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미가 있는 사고 방법이란 경우(상식)를 아는 사고 방법이라는 뜻이다. 논리적인 인간은 항상 자기를 정당하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인간적일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잘못되어 있다. 그런데 경우를 아는 인간은 혹시나 자기가 잘못되지나 않았나 의심을 한다. 그러므로 항상 올바른 것이다.

- 린위탕​

 

 


 

​논리적인 것과 대조를 이루는 것은 상식이다. 상식이라고 하기보다 ‘경우’라고 하는 편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경우를 중히 여김은 인간 문화에 있어 가장 건전한 최고의 이상이라서 경우를 아는 사람은 으뜸가는 문화인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완전무결할 수는 없다. 다만 경우 있게 구는 믿음직한 인간이 되도록 노력할 따름이다. 실제로 나는 세계의 사람들이 개인적인 문제건 국가적인 문제건 이 정신을 터득하는 시대가 올 것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경우를 아는 국민은 평화로운 생활을 하며, 경우를 아는 부부는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딸의 신랑감을 고르려면 기준은 단 한 가지뿐이다. 상대방이 경우를 아는 사람인가 아닌가. 절대로 싸움을 하지 않는 완전한 부부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오직 경우를 따져서 다투고 경우 있게 화해할 수 있는 부부를 상상할 수 있을 따름이다. 경우 있는 인간 세계에서만 평화와 행복을 즐길 수 있다. 경우를 따지는 시대라고나 할까, 그런 시대가 언젠가 온다면 그야말로 평화로운 시대이며, 경우 있는 정신이 널리 골고루 퍼진 시대일 것이다.

(...)

30년이나 중국에 머물렀던 미국인은 중국의 온갖 사회생활은 강리(講理, 도리)라는 말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말한다. 중국인이 싸움에서 마지막 결판을 내는 말은 ‘이봐, 그게 도리에 맞는단 말이냐!’이다. 누구나 곧잘 하는 가장 통탄할 만한 선언은, 부강리(不講理) 같은 놈이라는 것, 다시 말해서 ‘경우에 맞지 않는 말을 하는 놈이다.’라는 한마디이다. 자기가 ‘경우에 맞지 않는 일’을 인정하게 되면 이미 싸움에서 진 것이다.

인간미가 있는 사고 방법이란 경우를 아는 사고 방법이라는 뜻이다. 논리적인 인간은 항상 자기를 정당하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인간적일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잘못되어 있다. 그런데 경우를 아는 인간은 혹시나 자기가 잘못되지나 않았나 의심을 한다. 그러므로 항상 올바른 것이다. 편지의 추신에는 이 두 가지의 대조가 나타나는 일이 있다. 나는 항상 친구가 보내주는 편지의 추신을 아끼고 있는데 본문과 전혀 모순된 말을 쓴 추신은 특히 아끼고 있다. 추신 중에는 본문을 쓴 뒤에 가슴에 손을 얹고 여러 가지 세상의 경우에 비춰 보아서 생각난 일이나 망설임이나 기지나 상식이 섞여 있다. 어떤 명제를 긴 논의로 증명하려고 안간힘을 쓴 뒤에 갑자기 어떤 직각(直角, 어려움)에 부딪쳐서 상식이 떠올랐으므로 지금까지의 논의는 온통 허물어지고 자기가 잘못되었음을 인정한다 – 이런 사람이야말로 온정 있는 사상가이다. 또 이와 같은 사고 방법이야말로 내가 말하는 인간미 있는 사고 방법이라는 것이다.

편지의 본문에서는 논리적인 인간으로서 말하고 그 추신에서는 참다운 인간적 정신과 경우를 분간한 사람으로서 말하고 있는 편지를 상상할 수 있다. 지금 어떤 아버지가 여자대학에 입학시켜 달라고 졸라대는 딸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고 하자. 그는 붓을 들고 왜 딸을 대학에 보낼 수 없나 하는 이유를 첫째, 둘째, 셋째로 조목조목 말하고 누가 보아도 그렇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을 만한 여러 가지의 논거를 적어놓는다. 논리 정연하게 늘어놓아, 반문할 여유라곤 추호도 없다. 다시 말해서 현재 이미 오빠 셋을 대학에 보내고 있으며, 어머니가 병이 났으니 누군가 시중을 들어야 하지 않겠니 하면서, 그 밖에도 여러 가지를 적어 넣었다. 한데 편지 맨 마지막에 이름을 쓰고는 간간한 글귀를 한 줄 적어 넣는다. ‘얘, 괜찮다. 주리야, 올 가을에 입학할 셈으로 준비를 해놓아라. 어떻게 해볼 테니.’

혹은 또 아내에게 편지를 써서 이혼할 뜻을 적어 보내려고 하는 남편의 경우를 상상해보자. 그럴 듯한 이유는 얼마든지 있다. 첫째, 그녀는 남편에 대하여 성실성을 잃고 있었다. 둘째, 남편이 집에 들어왔을 때 따뜻한 음식을 대접한 일이 없다는 등 모두 당당하고 그럴 만한 이유이며, 정당하다고 생각되는 것도 있다. 만약 변호사를 댄다면 논리는 한층 더 완전해지며, 사정은 한층 더 정정당당하게 되는 셈이다. 한데 편지를 다 써놓고 보니 갑자기 마음이 변하여 간신히 알아볼 수 있을 만한 글씨로, ‘제기랄, 사랑하는 소피여! 나야말로 정말 형편없는 사람이야. 꽃다발을 들고 집으로 돌아갈게’라고 갈겨썼던 것이다.

이 두 편지의 본문에 있는 논의는 아주 완전하며 옳다. 말하고 있는 이는 하나의 논리적인 인간이다. 한데 추신에서 말하고 있는 이는 참다운 인간적인 정신 – 인간적인 아버지와 인간적인 남편이다. 조금만 경우를 아는 사람이라면 쓸데없이 까다로운 논의 때문에 골치를 앓지 않고 서로 반대되는 충동과 감정과 욕망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바다 가운데서 건전한 균형을 잡도록 노력해야만 하며, 그것이 인간으로서의 정신적인 의무이다. 우리를 진실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진실이라는 것은 인간 세계에 있어서의 진리의 모습이다. 공박할 여지가 없는 논의에는 인정이라는 게 맞서며, 정당한 것일지라도 애정 앞에는 약한 법이다. 그러므로 가장 확신이 가는 데도 불구하고 논리에 들어맞지 않는다고 할 때가 흔히 있다. 법률은 때로 조문의 ‘조리해석(條理解釋, 법에 없는 것을 사회생활의 일반 원칙에 따라 해석하는 일)으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 될 경우가 있고, 최고 행정장관에게 사면권을 주고 있는 것도 이와 같은 의미다. 에이브라함 링컨은 어느 어머니의 아들에 대해 이 사면권을 매우 효과 있게 행사하였다.

이렇듯이 경우를 중히 여기는 정신은 온갖 사고 방법을 인간적인 것으로 하며, 우리들 자신이 정확하다는 것에 대한 확신을 감퇴시킨다. 그것은 우리들의 관념을 원숙하게 하며, 행위에 있어 모가 난 곳을 둥글게 만들어준다. 여기에 대립되는 것은 사상과 행위 – 개인 생활, 국가 생활, 결혼, 종교, 정치에 있어서의 온갖 종류의 광신과 독단이다. 나는 감히 주장하는 바이지만, 중국에는 지적인 광신과 독단론이 다른 어느 나라보다 적다. 중국의 폭도는 매우 흥분하기 쉬운 면도 있으나, 경우를 분별하는 정신은 중국의 전제군주제, 종교 또는 소위 부인의 억압을 매우 인간미 있는 것으로 만들었다. 또한 이런 일들은 모두 얼마간 조건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지만 어쨌든 틀림없는 일이다.

경우라는 것이 중국의 황제, 신, 남편을 단순한 인간으로 끌어내리고 말았다. 중국의 역사가와 황제는 하늘의 명령에 의해 통치하는 것이며, 실정(失政, 정치를 잘못함)하였을 경우에는 ‘하늘의 명령’에 의하여 권리를 잃는다는 이론을 발전시켰다. 황제가 악정(惡政)을 펼 경우에 우리들은 사정없이 목을 베고 만다. 지난날 수없이 흥하고 망한 그 많은 왕조의 왕이나 황제의 목을 너무도 많이 베었으므로 그들이 신성하다거나 반신적(半神的)이라는 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중국의 성현은 신으로 모셔지지 않고, 오직 지식의 스승으로서 추앙을 받았을 따름이다. 또 중국의 신은 완전무결한 전형이 아니라 중국의 관리와 마찬가지로 돈의 힘으로 어떻게든 할 수 있는 썩어 빠진 족속이어서 아첨이 통하는가 하면 뇌물도 통한다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경우에 어긋난 일은 부친인정(不親人情, 인간성으로부터 동떨어진 것)이라는 낙인이 찍히고 마다. 너무나 성인인 체하며 완전무결한 인간은 마음속에 이상이 있다고 여기고 반역자 취급을 당하는 일조차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날의 유럽을 살펴본다면 경우대로 지배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으며, 경우에 따라 하지 않을뿐더러 이성조차 통하지 않고 오히려 광신적인 정신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다.

오늘날 유럽의 실정을 보면 누구나 신경과민이라는 느낌이 든다. 단지 국가의 목적에 대한 충돌이 있다든가, 국경문제나 식민지를 요구하는 마찰이 있다든가, 그런 일만이 원인은 아니다. 그런 일들만이라면 이성으로 판단하여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한데 좀처럼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은 그 근원이 더 깊고, 오히려 유럽의 통치자라는 사람들의 정신 상태에서 빚어졌기 때문이다. 이를 다른 일로 비유해서 말한다면, 낯선 도시에서 택시를 탔으나 갑자기 운전수를 신용할 수 없게 되어 불안감 속에 사로잡히고 만 일과 같다. 운전수가 자리에 어둡고 정확한 노선으로 손님을 목적지까지 모시지 못한다면 다소 납득이 가는 이야기겠지만, 운전수가 무슨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는 소리가 자리에 앉아 있는 손님 귀에 들려, 이 사람이 과연 올바른 정신의 소유자인가 하는 의심을 하게 만들면 그야말로 곤란한 문제다. 그리고 정신이 이상한 운전수가 권총을 가지고 있어 손님이 차에서 내릴 수 없다면 손님의 신경과민증은 극도로 심해지게 될 것이다.

이제 손님은 온갖 나쁜 병의 물결에 휩쓸려 참다못해 자기 자신을 불태워버릴 착란 상태, 일시적인 발광의 단계에 서 있게 된 셈이다. 이렇게 믿을 만한 까닭이 내게는 있다. 인간의 정신의 힘이란 원래 한정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신은 무모한 유럽 운전수의 지능보다는 무한히 높은 그 무엇이기에 언젠가는 평화스러운 생활을 즐길 수 있을 때가 오리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인류는 앞으로 머지않아서 경우에 입각하여 사물을 생각하는 일을 배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린위탕

 

* 《생활의 발견》 연재

4. 이상적으로 교육을 받은 사람이란?
http://goo.gl/F5cFKG

3. 분위기를 즐기고 싶은 삶에 필요한 것
http://goo.gl/YDtgI7

2. "인생을 즐기는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잊고 사는지 아는 사람"
http://goo.gl/2aklf5

 

1. 저자 서문, "용기에는 자기의 직관적인 판단을 호소하는 방법이 있다"
http://goo.gl/C46ioT


* 《생활의 발견》 서점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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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위탕(林語堂, 1895~1976)

  

1895년 중국 푸젠 성 룽시에서 그리스도교 장로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엄격한 그리스도교로 교육받고 신학교를 졸업하기는 했으나, 그리스도교에 회의를 갖게 되어 신앙을 버리고 하버드대학, 라이프치히대학에서 유학, 라이프치히대학에서 언어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935년 수많은 영문 저서의 첫 번째 작품 《내 나라 내 민족》을 출간해서 중국 문명의 품격을 높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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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지 2015-09-03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우란 참 동양적인 단어라는 느낌이 들어요. 상식과 인간적 예의? 도리? 를 합친 말에 가까우니 상식만로는 설명이 아쉬울 수 밖에.
그런 의미에서 중국인의 특성에 관해 편견이 있는 저로선 그가 말하는 `경우`라는 단어에도 조금은 편견이 생깁니다.
인간미를 가진 상식적인 인간이 많은 세상이 해를 가져올 것 같진 않으니 뭐, 맞는 얘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삶에서 일일이 경우를 따지는 것도 딱히 발전적일 것 같진 않습니다.

문예출판사 2015-09-03 15:41   좋아요 1 | URL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린위탕의 글은 남겨주신 것처럼 약간 아쉽거나,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이 특징인 것 같습니다. 작가가 살아있을 당시에는 굉장히 진보적인 생각이었을지 모르나, 지금에 보면 조금 당연한 말이 되어버린 것 같기도 하구요.^^ 어떤 분들은 린위탕의 글을 보수주의자의 글, 배고픔을 모르는 사람의 글이라고 혹평을 하기도 하고, 또 어떤 분들은 나와 생각이 다르지만 나의 생각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읽을만한 글이라고 평하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음... 이 작가의 사상을 배우려고 하면 힘든 책이고,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구나란 생각을 하면 제법 읽을만한 글인 것 같아요.^^ 이렇게 진심 가득한 의견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장소] 2015-09-03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임어당 좋죠. 딱 기본을위한. 기준이필요한 사람들에게

문예출판사 2015-09-03 18:14   좋아요 1 | URL
앗!!! 남겨주신 말씀이 딱 맞는 것 같아요.^^ 깊이 생각하며 자기 생각과 맞춰보며 읽기엔 힘들지만, 자기만의 생각을 표현하는 법을 찾으시는 분들에겐 좋은 기준을 알려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바이올렛 2015-09-04 08: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논리적인 삶을 꿈꾸던때가 있었는데...세월을 살아보니 논리적인것보다 때로는 인간미가 통할때가 의외로 많더라구요^^
무슨 오래된 사람같은 멘트라 혼자 웃음이 나네요 ㅋㅋ
뭔가 사색하며 읽게될것 같은 느낌의 책이네요.

문예출판사 2015-09-04 09:56   좋아요 1 | URL
예전에 글쓰기 수업을 받은 적이 있었어요. 선생님이 제 글을 보고 제발 논리적으로 창작을 하지 말라고 계속 호통을 치셨던 기억이 나네요. 당시 선생님이 `내가 이기는지 네가 이기는지 어디 한 번 끝까지 가보자. 매주 한편씩 글을 써서 가져와라`라고 한 말이 생각납니다. 그 당시, 선생님의 요점은 그렇게 자기만의 논리로 무장해서 자기 약점을 감추고 자기 본래의 마음을 숨기고 이야기 하는 자세가 어떻게 타인에게 감동을 줄 수 있겠느냐라는 것이었는데요. 남겨주신 말을 읽고 나니 옛 생각이 나네요. 그렇게 좋은 선생님을 만났는데... 아직도 논리적인 태도가 몸에 남아 있는 것 같아요. 항상 자신에게 논리 대신 자유를 주는 삶을 사실 수 있길 바라겠습니다.^^ 화이팅입니다.!!

[그장소] 2015-09-05 10:56   좋아요 0 | URL
와~ ^^저와는 좀 반대쪽에서 ! 저는 혼자 충실하게 느껴버리는 싸가지인데~ 같이 느껴야 할 부분도 ~ 몰라야할 부분도 그래버리면 참 김새는 거거든요 .ㅈㅔ가 그래서 글을 못써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