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 소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6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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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셀로나의 골목을 거닐고 있을 때 성당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일요일 아침과 수요일 오후, 온 동네로 울려 퍼졌던 교회 종소리. 그 소리가 나면 교인들은 동네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던 교회로 모여왔다. 특히 수요일 오후, 부동산을 운영하던 친구 엄마도 겉옷을 챙겨 입고 교회로 갔고, 한의원과 내과를 운영하던 원장도 가운을 벗고 교회로 갔다. 서울 한복판에 교회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나는 파란색 성경책을 들고 친구들과 교회로 몰려가기도 했었다. 청각이 어린 시절을 소환한 사실에 놀랐다. 소설도 그럴 것이다. 더 이상 종소리는 울리지 않는다. 어린 시절 언제부터인가 시끄럽다는 이유로 종은 울리지 못하게 되었고, 차츰 내 머릿속에서도 잊혀갔다. 그런데 어른이 되고 외국의 낯선 도시를 여행하다 그 소리를 들었을 때 저절로 떠오른 것은 종소리가 울리던 그때의 동네 모습과 사람들, 재미있게 읽었던 어린이 잡지와 만화책 등등 이었다. 사람 안에 축적되어 있는 수많은 감각과 추억은 어느 정도일까. 그것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얼마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일까.

 

 

 앨리스 먼로의 <거지 소녀>를 읽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중학교 때, 선생님 몰래 친구들과 돌려 읽었던 하이틴 로맨스. 지금 생각해 보면 표지를 벗긴 영어 사전만한 작고 얇은 로맨스 소설을 교과서 사이에 두고 반 친구들과 돌려 읽었던 그 짜릿했던 순간에 어린 소녀들이었던 우리 마음속에 로즈와 같은 상상은 시작되었던 것 같다. 거지 소녀가 품은 당당함과 무지에 가까운 자신감은 규율과 형식 속에서 살아온 왕의 마음을 훔칠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가진 젊음과 힘으로 얼마든지 거대한 존재를 상대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은 저마다 모습만 달리 한 채 각자의 가슴에 자리했다. 처음에는 그 마음으로 로즈를 따라갔다. 가난하지만 성적이 우수하여 장학금을 받으면서도 강한 자존심때문에 습관적으로 순종이 몸에 밴 다른 가난한 장학생 그룹에 끼지 않으려는 로즈.

 

 

 그런 자신을 좋아해 주는 패트릭이 백화점을 운영하는 부잣집 아들인데다 주변 여자들과 고향 사람들까지 자신을 질투하고 부러워하고 있다는 마음에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결혼을 하게 된다. <코페투아 왕과 거지 소녀>속 왕은 소녀의 어떤 모습에 이끌려 왕관을 버리겠다고 결심하게 되는 것일까? 마찬가지로 패트릭은 로즈의 무엇에 이끌리어 그녀를 사랑하고 삶을 바꾸어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사람들은 자기가 생각하고 결정한 일에 절대적 자신감을 드러낸다. 나는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내가 실수를 하더라도 선택한 그와 무언가가 그것을 보상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앨리스 먼로의 간결하면서도 세밀한 문장과 섬세한 묘사, 독자의 마음을 빨아들이는 흡인력 있는 심리와 서사는 쉽게 다가가 갔다가 그 자리에서 가슴을 건드리고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힘을 발휘한다. 인생은 내가 결정한 대로 흘러가는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때로는 이유도 조짐도 없이 행복이, 행복의 가능성이 나타나 그들을 놀라게 하곤 했다는 의미다. 그런 때 그들은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다른 외피를 두른 것 같았고, 눈부시게 상냥하고 순결한 로즈와 패트릭이 각자의 평상시 자아의 그림자 속에 거의 눈에 띄지 않는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그때, 그에게서 자유로워진 상태로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열람석 안을 들여다보았을 때 그녀가 본 사람은 바로 그 패트릭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그때 그를 내비뒀어야 했다.

178.p <거지 소녀> 중에서.

 

 

 눈앞에 정확한 그림이 그려져 있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렇게 바라볼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이 어리석은 길이라고 해도, 혹은 내 힘으로 얼마든지 해결해 나갈 수 있다는 믿음이 확고한 상황에서는 어떤 일이 닥칠지 몰라도 달려가 부딪쳐봐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 로즈도 그런 사람 중에 한 사람이다. 눈앞에 파도가 몰려오는 것을 보고 감탄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 파도 속으로 달려가 온몸이 흠뻑 젖도록 파도를 타는 사람이 있는데 로즈는 후자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가 만들어 낸 인생 속에서 얼마 정도는 그런 로즈 같은 삶을 지나온 사람이기도하다.

 

 

  앨리스 먼로의 거지 소녀속에 나오는 <장엄한 매질>부터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까지 작품들 한 편 한 편이 완성도 높은 단편이면서도 로즈와 그 주변의 사람들과의 삶을 한 올 한 올 촘촘하게 짜내어 삶이란 연작으로 만들어냈다.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내고 견뎌가는 가운데 인생이란 긴 시간을 만들어낸 것처럼 말이다. 그 속에서 로즈와 우리는 돌아가면 다시는 하지 않을 부끄럽고 후회스러운 일들을 벌이기도 했고, 무모하고 어리석은 선택을 통해 삶을 뒤죽박죽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모두 우리가 했고 그래서 힘들었지만 그로 인해 조금씩 인생에 연연해하지 않게 되었던 순간들. 때로는 서글프고 씁쓸하지만 그렇다고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지금. 그런 것들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었다. 그리고 앨리스의 소설이 참 아름답다는 것을 깨달았다. 설명할 수 없지만 인간과 삶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은 문학이 주는 위로고 힘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미스 해티가 로즈에게 했던 질문을 계속해서 곱씹는다.

 

 

네가 시를 잘 외울 수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고 생각해선 안 돼.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

자신이 도대체 뭐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은 것이 로즈에게 평생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사실은 그전에도 단조로운 징소리처럼 자주 귓전을 울리던 말이었기에 그녀는 그 말에 신경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제야 미스 해티가 가학적인 선생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353.p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중에서

 

 

  좋은 질문이다. 다만 좋은 대답을 찾기에 오래 걸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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