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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좋아하면 생기는 일
서필훈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12월
평점 :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단순히 감정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 감정이 육체와 정신에 에너지를 만들어 내고 자꾸 행동하게 만든다. 본인도 알고 있다. 지금 자신이 하는 행동들이 다른 사람들 눈에는 미련하고 어리석게 보인다는 것을. 그래도 멈출 수가 없다. 눈앞에 뻔히 고생길이 있는데도 그것을 향해 돌진한다. 그러나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물론 그 행복 속에는 새롭게 만난 사람들과 환경, 그로인한 온갖 어려움과 고난도 포함되어 있다. 그래도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좋아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점점 자신의 세계를 확장시켜 나가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알 수도, 만날 수도 없었던 다양한 세상을 접하고 그 전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되어 나아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참 운이 좋고, 행복한 사람이다.
매일 반복됐던 일상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다가온 한 순간, 그 순간을 받아들인 사람은 빠져 나갈 수 없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삶에서 벗어나 다른 인생을 살아가야만 하는 운명이 된다. 그러니 그 속에서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 강하게 볶은 원두를 융 필터로 진하게 내린 커피였는데 흔치 않은 노란색 잔에 담겨 있었다. 커피는 육수처럼 걸쭉하고 표면에는 기름이 둥둥 떠 있고 색깔은 검다 못해 보랏빛이 감돌았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한 모금 마셨는데 그걸로 끝이었다. 호로록 쩝쩝. 나는 인생을 들이켰다. 그리고 다시는 그 커피를 마시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4.p
그렇게 커피의 세계로 들어간 저자는 보헤미안 커피숍에서 일하게 되었고, 커피에 대해 가르쳐 주는 많은 사람들과 스승을 만났으며, 커피 산지를 찾아 하늘을 날아 세계를 떠돌아 다녔다. 그 뒤 힘들게 연남동 전통시장 안에 작은 공방을 열고 ‘커피리브레’를 시작했다. 빚과 경영난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좋은 커피를 찾아 전 세계를 돌고 돌았다. 그 열정이 대단하다. 커피를 진짜 좋아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커피’란 무엇인가. 내게 커피는 검은 액체로 인식되고 있었는데 책을 읽으며 생각이 바뀌었다. 커피는 수많은 사람들의 손길과 땅과 하늘이 도와가며 만들어내는 농작물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자라지 않는 농작물이기에 일단 눈에 보이지 않고, 재배와 무역 과정 또한 알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평생 모르고 편하게 기호식품으로써 커피를 음용할 수 있다. 공정무역이 많이 진행되고 있지만 그 이면의 불편한 진실은 괜히 들추고 싶지 않은 것이 소비자로서의 솔직한 마음이다.
오늘 아침 맛있게 마신 커피가 어디서 왔는지 누가 어떻게 생산했고 정당한 대가를 받았는지, 커피 생산자의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제때 밥을 먹고 지내는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오랫동안 우리는 커피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미처 마주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63.p
그러나 좋은 원두를 찾아 소비자에게 공급해야 하는 저자에게는 커피를 생산하고 가공하며 유통하는 모든 사람들, 또 그 커피를 맛있게 마셔주는 사람들 모두가 소중한 존재이다.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또 소통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고고학자는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아 끊어졌던 이야기를 잇는 작가이자 오랫동안 잊힌 존재들의 얼굴을 복원하는 기술자다. 나도 그렇게 커피를 재배한 농부들부터 커피 가공소의 노동자, 커피를 항구까지 실어 나르는 트럭 운전사, 항구 노동자와 배의 항해사, 커피를 내리는 바리스타까지, 한 잔의 커피가 누군가의 손에 들리기까지의 거기 담긴 모두의 얼굴을 ‘복원’해보고 싶었다. 15.p
생산자가 자신의 노동으로부터 소외되지 않고, 소비자가 자신의 소비 행위가 가진 힘과 가치에 귀 기울일 수 있게 이어주는 쌍방향 메신저의 일, 내가 꿈꾸는 소통이다. 19.p
우연히 마시게 된 커피 한 잔이 저자를 참 멀리도 데려다 놓았다. 그의 꿈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커피 속에는 참 많은 것이 담겨 있다. 그 중에 가장 마음에 남는 것은 ‘커피는 역사다’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매일 마시고 있는 커피 한 잔 속에는 안타깝지만 다국적기업의 횡포와 선진국들과 종교까지 가담한 학살로 인한 피가 담겨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유지하고 오늘을 살아가기 위해 노동의 땀을 흘리고 있는 사람들은 생업으로서 커피를 재배하기 위해 땀을 흘리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직업으로서 혹은 음료로서 커피를 좋아하는 마음과 커피를 생산한 사람들의 역사, 문화, 사회경제적 상황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서로 다르지 않다고 믿는다. 적어도 나에게 무엇을 좋아한다는 의미는 그렇다. 194.p
지구 반대편에서 내가 마시는 커피나무를 재배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땀을 흘리고 있다. 그것을 재배하여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고, 가족을 부양한다. 저자가 한 잔의 커피를 마시다가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나아갔던 것처럼 나 또한 호기심으로 읽게 된 이 책으로 인해 커피 속에 담긴 많은 사람들의 노고를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언젠가는 바로 잡혀야 하는 공정과정과 무역에, 날로 심각해지는 온난화 현상과 기후 변화에 마음이 쓰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것은 돌고 돌아서 다른 모습으로 내게 찾아올 문제일 수도 있기 때문에.
커피는 맛있지만, 엄연히 자본주의의 상품이고 나는 그저 장사꾼이다. 사실 내 머릿속은 온통 일 걱정뿐이다. 아주 가끔, 그곳에서 마주했던 커피 밭과 커피 기르는 사람들의 얼굴이 생각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곤 한다. 세상 속에서 커피가 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이며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내가 산지를 떠돌건 한국에서 커피를 팔건 모든 것은 이 질문에 답하는 과정일 뿐이다 그래도 커피를 좋아한다. 정녕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노력과 책임이 필요한 일인 것 같다. 226.p
백신을 접종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코로나19는 전 세계를 혼란 속에 빠뜨리고 있다. 이 시기가 지나간다고 해도 예전의 삶으로는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애써 일상을 유지하고, 곧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우리의 삶은 커피의 맛처럼 달기도 하고 쓰기도 하다. 커피 맛을 잘 모르는 사람은 그 쓴 것을 왜 마시냐며 타박하지만 커피의 맛에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다. 예전에는 자판기의 달달한 커피를 좋아했다. 아마 달달한 커피보다 짧게 주어진 여유로운 시간을 좋아했을 것이다. 지금 나는 원두를 갈아 직접 내려 마시는 달고 쌉싸름한 커피의 맛과 오묘한 향기까지 즐기는 커피애용가이다. 나 또한 커피와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제대로 대우받기를 원한다.
바쁜 사람에게도, 백수에게도 하루는 공평하게 빨리 지나간다. 하루를 보내며 대단한 의미나 보람을 좇지 않는다. 미래를 준비한답시고 오늘의 고통을 감내하거나 지금의 즐거움을 유예하고 싶지 않다. 나는 그저 오늘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다. …… 일주일에 두세 번 장바구니를 옆에 메고 시장에 가서 채소와 과일을 사온다. 저녁은 심혈을 기울여 최대한 맛있게 해 먹으려고 한다.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지나가는 날들이지만 그래도 하루를 살아냈으니 작은 위로를 받아 마땅하다. 244.p
커피를 마시다 보면 바쁜 일과 속에서도 잠시 여유를 찾게 된다. 또 현실 너머 엉뚱한 순간을 상상하거나 즐거운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래서 커피가 좋고 끊을 수 없다. 맛있는 커피를 매일 마시고 싶은 이유이며 그럴 수 있는 일상이 기쁘고 고맙다. 이 기쁨이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골고루 돌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