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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열정 (무선)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평점 :
자신이 경험한 강렬하고 짜릿한 경험을 이처럼 확실한 문장으로 표현해 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말로 쏟아낸 것들은 쉽게 사라지지만 글은 남아서 그것을 복기하고 뒤돌아보게 만든다. 과거 자기의 생각과 상대편을 향해 가졌을 열정적인 감정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주인공의 그 감정은 자신을 옭아맨 줄이었지만, 그로 인해 오히려 달콤한 절망을 느꼈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몇 번이나 사랑을 나누었는지 헤아려보았다. 사랑을 할 때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우리 관계에 보태어진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동시에 쾌락의 행위와 몸짓이 더해지는 만큼 확실히 우리는 서로 조금씩 멀어져가고 있었다. 우리는 욕망이라는 자산을 서서히 탕진하고 있었다. 육체적인 강렬함 속에서 얻은 것은 시간의 질서 속에 사라져 갔다. 17.p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생각해 보면 많은 부분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 순간 순간 변하는 인간의 감정과 모습을 이렇게 기록으로 남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식적인 가면을 벗겨낸 것 같다.
이 책을 읽을 때는 도덕적 판단이 유보된 상태에서 읽어야 한다고 미리 앞부분에서 말하고 있다. 인간의 삶을 유지 시켜주는 것 중 하나인 도덕과 윤리의 잣대는 잠시 내려놓고 작품에 충실해서 읽어나간다면 인간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욕망이란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다. 누구나 수십 번 머릿속으로 상상한다. 감정이 이성을 통제할 수 없을 만큼 화끈하고 열정적인 사랑을 하고 싶다고. 일상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 확률은 낮지만 말이다. 여기에서 한 발 더 깊이 다루어야 할 것은 그런 감정을 갖고 사랑을 나누었던 시간도 언젠가 과거 속으로 사라져 가고 지워진다는 것이다.
어느덧 4월이다. 이제는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곧바로 A의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친 구들과 이야기를 한다거나 영화를 본다거나 외식을 하는 등 ‘일상의 작은 기쁨’을 누려보겠다는 생각에도 거부감을 덜 느끼게 되었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열정의 시간을 살고 있다(잠에서 깨어나도 더 이상 A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공언하게 될 언젠가에 비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예전처럼 그렇게 내 일상을 집요하게 차지하고 있지는 않다. 56.p
그러면 무엇이 남는 것일까. 나는 여기에서 작가의 글쓰기에 집중하게 된다. 순간의 감정은 강력하나 사라지기 쉽다. 그것을 붙자고 기록을 남긴다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가 된다. 글을 남기는 과정에서 또 한 번 격한 감정을 느끼고 당장 밖으로 뛰어나가 그를 찾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것을 누르고 한 단어 한 단어 글을 쓴다. 기록을 남긴다. 자신이 느꼈던 욕망과 사랑에 불타던 순간의 느낌을. 그것은 과거의 감정일 수도 있고,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순간의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의 마음을 또다시 괴롭게 하거나 위로하게 될 것이다. 글은 살아서 움직일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은 “당신, 나에 대해 책을 쓰진 않겠지.”하고 말했었다. 나는 그 사람에 대한 책도, 나에 대한 책도 쓰지 않았다. 단지 그 사람의 존재 그 자체로 인해 내게로 온 단어들을 글로 표현했을 뿐이다. 66.p
우리는 때로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지만, 사람을 사랑하는 감정을 사랑할 수도 있다. 사랑을 하는 시간을 통과한 사람들은 더 이상 예전의 자신이 아니다. 무언가로 꽉 채워진 내면의 생각을 표현해내거나 다른 이들이 표현해 내준 것을 끊임없이 찾아다닌다. 그것을 자기의 것과 비교하고 공감하며 나만의 것으로 바꾸어 채워간다. 긴 여행을 하고 돌아온 사람들처럼.
나는 남녀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려는 것이 아니다. …… 우리 관계에서 그런 시간적인 개념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나는 그저 존재 혹은 부재만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언제나’와 ‘어느 날’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하면서 열정의 기호들을 모으고 있었다. 그 기호들을 한데 모으면 나의 열정을 좀 더 사실적으로 그려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을 열거하거나 묘사하는 방식으로 쓰인 글에는 모순도 혼돈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글은 순간순간 겪은 것들을 음미하는 방식이 아니라, 어떤 일을 겪고 나서 그것들을 돌이켜보면 남들이나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방식인 것이다.…… 글을 쓰는 데 내게 미리 주어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내가 열정적으로 살 수 있게 해주는 시간과 자유일 것이다. 26~27.p
인간은 감정적이고 위선적이며 불완전한 존재이다. 그런 인간이 존재에 대해 고민하고, 가난을 극복하며 윤리와 도덕을 논한다. 우리의 삶이 역설이고 아이러니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