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언수 소설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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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청 억울하고 고통스러우면서도 재미있다가 눈물이 나는 슬픈 소설을 이제야 읽었다. 제목이 주는 밝고 희망적인 느낌 때문에 소설을 읽는 동안 받게 된 아픔은 두 배가 되었다. 그러나 김언수의 소설에서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본다. 소설이 우리의 삶과 닮았으면서도 극적이라 책을 덮고 나서도 오래 기억에 남는다

 

 

눈을 떴을 땐 자동차 안이었다.

……나를 어디로끌고 가는 것일까? 아니다. 대체 나를 끌고 가는 것일까? (117.p)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누군가에게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하지도 않은 일을 진술해야 하는 등 일방적으로 무차별 폭력을 당하는 삶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을지 모른다. 오늘도 운 좋게 살아남아 편안한 일상을 살고 있지만, 그 일상을 깨고 뒤흔드는 일이 내게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그저 편안한 하루가 지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에 대해 안심하고 가슴 조이며 살아갈 뿐이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자기 자신을 향해 수많은 질문을 던지지만 답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공포와 두려움 속으로 집어넣은 누군가와 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요구받은 것을 완벽하게 해 나가는 것 밖에. 그때의 나는 진짜 내가 아닐지도 모른다. 소설 속 스티로폼 라면 용기 만드는 일을 했던 평범한 가 감금된 후 장비에 다시 올라가지 않기 위해 그들이 원하는 대로 진술서를 깔끔하게 써내려 가는 것처럼. 김석산을 죽인 암살범이 되어 말이다.

 

 

진짜 극한의 고통이 오면 인간은 비명조차 지를 수 없다.

……면도날로 신경을 한 꺼풀씩 벗겨내는 것 같은, 갈기갈기 찢어놓은 신경을 다시 염산 속에 담가놓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130~131.p)

 

  고통의 기억을 안고 있는 한 는 또 다시 그 속으로 들어가지 않기 위해 거짓과 진실을 따질 겨를 도 없이 진술서를 써내려 갈 수밖에 없다. 내가 세월호사건 이후 제주도를 갈 때 마다 배를 타고 갈까라는 말을 꺼내지 못하는 것처럼. 극복되지 못한 아픔이 행동과 사고의 한계를 만들고 거짓된 삶을 만들어 가는 것이 무섭다. 사람들이 두려움을 잊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하루하루 주어진 일에 몰두하는 것이다. ‘는 자신의 회사 책상과 비슷한 환경을 만들어줄 것을 요구하고 진술서를 쓰기 시작한다.

 

 

탁자 위에 가득 놓인 검정, 빨강, 파랑 볼펜들과 일곱 가지 색의 형광펜, 포스트잇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노라니 어쩐지 갑자기 행복해진 느낌이었다. (140.p)

 

 

  그 순간 그는 마음이 편안해지기 시작한다. 카키양복이 보내주는 칭찬과 당근을 먹으며, 자신의 쓴 진술서의 주인공이 되어간다. 단련되고 훈련되어진 그의 글 솜씨도 날마다 일취월장한다.

 

 

나는 날마다 진술서 속의 이야기들을 상상하고 느끼고 호흡했다. 그러자 나는 진술서의 세계가 점점 좋아졌다. 아무런 의혹도 모순도 없는 세계! 이처럼 논리적이고 명확한 곳 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지! 하고 나는 중얼거렸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더 이상 나에게 암살범이라는 가짜 암시를 주지 않아도 되었다. 나는 암살범 그 자체이고, 진술서 그 자체였다. 나는 이제 자료만 준다면 어떤 진술서도 열두 시간 안에 완벽하게 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143.p )

 

 

현실에서 벌어질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도 안 되는 일을 겪게 되다보니 오히려 상상의 세계가 더 현실 같고,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비현실적인 일처럼 보이게 되는 아이러니를 느끼게 된다. 이제 가 살아가는 세상은 현실이 아니라 그가 쓴 진술서의 세계이다. 그곳에서 그는 대단한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두었고, 자기 자신 또한 냉정한 암살범이 되어 있다. 진실과 왜곡이 한 몸이 되어 가고 있는 과정이 눈앞에서 펼쳐지지만 그것을 가려낼 힘이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그런 곳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소설 속에서 벌어진 일들을 우리의 일상생활 속 그 무엇에 빗대어도 이야기는 진행될 수 있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받는 수많은 일들을 물론이고, 입시와 미래의 불안에 시달려 본 사람들은 좁은 교실 속에서 교과서와 성적의 세계에 매달리며 편안함을 찾을 수 있다. 가끔씩 주어지는 성적과 비교, 자존감 상실과 왕따의 공포에 대한 두려움만 피해갈 수 있다면. 언제 직장에서 쫓겨날지 모르는 비정규직에게도 소설의 내용이 무관하지 않다. 물질로 인한 갑과 을의 횡포, 가정폭력과 수많은 차별, 그 차별 뒤에 숨어있는 일상 속 공포들이 불쑥불쑥 얼굴을 드러낼 때마다 우리의 삶이 마냥 해피엔딩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거침없는 문장과 한편의 연극을 보는 것 같은 소설 속에서 세상은 마냥 상식과 질서로 돌아가는 평화롭고 권태로운 곳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것을 아는 것에서부터 희망을 갖게 되지만 그래서 더 서글퍼진다.

이 소설은 전체가 은유덩어리이다. 리뷰를 쓰고 있는 나에게도 말이다. 싸구려 감성은 버리고 냉정하고 명료하게 경제적으로 써야 하는데 생각이 많아진 나는 그렇게 하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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