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서로가 모르는 사람

김영하의 <여행>

    

 

 

 한 번 끝난 인연이 무엇을 확인하기 위해 다시 만나야 하는 것일까? 한때 연인이었으나 이제 더 이상 연인이 아닌, 남남이 된 수진과 한선은 마지막으로 여행을 가기로 한다. 한선의 일방적인 계획에 결혼을 앞둔 수진은 꺼림칙했으나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알겠다고 약속을 했다. 한선에게도 어린 애인이 있다. 9세 연하의 중국인 유학생 친친. 그러나 그에게 친친은 그냥 가벼운 인스턴트 같은 상대이다. 당장의 허기와 나트륨의 짭조름한 맛을 즐기기 위한 딱 그 정도의 관계. 솔직히 한선에게 그 정도의 관계도 과분하다. 수진의 생각대로 캠퍼스의 늙은 어린이 같은 존재인 그에게 말이다.

 

 

  한선은 아무리 기다려도 수진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자 그의 온 SNS를 뒤지기 시작한다. 그것이 개인의 사생활 침해이자 스토커적인 행동이라는 것은 인식하지도 못한 채 그녀가 미국에서 이혼한 백인 남자와 유학생 등을 사귀다 지금의 애인을 만나 결혼에 이르게 된 것과 결혼식 날짜와 장소까지 알아낸다. 그리고 한선은 그녀의 집 주소까지 찾아내어 무작정 찾아간 다음, 당사자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순식간에 바닷가 시골 마을까지 차를 몰아왔다.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겠지만 결과는 그녀를 납치한 것과 같은 상황이다. 수진쪽에서도 그를 포스트잇같이 부드럽고 유연하고 뒤끝 없는 관계라고 믿지 않았다면, 자신의 인터넷 세계를 헤집고 다니며 은밀한 개인정보와 살고 있는 집까지 찾아내는 한선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면 아마 쉽게 그의 차에 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근데 오빠.”

?”왜 나하고 여행을 가려고 해? 그러니까 나 같은 애 말고도……

한신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우리 옛날에 여행 많이 다녔잖아.”

그랬었나?”

경주도, 설악산도, 제주도도…… 콘도에서 맛있는 것도 해 먹고 참 좋았는데.”

에이, . 주로 라면이었지. 회 좀 떠다 먹고. 오빠는 만날 술 먹고 뻗었잖아.”

그땐 꿈이 있었던 것 같아.”

지금은 없어?”

인생을 실패한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 이제 돌이키기엔 너무 늦었다는 생각.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이상하게 네 얼굴이 떠올라. 네가 내 가장 중요한 것을 빼앗아간 것 같아.”

(41.p)

 

 

  한선은 왜 그녀와 여행을 가려고 했던 것일까? 정말 수진이 자신의 중요한 무언가를 빼앗아갔다고 해도 그것은 이미 지난 과거일 뿐이다. 그의 말은 마치 앞이 보이지 않는 모래구멍 속에 자기 혼자 남겨두고 너만 잘 살기위해 탈출 할 수 있냐고 그녀에게 떼를 쓰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미 두 사람은 완벽한 타인이다. 과거는 과거일 뿐 현실을 부정할 수 없다. 그것은 수진이 위기 상황에서도 냉정한 태도를 잊지 않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 전혀 실감이 나질 않았다. 시공간 이동이라도 한 것 같았다. 백오십 킬로미터를 넘나드는 위태로운 운전도 남의 일 같았다. 나는 이딴 일로 죽지는 않을 거야. 수진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49.p)

 

 

  그녀는 애초에 한선이란 모래구멍 속에 빠질 마음이 없다. 그와는 이미 지나간 사이일 뿐, 함께 사막을 건널 사이는 아니니까.

 

 

그 만 멈추어 달라는 수진의 요구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페달을 밟으며 달려갔던 한선에게 분노와 두려움을 느낄 겨를도 없이 두 사람 앞에 또 다른 존재가 등장한다. 예기치 않는 상황의 연속이다. 그는 갑작스럽게 나타나서 공포분위를 만들어내며 음흉하게 농을 던지다 가차 없이 폭력을 휘두른다. 그 느닷없는 폭력 앞에 두 사람은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들이 차에 다다랐을 즈음에는 무슨 공포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가 벌써 와 있었다. 한선이 수진을 젖히고 앞으로 나서 뭔가 말하려는 찰나, 고무장화가 아까부터 손에 들고 있던 막대기를 벼락같이 휘둘렀다. 채찍으로 짐승의 등을 때리는 듯 한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한선이 모로 쓰러졌다. 고무장화는 쓰러진 한선의 머리를 거듭하여 찼다. 거센 발길질에 한선의 몸이 범퍼 아래로 구겨져들어갔다.

(56.p)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정해진 규칙처럼 잘 진행되어 가다가도 한순간 어디에서 날아오는지도 모르는 돌덩어리들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질 수 있는 곳이다. 언제 그러한 순간을 맞이하게 될지 혹은 그 순간 내 손을 잡고 함께 구급차에 올라가줄 사람은 누구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한선에게 수진은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그에게 수진은 느닷없이 찾아와 여행을 가자고 고집을 부리고, 그녀의 의사와 상관없이 먼 길까지 와서 그녀를 공포와 두려움 속으로 몰아넣는 고무장화와 다르지 않는 모르는 사람일 뿐이다.

 

 

전 안 가요.”

, 보호자 아니세요?”

대원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수진은 단호하게 다시 한번 반복했다.

정말 잘 모르는 사람이에요.”

(59.p)

 

 

  끝 난 인연은 이미 다른 길을 가는 사람이고 공포와 두려움을 몰고 온 사람에게 신고를 하거나 도망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

 

  김영하의 문장은 매끄럽고 거침이 없어 소설 속 상황이 바로 앞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생생하다. 로맨스와 코믹인가 하는 순간 무서움으로 바뀐다. 그것이 <여행>을 읽는 동안 더 공포감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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