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반열에 오른 사회학의 명저를 찾아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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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그 짐멜의 문화이론
게오르그 짐멜 지음, 김덕영. 배정희 옮김 / 길(도서출판)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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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적 상상력
C. 라이트 밀즈 지음, 강희경.이해찬 옮김 / 돌베개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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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 엘리트
C. W. 밀즈 지음 / 한길사 / 199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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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계급론
토르스타인 베블런 지음, 김성균 옮김 / 우물이있는집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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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에 통이 되게끔 하는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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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짜 심리학- 생각의 오류를 파헤치는 심리학의 유쾌한 반란
리처드 와이즈먼 지음, 한창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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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살이 심리학에게 묻다- 대한민국 30대를 위한 심리치유 카페
김혜남 지음 / 갤리온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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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을 변화시킨 40가지 연구
로저 R. 호크 지음, 유연옥 옮김 / 학지사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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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존엄을 넘어서
B.F.Skinner / 탐구당 / 199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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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으로 경제학적 마인드를 쌓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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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짜경제학- 상식과 통념을 깨는 천재 경제학자의 세상 읽기
스티븐 레빗 외 지음, 안진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5년 6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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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테일 경제학
크리스 앤더슨 지음, 이노무브그룹 외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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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열린경제학
이준구 지음 / 다산출판사 / 2011년 2월
14,000원 → 14,000원(0%할인) / 마일리지 0원(0%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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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경제학
토드 부크홀츠 지음, 이성훈 옮김 / 김영사 / 199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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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이 아름답다 범우사상신서 35
E.F.슈마허 지음 / 범우사 / 198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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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텔이나 고급음식점 같은 곳에선 차에 따라 대우가 달라진다. 주차안내원이나 종업원들은 작은 차를 타고온 사람에게 "어이"라고 호칭하고, 소형차는 "아저씨", 중형차는 "선생님", 대형승용차는 "사장님"이라고 부른다는 속설도 있다.

또한 대형차를 탄 재벌 아들이 자기 앞에 끼어든 작은 차의 무엄한(?) 행동에 격분하여 그 운전자를 폭행, 중태에 빠진 어처구니 없는 사태가 벌어진 적도 있다.

사회에서 흔히 경험하는 이런 일들은 우리가 큰 것에 약하기 때문이다. 일명 '사이즈 컴플렉스'. 큰 사이즈라면 무조건 주눅이 드는 경향. 이런 큰 것 선호의식은 큰 것은 무조건 좋고, 작은 것은 안 좋은 것이라는 편견을 만들어 낸다.

그런데, 우리의 편견과 정 반대의 주장을 펼치는 석학의 명저가 있다.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범우사, 2004)가 바로 그것.

크기가 좋고 나쁨의 척도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슈마허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 했을까? 

 작은 것은 가치개념이 개입되면 큰것보다 열등하기 때문이다. 20세기 이후 작은 것은 좋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특히 사회가 거시적인 것, 공업화를 추구하면서 작은 것은 끊임없이 개선되어야 할 대상이었다. 작은 것은 무조건 크게 해야만 가치있는 일로 생각되었다. 오죽하면 '성장의 신화'라고 까지 했겠는가.

 하지만 언제 부터인가 '절약과 능률'이라는 모토아래 그 전도가 서서히 뒤바뀌어지고 있다. 이런 조류를 존 네이스 빗은 "세계경제가 거대화 될 수록 소규모 경제주체들의 영향력이 커진다"는 글로벌 패로독스라는 개념으로 형상화 시켰다.

이것은 거대화된 경제구조 속에서  작은 기업이 세계경제를 주도한다는 것. 그렇게해서 일본은 1980~90년대 축소지향적 산업으로 세계시장을 석권했다. 바야흐로 작은 것이 가치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작은 것을 지향하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한정된 에너지로 작은 것을 움직이는 것이 큰 것을 움직이는 것보다 훨씬 경제적이기 때문이다. 바로 작은 것과 큰 것 사이에 에너지라는 개념이 개입되면 양상이 달라진다는 것.

이 한정된 현재의 기술을  제레미 리프킨은  엔트로피 법칙으로 풀어냈다. 그의 명저 <엔트로피>에서 우리 지구는 폐쇄체제로서 에너지가 한정되어 한방향으로만 흐른다고 했다. 쓸 수 있는 에너지에서 써버린 에너지로 이행하는 에너지 고갈을 그는 엔트로피 법칙이라고 보았다.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이와 같은 엔트로피 법칙의 연장선상에 있다. 과학과 기술이 급속히 발전하면서 자원은 고갈되었다. 무분별한 개발은 자연 스스로 치유할 능력을 상실하게 할 정도로 황폐해졌다. 하지만 '발전'이라는 신화의 논리는 이 모든 행위를 정당화 시켜주기에 충분했다.

  그 댓가는 만만치 않았다. 에너지 문제가 전 지구적 문제로 확대되었고, 이때부터 환경파괴에 대한 경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여기에 더하여 산업화와 도시화의 진행은 인간소외와 인구문제를 심화시켰다.

이에, 슈마허는 이 책의 반을 할애하여 우리시대의 암울한 미래상을 보여주고 있다. 홀크하이머과 아도르노가 쓴 우리시대의 가장 암울한 책이라 일컬어지는 <계몽의 변증법>이 우리시대의  철학의 부재와 가치관의 혼동을 보여주었다면, 이 책은 그 정신적 혼란이 야기시킨 물질적인 면을 경제학적 시각에서 분석하고 있다. 

헌데 그 경제학적 시각이 독특하다. 슈마허는 경제학의 역할이 경제학을 위한 경제학이 아닌 인간을 위한 경제학이 될 것을 주창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경제학은 복잡한 수식으로 가득찬 이론의 정치함 속에서만 안주해 왔다는 게 그가 주장하는 것. 경제학이 수많은 천재들을 집어삼키고서도 해답없는 문제가 지속되는 것은 그 가운데 인간을 위한 시도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슈마허는 경제학이 주류와 비주류를 지양하고 인간중심의 경제학으로 바로설 것을 역설한다. 

 이 작은 책 속에서 인간중심의 경제학을 위해 슈마허는 방대한 형이상학적, 종교적 성찰을 시도한다. 그 성찰의 결과로서 슈마허는 모든 문제들에 대한 설득력있는 대안을 제시한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의 압권이라 할 수 있는 스몰사상 즉 중간기술의 개념이다.

 이 책에 따르면 중간기술은 기계적 대량생산체계가 아닌 대중의 손에 의한 대중생산에 초점을 맞춘다. 경험과 지식을 활용하는 대중생산체제는 분권화를 촉진하고 생태계법칙에 적합하며 인간을 위한 기술이라는 것. 다시말해 이것은 필요한 만큼만 소비한다는 불교의 구도자적 사상을 그의 대안 철학으로 받아들였음을 의미한다.

이 중간기술의 철학적 기반은 '중도'개념이다. 슈마허가 불교에 심취했을 때 그 사상에 매료됐다고 한다. 인간이 물질과 정신으로 이루어진 존재이기에 이것의 끝(물질적인 것)과 저것의 끝(정신적인 것)이 아닌 그 중간(중도)을 이용한다는 것은 매우 인간적이라 할 수 있다.
 
한편, 현대 대량생산체제에서 인간은 소비자로 전락했다. 경제학책 어디에도 인간의 개념은 나오지 않는다. 오로지 소비만을 하는 소비자만이 있을 뿐이다. 이런 경제학적 사고방식이 우리의 의식을 점점 황폐화 시켜 부지불식간에 소비주의적 생활 습관에 익숙하게 했다. 매일 우리가 접하는 신문과 TV가 그런 소비에 익숙하도록 우리를 훈련시켰다.

이것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미국식 산업구조를 반성적 사고 없이, 소비주의적 생할양식을 그대로 받아들인 폐습이다.

  결국 우리는 작은 것과 적은 것에 고마워 할 줄도, 만족할 줄 모르게 되었다. 국민총생산과 같은 단순한 수량적 척도로 발전의 기준을 삼는 산업문화 속에서 인간은 점차 도구화 되어 가고 있다. 성장 제일주의와 정신적 가치가 부재한 물질적 번영은 심리적 빈곤과 불안 그리고 생명력의 상실을 가져온다. 인간이 아닌 소비자만을 배운 당연한 결과이다. 

이 책을 쓴 슈마허는 독일 출신으로  독일 영국 미국 등지에서 슘페터, 케인즈, 윌리스 등 저명한 학자들로부터 경제학을 배웠다. 22살에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나치스의 유태인 탄압으로 영국에 건너가 개인 기업의 재무고문 신문사 프리랜스 기자 등으로 근무했다.1946~1950년까지 경제통으로 활동했다. 국제결제제도에 관한 그의 구상은 케이즈로부터도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1964년 이후 이른바 중간기술이론을 제창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후 농촌 개발에 대한 그의 권고안은 수많은 외국 정부로부터 주목받았으며 활발한 학술 활동으로 1974년에는 대영제국 지도자 훈장(CBE)을 받았다.

현대 환경 운동사에서 최초의 전체주의적 사상가로 평가되는 슈마허는 매우 다양한 관심사를 하나의 참조 틀 속에 버무릴 줄 아는 위대한 경제학자였다. 바로 이런 시각에서 탄생한 책이 <작은 것이 아름답다>이다. 이 책은 그의 독특한 이력과 사상이 고스란히 담긴 슈마허 사상의 결정체이다.

그런데  '슈마허 사상'의 실체를 확인할수록 많은 아쉬움이 남았다. 슈마허가 지향하는 가치라는 것이 우리가 너무도 쉽게 버린 가치, 다시말해 물아일체되어 안빈낙도하며 안분지족의 생을 누린 우리 선조들의 시조와 사상적 자취에 고스란히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제시한 문제해결의 열쇠를 위한 기본철학은 우리의 한국사상 내면에 면면히 흐리고 있는 것들 이었다.

 슈마허가 제시한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명제는 결국 우리의 전통적 가치인 '안분지족'의 삶을 배우라는 소중한 충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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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정복
버트란트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 사회평론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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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며]

나는 럿셀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책들은 좋아한다. 사상가를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저서를 좋아하는 유일한 이유는 저서들이 모두 쉽다는 거. 나는 그의 <서양철학사>와 고 박종홍 선생의 <철학개설>로 철학에 입문했다. 그를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는 어떤 것을 나누기를 좋아하고 싫고 좋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일반사람이면 취향이거니 하겠지만 사상가쯤 되면 자기가 싫어하는 것에 맹렬한 비판을 논리적이고도 철학적으로 가하기 때문이다. 그가 <서양철학사>로 책의 이름을 명명한 것도 동양 사상과 구분되는 점을 명확히 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어떻게 보면 동양철학사를 인정해주는 것같은 인상이지만 뒤집어 보면 논의할 가치가 없어서 빼버렸는지도 모른다. 하여간~

[행복의 정복 읽기]

 여기 <행복의 정복>이라는 아주 겁대가리를 상실할 정도로 오만한 책이 있다. 행복의 정복이라니...하지만 럿셀은 책의 제목을 정할 때 항상 책에서 그 이름을 정한 이유를 밝힌다. 이 책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이런 방자한(?) 제목을 달 때에야 충분히 납득을 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렇게 이름을 붙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남자나 여자는 피할 수 있는 불행과 피할 수 없는 불행, 병과 심리적 갈등, 투쟁과 가난의 악의로 가득찬 세계 안에서, 각 개인에게 맹공을 퍼붓는 불행의 무수한 원인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렇게 보면 행복은 필연적인 것도 아니며 우연적으로 주어지는 행운도 아니다. 운이 대통하여 행복의 자기 수중에 그냥 굴러들어오는 일은 결코 없다는 것을 럿셀의 말에서 찾을 수 있다. ‘무수한 불행의 원인을 극복한다’라는 말 속에는 행복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쟁취하는 것이요, 행복은 정복될 수 있는 대상이라는 게 이 책의 핵심사상이다.

 <행복이 정복>은 럿셀이 노년기로 들어설 무렵에 출간한 책이다. 58세 때인 1930년에 출간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삶의 원숙미와 지성이 곳곳에 묻어 있다. 영국 경험론의 전통을 이어받은 사상가 답게 풍부한 생활의 경험을 통해 행복의 본질을 끌어내고 있다. 럿셀은 현대인은 왜 행복할 수 없는지. 행복하지 못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묻는 동시에 현대인은 행복을 누리기 위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묻는다. 이와 같은 문제들에 대해 럿셀은 너무도 쉽고 명쾌하게 규명한다. 문제의 핵심을 잡아 결코 형이상학적이거나 현학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생활 속에서 불행의 원인을 치유할 방법을 찾고 회복해야 할 행복의 원리를 일깨워 준다.

그렇기 때문에 책의 처음에 불행해 질 수밖에 없는 원인을 고찰한다. 럿셀이 진단한 현대인의 불행의 요인은 경쟁, 권태와 자극, 피로, 질투, 죄악감, 피해망상증, 여론의 두려움 등이다. 이와 같은 불행의 요인을 검토한 다음 럿셀은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제시한다. 인생에 적극적이고 외부사물에 흥미와 열정을 갖고 대하고, 서로 진정한 사랑을 공유하며 자신의 사업을 갖고 있는 한 사람은 누구나 행복할 수 있다고 한다. 자신에게 집착하는 실존주의적인 비좁은 태도를 버리고 다양한 세계, 흥미가 가득한 세상사에 관심을 가지라고 한다. 그래야 번민과 우울함과 같은 조그만 불행을 능히 초극할 수 있다. 결국 인생은 살만하다는 신념, 외부의 광할한 세계야말로 우리 행복의 원천이라는 외부지향적 생활태도 그리고 어떤 불행이 닥쳐와도 극복할 수 있다는 용기와 낙천적인 인생관만 있다면 누구나 행복에 이를 수 있고 이러한 것들은 각자의 노력에 의해 가능하다고 한다.

 책장을 술술 넘기면 너무도 쉽고 평범한 행복에 이르는 길임을 알 수 있다. 누구나 생활 속에서 한 번쯤 생각했던 것을 자명하게 제시함으로써 뛰어난 설득력을 제시하는 책이다. 그도 그럴것이 60평생 행복을 정복하기 위해 럿셀 자신이 스스로 경험하고 사색한 철학적 흔적이 고스란히 글에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경험적 사상이 삶 속에 반영되어 체험적인 진술의 지혜가 담겨 있기에.

[책에 대한 비판]

 방대한 행복의 논증으로부터 결론적으로 럿셀이 느끼는 참된 행복이란 무엇을 의미하며 행복한 인간이란 무엇일까? 마지막 장에 보면 럿셀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행복의 일부는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다. 우리는 이 책에서 자기 자신에 달려 있는 부분을 고찰 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는 행복은 개인의 노력뿐만 아니라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외부적 여건이 마련될 때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행복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개인과 사회의 조합이라는 견해가 도출된다. 이게 진정한 행복의 길이라고 럿셀은 생각하는 거 같다. 하지만 이것은 럿셀이 한 단면만을 보고 있다는 게 내 주관적인 생각이다. 일반적으로 불행한 사람은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외부환경이 좋아도 어떤 이유로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너무도 많다. 또한 아무리 열악한 환경에 있는 사람도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 또한 많다. 어떤 기관이 조사한 결과만 보더라도 가장 못사는 나라의 행복지수가 선진국의 행복지수보다 높다는 사실은 외부적 환경보다는 개인적으로 느끼는 행복에 대한 기대감이 행복과 불행을 가르는 결정적인 요인인 거 같다. 아무래도 럿셀의 이 부분에는 동의할 수 없다. 

 계속해서 마지막 장에 럿셀이 말한 바를 따라가 보면 다음과 같이 끝을 맺고 있음을 본다.

“참된 행복은 현실도피의 수단인 유흥이나 일시적 오락이 아닌 무엇보다 인간과 사물에 대하여 호의적인 관심을 느끼는 것이다. 외부의 환경이 그다지 불행하지 않을 경우에는 정렬과 흥미가 내부로 향하지 않고 외부로 향하게 될 때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행복한 사람은 객관적으로 살아가고 자유로운 애정과 광범위한 흥미를 갖고 이를 통해 자기의 행복을 소유하는 자요 남에게 흥미와 애정의 대상이 되어 행복을 느끼는 자이다. 행복한 인간은 자기가 사회의 통일이 이루어 지지 않아 괴로워하는 일이 없다. 그의 인격인 자기 자신에 대하여도 분열되지 않으며 세계에 대하여도 대립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자기 자신을 ‘우주의 시민’ 이라고 생각하고 우주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마음껏 향락하며 자기들 뒤에 오는 생명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함으로써 죽음에 대하여도 마음이 동요되지 않는다. 이처럼 생명의 큰 물줄기와 본능적으로 깊이 결합될 경우에 우리는 가장 큰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p368) 

 외부적인 사람이 행복한 사람인가? 그런 사람만이 우주적인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마음껏 향락할 수 있는가? 럿셀은 자기 자신으로 침잠하는 실존주의를 극렬하게 비난했다. 옹졸하고 생산성이 없는 무용한 것이라고까지 폄하했다. 럿셀의 주장대로 자기를 분석해 보아 나올 것이 없다면 문학에서 실존주의가 꽃피울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으로 설명이 가능할까? 실존주의로 인해 문학은 더욱 풍부해 졌으며,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을 깨달아 삶의 새로운 의미를 찾는 사람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인간은 외향적 인간만 있는 게 아니다. 자기 자신을 모를 때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것을 염두 해 두지 않고 내부지향적인 사람을 매도하는 것은 논리적이지도 철학적이지도 않아 보인다.

 럿셀은 이 책에서 참된 행복의 전제를 정렬과 흥미가 외부로 향해지는 것이라 했다. 그래서 그런지 정치를 인간이 참된 행복에 이르기 위한 최고의 것으로 보았다.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정치라고 서슴없이 결론 내렸다. 거기까지의 럿셀의 추론을 반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럿셀은 행복하지 못했다. 말년에 궁극의 행복에 이르기 위해서 참여한 정치는 불행으로 끝나고 말았다. 결국 럿셀은 자기 자신의 주장을 그 자신이 멋지게 반증했다. 행복의 정복이라는 제목이 무색할 정도.

 어떻게 럿셀은 행복의 정복이라는 오만한 타이틀을 붙였을까? 그렇게 까지 확신이 들었을까? 생활 속에서 여러 가지 빛나는 혜안을 보여줬지만, 다양한 인간의 한 단면만을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고 착각한 그 대전제가 잘못된 것을 그는 몰랐을 것이다. 왜 그렇게도 실존주의를 싫어했는지..왜 그렇게도 외향적인 면에 집착을 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럿셀의 이 책은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다. 생활 속에서 행복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는 그 탁월한 비교와 혜안이 럿셀의 명성을 조금도 누그러뜨리지 않는다. 형이상학적인 행복이라는 관념을 너무도 쉽고 평이하게 생활 속에서 발견할 수 있게끔 해 준 이 책은 고전으로 남아 여전히 꼽십어 볼 수 있는 그런 책이라 할 수 있다.

[책을 덮으며]

사람들은 항상 말한다. '그때가 좋았다'라고. 그때는 곧 과거이고 항상 현재와 대비해서 과거를 평가한다. 그래서 좋았다면 '행복했다'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 아닐런지.

 현재 자신이 처해있는 환경에서 ‘행복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현재를 느낄 수 있고 즐길 수 있으며 그냥 보낼 수는 있지만 현재 행복을 누릴 수는 없을‘거라 생각한다. 행복은 매우 미래지향적이라서 에른스트 블로흐식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선취하는 의식'속에 내재해 있는 것이기에 일종의 유토피아니즘하고 비슷하다는 생각이다. 현재 행복하다고 한 순간 곧 과거가 되 버리기에, 아~나 행복해~라고 말하는 순간 행복은 다시 저 멀리 있게 된다.(시간을 붙잡아 멜 수 있으면 모르겠지만) 그리고 시간과 함께 과거로 빠져나가 버린다.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

 순간에 충실하고 순간을 의미 있게 살며 깊이 느낄 수는 있지만 그런 삶이 행복한 삶이라고 어느 누가 확신할 수 있을까? 수많은 철학자들이 행복을 찾아 헤멨지만 '아파테이아'(정념이 없는 마음의상태)와 '아타락시아'(궁극적 쾌락), 물아일체..라는 개념만을 말 할 수 있을 뿐이었다.

 행복을 정의하고 그에 삶을 맞추는 것은 럿셀처럼 불행을 초래하는 거 같다.(말년에 정치에 참여하여 불행했다) 정의할 수 없는 걸 애써 정의해서 그렇게 행복한 삶을 만드게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그것도 모자라 행복의 정복이라니...정말 터무니 없다고 생각한다. 굳이 행복을 말하지 않더라도 자기가 만족하는 삶을 살아가면 되는 건 아닌지...생각해 본다. 행 불행을 나누는 거 자체가 ‘행복’에의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노자는 도덕경 첫 장 첫 구절에 '도가도비상도'이라 했다. 도라고 말할 수 있는 건 도가 아니라는...절대적 진리는 말할 수 없는 것이라는...행복도 그와같은 게 아닐런지....20세기 가장 위대한 철학자라고 말들하는 비트겐슈타인(아이러니 하게도 비트겐슈타인은 럿셀의 제자였다)이 암으로 죽어가면서 한 말을 되새길 필요가 있을 거 같다.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사람이 이땅에 와서 잘~ 살다 간다고' 죽을때 이런 정도의 말을 할 수 있는 거.... 우리가 행복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실체가 있다면 바로 이와 같은 태도가 아닌지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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