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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살아야 하는가 - 삶과 죽음이라는 문제 앞에 선 사상가 10인의 대답
미하엘 하우스켈러 지음, 김재경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21년 8월
평점 :
보통 인간이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은 죽음일 것이다.
자신의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만 그 사람도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고 힘들어 하고 두려워 할 것이다. 그런 감정적인 부분이 죽어서 다른 세상으로 간다고 믿었을 것이고 죽음은 종교와 깊은 관련이 있다. 사람이 죽지 않는다면 종교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죽어서도 좋은 곳에 가서 살고 싶은 욕구가 천국을 만들어내고 신을 만들어낸 것일게다.

독일의 철학자 미하엘 하우스캘러가 지은 이 책은 삶과 죽음이라는 문제를 10인의 철학자들의 철학을 통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해주는 책이다.
철학책에서 답을 찾으려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철학에서 답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찾는 과정만 있을 뿐이다.
노벨상을 거부한 철학자 장 폴 샤르트르는 문학이란 무엇인가 라는 저서를 시작하면서 문학이란 무엇인지 모른다고 말을한다. 이 책도 삶과 죽음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의 의미는 무엇일까에 대해서 여러가지 생각을 탐구해보는데 의의가 있다.
한 두가지 답을 고집하는 것은 답답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세상은 시험문제 답안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 많은 현상과 해석이 존재한다. 그게 너무 복잡하므로 어느정도 보편적인 해석을 찾는 것인데 그게 답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모든 상황에서 그렇게 이야기 한다면 답답해질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정답만을 추구하면 다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외통수가 될 뿐이다. 정답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아집과 불통을 어느정도 해소할 수 있다. 내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을 이해할 때 사람은 더 현명해지는 것 같다.
내가 일신교계의 종교를 불편해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나 이외의 것은 인정하지 않는 배타성은 다양성을 죽이고 차별을 양산하고 다름을 이해하지 못하게 만든다. 넓은 세상을 종교라는 시야로만 해석하고 받아들이면 앞만보고 운전하는 꼴이 아니겠는가.
물론 진보적인 교회도 있다. 한국에서는 예장교단 보다는 기장교단이 진보적인 편에 속한다. 한동안 기장교단에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역시 종교의 시선이라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본능적으로 기독교인이 될 수 없었다. 할아버지 때부터 기독교 집안이지만 나는 내 대에서 종교를 끊어버린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삶은 유한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살아서도 잘 살고 죽어서도 잘 살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빚어낸 천국이라는 허상은 없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종교인들이 내 이야기를 들으면 불편하겠지만 나도 그들의 이야기가 매우 불편하긴 마찬가지이다. 그저 각자 믿는 것을 계속 믿고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만 않으면 존중을 한다.
배타성을 배제 한다는 것은 배타성을 가진 종교도 하나의 가지로서 인정을 한다는 의미기도 하다. 다만 그 가지가 내 영역을 자꾸 찌르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각기 개성이 넘치는 10인의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깊은 사고를 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철학자는 니체이다. 과학이 발달을 하면서 카톨릭의 신념들이 하나씩 무너져갔고, 사람들은 깨어났다. 더 이상 신이라는 것이 없다고 느끼게 된 것이다. 종교는 남아있을지 모르나 어렴풋이 신은 없다는 것을 그들도 알지 않았을까. 로마가 통치의 도구로서 통합한 카톨릭이라는 종교는 면죄부를 사고 팔 정도로 타락했고 수 없이 많은 문제들을 가져왔다. 정치와 종교가 결합하면 어떻게 되는 것인지를 세계역사에 잘 보여준 사례가 아닌가 싶다. 종교개혁이 일어났지만 그 나물에 그 밥이다.
니체의 죽은 신은 여러가지 의미가 있다. 종교의 신이 될 수도 있지만 우리 자신이기도 한 것 같다. 인간이 여러가지 신을 창조했으므로 마찬가지인 것일수도 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다들 알고 있지만 영원히 살것처럼 삶을 살아가는 것도 인간이다. 건강에 아무 이상이 없는 사람이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살지는 않는다. 그러나 삶은 유한하고 그것을 '억울함 없이' 받아들이면 다른 모든 것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한다. 죽음과 소멸을 긍정하는 것이 영겁회귀 사상을 이야기 하는 니체사상의 핵심이라고 저자는 해석한다.
우리의 의지는 언제나 시간을 향해 분노한다. 시간은 영원히 그리고 끊임없이 우리 손아귀에서 점점 더 많은 것들을 앗아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땐 그랬지"를 "딱 내가 원한 대로야"로 바꾸기만 한다면 우리는 시간을 극복할 수 있다. 사고 방식의 변화, 삶의 태도의 변화를 실제로 이루고 싶다면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가 "그게 삶이었어? 한 번 더 살아보자!" 라고 말할 용기를 내기만 한다면 우리는 죽음 자체까지도 극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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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죽음이 없다면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이고 삶이 없다면 죽음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어쨋든 죽을 것이다. 그것이 언제일지 모를 뿐이다. 그렇다면 곧 죽어도 후회없는 삶을 사는 것도 고려해볼 일이다. 그렇다고 본능적인 쾌락만을 추구하며 살라는 것은 물론 아니다. 작은 것에 연연하지 않고 두려워 하지 않으며, 충실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여러 유명한 철학자들, 익히 이름을 들어본 인물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사상은 잘 알지 못했는데, 죽음이라는 공통된 주제로 그들의 철학을 '시식' 할 수 있어서 좋았다.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가 끼어 있다는 게 재미있었다. 이들은 소설가지만 소설을 통해 인간의 깊은 고뇌를 담아냈다는 점에 있어서 철학자라고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도스토옙스키 소설은 사실 한 권도 읽지 못했다. 읽고는 싶었으나 너무 어려울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중에 시간을 두고 읽기 위해서 미루고 미루다 아직까지 못 읽은 것이다. 도스토옙스키 소설속의 인물들은 끝없이 살인과 자실행각을 벌인다고 한다. 그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이유는 더이상 살아가야 할 이유를 찾지못해서이다. 다른 사람을 죽임으로서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고 구속하는 법칙으로부터 독립됨을 선언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해석하고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인물들이 이런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것들 보여주면서 당시 유행했던 허무주의를 반박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결국 철학자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을 이야기하면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떤 삶이 가치 있는 삶일까' 라는 것을 깊이 생각해 보기 위함일 것 같다. 우리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삶의 가치가 무엇인가는 각자 찾아봐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 또 어떤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스스로 자신의 삶의 가치는 무엇일까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독서를 하며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진 것이 마음을 왠지 좀 더 강하게 만들어준 느낌이 들어서 참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