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일자 샌드의 책은 '나의 수치심에게'라는 책으로 처음 접했다.
차분한 목소리로 토닥토닥 다독여주며 상담을 해주는 것처럼 느껴지는 문장이었다.
저자는 여러해 동안 목사로 활동했다고 한다. 수 대째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무신론자가 된 나는 종교인의 편향적일 수 밖에 없는 서적은 일단 선입견을 갖고 보는데, 그 선입견이 틀린 적은 많지 않았지만 가끔 있었고 저자가 그 가끔이었다. 종교적 이야기는 나오지 않아서 좋았고, 균형을 유지한 시각이 좋았다.

양심의 가책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참 필요한 것 같다. 이 가책이 인간을 스스로 선을 지키게 하기도 하고 타인과 자신을 큰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긍정적인 부분도 있지만 문제는 컨트롤이다. 비판적인 시각도 긍정적인 시각도 둘 다 장단점이 있기 때문에 단순히 좋다, 나쁘다의 시각으로 보는 것은 그 자체가 오히려 부정적인 입장이 되버리는 것이지만, 늘 문제는 정도에 있다.
저자는 죄책감을 쉽게 느끼는 사람은 책임을 떠넘기고 싶어하는 사람의 표적이 된다고 지적하는데, 누구나 과거의 경험을 잘 생각해보면 이런 일을 겪었을 것이다. 죄책감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무능감은 혼동하기 쉽지만 분명 다른 것이고 이것을 구분하과 정도를 조절하는 방법을 연습하기를 통해서 훈련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있는데, 이 부분이 참 실용적이고 좋은 것 같다.
다만 한 번 읽고 넘어간다면 별 도움이 되진 않을것 같다. 여러 번 반복을 하며 실행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여겨진다.

자기비판의 목소리는 나를 바로 잡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내가 그랬는데, 한창 혈기왕성할 때 크게 어긋나지 않도록 해주었고, 어떤 일을 할 때는 안주하지 않고 성장하게 도움이 되었다.
그렇지만 나쁜 영향을 미치기도 하는데, 자기 비판이 너무 심한 나머지 좌절하고 자존감이 떨어지고 비관하게 되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장점은 살리되 부정적인 결과를 불러오지 않도록 자기비판이 드는 순간을 스스로 관찰하면서 지금 드는 자기비판적 생각이 바람직한 것인지 아니면 자동으로 떠오르는 습관에 불과한 것인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고, 나쁜 슴관에 해당한다면 건설적 습관으로 바꾸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사실 나는 양심의 가책을 느낄만한 일을 한 적이 많지는 않다. 결정적으로 몇 가지가 있지만 그때는 정말 잘못이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에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오히려 당사자는 잊고 지낼지도 모르지만 그 순간의 선택과 실수와 잘못이 오랫동안 지워지지가 않는다.
그렇다고 해결이 되는 것도 아닌데.
이런 것들을 안고 살면서도 잘 풀어나가는 방법을 이 책에서 배운 것 같다.
다른 사람에게 신세 지는 것을 꺼려하는 나라서 사실 내가 죄책감을 느낄 일보다 남이 나에게 죄책감을 느낄 일이 더 많은것 같기도 하다.
절친한 사이었지만 돈을 빌리고 연락을 끊은 지인이 생각난다.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원망과 궁금증이 함께 일어나면서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때도 있었음을 떠올려본다.
소년 시절 상처가 되는 말이나 행동을 나에게 퍼부었던 어른들은 지금 생각해도 그렇게까지 해야 했나 싶을 정도다.
그들은 아마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아예 기억조차 못할지도 모른다.
그런 것이 일상이고 어른으로서 당연한 훈계쯤으로 치부되던 시절이었으니까.
자신의 과실을 크게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도 참 많다. 죄가 드러나고 밝혀져야 그제서야 사과를 하는 범죄자들이나 아무렇지 않게 살다가 나중에 문제가 되자 사과를 하고 자숙을 갖는 공인들은 쉽게 말해서 걸리지 않았으면 죄책감도 없었을 것이다.
읽고 보니 내가 자신에게 가혹하고 엄격한 정도가 있기는 하지만 그리 심하지 않은 것 같다. 그렇지만 반드시 이런 패턴을 끊어내야할 부분도 있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