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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사회 - 증오는 어떻게 전염되고 확산되는가
카롤린 엠케 지음, 정지인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7년 7월
평점 :
'극혐' '맘충' 특정 사이트 사용자를 부르는 'ㅇㅇ충' '여혐' '남혐'
요즘은 온갖 혐오와 비난이 난무하는 세상이다. 왜 이렇게 돼버린 걸까?
어째서 사람들은 공존하기 보다는 서로를 헐뜯고 박멸하려고 이토록 애쓰는 걸까?
카롤린 엠케의 '혐오사회'에서는 서로를 헐뜯고 그걸로는 모잘라 사회에서 '매장' 시키고 싶어하는 요즈음 시대를 정확하게 통찰한다. 독일의 저널리스트이자, 독일 사회를 냉철하게 분석한 책이지만, 한국의 모습과 소름끼치게 닮아있다. '세계화'가 이런 식으로 진행 되어버린 것일까?
우리는 다르기 때문에 불평등하게 대우받는 것이 아니다. 불평등하게 대우 받았기 때문에 다르게 된 것이다. - 16p 추천의 말中
책의 내용 중에서 '에릭 가너'라는 흑인의 억울한 죽음에 관한 일화가 생생하게 나와있다. 그 대목을 읽으면서 말도안되는 '흑인' 대우에 대한 분노가 일렁였으며, 애도의 눈물이 흘러나왔다. 한국의 역사 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 숨어있는 부당한 사건들에는 이루말할 수 없는 분노가 가슴속 가득 차오른다.
여기서, 내가 '그'에 대한 감정이 생기지 않았다면? 내가 '흑인'이라는 인종을 극도로 혐오했다면, 과연 눈물이 나왔을까? 아니. 나는 아니라고 확신한다. 그저 인상을 쓰면서 이걸 왜 사례로 든거지?라는 생각에만 사로잡혔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바로 '감정'이다. 그냥 감정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타자에게, 어떤 사건의 당사자에게, 피해자에게 '감정이입'을 해야한다. 그래야 피의자에 대한 분노가 생길 것이며, 사건의 문제점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숨을 못쉬겠어"라고 애절하게 소리치는 에릭 가너의 말에 나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지만, 그 현장에 있는 경찰관들은 그저 그런 '천식환자'를 '무서운' 또는 '위협적인' '괴물' 인냥 대한다. 숨을 쉬지 못하겠다는 애절한 목소리에도 가슴을 짓누르며 움직이지 못하게 수갑을 채운다. 그의 목소리와 숨소리가 잦아지고 나서도, 그들(경찰)은 결코 에릭 가너의 안위를 살펴보지 않았다. 이미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여성 경찰이 다가와 맥박을 짚어본다. 그들은 감정이 없는 사람들인가? 어째서 그들은 에릭 가너의 숨을 못쉬겠다는 말을 무시할 수 있었을까, 어째서 한 '사람'이 눈 앞에서 아무런 죄도 없이 죽어가는데 그저 바라만 볼 수 있었을까? 엠케는 책의 초반부에 "증오한다는건 확신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 증오하는 자에겐 자기 확신이 있어야 한다." -17p 라고 이야기 한다. 아무런 죄가 없어도, '흑인'들은 '위험하고' '질나쁜' 종족이라는 확신이 이미 '백인' 경찰관들에게는 가득 들어차 있는 것이다. 이미 그런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잔혹하게도 그런 행동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에게는 그 행위가 '당연한'일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놀랍게 읽은 부분은, 이런 사건이 있은 뒤, 무조건 이런 행위를 벌인 경찰들을 '증오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었다. 결코 그들이 올바른 행동을 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 장소에 있던 경찰들은 물론 마땅한 벌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만, 그 사건이 '왜' 벌어졌는지에 집중하고, 그 사건의 원초적인 이유에 대해서 풀어나가야 한다고 카롤린 엠케는 이야기 한다. 증오에 증오가 더해지면 절대 풀릴 수 없는 실타래일 뿐이니까. 결국, 우리도 똑같이 누군가를 증오하고 혐오할 뿐이니깐. 그런 증오와 혐오의 반복은 그만두고 현명한 자세를 가지라고 이야기한다.
(에릭 가너의 자세한 이야기는 네이버에 그의 이름을 검색하면 많이 나온다. 그는 아내와 자식이 있는 가장이었다.)
다수와 소수의 견해에 대해서 글을 쓴 적이 있다. (물론 혼자 노트에 적고 끝났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라면 이치에 맞지 않는걸 이치에 맞는 일로 탈바꿈 시켜버린다. 그들에게는 아주 간단한 일이다. 다수가 힘을 합쳐 소수에게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할 뿐이다.
말도 안되는 말을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 한다고 옳다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을까?
이런 의문이 들겠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옳다고 한다.
소수 보다는 다수의 말이 훨씬 일리가 있을 거라고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같은 말을 하지 않겠냐는 생각이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수의 의견은 묵살당하기 일쑤다.
그들이 아무리 정의롭고 올바른 이야기를 한다한들. 사람들의 귀와 눈이 이미 먹어버린 상태에서는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이다. 나의 이 생각에 대해서 한 페이지 분량 정도의 글을 쓴 적이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더이상 옳은걸 옳다고, 그른걸 그르다고 말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고 느끼며, 어째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에 대한 생각을 글로 정리해본 것이다. 내가 내린 결론은 항상 '다수'였다.
물론 역사와 이데올로기도 큰 역할을 하겠지만, 다수의 힘이 없다면 혐오와 증오도 힘이 없지 않을까?
이유없는, 혹은 만들어진 내용들로 누군가를 '혐오'하고 '증오'하기는 이제는 그만둬야하지 않을까?
어째서 같이 살아가는 다른 누군가를 같지만 다른 '사람'으로써 취급하고 존중하지 않고 나의 혹은 내가 속해있는 사회의 잣대에 맞춰서 판단하는 것일까?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가 두려운 사회는. 절대 자유로운, 민주적인 사회가 아니다.
우리의 사회는 훨씬 더 자유로울 수 있으며 그럴 권리가 우리한테는 존재한다.
우리는 우리의 사상을 굳게 밀고 나갈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카롤린 엠케의 혐오사회를 한 번쯤은 읽어보길 추천한다.
혐오하는 사회를 혐오하길 바라며.
더이상 억울한 죽음은 존재하지 않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