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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란사 - 조선의 독립운동가, 그녀를 기억하다
권비영 지음 / 특별한서재 / 2021년 7월
평점 :
립운동가를 기리는 것은 그들을 위한게 아니다.
우리가 알아주지 못한다고 그분들이 섭섭해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분들이 어디선가 보고 있을 거라는 것은 그저 살아있는 인간들의 착각 혹은 희망이다. 은유적 표현이라 해도 좋겠다.
사후 세계가 있다는 증거가 없지만 있다 치더라도 그분들이 안다는 보장은 없다. 그 긴 세월 동안 세상의 일을 일일히 모니터링하지는 않을거고 그 세상의 삶에 집중하고 있지 않겠는가.
설사 안다해도 그들은 고작 자신을 알아주길 바래서 위대한 일에 목숨을 바치지는 않았을 것이며, 그저 대의를 위해 하나 뿐인 소중한 목숨을 걸었을 것이다. 알지도 못하는 후세 사람들의 존경을 받자고 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들을 기리는 것은 우리 스스로를 위한 것이다.
인간으로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은 남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나라를 위하는 것은 나라에 속한 사람들을 위하는 것이니 여기에 해당된다.
이름이 잘 알려졌다고 더 훌륭하거나, 아예 흔적도 없다고 덜 훌륭한 것은 아닐 것이다. 독립운동을 성과로 평가 할 수는 없다. 실제로 어쨋는지는 알길이 없으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분들 모두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조금이라도 더 바르게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 훌륭한 분들의 희생 정신을 기리고 애국심을 고취하여 현재와 미래를 잘 이끌어나가기 위한 정신적 지표로 삼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서.
하란사는 잘 알려지지 않은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독특한 그 이름은 이화학당에서 받은 세례명 '낸시'를 우리식 발음으로 부른 것에서 비롯되었는데, 원래 김씨였으나 남편의 성을 따라 하란사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다고 한다. 본명은 나오지 않는다. 저자가 개화기 여성들의 열전에서 그 이름을 발견하였고 자료 조사를 했는데, 아무래도 많이 남아있지 않는 자료를 토대로 하다 보니 상상력이 많이 동원되었을 것이다.
좀도둑 소년 병수를 잡는 과정에서 만난 란사와 화영은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다. 활동적이고 거침없는 란사와는 달리 기생출신으로 다소곳한 화영은 그러나 비슷한 나이라는 것과 둘 다 후처라는 공통점으로 인해 친해진다. 소매치기 소년 병수는 독립운동가의 아들로 설정이 되어있는데, 후에 란사와 함께 하는 여정에 참여하게 된다.
남편 하상기의 배려로 일본 및 미국 유학을 가서 한국 최초의 미국 자비 유학생 및 문과 졸업자가 되었고, 이화학당의 교사가 되어 여성들의 의식을 깨우는데 힘썼다.
하란사의 시대를 뛰어넘는 행동은 남편의 배려 및 본인의 강렬한 의지가 있어서 였다. 그런 란사를 동경하며 지켜보는 화영은 남편의 눈치를 보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작은 봉사활동을 한다.
저자는 재미를 위해서인지 란사가 의친왕에게 연정을 품었다는 설정을 했다. 소설의 몰입도를 높이는데는 보탬이 되었을 것이다. 전기가 아닌 소설이기에 가능한 설정이다. 실제야 어땠는지 알 길은 없다. 그러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것만은 사실일 것이다. 백과 사전을 찾아보니 독립지사들과 만찬에 참석했다는 언급이 있었다.

하란사의 배움에 대한 의지와 열정은 대의를 위한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신여성이란 그저 서양옷을 입고 머리를 자른 것이 아닌 여성들도 깨어나야 한다는 의지 표현이 아니었을까?
드물게 고등 교육을 받은 여성으로서 란사는 교육의 중요성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일생을 교육에 바쳤을 것이다. 교육과 독립운동 모두 나라를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란사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배움의 중요성을 알려준다.
배움의 중요성은 현재에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사기를 당할 때는 보통 그 분야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를 때다. 학문이라는 것은 예로부터 기득권들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기도 했다. 천주교의 교황들이 히브리어를 알고 성경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은 그들의 특권이었다. 일부러 엉터리 해석을 해서 면죄부를 팔아 이득을 취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원인 중의 하나기도 하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를 반대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문자를 알고 있다는 것은 특권이며, 배우기 쉽고 과학적인 한글이 보급이 되어 백성들도 문자를 알게 되면 자신들만 누리는 이득에 위협이 된다는 매우 집단 이기주의적이고 좁은 생각으로 반대를 한 것이다. 그래서 한글 창제 이후로 500년 동안 묻히다 시피 한 것이었다. 물론 일반 백성들은 세종의 뜻대로 한글을 사용한 것으로 보이나, 본격적으로 사용하게 된 것은 1896년 최초의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이 발간되면서이다. 모두가 한글을 사용하면서 일본에 저항하자는 뜻이었다고 한다. 식자층들의 특권을 포기하고 일본에 저항한 최초의 시도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만큼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배움을 게을리 했던 것이 참 후회되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배우려는 의지를 가졌던 하란사 및 선조들에 비하면 비교도 안될 정도로 배움의 기회가 널려 있는데도 배우지 아니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독립운동으로 인한 숭고한 정신 뿐만 아니라 배움에 대한 정신도 우리에게 의미를 가져다 주는 하란사인 것이다.
읽기 쉽게 쓰였고 재미도 있기 때문에 부담없이 접근할 수 있으면서도 많은 것을 느끼게 한 소설이었다. 학생들이 이 책을 읽고 배움의 중요성과 대의를 깨닫는다면 더 의미가 있겠다.
과거의 학문을 배운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배우는 토대이다. 이미 전화를 발명했는데 그걸 모르고 처음부터 전화기를 만들려고 하는 노력은 아무 의미가 없듯이 과거의 학문을 모르고 새로운 것을 배울 수는 없다. 인간의 숭고한 정신도 마찬가지이다.
이미 위대했던 인물들의 정신을 알고 본받는다면 적어도 못난 인간은 되지 않을 것이다.
감히 그분들을 위한다는 착각은 하지 말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이런 분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네이버 문화충전200% 카페를 통해 책을 제공받은 뒤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