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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과 물 ㅣ 배수아 컬렉션
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평점 :
<뱀과 물>은 처음 읽은 배수아의 작품이다. 작품에 대한 호불호가 확실하고 마니아층이 형성될 만큼 영향력 있는 작가이기에 호기심을 갖고 소설을 읽었다. 소설 속 이미지들은 강렬하면서도 담대하고 섬세하다. 전통적 서사구조를 벗어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화자가 소설을 이끌어간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누군가 내게 20센티미터쯤 되는 뱀을 건네주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도 뱀은 징그러웠고 받자마자 손에서 놓쳐버렸는데 그것이 목옆을 스르륵 지나가는 섬뜩한 기운을 느꼈다. 그만큼 이 작품은 메시지보다 이미지가 더 크게 다가왔다.
“난 너를 알아. 1972년에 넌 전학생이었잖아. 우리는 같은 책상에 나란히 앉아서 수업을 들었고……”
소설은 나를 안다는, 내가 모르는 사람에게 전화를 받는 것부터 시작된다. 전화를 받은 ‘나’인 김길라가 어린 소녀가 되어 전학서류를 건네러 가고 여교사 김길라를 만난다. 그리고 운동장 가운데에서 늙은 길라를 만나며 끝이 난다. 시간을 초월한 세계 안에서 방황하고 폭행당하며 현재를 벗어나고자 하는 많은 김길라가 중심에 서있다. 이들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등장하고 이야기하고 꿈을 꾼 뒤 죽어간다. 한 사람 안에는 그 사람이 살아온 날 만큼 부딪치고 깨지면서 쌓여진 역사와 아픔, 고통이 있다. 콜레라와 같은 전염병, 폭탄과 핵무기, 전쟁 그리고 무서운 소문들 앞에서 우리들은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고 떨게 된다. 그런 인간의 심리 속으로 길라가 되어 한없이 들어가다 보면 물과 뱀에게 둘러싸여 악몽을 꾸는 여교사 김길라를 만날 수 있다. 물과 뱀은 여교사 김길라에게 끔찍한 폭력을 휘두르고 그 안에서 빠져 나오 지 못하는 그녀는 마지막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그들의 존재를 마주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것만은 제발 안 된다고.
날 죽여줘. 소리도 없이. 직관도 없이.
하지만 뱀과 물은 여교사를 죽이지 않았다. 아니, 그러기 전에 그들은 마지막 의례를 치르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여교사의 양쪽에서 나란히 서서, 천천히 마스크를 벗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여교사는 극도의 패닉에 빠졌다. 지금까지의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금까지는 자비로운 전희에 불과했다. 그녀는 제정신을 잃었다. 머리를 움켜쥐고 쓰러지며 발광했다.
안 돼, 안 돼! 마스크를 벗으면 안 돼! 그건 안 돼! 너희들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 날 계속 때리고 모욕해! 날 강간하고 살해해도 좋아! 날 고기 가는 기계에 넣고 갈아버려! 내 껍질을 벗기고 피와 기름을 끓여서 비누로 만들어버려! 하지만 제발 부탁이니 마스크는 벗지 마! 마스크는 벗지 마! 내가 너희의 얼굴을 보게 하지는 마! 너희가 누구인지 알게 하지는 마! 216~217.p
꿈속에서 여교사 김길라는 뱀과 물에게 자신의 육체와 영혼을 내던져 준다. 그것만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처럼. 그러나 그들이 마스크를 벗고 얼굴을 드러내려고 했을 때 제발 그것만은 감당할 수 없다며 멈추어 달라고 애원한다. 그녀가 두려워했던 것은 무엇일까? 어쩌면 폭력을 당하는 ‘나’가 폭력을 휘두르는 ‘나’와 만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은 아닐까? 고통의 가장 밑바닥, 그 근원을 마주대할 용기가 우리에게는 없다. 아니 그것과 마주하는 것은 자신을 분해시키는 가장 큰 형벌일 것이다. 우리는 예의와 규칙, 법과 상식 안에서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지만 어떤 상황에서 자신도 몰랐던 악의가 튀어나오고, 끔찍한 상상을 하며, 믿을 수 없는 일을 저지르는 모습들을 많이 보아왔고, 또 잊었다.
어린 시절. 그것은 막 덤벼들기 직전의 야수와 같았다고 여교사는 생각했다. 모든 비명이 터지기 직전, 입들은 가장 적막했다. 시간과 공기는 맑은 술처럼 여교사의 갈비뼈 사이에 고여 있었다. 염세적인 사람은 일생에 걸친 일기를 쓴다. 그가 어린 시절에 대해서 쓰고 있는 동안은 어린 시절을 잊는다. 갖지 않는다. 사라진다.
223.p
<뱀과 물>을 읽다가 미궁 속을 헤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계속 읽고 무슨 말이라도 쓰고 싶었다.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내 안에 있는 것 중 내가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생각하면서 말이다. 내 안에도 수많은 내가 존재하니까. 그렇지만 나또한 내안의 어두운 무언가를 마주하기란 두렵고 무섭다. 나를 바라보는 나의 눈이 제일 무섭다. 뱀과 물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