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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 ㅣ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손홍규 지음 / 교유서가 / 201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크리스마스 이브 날, 손홍규의 두 번째 산문집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과 노트북을 들고 카페로 갔다. 오늘만큼은 많은 커플들이 손을 꽉 잡은 채 자기들만의 언어로 속삭이고 있을 줄 알았는데 여전히 커피 잔을 옆에 놓고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눈이 내리는 것 같더니 그마저도 시시하게 그치고 말았다. 특별한 날이지만 각자 여전히 하고 있는 일들을 마무리해야 하고, 시간이 정해져 있는 순서대로 처리해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다 그러할 것이다.
『다정한 편견』이후, 손홍규의 두 번째 산문집을 읽게 되어 기뻤다. 그의 산문은 투박하지만 인정 많은 말투로 이야기를 건네는 시골 여인을 닮았다.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에게 그의 정서가 따뜻하게 다가오는 것은 세상과 타인을 대하는 진심이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그의 산문을 읽지 않고, 이상 문학상 수상작인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를 읽었다면 나는 작품 안에 담긴 그의 가난한 마음과 고단함, 세상 사람들을 향한 애틋한 감정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소설 속에 녹아 있는 작가의 진심이 산문을 읽으면 더욱 생생하게 다가온다.
나는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을 읽으면서 고향과 가족, 읽었던 책들과 여행, 대학시절과 문학에 대하여 친구와 마주앉아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듯 했다. 그 중에는 많은 부분 겹치고 공유되는 경험이 있어 나도 이야기를 건네는 것 같았다. 예를 들면 시골 할머니댁과 사촌들과의 추억,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과 볼라뇨의 『칠레의 밤』, 그리고 이스탄불과 『당나귀는 당나귀답게』의 아지즈 네신에 대한 작가론까지 나의 오랜 지인과 대화를 나누는듯 책을 읽어나가는 기쁨을 느꼈다.
어린 시절 나는 한 마리 소를 사랑했다.
아버지는 내게 물었다. 그래, 소설이라는 것을 쓸 테냐. 아버지는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거다. 이래도 소설이라는 걸 쓸 테냐. 나는 고개를 저었는데 무엇을 부정하는 거였는지는 아버지 역시 확신할 수 없었으리라. 쓰고 말고 할 게 있나요, 나는 이렇게 대답했으나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거다. 제기랄, 소설은 이미 소가 다 써버린걸요. 세상이 들려준 이야기를 받아 적는 것만으로도 소설이 되는 비장하게 희극적인 삶을 삭제할 수 없는 나로서는 여전히, 문학은 소다.
1부 <절망을 말하다> - ‘문학은 소다’ 중에서
첫 글에서부터 작가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근간으로 글을 쓰며 살아갈 것인지 밝히고 있다. 어린 시절 외동으로 자란 작가가 마음을 다해 사랑했던 소는 인공수정 후 송아지를 낳은 뒤, 병들고 지친 몸으로 자신의 등록금을 위해 팔려갔다. 그렇게 그의 소는 소설가로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소만큼 인간들과 함께 하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동물이 있을까. 커다란 눈망울과 무언가를 꾸준히 우물우물 씹고 있는 얼굴은 수많은 사람들을 닮아 있다. 그의 글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하고 끝난다. 수없이 절망하고 흔들리는 사람들, 흔들리며 견디고 버티는 사람들, 흔들리다 우리 곁을 떠나간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날카롭고 강렬하지 않지만 수심 깊은 곳에서 울리는 진동처럼 한편 한편의 글 속에는 진심과 마른 울음이 섞여 있다. 그것이 읽는 이의 마음을 잡는다.
사실 나는 절망을 말하고 싶다. 절망한 사람을 말하고 싶다. 절망한 사람 가운데 정말 절망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많지 않은 이유를 말하고 싶다. …… 오래전 내 꿈은 소설가였고 지금 나는 소설가인데 여전히 내 꿈은 소설가다.
1부 <절망을 말하다> - ‘절망한 사람’ 중에서
이 마지막 문장이 절망하고 또 일어서고, 또 절망하다 쓰러지지만 여전히 나는 글을 쓰고 싶다는 말로 들렸다. 문학은 바로 그곳에서 시작해서 사람들을 향해 걸어가는 행위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나는 이미 터키를 떠나 한국으로 돌아갔을 때 몹시도 그곳을 그리워하게 될 것임을 알았다. …… 내게 여행이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자리에 잠시 주저앉아 높이가 다른 세상을 일별하는 것과 비슷하다. 익숙한 세계가 순식간에 낯설어지고 낯선 세계가 하염없이 밀려들어와 뜻밖의 사건처럼 내 안에 자리잡고 나와 함께 거주하게 된다. …… 문학은 서로 다른 언어로 쓰인 공통의 기억이다. 아지즈 네신의 소설에 깃든 날카로운 풍자를 알아보지 못할 수가 없으며 야사르 케말의 소설에 깃든 비참하게 아름다운 인간성을 해독하지 못할 수가 없다. …… 자본주의와 타협하지 말라. 문학은 바로 네가 선 그 자리에서 시작하는 거다.
2부 <문학은 네가 선 자리에서 시작하는 것> - ‘이스탄불에서 마음을 놓치다’ 중에서
이스탄불은 사람을 매혹하는 도시이다. 내가 여행을 갔을 때는 아직 아지즈 네신이나 야사르 케말에 대해 알지 못했지만 도시와 그곳에 사는 사람들로 인해 어렴풋이 가지고 있었던 환상과 편견이 깨지고 새로운 인식과 애정이 쌓이고 있었다. 작가가 두 발로 다니며 알려주는 이스탄불 곳곳에서 내가 함께 했던 친구들은 물론이고, 지금보다 조금 더 젊고 힘이 넘쳤던 나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어서 독서가 주는 또 다른 즐거움을 누렸다.
소설과 달리 에세이를 읽다보면 글을 쓴 사람의 마음을 엿보게 된다. 그만큼 작가도 자신의 속마음을 들킬 각오를 하고 글을 써나갈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에세이는 읽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래서 소설을 읽기 전에 그 작품을 쓴 소설가의 에세이를 찾아 읽는다. 그러다 보면 이해하기 어렵거나 공감하기 힘든 작가의 소설도 애정을 갖고 읽게 된다.
문학은 사적이면서도 공적인 것이다.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과 가치관을 담고 있지만, 그가 그런 경험을 하고, 생각을 하게 만든 당대 사회의 물과 공기를 소가 여물을 먹듯 작가가 마시고 소화시켰기 때문이다. 글을 읽고 쓰는 사람들은 그래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작가와 독자는 서로에게 낯선 사람들일지라도 서서히 닮아 가게 되는 것 같다. 절망하는 상황에서도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내고 속내를 기꺼이 보여준 작가를 응원하며 그 다음을 기대하게 만드는 것을 보니 말이다.
이야기는 실제 삶을 불안에서 건져주지는 못하겠지만 그 불안을 무사히 건너갈 수 있게 도와주기는 한다. 만약 이게 최소의 원칙이라면 좋은 문학은 이 최소를 넘어서는 것이어야 하며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해내는 것이어야 한다. 어떤 존재든 그 존재의 의미는 그의 내부에 있지 않다. 의미는 그에게 허락된 것을 넘어서는 순간 태어난다. …… 이야기꽃은 남루한 삶 한가운데서 피어나 우리의 사연이 어떤 의미인지를 보여주는 꽃이다.
4부 <슬픔과 고통으로 구겨진 사람> - ‘이야기꽃’중에서
이제 내일이면 새로운 해를 맞이하게 된다. 올해 우리가 피어낸 이야기는 무엇이며, 새해에 피어내야 할 이야기는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나를 생각하게 만든 것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이야기와 사연을 담고 있다.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절망하고 있더라도 모두가 복된 새해를 맞이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