플래그 등을 준비한다. 스치고 지나가는 문장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2021년 김승옥 문학상 수상작품집에도 꽤 많은 색깔의 플래그가 붙여졌다. 반은 작품 속 문장이었고, 나머지는 작가노트에 적힌 작가의 고백이었다.

- 어쩌면 어떤 찰나들은 너무도 결정적인 동시에 사소해서, 눈치 채지도 못한 사이 내 안쪽 어딘가에 박혀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어떤 사람이 되었다는 것. 우리는 이런 우리가 되었다는 것. 혹은 되어버렸다는 것. 내가 그 찰나들을 붙잡아 기록해둔다면. 나의 소설쓰기가 그런 작업이 된다면 어떨까 생각했다. 33.p

문학상 수상작품을 읽을 때는 작품뿐만 아니라 작가의 말을 눈여겨본다. 문진영 작가의 고백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마음에 남았다. 얼마나 많은 경험들이 내 마음속에 숨어있을까. 나도 찰나의 선택 때문에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잊혀 지지 않는 친구가 있다. 그때 나는 스무 살이었기 때문에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기보다 나의 자존심을 더 중요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때로 돌아가 나의 솔직한 마음을 전하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설을 쓰고 읽는 것인지도 모른다.

<두 개의 방>을 읽으면서 중학교 1학년 때, 은미처럼 늦잠을 자다가 1교시가 지나고 등교를 해서 반 전체를 즐겁게 해주었던 친구가 생각났다. 호텔지배인이 되어 있는 멋진 내 친구는 지금도 잠이 많아 출근할 때 늘 힘들어 한다. 작품 속 한 문장만으로 몇 년 동안 만나지 못한 친구를 소환해낼 수 있다니. 그뿐만 아니라 두 사람이 함께 걸어가며 이야기를 나누는 종로와 북아현동, 광화문과 신촌 거리 곳곳에는 나와 친구들의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그들의 발길이 닿는 곳의 골목들과 카페, 상점 거리 곳곳이 앞에서 보는 듯 눈에 선하다. <두 개의 방>을 읽으며 잊고 있었던 지난날의 추억을 떠올리고 많이 웃었다. 소설이 있음직한 이야기라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이야기 위에 나의 이야기를 덧씌울 수 있기 때문인가 보다.

솔직한 심정을 말한다면 수상작보다 내게 더 와 닿은 작품은 정용준의 <미스터 심플>과 손흥규의 <지루한 소설만 읽는 삼촌>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녁에 무엇을 먹을까 함께 고민하던 연인이 곧이어 세상에 없는 사람이 되고, 어학연수를 떠난 부인과 아들에게 이별을 통보받고 외면당한 뒤, 주어진 시간을 혼자 통과해야 하는 사람은 그 상황 속에서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소설은 질문을 던지고 해결책을 알려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정답은 없지만, 각자만의 해답이 있는 것처럼.

- 자기 연민에 빠진 사람은 되고 싶지 않다. 상처받은 이의 얼굴을 하지 않을 것이다. 할 일을 할 것이고, 잘 자고, 잘 먹고, 잘 지낼 것이다. 215.p <정용준/미스터 심플 중>

그래서 자기의 일상을 지키고 삶의 궤도에서 이탈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두 사람이 보였다.

<지루한 소설만 읽는 삼촌>의 아버지는 가족의 안위와 생계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그 시절 가장들은 가족을 희생시키면서까지 가정을 지키려는 모순을 안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모르고 살았다. 그래서 나는 삼촌보다 오로지 먹고 사는 것과 가족의 생계밖에 모르는 아버지의 시간 속에 남겨져 있는 어린 시절 에피소드가 참 좋았다. 그런 형에게도 집나간 이복동생을 찾아 헤매는 순수한 모습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해주니까. 지금 우리가 바라보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그것이 전부라고 단정 지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윤대녕의 <시계입구가게앞검문소>는 읽는 동안 내내 반가웠다. 대화부분에서 젊은 사람들의 대화가 맞나 하고 의아해했지만, 젊은 감각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애써 문장을 다듬는 작가의 노력이 느껴졌다.

그 외 <완전한 사과/ 안보윤>도 기억에 남는다. 타인에게 해를 입힌 나의 가족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지. 나의 가족이라 해서 무조건 잘못을 덮어줄 수 없다는 것. 그뿐 아니라 가족은 보이지 않는 뿌리로 깊이 이어져 있기에 한 사람이 느끼는 고통을 다함께 공유할 수 밖에 없다는 것에도 공감한다. <완전한 사과>를 비롯하여 단편집<<소년7의 고백>>에서 보여주는 안보윤 작가의 세상을 향한 시선과 치열함에 독자로서 존경심을 느낀다.

<나의 사랑스럽고 지긋지긋한 개들>을 읽으며 제목이 우리의 삶을 나타내는 메타포로 다가왔다.

- 우리는 이루는 모든 것들이 여전히, 낯설고 우스꽝스럽다. 낯설고 우스꽝스러워서 곧잘 웃는다. …… 너희는 냄새로 시간의 변화를 알아채는 종족이니 보이지 않는 눈으로도 들리지 않는 귀로도 불편한 다리로도 더 많이 보고 더 많은 것을 듣고 더 먼 곳까지 갈 수 있어. 갈 수 있다. 나는 웃고,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생명체를 주시하면서 기억하면서 길을 간다. 나는 길을 간다. 예정된 상실을 조금씩 미루면서. 나는 길을 간다. 나의 사랑스럽고 지긋지긋한 개들과 함께. 196.p <나의 사랑스럽고 지긋지긋한 개들 중>

<우리집 여기 얼음통에>에서는 가난한 두 젊은 남녀의 일상이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추위와 오래된 집이 두 사람의 현실같았다. '두 사람의 지금 현재의 삶'이 여기 얼음통 속에서 꽁꽁 얼어버렸고, 얼마 안 있으면 곧 터져버릴 것 같은 위기감을 느꼈다.

- 지난겨울 그토록 춥지만 않았어도 한 시절의 고비를 극복하고자 한 사람을 선택하는 일따윈 하지 않았을 텐데. 그런 식으로 사랑이 줄줄 새도록 내버려두진 않았을 텐데. 273.p <우리집 여기 얼음통에>

지금도 수많은 작가들이 그들만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사람들의 일상과 다양한 경험, 인생 등을 문장 속에 녹이며 계속 쓰고 있을 것이다. 작가의 작업은 오롯이 혼자만의 힘으로 마주한 시간을 통과하며 계속 나아가야 하는 것이기에 쓰는 동안 외롭거나 힘들 수 있다. 그래도 쓰기를 포기할 수 없어 밤새도록 자판을 두들기고 있을 작가들을 응원한다. 무언가를 열심히 쓰는 모든 사람들을 말이다. 소설을 읽으며 우리가 어떤 존재들인지 한 번쯤은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할 수 있기에. 다음해에도 기꺼이 읽어줄 마음을 품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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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1-11-03 00: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읽으면서 인덱스 많이 붙이셨네요.^^
문학상 수상작들은 장편이 적지만 여러 작가의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점이 좋은 것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 hope&joy님, 좋은 밤 되세요.^^
 
작별하지 않는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장편소설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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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무탈하시길 빌며, 작별하지 않으며

감사를 담아, " 2021년 가을에 한강

책을 펼치니 강물이 흘러가는 글씨체로 무탈하시길, 작별하지 않기를 바라는 작가의 글씨가 써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한강 작가의 작품을 읽으며 작가란 참 힘든 일을 하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윤동주 시인이 쓴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줄을 알면서도'라는 문장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때때로 작가는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 보고 그것을 이야기해 주어야 하는 명을 받은 사람이란 생각을 했다. 주로 책을 읽었던 늦은 밤에서 자정을 넘기고 잠자리에 들면 나도 모르고 등이 시리고 떨려오곤 했다. 그만큼 한강 작가의 문장을 차분하면서도 한기가 서늘한 무언가를 남긴다.

처음 1부를 읽을 때는 끈적끈적한 더위가 온몸을 휘감았다. 땀과 더운 공기 속에서 차가운 물로 샤워를 하지만, 그 차가움은 곧 더위 속으로 끌려가고 또다시 땀범벅 속으로 끌고 간다. 주인공이 그 속에서 숨이 막히고 힘들 때마다 그것을 읽는 독자도 힘들고 숨이 막혔다.

욕실을 나와 젖은 옷을 벗고, 아직 버리지 않은 옷 더미 속에서 쓸 만한 걸 찾아 입었다. 만원권 지페 두 장을 여러 번 접어 호주머니에 넣고 현관을 나섰다. 가까운 전철연 뒤편의 죽집까지 걸어가 가장 부드러워 보이는 잣죽을 시켰다.. 지나치게 뜨거운 그걸 천천히 먹는 동안, 유리문 밖으로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의 육체가 깨어질 듯 연약해 보였다. 생명이 얼마나 약한 것인지 그때 실감했다. 저 살과 장기와 뼈와 목숨 들이 얼마나 쉽게 부서지고 끊어져버릴 가능성을 품고 있는지. 단 한 번의 선택으로.

인생과 화해하지 않았지만 다시 살아야 했다. 15.p

그러다 또다시 친구 인선의 병문안을 가고, 그곳에서 손가락이 절단된 친구의 고통과 3분마다 날카로운 주사바늘이 가느다란 손가락을 찔러야 하는 것을 고스란히 바라본다. 크고 작은 고통이 두 사람 곳곳에 배어 있다. 사람들의 삶을 비집고 자리잡는다.

다시 2부는 제주도의 눈과 바람, 어둠속 공포와 밀려오는 두통 때문에 시공간을 초월하며 지금 경하와 인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마주하게 된다. 경하가 인선의 부탁을 받고 제주 중산간에 위치한 집까지 찾아가는 여정 마저도 독자를 힘들게 한다. 마치 캄캄한 어둠과 추위를 견디며 낯선 제주도 산속을 헤매는 듯한 두려움이 계속 가시질 않았다.

죽으러 왔구나. 열에 들떠 나는 생각한다.

죽으려고 이곳에 왔어.

172.p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일까. 죽이려고 하는 자와 끝까지 살기를 바라는 사람들 사이에 어떤 세계가 존재하는 것인가. 가리려고 하는 사람들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한다. 아무리 정당성있는 폭력이었다고 주장해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 그래서 그들의 존재를 알리고, 왜 죽어야 했었는지 말해주어야 한다. 그것이 애도이고 살아있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 중에 하나이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나와 상관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몰랐다고 외면하고 그래서 앞으로 잘 처리해 나가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사건이 아니라 사람을 생각하게 된다. 왜 인선의 엄마는 오빠를 잃어야했을까. 그 작은 체구로 어떤 진실을 찾아내려고 애썼는지 같이 들여다 봐야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보낸 시간에 기대어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아주 찰나의 시간일지라도 그것은 나와 내 가족, 친구, 이웃에게 영향을 미치고 나에게 돌아온다. 경하가 잡지사 일을 하다가 인선을 만나 위기의 순간을 넘기고, 손을 다친 인선이 이웃의 할머니 모자의 우연한 방문으로 서울 병원까지 오게 되고, 오전에 서울에서 씨름하던 주인공이 인선의 새를 구하기 위해 한밤중 제주도 숲속을 헤매기까지 우린 모두 알 수 없는 존재와 시간 속에서 서로 연결되어 오늘을 살고, 내일을 살아간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또 살아가지만 영원히 잊을 수도 작별할 수도 없는 이유이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목에 위로를 받는다. 놓아주어야 할 때가 되면 저절로 놓아지겠지. 날아갈 때가 되면 훨훨 날아가겠지. 그때까지 작가와 독자는 아프게 쓰고, 읽으며 힘없이 죽어간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게 될 것이다. 한강의 소설은 거기까지 나아가게 하는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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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11-05 16: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리뷰 당선작 축하드려요!

hope&joy 2021-11-05 16:39   좋아요 2 | URL
고맙습니다.^^

서니데이 2021-11-05 18:1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hope&joy 2021-11-05 18:52   좋아요 2 | URL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책 많이 읽고 리뷰 남기겠습니다.

초딩 2021-11-07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 축하드립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hope&joy 2021-11-07 12:51   좋아요 0 | URL
네ᆢ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즐거운 하루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