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통해 현재를 비판하다

과학소설의 아버지 허버트 조지 웰즈의 소설들


미래를 예견하면서 현재를 비판한 대표적인 소설이 무엇인가요라고 묻는다면 아마 많은 분들이 조지 오웰의 1984나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말할 것 같습니다하지만 조지 오웰이나 올더스 헉슬리보다 먼저 미래를 예견하는 것으로 현재를 비판한 작가가 있습니다과학소설의 아버지라고 불려지기도 하며, ‘타임머신이란 단어를 최초로 사용한 허버트 조지 웰즈이죠.

   

허버트 조지 웰즈

이 분의 작품은 소설로 읽지 않았더라도 한 번쯤은 영화로 보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타임머신을 소재로 한 영화거나 투명인간을 소재로 한 영화들은 대부분 웰즈의 타임머신과 투명인간을 참고하기 마련이니까요.

 

웰즈의 소설이 원작이거나 재해석 된 영화로는 아래와 같은 영화들이 있습니다.



왼쪽부터 <닥터 모로의 DNA>(1933), <투명인간>(1933), <타임머신>(2002), <우주전쟁>​(2005)


다른 영화는 모르겠지만톰 크루즈 주연의 <우주 전쟁>은 제목만이라도 보신 적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웰즈의 작품관

 

웰즈의 많은 작품들이 영화화가 되었지만웰즈는 영화 시나리오 작가는 아닙니다그렇다고 예술이나 문학을 찬양한 작가도 아니구요정확하게 표현한다면 그는 문명 비판가 혹은 미래를 예언하고자 했던 작가에 가깝습니다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웰즈는 초기에 자연과학 지식을 상상력과 결합한 공상과학 소설을 저술했고제법 밝은 느낌의 풍자와 유머가 있는 작품을 쓰기도 했습니다그 이후 차즘 문명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면서 진보적인 시각으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비판하기도 했고요.그러나 2차 세계 대전 이후한평생 동안 마음속에 가지고 있던 낙관적인 인간관과 세계관을 완전히 포기하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웰즈의 성장

 

웰즈는 세계 대전 이전엔 세상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많은 공상과학 소설들을 집필해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이건 그의 성장과정 남달랐기 때문이 아닐까란 생각이 듭니다웰즈는 자수성가한 대부분의 인물들이 그렇듯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온갖 잡다한 일을 하며 힘겹게 학업을 마치고 성공한 인물입니다자신은 자신의 노력으로 많은 것을 이루었으니 세계가 아무리 불행해 보여도 인간의 노력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희망을 가진 것은 아니었을까요.

 

웰즈는 넉넉하지 않은 집의 아들로 태어났고 부모의 이혼으로 13세부터 스스로 생계를 책임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포목상 도제초등학교 교생약제사 조수백화점 견습 사원 등을 거쳐 1884년 사우스 켄싱턴의 과학사범학교 국비 장학생으로 입학하면서부터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합니다이때 당시 웰즈는 생물학과 동물학 이외는 특별히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하는데요웰즈에게 생물학 등을 가르친 스승은 T. H. 헉슬리였다고 합니다.

 

웰즈의 스승


T. H. 헉슬리​

 

웰즈가 힘겹게 학교에 입학하여 어렵게 작가로서 성공한 것은 백과사전 등으로 쉽게 알 수 있지만 그의 스승인 T. H. 헉슬리(토머스 헨리 헉슬리)에 대해선 많은 이야기가 없어 간략히 소개하고자 합니다뛰어난 제자는 뛰어난 스승이 있는 것 아닐까요.^^ 참고로 토머스 헨리 헉스리의 손자가 멋진 신세계를 저술한 올더스 헉슬리입니다토머스 헨리 헉슬리를 기점으로 웰즈와 올더스 헉스리가 이어지는 군요ㅎㅎ

 

아무튼 웰즈가 타임머신을 최초로 만든 사람이라면그의 스승 헉슬리는 불가지론’(신과 같은 본질적은 것은 인식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란 단어를 최초로 만든 사람입니다불가지론이란 어려운 이야기는 여기에선 일단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토머스 헨리 헉슬리는 인간의 윤리가 진화의 산물이며인간은 진화의 운명을 피할 수 없다는 주장을 했습니다인간은 다른 진화하는 모든 생물들과 마찬가지로 생존하기 위해 경쟁해야 하는 위치에 놓여있습니다식물의 씨앗이 이전 세대 식물의 사체를 양분으로 삼아 상장하는 것처럼 경쟁하고 살아남는 것은 이전 세대를 양분으로 성장해 갑니다이게 우주의 법칙이지만 인간의 문명은 우주의 법칙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가며 공존을 꿈꾸기도 합니다진화가 공존의 윤리를 만든 것이죠.

 

그리고 여기에서 웰즈의 소설 타임머신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지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타임머신은 흉측한 멀록족과 지능이 낮은 엘로이족을 통해 다윈의 진화론과는 다른 세상을 그려냈습니다시간이 갈수록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퇴행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죠그리고는 스승의 사상과도 다른 생각을 펼칩니다헉슬리는 인간이 우주의 법칙을 거스르며 악을 제거하며 문명을 이루어야 한다고 했지만웰즈는 그렇게 평화로운 세상이 되면 생존에 필요한 자극을 잃게 되어 진화가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는 상상을 하기도 합니다진화에 따라오는 생존경쟁문명에 따라오는 평화어느 쪽이 인간에게 더 나은 삶을 약속할 수 있을까요웰즈는 답을 주지 않습니다다만 어느 쪽도 분명하지 않다고 말할 뿐이죠.

 

마지막으로 웰즈의 소설을 소개합니다.

 

장편소설













타임머신 


시간을 여행하는 시간 여행자는 자신이 본 미래의 지구를 말해주지만 아무도 시간 여행자의 이야기를 믿지 않습니다미래의 인류는 문명을 잃어버렸고 지능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퇴화하기에 이르렀습니다시간 여행자가 본 미래는 정말 믿지 못할 이야기일까요?

 

책 속의 한 문장

"어떻게 인류가 이처럼 두 종족으로 분화된 것인지 생각해보았다. (...) 우선 우리 시대의 문제점들을 기반으로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명확해질 것이라고 본다현재에는 그저 일시적이고 사회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차이가 점차 확대되었다고 하는 사실이 전체적인 입장을 푸는 열쇠였다."

















투명인간


타인의 눈에 보이지 않을 때 인간은 어떻게 될까요주인공 그리핀은 투명인간이 된 후 몸을 되돌리려고 노력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공포를 이용하려는 야심을 가지기도 합니다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정치나 권력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을 가진다는 건 정말 무서운 이야기겠죠타인에 대한 폭력도 자유이고처벌도 내릴 수 없으니까요.

 

책 속의 한 문장

"나는 아무런 의구심도 없이 투명성이 한 인간에게 미칠 엄청난 비전그 미스터리권력그리고 자유를 예견해보았어허점이라곤 보이지 않았어."
















모로 박사의 섬 


남태평양의 어느 섬에서 모로 박사는 인간의 노예로 쓸 수 있는 동물을 만들기 위해 연구를 진행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자신도 죽음에 이르게 된다동물의 생명을 무가치하게 다루는 인간에 대해 비판하는 이 작품은 반려동물을 소중하게 여기는 오늘날에도 읽어볼만한 책이다.

 

책 속의 한 문장

 

"주위 남자와 여자 들은 진짜 남자와 여자 들이다변치 않는 남자와 여자 들이고 완벽하게 이성적인 존재들이며 인간의 욕망과 사소한 걱정거리로 가득 찬 사람들이다본능으로부터 자유롭고 황당무계하지 않은 법의 노예들이라 동물 인간들과는 전연 다르다그럼에도 나는 그들을 피한다그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과 그들의 질문과 그들의 도움을 피하고 그들에게서 벗어나 혼자 있고 싶어 한다."
















우주전쟁 


화성인들의 압도적인 화력을 막아내지 못하고 결국 런던을 포함한 일대의 도시들이 무참하게 파괴되는 지경에 이른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처럼, 주인공인 화자가 자신이 목격한 바를 그대로 서술하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철제 무기들을 녹이는 외계의 광선포, 긴 촉수로 인간을 휘어잡아 죽이는 외계 생명체 등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는 이 작품을 단번에 고전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책 속의 한 문장

"촉수들은 고르곤 같았고, 낯선 대기권 속에서 힘겹게 작동하는 허파로 인해 숨소리가 요란했다. 둔하고 고통스런 움직임은 아마도 지구의 엄청난 중력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커다란 눈동자에서 나오는 특유의 강렬한 눈빛까지 합쳐져, 생생함, 강렬함, 냉혹함과 괴물 같다는 인상을 불러 일으켰다. 미끈 거리는 밤색 피부에는 균사가 증식했고 천천히 꿈틀거리는 동작은 형언하기 힘든 불쾌감을 안겨주었다. 두려움과 공포가 나를 압도했다. "



단편소설















허버트 조지 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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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메시지를 던지는 예술에 도전하고 싶을 때,
《아방가르드 예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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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정의 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문학이든 그림이든 멋진 작품을 만나면 나도 한번 저렇게 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들기도 합니다. 잘 못해도 좋으니까 마음껏 시간을 쓰면서 도전이라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종종 들기도 하죠. (저만 그런가요?)

그리고 예술과 도전이라는 이 두 단어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은 아마도 ‘아방가르드 예술’이 아닐까 합니다. 과감하게 기존 형식을 파괴한 아방가르드 예술은 어떤 면에서 자유의 전형처럼 보이기도 하구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아방가르드 예술은 지적 급진주의, 부르주아의 문화의 쇠퇴, 비인간적, 반사회적이라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아방가르드 예술론》의 저자 레나토 포지올리는 이렇게 기존 문화에 반(反)한다는 의미에서 아방가르드 예술에는 이념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가 말하는 이념은 사회가 구조상 만들어 낸 것이기도 하고, 집단이 사회에 맞서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어느 쪽이든 자기 방어와 관련이 되어 있고 자기를 지킨다는 의미에서 인간의 영혼과 관련되어 있기도 합니다.

저자 레나토 포지올리는 아방가르드 예술의 영혼에 대해서도 추가적인 설명을 하는데요. 아방가르드 예술에 있어 예술 영혼은 개인의 영혼이 아니라 집단의 영혼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하네요. 그만큼 아방가르드 예술은 사회와 강하게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 같습니다. 혼자만의 고독한 예술적 활동이 아니라, 기존 예술에 반대하거나 정치에 반대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추구하고 싶은 분이라면 이미 아방가르드 예술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자는 서문에서 예술가가 작품을 만들고 아방가르드 예술처럼 새로운 메시지를 던지고 있음에도 예술가 본인이 아방가르드의 역사를 모른다면 왜 자신의 작품이 새로운 메시지를 던지는지 이해를 할 수 없다고 하네요.

예술에 도전하고 싶을 때 자신의 작품이 가지는 의미를 자신이 모른다면 많이 섭섭할 것 같습니다. 사회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실험적인 예술의 역사를 알고 싶다면 《아방가르드 예술론》을 추천하여 봅니다. 이런 이론서가 예술을 창작하는 데 있어 어떤 도움을 줄까라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저자의 말을 빌려서 말하면, 중요한 것만 알고 곁가지는 넘어가기 위해서입니다.

이 책에 대해서 잘 평가해주신 독자 리뷰가 있어 아래 링크를 첨부합니다. 링크 아래 저자가 인용한 좋은 시가 있어 첨부하오니 관심있는 분은 읽어보세요.


_문예남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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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 추천하는 독자 리뷰 읽기 : http://goo.gl/VY790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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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소개한 시


나는 전통과 창조의 
질서와 모험의 그 기나긴 싸움을 생각한다.
당신들의 입술은 하느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으니
질서 그 자체인 것으로의 입술이다

질서의 완전함이었던 이들에게
당신이 우리를 비교할 때는 너그러웠으면 한다
우리는 도처에서 모험을 찾고 있으니까

우리는 당신의 적이 아니다
우리는 당신에게 광활하고 낯선 영토를 주려 한다
그곳에서 꽃의 신비는 그 꽃을 꺾고자 하는 사람에게 주어진다
그곳에는 무게를 잴 수 없는 수천의 환각들이,
벌써 눈에 띈 색깔들을 가진 새로운 불들이 있다
거기에 실재를 부여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것이 숨겨진 거대한 반대편의 선善을 탐구하고자 한다

거기에는 우리가 쫓아내거나 다시 불러들일 수 있는 시간이 있다
우리를 위한 연민은 이곳 무제한과 미래의
전선에서 하루종일 전투를 한다
우리의 잘못을 위한 연민, 우리의 죄를 위한 연민은


- 기욤 아폴리네르 

 


 

아방가르드 예술을 소개하는 책들

《아방가르드 예술론》 , 레나토 포지올리 지음, 문예출판사 : http://goo.gl/WXZAbk

《아방가르드》, 노명우 지음, 책세상 : http://goo.gl/hwvuh1

《아방가르드란 무엇인가》, 진휘연 지음, 민음사 : http://goo.gl/gh9go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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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미가 있는 사고 방법이란 경우(상식)를 아는 사고 방법이라는 뜻이다. 논리적인 인간은 항상 자기를 정당하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인간적일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잘못되어 있다. 그런데 경우를 아는 인간은 혹시나 자기가 잘못되지나 않았나 의심을 한다. 그러므로 항상 올바른 것이다.

- 린위탕​

 

 


 

​논리적인 것과 대조를 이루는 것은 상식이다. 상식이라고 하기보다 ‘경우’라고 하는 편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경우를 중히 여김은 인간 문화에 있어 가장 건전한 최고의 이상이라서 경우를 아는 사람은 으뜸가는 문화인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완전무결할 수는 없다. 다만 경우 있게 구는 믿음직한 인간이 되도록 노력할 따름이다. 실제로 나는 세계의 사람들이 개인적인 문제건 국가적인 문제건 이 정신을 터득하는 시대가 올 것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경우를 아는 국민은 평화로운 생활을 하며, 경우를 아는 부부는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딸의 신랑감을 고르려면 기준은 단 한 가지뿐이다. 상대방이 경우를 아는 사람인가 아닌가. 절대로 싸움을 하지 않는 완전한 부부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오직 경우를 따져서 다투고 경우 있게 화해할 수 있는 부부를 상상할 수 있을 따름이다. 경우 있는 인간 세계에서만 평화와 행복을 즐길 수 있다. 경우를 따지는 시대라고나 할까, 그런 시대가 언젠가 온다면 그야말로 평화로운 시대이며, 경우 있는 정신이 널리 골고루 퍼진 시대일 것이다.

(...)

30년이나 중국에 머물렀던 미국인은 중국의 온갖 사회생활은 강리(講理, 도리)라는 말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말한다. 중국인이 싸움에서 마지막 결판을 내는 말은 ‘이봐, 그게 도리에 맞는단 말이냐!’이다. 누구나 곧잘 하는 가장 통탄할 만한 선언은, 부강리(不講理) 같은 놈이라는 것, 다시 말해서 ‘경우에 맞지 않는 말을 하는 놈이다.’라는 한마디이다. 자기가 ‘경우에 맞지 않는 일’을 인정하게 되면 이미 싸움에서 진 것이다.

인간미가 있는 사고 방법이란 경우를 아는 사고 방법이라는 뜻이다. 논리적인 인간은 항상 자기를 정당하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인간적일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잘못되어 있다. 그런데 경우를 아는 인간은 혹시나 자기가 잘못되지나 않았나 의심을 한다. 그러므로 항상 올바른 것이다. 편지의 추신에는 이 두 가지의 대조가 나타나는 일이 있다. 나는 항상 친구가 보내주는 편지의 추신을 아끼고 있는데 본문과 전혀 모순된 말을 쓴 추신은 특히 아끼고 있다. 추신 중에는 본문을 쓴 뒤에 가슴에 손을 얹고 여러 가지 세상의 경우에 비춰 보아서 생각난 일이나 망설임이나 기지나 상식이 섞여 있다. 어떤 명제를 긴 논의로 증명하려고 안간힘을 쓴 뒤에 갑자기 어떤 직각(直角, 어려움)에 부딪쳐서 상식이 떠올랐으므로 지금까지의 논의는 온통 허물어지고 자기가 잘못되었음을 인정한다 – 이런 사람이야말로 온정 있는 사상가이다. 또 이와 같은 사고 방법이야말로 내가 말하는 인간미 있는 사고 방법이라는 것이다.

편지의 본문에서는 논리적인 인간으로서 말하고 그 추신에서는 참다운 인간적 정신과 경우를 분간한 사람으로서 말하고 있는 편지를 상상할 수 있다. 지금 어떤 아버지가 여자대학에 입학시켜 달라고 졸라대는 딸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고 하자. 그는 붓을 들고 왜 딸을 대학에 보낼 수 없나 하는 이유를 첫째, 둘째, 셋째로 조목조목 말하고 누가 보아도 그렇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을 만한 여러 가지의 논거를 적어놓는다. 논리 정연하게 늘어놓아, 반문할 여유라곤 추호도 없다. 다시 말해서 현재 이미 오빠 셋을 대학에 보내고 있으며, 어머니가 병이 났으니 누군가 시중을 들어야 하지 않겠니 하면서, 그 밖에도 여러 가지를 적어 넣었다. 한데 편지 맨 마지막에 이름을 쓰고는 간간한 글귀를 한 줄 적어 넣는다. ‘얘, 괜찮다. 주리야, 올 가을에 입학할 셈으로 준비를 해놓아라. 어떻게 해볼 테니.’

혹은 또 아내에게 편지를 써서 이혼할 뜻을 적어 보내려고 하는 남편의 경우를 상상해보자. 그럴 듯한 이유는 얼마든지 있다. 첫째, 그녀는 남편에 대하여 성실성을 잃고 있었다. 둘째, 남편이 집에 들어왔을 때 따뜻한 음식을 대접한 일이 없다는 등 모두 당당하고 그럴 만한 이유이며, 정당하다고 생각되는 것도 있다. 만약 변호사를 댄다면 논리는 한층 더 완전해지며, 사정은 한층 더 정정당당하게 되는 셈이다. 한데 편지를 다 써놓고 보니 갑자기 마음이 변하여 간신히 알아볼 수 있을 만한 글씨로, ‘제기랄, 사랑하는 소피여! 나야말로 정말 형편없는 사람이야. 꽃다발을 들고 집으로 돌아갈게’라고 갈겨썼던 것이다.

이 두 편지의 본문에 있는 논의는 아주 완전하며 옳다. 말하고 있는 이는 하나의 논리적인 인간이다. 한데 추신에서 말하고 있는 이는 참다운 인간적인 정신 – 인간적인 아버지와 인간적인 남편이다. 조금만 경우를 아는 사람이라면 쓸데없이 까다로운 논의 때문에 골치를 앓지 않고 서로 반대되는 충동과 감정과 욕망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바다 가운데서 건전한 균형을 잡도록 노력해야만 하며, 그것이 인간으로서의 정신적인 의무이다. 우리를 진실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진실이라는 것은 인간 세계에 있어서의 진리의 모습이다. 공박할 여지가 없는 논의에는 인정이라는 게 맞서며, 정당한 것일지라도 애정 앞에는 약한 법이다. 그러므로 가장 확신이 가는 데도 불구하고 논리에 들어맞지 않는다고 할 때가 흔히 있다. 법률은 때로 조문의 ‘조리해석(條理解釋, 법에 없는 것을 사회생활의 일반 원칙에 따라 해석하는 일)으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 될 경우가 있고, 최고 행정장관에게 사면권을 주고 있는 것도 이와 같은 의미다. 에이브라함 링컨은 어느 어머니의 아들에 대해 이 사면권을 매우 효과 있게 행사하였다.

이렇듯이 경우를 중히 여기는 정신은 온갖 사고 방법을 인간적인 것으로 하며, 우리들 자신이 정확하다는 것에 대한 확신을 감퇴시킨다. 그것은 우리들의 관념을 원숙하게 하며, 행위에 있어 모가 난 곳을 둥글게 만들어준다. 여기에 대립되는 것은 사상과 행위 – 개인 생활, 국가 생활, 결혼, 종교, 정치에 있어서의 온갖 종류의 광신과 독단이다. 나는 감히 주장하는 바이지만, 중국에는 지적인 광신과 독단론이 다른 어느 나라보다 적다. 중국의 폭도는 매우 흥분하기 쉬운 면도 있으나, 경우를 분별하는 정신은 중국의 전제군주제, 종교 또는 소위 부인의 억압을 매우 인간미 있는 것으로 만들었다. 또한 이런 일들은 모두 얼마간 조건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지만 어쨌든 틀림없는 일이다.

경우라는 것이 중국의 황제, 신, 남편을 단순한 인간으로 끌어내리고 말았다. 중국의 역사가와 황제는 하늘의 명령에 의해 통치하는 것이며, 실정(失政, 정치를 잘못함)하였을 경우에는 ‘하늘의 명령’에 의하여 권리를 잃는다는 이론을 발전시켰다. 황제가 악정(惡政)을 펼 경우에 우리들은 사정없이 목을 베고 만다. 지난날 수없이 흥하고 망한 그 많은 왕조의 왕이나 황제의 목을 너무도 많이 베었으므로 그들이 신성하다거나 반신적(半神的)이라는 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중국의 성현은 신으로 모셔지지 않고, 오직 지식의 스승으로서 추앙을 받았을 따름이다. 또 중국의 신은 완전무결한 전형이 아니라 중국의 관리와 마찬가지로 돈의 힘으로 어떻게든 할 수 있는 썩어 빠진 족속이어서 아첨이 통하는가 하면 뇌물도 통한다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경우에 어긋난 일은 부친인정(不親人情, 인간성으로부터 동떨어진 것)이라는 낙인이 찍히고 마다. 너무나 성인인 체하며 완전무결한 인간은 마음속에 이상이 있다고 여기고 반역자 취급을 당하는 일조차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날의 유럽을 살펴본다면 경우대로 지배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으며, 경우에 따라 하지 않을뿐더러 이성조차 통하지 않고 오히려 광신적인 정신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다.

오늘날 유럽의 실정을 보면 누구나 신경과민이라는 느낌이 든다. 단지 국가의 목적에 대한 충돌이 있다든가, 국경문제나 식민지를 요구하는 마찰이 있다든가, 그런 일만이 원인은 아니다. 그런 일들만이라면 이성으로 판단하여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한데 좀처럼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은 그 근원이 더 깊고, 오히려 유럽의 통치자라는 사람들의 정신 상태에서 빚어졌기 때문이다. 이를 다른 일로 비유해서 말한다면, 낯선 도시에서 택시를 탔으나 갑자기 운전수를 신용할 수 없게 되어 불안감 속에 사로잡히고 만 일과 같다. 운전수가 자리에 어둡고 정확한 노선으로 손님을 목적지까지 모시지 못한다면 다소 납득이 가는 이야기겠지만, 운전수가 무슨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는 소리가 자리에 앉아 있는 손님 귀에 들려, 이 사람이 과연 올바른 정신의 소유자인가 하는 의심을 하게 만들면 그야말로 곤란한 문제다. 그리고 정신이 이상한 운전수가 권총을 가지고 있어 손님이 차에서 내릴 수 없다면 손님의 신경과민증은 극도로 심해지게 될 것이다.

이제 손님은 온갖 나쁜 병의 물결에 휩쓸려 참다못해 자기 자신을 불태워버릴 착란 상태, 일시적인 발광의 단계에 서 있게 된 셈이다. 이렇게 믿을 만한 까닭이 내게는 있다. 인간의 정신의 힘이란 원래 한정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신은 무모한 유럽 운전수의 지능보다는 무한히 높은 그 무엇이기에 언젠가는 평화스러운 생활을 즐길 수 있을 때가 오리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인류는 앞으로 머지않아서 경우에 입각하여 사물을 생각하는 일을 배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린위탕

 

* 《생활의 발견》 연재

4. 이상적으로 교육을 받은 사람이란?
http://goo.gl/F5cFKG

3. 분위기를 즐기고 싶은 삶에 필요한 것
http://goo.gl/YDtgI7

2. "인생을 즐기는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잊고 사는지 아는 사람"
http://goo.gl/2aklf5

 

1. 저자 서문, "용기에는 자기의 직관적인 판단을 호소하는 방법이 있다"
http://goo.gl/C46ioT


* 《생활의 발견》 서점가기 
















*

린위탕(林語堂, 1895~1976)

  

1895년 중국 푸젠 성 룽시에서 그리스도교 장로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엄격한 그리스도교로 교육받고 신학교를 졸업하기는 했으나, 그리스도교에 회의를 갖게 되어 신앙을 버리고 하버드대학, 라이프치히대학에서 유학, 라이프치히대학에서 언어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935년 수많은 영문 저서의 첫 번째 작품 《내 나라 내 민족》을 출간해서 중국 문명의 품격을 높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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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지 2015-09-03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우란 참 동양적인 단어라는 느낌이 들어요. 상식과 인간적 예의? 도리? 를 합친 말에 가까우니 상식만로는 설명이 아쉬울 수 밖에.
그런 의미에서 중국인의 특성에 관해 편견이 있는 저로선 그가 말하는 `경우`라는 단어에도 조금은 편견이 생깁니다.
인간미를 가진 상식적인 인간이 많은 세상이 해를 가져올 것 같진 않으니 뭐, 맞는 얘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삶에서 일일이 경우를 따지는 것도 딱히 발전적일 것 같진 않습니다.

문예출판사 2015-09-03 15:41   좋아요 1 | URL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린위탕의 글은 남겨주신 것처럼 약간 아쉽거나,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이 특징인 것 같습니다. 작가가 살아있을 당시에는 굉장히 진보적인 생각이었을지 모르나, 지금에 보면 조금 당연한 말이 되어버린 것 같기도 하구요.^^ 어떤 분들은 린위탕의 글을 보수주의자의 글, 배고픔을 모르는 사람의 글이라고 혹평을 하기도 하고, 또 어떤 분들은 나와 생각이 다르지만 나의 생각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읽을만한 글이라고 평하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음... 이 작가의 사상을 배우려고 하면 힘든 책이고,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구나란 생각을 하면 제법 읽을만한 글인 것 같아요.^^ 이렇게 진심 가득한 의견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장소] 2015-09-03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임어당 좋죠. 딱 기본을위한. 기준이필요한 사람들에게

문예출판사 2015-09-03 18:14   좋아요 1 | URL
앗!!! 남겨주신 말씀이 딱 맞는 것 같아요.^^ 깊이 생각하며 자기 생각과 맞춰보며 읽기엔 힘들지만, 자기만의 생각을 표현하는 법을 찾으시는 분들에겐 좋은 기준을 알려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바이올렛 2015-09-04 08: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논리적인 삶을 꿈꾸던때가 있었는데...세월을 살아보니 논리적인것보다 때로는 인간미가 통할때가 의외로 많더라구요^^
무슨 오래된 사람같은 멘트라 혼자 웃음이 나네요 ㅋㅋ
뭔가 사색하며 읽게될것 같은 느낌의 책이네요.

문예출판사 2015-09-04 09:56   좋아요 1 | URL
예전에 글쓰기 수업을 받은 적이 있었어요. 선생님이 제 글을 보고 제발 논리적으로 창작을 하지 말라고 계속 호통을 치셨던 기억이 나네요. 당시 선생님이 `내가 이기는지 네가 이기는지 어디 한 번 끝까지 가보자. 매주 한편씩 글을 써서 가져와라`라고 한 말이 생각납니다. 그 당시, 선생님의 요점은 그렇게 자기만의 논리로 무장해서 자기 약점을 감추고 자기 본래의 마음을 숨기고 이야기 하는 자세가 어떻게 타인에게 감동을 줄 수 있겠느냐라는 것이었는데요. 남겨주신 말을 읽고 나니 옛 생각이 나네요. 그렇게 좋은 선생님을 만났는데... 아직도 논리적인 태도가 몸에 남아 있는 것 같아요. 항상 자신에게 논리 대신 자유를 주는 삶을 사실 수 있길 바라겠습니다.^^ 화이팅입니다.!!

[그장소] 2015-09-05 10:56   좋아요 0 | URL
와~ ^^저와는 좀 반대쪽에서 ! 저는 혼자 충실하게 느껴버리는 싸가지인데~ 같이 느껴야 할 부분도 ~ 몰라야할 부분도 그래버리면 참 김새는 거거든요 .ㅈㅔ가 그래서 글을 못써요!^^
 



현대는 ‘전형’이 점점 ‘이념형’적으로 변형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전형’이 점점 ‘이념형’적으로 바뀌어간다는 말은 무엇일까? 현대인들에게는 사회가 점점 괴리되어가며, 삶 자체가 더 논리적으로 구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인이 점점 더 분석가의 위치에 선다는 것을 말한다. 세계를 당연히 여기며 그저 살아가는 게 아닌 분석가의 입장에서 끊임없이 회의하는 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읽는 막스 베버》에서

​간략 소개

사회학, 역사학, 경제학, 정치학 등 다양한 학문 영역에 영향력을 끼친 막스 베버(Max Weber) 탄생 150주년을 맞아, 연세대 박영신 교수를 비롯한 석학 11명이 베버의 삶과 학문을 연구한 《다시 읽는 막스 베버》가 출간되었습니다.

 

11명의 석학들은 “혁명은 흔히 지식인의 흥분의 근원으로 지적된다”고 한 베버의 말처럼 새로운 것을 발견하려는 학자의 자세가 우리 사회의 문제와 씨름할 수 있는 혁명의 정신으로 살아나길 염원하며 이 책을 저술했습니다. 


 

■ 책소개 

 

막스 베버 탄생 150주년 기념, 베버의 삶과 학문 연구

막스 베버(Max Weber) 탄생 150주년을 맞아, 다양한 분야의 석학 11명이 베버의 삶과 학문을 연구한 논문을 엮은《다시 읽는 막스 베버》가 출간됐다. 올해로 각기 32년과 38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한국사회이론학회와 한국인문사회과학회가 베버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는 학술 대회를 2014년 감리교신학대학교 백주년기념관에서 공동으로 개최한 결과물이다.

 
막스 베버는 때로는 사회학자로, 때로는 역사학자와 경제학자, 혹은 정치학자와 종교학자 등으로 불릴 정도로 각 학문 영역에서 존재감과 영향력이 혁혁한 사회과학자다. 베버의 탄생을 기념하며 각별하게 의미를 되새기는 것은 한국은 물론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두 학회가 개최한 학술 대회는 무척 의미 깊은 학술사의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이 도서는 학회의 원로이자 설립자 가운데 한 사람인 박영신 연세대 명예교수,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Die Protestantische Etik und der Geist des Kapitalismus)》을 올바르게 개역한 번역자이자 베버를 주제로 한 다수의 연구서 및 논문을 집필한 보스턴대 사회학과의 교수이며 세계적인 베버 사회학의 대가인 스테판 칼버그(Stephen Kalberg)의 참여가 특히 눈길을 끈다.

11명의 다양한 분야의 석학이 벌이는 막스 베버에 대한 새로운 해석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역사학자, 사회학자, 신학자, 경제학자, 정치학자, 그리고 법학자에게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문자 그대로 몇백 권의 책과 몇천 편의 논문이 베버의 이 주장을 논의하려고 쓰였다. 막스 베버는 초기 개신교, 특히 칼뱅주의 형태가 서양에서 자본주의 출현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것은 세계사에서 ‘서양의 출현’에 여전히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때문에 20세기 사회 이론의 수호천사라고 불릴 정도로 다양하고 깊은 연구를 한 막스 베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계속해서 나오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지 모른다. 


이 책에서는 <베버의 ‘쇠우리’ — ‘삶의 모순’ 역사에서>를 통해 ‘쇠우리’의 진정한 의미를 분석하며 ‘우리’에 한사코 대결하도록 부름받은 사람이 되어 자유의 삶이자 책임의 삶을 살 것을 주문하고, <베버의 ‘이념형’과 슈츠의 ‘전형’>에서 ‘전형’과 ‘이념형’을 통해 근대성의 본질을 밝힌다. <베버의 실제 방법론 — 체계적인 문명사회학을 위하여>에서는 베버의 이해방법론의 주요 요소들에 깊이 뿌리내리는 문명사회학이 문명들의 윤곽을 분명히 하고, 문명들의 발전을 이해하고, 더욱 격렬하건 조화롭건 간에 문명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통찰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베버의 삶과 에로틱>을 통해 베버의 여성 관계를 분석하며 책임 가치의 근원인 윤리와 비일상성을 경험하게 하는 열정의 느낌을 설명하고, <카프카의 소설 《성》과 베버>에서 관료제 현실에 맞서 투쟁하는 개인의 자유를 가장 높이 평가하는 베버와 카프카의 견해를 살핀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과 해롤드 버만>에서는 종교사와 법제사관으로 베버의 기본 테마를 긍정하면서도 여러 중요한 요점에서 반론을 제기한 버만의 논점을 정리한다. <베버의 정치사회학과 현실 정치>에서는 베버가 독일 정치 지도자들에게 던지는 질문들로 우리 스스로를 돌아볼 것을 주장하고, <베버의 법사회학과 의미의 문제>에서는 행위의 합리성과 함께 행위가 일어나는 환경 혹은 사회구조의 요소 가운데 특히 합리적 법에 초점을 두며 베버의 행위 이론과 법사회학을 통해 지금 우리 사회에 대한 논의를 한다. <합리적 지배와 관료제의 목적 전치>에서는 ‘쇠우리’를 만들어내는, 근대의 반쪽짜리 합리성의 결과인 목적 전치를 방지할 수 있는 해법을 논의하며 <베버의 합리화와 인터넷>에서는 일간 베스트 이용자들과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비교 분석을, <베버의 역사사회학과 우리 역사 쓰기>에서는  베버의 역사하기를 통해 오늘날 자본주의의 모양새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도록 돕는다.


베버는, 교수의 역할을 여러 가치와 목적에 대한 다양한 수단의 관계와 선택 항목들을 논리적이고 명쾌하게 분석하는 것까지로 정의하고, 가치판단은 유보하여 후에 학생들에게 맡기는 것이라고 했다. 때문에 이 책을 통해 20세기 사회 이론의 대가인 막스 베버에 대한 다양한 분야의 새로운 시각을 살펴보며 개인만의 가치판단과 해석을 해볼 것을 권하는 바다.

20세기 사회 이론의 대가 막스 베버, 그리고 21세기의 오늘

​근대의 가장 위대한 사회과학자 중 한 사람으로 일컬어지는 막스 베버의 학문적 활동은 사회학, 경제학, 역사학, 법학 등 매우 폭이 넓었다. 베버의 주요 저작들은 종교사회학, 정치 체제, 조직 이론, 행위의 합리화 등을 다룬다. 근대 자본주의의 특징을 개신교(프로테스탄티즘)와 관련하여 밝힌 것은 그의 뛰어난 업적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는 <베버의 ‘쇠우리’ — ‘삶의 모순’ 역사에서>를 통해 ‘쇠우리’의 진정한 의미를 분석하며 ‘우리’에 한사코 대결하도록 부름받은 사람이 되어 자유의 삶이자 책임의 삶을 살 것을 주문하고, <베버의 ‘이념형’과 슈츠의 ‘전형’>에서 ‘전형’과 ‘이념형’을 통해 근대성의 본질을 밝힌다. <베버의 실제 방법론 — 체계적인 문명사회학을 위하여>에서는 베버의 이해방법론의 주요 요소들에 깊이 뿌리내리는 문명사회학이 문명들의 윤곽을 분명히 하고, 문명들의 발전을 이해하고, 더욱 격렬하건 조화롭건 간에 문명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통찰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베버의 삶과 에로틱>을 통해 베버의 여성 관계를 분석하며 책임 가치의 근원인 윤리와 비일상성을 경험하게 하는 열정의 느낌을 설명하고, <카프카의 소설 《성》과 베버>에서 관료제 현실에 맞서 투쟁하는 개인의 자유를 가장 높이 평가하는 베버와 카프카의 견해를 살핀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과 해롤드 버만>에서는 종교사와 법제사관으로 베버의 기본 테마를 긍정하면서도 여러 중요한 요점에서 반론을 제기한 버만의 논점을 정리한다. <베버의 정치사회학과 현실 정치>에서는 베버가 독일 정치 지도자들에게 던지는 질문들로 우리 스스로를 돌아볼 것을 주장하고, <베버의 법사회학과 의미의 문제>에서는 행위의 합리성과 함께 행위가 일어나는 환경 혹은 사회구조의 요소 가운데 특히 합리적 법에 초점을 두며 베버의 행위 이론과 법사회학을 통해 지금 우리 사회에 대한 논의를 한다. <합리적 지배와 관료제의 목적 전치>에서는 ‘쇠우리’를 만들어내는, 근대의 반쪽짜리 합리성의 결과인 목적 전치를 방지할 수 있는 해법을 논의하며 <베버의 합리화와 인터넷>에서는 일간 베스트 이용자들과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비교 분석을, <베버의 역사사회학과 우리 역사 쓰기>에서는  베버의 역사하기를 통해 오늘날 자본주의의 모양새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도록 돕는다.

 

 

 “혁명은 흔히 지식인의 흥분의 근원으로 지적된다”고 한 베버의 말처럼 학문을 통한 개개인의 새로운 시각을 담보로 한 혁명을 통해, 21세기 학자의 역할 또한 현재 진행형이 될 것이다.

 

 

 


■ 차례

 

머리말

 

차례

 

서문 베버의 ‘쇠우리’ — ‘삶의 모순’ 역사에서
박영신 (연세대 사회학과)

제1부 막스 베버의 삶과 학문


베버의 ‘이념형’과 슈츠의 ‘전형’
김광기 (경북대 일반사회교육과)

 

베버의 실제 방법론 — 체계적인 문명사회학을 위하여
스테판 칼버그 Stephen Kalberg (보스턴대 사회학과)

 

베버의 삶과 에로틱
정갑영 (안양대 교양대학)

 

카프카의 소설 《성》과 베버
편영수 (전주대 독어독문학과)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과 해롤드 버만
김철 (숙명여대 법학과)

제2부 베버와 우리 사회


베버의 정치사회학과 현실 정치
정원 (연세대 사회발전연구소)

 

베버의 법사회학과 의미의 문제
신동준 (국민대 사회학과)

합리적 지배와 관료제의 목적 전치
문상석 (연세대 국가관리연구원)

 

베버의 합리화와 인터넷
박창호 (숭실대 정보사회학과)

베버의 역사사회학과 우리 역사 쓰기
박정신 (숭실대 기독교학과)


■ 본문 엿보기


■ 베버가 넓게는 서양 일반과 좁게는 자기 사회 문제와 씨름했듯 우리도 우리 문제와 씨름해야 한다. 베버의 생각과 만나 그와 대화하면서 우리가 배워야 할 그의 학문 정신이 여기에 있다. 이 정신을 귀히 여기며 이 땅에서 학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모든 문명 모든 역사의 삶에 일률로 적용될 법칙을 추구할 것이 아니다. 역사의 삶 그 현실을 깊이 파고들어가야 한다. 우리가 ‘쇠우리’를 살펴보면서도 그것으로 다 풀이될 수 없는 우리 모습을 찾아나서야 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45쪽)

 

■ 필자 시각에서 현대는 ‘전형’이 점점 ‘이념형’적으로 변형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말의 의미는 간단하다. ‘전형’은 현실세계와 긴밀히 연결된 것이고, ‘이념형’은 아니다. ‘이념형’은 현실과는 철저히 괴리된 단지 분석가의 추상적이고 논리적인 이념적 구성물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전형’이 점점 ‘이념형’적으로 바뀌어간다는 말은 무엇일까? 현대인들에게는 사회가 점점 괴리되어가며, 삶 자체가 더 논리적으로 구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인이 점점 더 분석가의 위치에 선다는 것을 말한다. 세계를 당연히 여기며 그저 살아가는 게 아닌 분석가의 입장에서 끊임없이 회의하는 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94쪽)

 

■ 베버의 비교 방법론의 주요 요소들은 모두 합쳐져 그의 체계적 문명사회학의 엄밀한 토대를 이룬다. 그 방법론들은 이 큰 규모의 실체들이 주관적 의미의 다양한 ‘복합체’에 대한 철저한 연구 없이는 이해될 수 없고, 행위의 유형들과 그것들의 규칙적 행위 맥락 속의 배태성이 인식되어야 하며, 과거에 배태된 규칙적 행위가 현재에 영향을 주는 행위 유형까지 지속되고 그 행위 유형을 위한 맥락을 형성하며, 결속된 사회적 담지자들의 강도에 대한 평가는 체계적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베버의 방법론은 행위 동기가 얼마나 강한지가 문명의 윤곽과 발전 경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주장한다. (149쪽)

 

■ 카프카의 소설 《성》은 성-관청에 맞선 K의 투쟁 기록이다. 소설 《성》에 등장하는 성-관청은 삶의 모든 과정과 의식의 모든 과정을 기록하고 관리하는 거대한 관료 기구의 형상이며, 근대의 합리화 과정을 통해 무정부 상태에 이르기까지 비(非)합리화된 근대의 사회질서를 반영한다. K는 ‘성’에 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한다. 동시에 ‘성’에 저항하려고 투쟁한다. K는 “명예롭고 평온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 (Kafka, 1982 : 241) ‘성’에 온 것이 아니라, 성에 맞서 투쟁하기 위해 ‘성’에 왔다. K는 ‘성’으로부터 자선을 바라지 않고 ‘성’에게 권리를 요구한다. 성-관청에 맞선 K의 투쟁은 실패와 좌절을 동반한다. (209쪽)

 

■ 베버의 관료제는 역효과가 있음에도 현대사회에서 중요하다. 베버가 말한 법적・합리적 지배를 위한 관료제를 법과 합리성에 근거해서 통제하는 제도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법과 제도로 관료제에서 조직 총수나 국가 통치자가 조직을 사적 목적 활용에 이용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규제하는 작업 그리고 보안과 비밀이라는 이름으로 시민 통제에 두지 않는 국가의 억압 기구들을 통제하는 제도적인 장치 마련이 되어야 한다. 국가와 국가기구들은 효율적이면서도 동시에 합목적적이어야 한다. 이것이 ‘쇠우리’를 만들어내는, 근대의 반쪽짜리 합리성의 결과인 목적 전치를 방지할 수 있는 방법이며, 20세기를 넘어선 21세기형 새로운 형태의 합리적・법적 지배를 우리 사회에 적용할 수 있는 길이다. (368쪽) 

■ 지은이 소개

 

한국사회이론학회·한국인문사회과학회

김광기 경북대 일반사회교육과
김 철 숙명여대 법학과
문상석 연세대 국가관리연구원
박영신 연세대 사회학과
박정신 숭실대 기독교학과
박창호 숭실대 정보사회학과
스테판 칼버그(Stephen Kalberg) 보스턴대 사회학과
신동준 국민대 사회학과
정갑영 안양대 교양대학
정 원 연세대 사회발전연구소
편영수 전주대 독어독문학과
 


■ 서점가기











알라딘 : http://goo.gl/nPPwX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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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신문에서 창립 50주년을 앞둔 문예출판사를 취재하였습니다.
문예출판사가 지난 50년 동안 걸어온 길을 정리하여 주신 전병석 회장님의 말씀 중 아래의 3가지 내용이 기억이 남네요.

"출판은 그 자체가 문화·교육"
"책이 안 읽히는 이유는 스마트폰이 아니라 지식만 강조하는 세태"
"후회가 되는 건, 출판 인력을 키우지 못한 것"

문예출판사의 지난 50년이 궁금하신 분,
지난 50년 동안 해결되지 못한 출판의 문제를 알고 싶은 분,
그리고
책을 사랑하며
책으로 마음을 키우고 지식을 늘리는 것을 좋아하시는 분에게
아래 기사를 권합니다.

이런 의미있는 기사가 나올 수 있도록
오랜 시간 문예출판사를 사랑하여 주신 독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_문예남 올림.

*
기사 전문 읽기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31404

 

*
문예남은 개인적으로 아래의 내용이 기억에 남아요.^^


그런 전병석 회장도 요즘 복잡하게 얽힌 출판계가 걱정이다. 일부에서는 요즘 책이 안 읽히는 게 ‘스마트폰’의 등장 때문이라고 지적하는 이들도 있지만, 전 회장은 생각이 조금 다르다. 소크라테스 시대에는 이데아가, 르네상스 이후에는 이성이 중시됐지만,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물질이 생각의 중심에 놓이기 시작했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지덕체와 같은 고전적 덕목조차 ‘지’만 강조하는 세태가 됐다는 것이다.

독서를 하더라도 지나치게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고 우려한다. “입시, 취업, 처세, 모두 실용적 가치관에 입각한 독서가 되고 있습니다. 인격 도야라는 덕(德)의 측면을 놓치고 있다는 게 문제죠.” 그는 이런 부박한(경박한) 독서 풍토가 된 데는 교육이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한 탓이 크다고 말했다. “독서는 취미가 아니라 생활이어야 해요. 자신을 발견하고, 성찰하는 일종의 수신(修身)의 한 방편인 셈이죠. 자신을 돌아보고,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훈련을 해야 하는데, 독서가 바로 그런 힘을 길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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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9-01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이 안 읽히는 이유는 스마트폰이 아니라 지식만 강조하는 세태˝

전병석 회장님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생각하는 힘을 기르기보다 오로지 암기하는 식의

유에서 유를 복사 붙여넣기 하는 지식만 강조하는 시대가

독서문화와 글쓰기문화를 지양합니다.

밝고 아름답고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되려면

지성인이 많아져야 합니다. 그러기위해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야 합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는 진짜 지식인이 필요합니다.

현재와 같이 오로지 실용적 지식만 많이 외우고 저장 하는 일에만 치중된 사회는

그릇됨을 통찰할 수 있는 능력이 저하되고 그로인하여 어둡고 각박한 사회를 만듭니다.

문예출판사 2015-09-03 14:38   좋아요 0 | URL
ㅜㅜ 저희 회장님의 생각에 동의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인생을 오래 산 것은 아니지만 제가 어렸을 때보다도 오히려 문화적으로 좀 더 가난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른이 되면서 생각할 여유를 계속 잃어가면서 그렇게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말씀해주신 것처럼 실용적인 생각, 실용적인 행동만 너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아닌가란 느낌이 지워지질 않네요. 물리학에는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는데, 문화에도 그런 힘이 작용하여서 각박한 사회를 밀어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