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죽음을 곁에 두고 씁니다
로버트 판타노 지음, 노지양 옮김 / 자음과모음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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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악성 뇌종양으로 시한부를 선고받은 소설가가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남긴 기록이다.

 

실화인가 했는데 로버트 판타노라는 사람?과 유튜브〈Pursuit of Wonder〉가 여전히 운영이 되고 있고, 어떤 소설을 썼는지 구글에 검색을 해도 나오질 않으니(내가 못 찾는 걸수도 있다) 실제 인물의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만일 내가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면 어떻게 될까 라는 생각을 소설의 형태로 창작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실화인지 아닌지는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글을 읽고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왠지 실화라고 하면 더 와닿게 느껴지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죽음을 앞두고 삶과 죽음의 의미를 사색하는 것들이 굉장히 솔직하다. 솔직하다는 것이 제일 중요할 것이다. 세상은 사실 하나도 변한게 없지만 개인의 세상은 변할 수 밖에 없다.

 

인생전환프로젝트라는 책을 쓴 대니얼 케이블도 암을 선고 받고 죽음을 실감하게 되자 인생을 돌아보게 되고 지금까지 원하는 삶을 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들이 보기엔 성공한 인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치료가 성공적이서 살게 되었지만 인생을 새로운 관점으로 본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 책의 주인공은 끝내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보인다(실제든 가상이든 간에). 그 역시 인생을 되돌아보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들에 대해서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는다. 대니얼 케이블과 다르지만 그도 결국 남아있는 삶을 지금과는 다르게 살아왔던 것이다. 죽음을 선고 받으면 치료에 매진할 수도 있고 그냥 받아들이고 여행을 다니고 요양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 할 수도 있고 하던 일을 계속 할 수도 있다. 주인공은 그저 글을 쓰면서 조용하게 남은 생을 보내기로 결심했다.

주인공의 생각이 내가 평소에 하던 생각과 많이 비슷해서 좋았다. 방향이 같다고나 할까? 내가 생각은 했지만 구체적으로 표현을 못했던 것들도 있어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한다. 낭비한 날들에 대해서 후회하느라 낭비한 날들을 다 합하면 꽤 많은 시간이 될거라고. 그날 하루를 게으르게 보냈다고 혼자 판단하고 죄책감을 가지면서 더 나브게 만들어버린 하루들이 너무도 많았다고. 그날들이 그 자체로 얼마든지 좋은 날이었다고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좋은 날을 만들 수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했었다고.

40p 중 -


이 책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그런(죽음을 맞이한 혹은 죽을 고비를 넘긴) 경험없이도 인생을 돌아볼 수 있다는 것일 거다. 사람은 누구나 죽지만 우리는 죽지 않을 것처럼 살고 있다. 내일이 오는 것이 그저 나에게 주어진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살면서 시간을 낭비하기도 한다.

 

허나 시간을 낭비한다는 것은 무슨 기준일까? 그저 열심히 바쁘고 빡빡하게 살면 시간을 낭비한것이 아닌가? 돈을 잘 벌었던 시간은 시간을 잘 보낸 거라고 할 수 있는가? 그저 빈둥거렸다고 해서 시간을 낭비한 것인가? 시간은 객관적이지만 시간에 대한 개념은 주관적이다.

 

수입이 꽤 좋았음에도 일을 그만두고 쉬고 있으니 주위에서 되려 수입이 있다가 없으니 불편하지 않느냐, 놀고 있으면 불안하지 않느냐고 말을 했었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너는 시간으로 돈을 벌고 있는 것이고 나는 벌어논 돈으로 시간을 사고 있는 것이다.

불편한 것은 내가 아니라 그들이었다. 나를 자신들 혹은 보편적인 기준의 관점에서 남자는 놀면 안된다, 무능하다 라는 생각을 기준으로 나를 본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무능할 필요도 유능할 필요도 없다. 내가 무슨 누구에게 일을 해주기 위해서 태어난 것도 아니다. 나는 세상에 빚진 것이 없고, 의무도 없다. 그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내 삶을 주도적으로 살 뿐이다. 나 자신은 세상의 부품이 되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내가 하는 일을 좋아한다면 또 다르겠지만 난 그렇지 못했었다.

누구든 그저 살기 위해서 일을 하는 것이지 일하기 위해서 사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좋은 인생이란 스트레스와 불행이 전혀 존재하지 않아서 좋은 인생이 아니라, 그 사람이 무언가를 믿고 관심을 갖고 의미를 찾는 과정에서 겪은 위험과 스트레스와 불행이 존재했기 때문에 좋은 인생이 되었다 할 수 있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도망갈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인생의 고통과 고난을 가치있는 싸움으로 변화시켰기 때문에 좋은 인생을 만들었다 할 수 있다.

90p 중 -


그렇다면 인생의 의미는 무엇일까?

 

알 수 없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내 인생을 남이 정해줄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인생은 불확실해서 살만한 것인지도 모른다.

불확실한 것이 불안하다 보니 사람들은 자꾸 규정을 지으려고 한다. 하지만 규정을 짓는 것은 사회적 질서에 대한 것이면 충분하다.

 

뜨거운 수증기로 이루어진 빛나는 구체, 별이 가득한 밤하늘이 있다. 물과 녹색의 산소 발생 물체로 채워진 지구가 있다. 모든 인간의 두 눈 뒤에는 의식적인 독립체가 있다. 물질과 현상으로 채워진 우주는 이 순간에도 끝없는 경이와 마법을 창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모든 것은 무에서 출발했다. 이 모든 것이 무엇이고 또 무엇이 될지에 관해서 우리는 끝없는 질문과 대답을 할 수 잇다. 그런데 우리는 경이를 찾기 위해서 부자연스럽과 확정적인 현실의 개념으로부터 눈을 돌리려 한다.

117p 중-

남의 인생에 대해서도 규정을 지으려 하면 안된다.

내가 기독교를 싫어하는 것은 신의 이름 뒤에 숨어 남에게 원하지 않는 영향력을 행사해도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동성애가 있다.

사실 나는 동성애를 찬성하지 않는다. 물론 반대도 하지 않는다.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남의 성적 취향을 내가 왜 반대하거나 찬성을 해야 하는가?

그것은 그들의 문제이지 내 문제가 아니다. 남들이 간섭할 문제도 아니다. 그저 그들끼리 합의에 의해서 결정할 일이다. 합의가 아닌 강제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이고 그럴 경우에도 그것은 법적인 문제이다.

백번 양보해서 신이 있다고 치자.

있다고 처도 신이 판단할 문제지 신자들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신자가 결정한다면 그들이 하는 행위는 기만이자 신의 권한에 대한 도전이다. 게다가 이승에서 처리할 일이 아니다. 신자들이 그렇게 기다리는? 사후의 세계에서 신이 알아서 할것이다. (정말 신을 믿는다면 신에게 다가가는 죽음을 기뻐해야 할텐 대부분의 신자들도 비신자들 처럼 죽음을 슬퍼하고 두려워하고 있다.)그걸 인간이 대행 하려고 하면 그것은 신이 하지말라고 했던 정죄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자들은 신의 계율을 지키지 않고 있는 것이 된다. 그걸 알면서도 한다면 신자들이 믿는 것은 신이 아니라 신이라는 존재가 가질 수 있는(있다고 생각하는) 권력을 탐하는 것이 되버린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그저 당신만의 기준을 세우고 그에 따라 잠에 들고 일어나라는 이야기다. 그에 따라 살고 죽으라는 말이다. 당신이 틀렸다고 해도 당신을 위해 사는 삶이 될 테고 아마도 다른 사람에 비해 특별히 더 나쁜 삶을 살게 될 확률은 적을 것이다. 당신이 옳다면 당신을 위해 사는 삶이 될 것이고 아마도 다른 사람보다 훨씬 나은 삶을 만들어가게 될지도 모른다.

101p 중 -

 

우주는 너무나 광활해서 인간이 다가갈 수가 없다. 인간이 관측할 수 있는 우주의 거리는 약 460광년이라고 한다. 그 너머에 있을 우주는 지평선이라고 한다. 그 너머의 존재가 없어서 못보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이다.

 

우주만 미스테리가 아니다. 인간의 뇌는 과학적으로 절반도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인체의 신비도 마찬가지이다. 매우 높은 확률로 우리는 우리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150살까지 산다고 해도 이것들을 모르는 채로 죽어갈 것이다. 우주는 커녕 내 자신의 마음도 모른채 죽을 수도 있다. 누가 자신에 대해서 다 안다고 할 수 있는가? 우리의 내장이 어떻게 생겼는지 직접 볼 수도 없다. 마음이라는 추상적인 존재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이 심장에 있는지 뇌에 있는지 그게 뭔지 정의 내리기 조차 어렵다.

 

그렇게 불확실한 세상에서 신이란 존재를 확정짓고 확실하다고 믿는 것은 그저 믿고싶은 것일 것이다.

어차피 죽을 때까지 신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죽기 전까지 믿으면 있다고 생각하고 죽는 것이고, 없다고 믿으면 없다고 생각하고 죽는 것이다. 죽고 나서 있었다고 알려줄 수도 없고 없었다고 알려줄 수도 없다. 그런 경우가 있었다고 해도 믿을 수도 없고 근거도 없다.

그런 불확실성 속에서 우리가 해야할 것은 안다고 착각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싶다.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삶을 대하는 태도이다. 결국 삶의 막바지에 이르면 사람은 나로 살아갈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 고민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내 삶의 주체가 나인지 아닌지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의식이 계속해서 진화했기 때문에 인간도 존재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의식의 진화란 무엇일까.

우리는 의식의 의미에 대해서 이해할 만큼은 진화했지만 의식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진화하진 못했다.

따라서 불완전한 진화 안에는 의식과 무의식의 완벽한 조화가 존재한다.

능력과 무능력, 지성과 무지가 교차한다. 비극적으로 느껴질 만큼 아름다운 교차라 할 수 있다.

127p 중-


진정한 지혜란 결국 인생이 암울하고 가혹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그 깨달음에 대한 반응에서 찾을 수 있다. 인생의 부조리가 내게 어떤 고통을 가져다줄지 몰라도 어쨌거나 살아가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이 안에서 인간 정신의 정수와 인간만의 고유한 특징이 나타난다. 절망 상태에서도 포기하기를 거부한다. 절망 어디에선가 작은 희망을 찾아낸다.

불가능한 것을 희망하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건 어떤 종류의 희망도 없이 계속 살아가는 것이다.

나는 이 희망 없음에 희망이 있다고 믿는다. 전복적 희망은 삶의 고통을 갈망하고 그 안에서 양분을 얻는다. 이성적인 희망을 모두 포기했을 때도 그럴 수 있다.

170p 중 -

 


나는 훗날 내가 내 인생을 후회하게 될까봐 평생동안 걱정하며 살았다. 후회할 일을 만들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 결국엔 더 후회할 만한 인생을 만들고 말았다. 나는 언제나 넘어지지 않으려고 조심했고 신중했으며 내가 진실로 원하는 일은 피하고, 하고 싶은 말을 참았다.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상상하면서 끝없이 공급되는 현재의 순간에 늘 머뭇거렸다.


우리의 삶이 언젠가는 끝나니라는 것을 알지만 언제일지는 모를 때, 왜 우리는 하고 싶은 일과 하고 싶은 말을 미루게 되는 걸까? 종말의 불확실성은 일정의 신기루 효과와 같이. 이 효과는 우리의 의식에 우리가 영원히 살게될 것이라는 생각을 주입힌다. 나에게는 여전히 내일이 있으므로, 나는 이 세상의 모든 내일을 다 가졌다고 생각하게 된다. 


181~182p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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