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박하다는게 이 시리즈의 첫 인상이었다. 처음 인스타에서 발견했을 때 이 책은 또 뭐야? 라며 절로 호기심이 생겼다. 자극적인 컨텐츠를 찾는 요즘의 사람들에게 다른 의미로 자극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디자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하는 마음으로 밀리에 검색해보고는 바로 읽기 시작했다. 컨셉이 신박하기에 아무 생각 없이, 별 기대없이 읽기 시작해서 [순한맛]은 잔잔하면서 감성적이고 작품성이 높은 이야기들로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 [순한맛]에서 기대감이 높아졌기 때문일까? [매운맛]을 읽으며 작품성은 마찬가지로 좋았지만 순한맛과 매운맛의 차이가 거의 없어서 실망감이 들었다. 아무래도 순한맛보다는 훨씬 자극적인 내용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인데 그렇지는 않았다. 이 두 작품에 호러적인 공포는 존재하지 않는다.
-[초록 비가 내리는 집] 평생 남편에게 핍박받고 무시받으며 살아온 주인공은 병원에서 시한부 선고를 받고 자신이 유일하게 아끼던 화분들을 보살피다 세상을 떠난다. 한편 젊은 여성이 교수에게 파렴치한 짓을 당하고 힘든 삶을 영위하고 있는데 두 이야기가 오버랩 되며 혐오감이 배로 생겨난다. 잔잔하고 아름다우면서 그 속에 독기가 담긴 이야기였다. 어쩌면 여성이기에 이 작품이 오싹하게 느껴지는 걸 수도. 전체적으로 덤덤하면서도 깊은 곳을 찌르는 이야기였다.
[아직은 고양이] 남자친구가 고양이가 된 것 같다는 친구의 이야기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친구는 남자친구로 추정되는 고양이와 함께 살면서 ˝나도 고양이가 되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이야기 한다. 그러던 어느날 친구가 실종되고, 주인공은 벅찬 삶 속에서 친구를 떠올려본다. 그래도 나는 ˝아직은˝ 고양이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치열한 삶 속에서 인간이길 포기하고 그렇게라도 행복하고 싶다는 사람들의 마음이 처연하게 와닿는 이야기였다.
[우산이 나타났다] 술만 취하면 망가진 물건을 가져와 고치는게 술버릇이라는 주인공. 어느날 아이가 아파 어린이집에서 연락이 와서 데리러 가던 중 길가에 놓인 망가진 도롱이를 보고는 홀린 듯 고치게 된다. 그러다 아이가 열이 심해 쓰러져 중환자실에 입원하게 된다. 혼자 아이를 키우는 워킹맘들의 현실적인 고통과 어려움이 잘 담겨져 있는 이야기였다.
[디 워] 팀장과 구내 식당에서 밥을 먹고 돌아가는데, 팀장의 재채기 소리에 돌연 식사 전으로 돌아가게 된다. 무한 타임루프에 빠진 주인공은 평소의 자신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을 하게 된다. 가장 직관적이면서 유쾌한 작품이었다. 언제까지고 반복될 것 같은 일상. 직장인이라면 현실 속에서 모두가 겪고 있는 끔찍한 악몽이 아닐까. 누군가 반복되는 일상 속 특별한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고 이야기해주는 것 같은 이야기였다.
[나는 나무다] 한 숲에 뿌리내리고 오래도록 살아온 나무의 회고록. 인간의 추잡한 모습들을 적나라하게 그려냈다.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 인간이 저지르는 일들. 기분나쁘고 소름돋는 이야기였다.
[절담] 과거 어느 절에서 경험한 일을 시간이 훌쩍 지나서 재회하게 된 스님과 회상을 하게 된다. 그러나 두 사람의 기억은 전혀 다른 기억이다. 좋지 못했던 기억과 그 기억의 불확실성. 인간 기억력의 불완전성. 그것의 공포를 담은 이야기였다.
[마굿간에서 하룻밤] 별장을 팔기위해 내놓은 주인공은 자신에게 찾아온 세 명의 손님 때문에 불편한 상황을 겪게 된다. 불쾌한 감정은 독자에게까지 파고드는데, 누구의 말이 맞는 것인지 애매하고 기묘한 상황까지 생기기 때문에 독자들은 끝까지 찝찝함을 내려놓지 못하게 된다.
[아미고] AI가 지배한 세상 속에서 ‘사람‘으로써 아직까지 스턴트 배우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주인공은 자신이 직접 했으면 죽었을지도 모를 장면의 촬영을 보고 편리함과 생존의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언젠가 우리에게 실제로 도래할 수도 있을 미래를 현실적인 감각이 풍부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모든 작품이 감성적이고 환상적인 느낌이 짙어서 감성 미스터리라는 느낌이 가장 많이 들었는데, 모두 우리의 현실과 맞닿아있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순한맛]은 현실 속에서 느낄 수 있는 고통과 불편을 환상적인 이야기 속에 부드럽게 풀어냈다면, [매운맛]은 직접적인 불편함을 느끼게 하며 현실성이 더욱 짙은 이야기들이었다. 순하고 매운 것의 차이는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아- 이런 불편함을 가지고 있지 라는 느낌을 들게 하는 순한맛. 아- 진짜 불쾌하다 라고 느끼게 하는 매운맛. 신박하고 현실적인 공포를 느끼게 하면서 잔잔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들로 두 권 모두 만족스러웠지만, ‘공포‘ 그 자체를 생각하고 계시다면 분명히 실망할 것이다. ‘공포‘를 원하신다면 추천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