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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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페 '검은 양조장'카운터에 기대앉아 나는 맥주 한 잔을 마신다. 이봐, 오늘부터 넌 혼자야. 홀로 세상에 맞서야 해. 마음이 안내키더라도 사람들을 보러 나가 즐기고 연기를 해야 할 거야. 이 땅에 발붙이고 있는 동안은 말이야. 오늘부터는 수심에 찬 원들만 소용돌이치는군......전진이 곧 후퇴인 셈이지. 그래, 프로그레수스 아드 오리기넴과 레그레수스아드 푸투룸은 같은 말이야. 너의 뇌는 압축기에 짓이겨진 한꾸러미의 사고에 불과하지.

 햇살을 받고 앉아 맥주를 마시며 카렐 광장은 쉴새없이 오가는 사람들의 무리를 지켜보았다. 젊은 사람들, 젊은이와 학생뿐이다. 그들의 이마에는 모두 별이 하나씩 새겨져 있다. 삶이 시작되는 순간 저마다의 내면에 싹트는 천재성의 표징이다. 그들의 시선은 힘을 발휘한다. 소장이 나를 바보 천치라고 부르기 전에는 내게서도 샘솟던 힘이다. 나는 난간에 몸을 기댄채 바라본다. 전차들이 돌며 한 방향에서 내려와 다른 방향으로 되올라간다. 그것들의 붉은 줄무늬를 보니 내 마음도 유쾌해진다. 내게는 이제 시간이 있다.




 어떻게 지내는지를 묻는 귀에 익은 목소리가 조금씩 아스라해질 때,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빙하가 녹은 물에 세수하고, 짧은 시간 빨리 샤워를 끝내야 하고, 조그만 노트에 그림을 그리거나 수첩에 뭔가를 적으며 신문도 인터넷도 도착하지 않는 곳에서 시간을 보내다 돌아오니, 마침내는 나는 아직도 집에 온 것인지, 여행 중인지가 헛갈렸던 봄날. 인터넷도 안되는 곳에 가져가야 할 책은 얇고 짧고 깊은 것이어야 했다. 깊은 초록빛의 얇은 책, 와주었구나. 



 

밀란 쿤데라, 줄리언 반스, 제임스 우드가 극찬한 책. 페이지를 조용히 천천히, 커피는 진하고 깊게. 밤에는 집에 있을 고양이들을 생각하며 별도 보고 타들어 가는 나무 냄새를 맡으며 곁의 휘파람 소리를 듣던 기억. 삼십오 년째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는 남자와 삼십오 년 남짓 종이 더미를 뒤지는 나의 공통된 기억. 내가 누구이든, 어디에 있던 간에 이름 앞에 숨은 그림자를 캐내는 듯한 목소리.





 폐지를 압축하던 남자, 한탸. 그는 근사한 문장을 통째로 쪼아 사탕 처럼 빨아먹고, 작은 잔에 든 리큐어처럼 홀짝대며 음미한다. 책 속에서 그는 문장이 천천히 스며들어 그의 뇌와 심장을 적시고, 혈관 깊숙이 모세 혈관까지 비집고 들어온다고 고백한다. 책과 글씨가 그 자신이 되고, 그가 흡수한 것이 곧 그 자신이 되는 경지에 오른 글을 좋아하는 남자가 하는 작은 회상. 책 한 줄 읽지 않은 그의 연인, 그러나 누구보다도 멀리 갈 수 있었던 여자. 많이 읽는 것과 깊이 읽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를 똥스키를 타던 여자는 온몸으로 보여준다. 물 건너간 기품, 절망보다 먼저 터지는 웃음.





나의 만차는 투숙객들이 햇볕에 몸을 그을리고 있는 테라스를 따라 평소처럼 이리저리 오가고 있었다. 사업가 이나의 안목이 정확했다. 그날 만차는 정말이지 멋졌다. 그런데 그녀가 거기에 있던 투숙객 몇 명을 막 지나친 순간 여자들 몇이 돌아보며 웃음을 참는 것이 보였다. 그녀가 내 쪽으로 다가올수록 여자들의 웃음이 더 자지러졌다. 남자들도 뒤로 벌렁 나자빠지며 신문으로 얼굴을 가린 채 열심히 읽는 척하거나 차라리 눈을 감았다. 마침내 만차가 내 곁을 지나가는 순간 나는 보았다. 그녀가 신은 한쪽 스키, 그러니까 발꿈치 바로 뒤쪽에 큼직한 똥이 얹혀 있는 것을. 야로슬라프 브르흘리츠키의 아름다운 시에도 나오는, 문진만큼이나 큰 똥......나는 대번에 이해했다. 만차의 삶에서 이제 제 2막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명예를 지키지 못하고 치욕을 견뎌야 하리라고 예견된 삶이었다. 




 이 똥스키 사건에서 한탸는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으며, 사고하는 인간 역시 마찬가지다'라고 생각한다. 폐지를 압축하며 만차를 생각하는 한탸, 밤새 샴페인을 마시며 용서를 빌었건만 결국, 떠난 만차. 그가 압축하기로 한 노자의 도덕경. 

 치욕을 겪고 명예를 지킨다는 내용의 페이지를 압축통 한가운데 놓는다. 바스러지는 종이, 바스러지는 명예, 결국 지금에야 회상하는 삶의 한 토막. 

 이것이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다면 페이지를 더 넘기는 것이야말로 읽는 사람의 도리일 것이다. 읽는 사람과 쓰는 사람이 조금씩 맞추어가는 호흡이 얼마나 황홀한지를 느끼게 해주는 문학적 성취. 책과 나 사이의 적절한 거리, 내 머릿속에 천천히 들어오는 작가의 목소리. 

 책의 각 장은 한탸의 일을 소개하는 짧은 문장으로 시작하는데, 어느 것 하나 같지 않고 조금씩 끝이 맞물려 돌아가서, 보흐밀 흐라발은 글씨와 이야기로 이어지는 작은 푸가를 완성한다. 




 침대에 등을 대고 비스듬히 누워 있는데 아주 작은 생쥐 한 마리가 내 가슴팍 위로 떨어져 미끄러지듯 달아나 몸을 숨겼다. 내 가방이나 외투 호주머니에 두세 마리가 딸려온 게 틀림없었다. 마당에 변기 냄새가 가득 퍼져 있는 것을 보니 곧 비가 퍼붓겠다 싶었다. 술과 노동으로 멍해진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이틀 동안 내 지하실을 청소하며 생쥐들을 희생시킨 참이었다. 그저 책이나 갉아먹고 폐지 더미에 뚫린 구멍 속에 살며 그 작은 둥지 안에서 새끼들을 낳고 키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소박한 짐승들인데. 추운 밤이면 내 품안에서 공처럼 웅크렸던 내 어린 집시 여자처럼 몸을 사린 생쥐들이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 그래도 저 하늘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연민과 사랑이 분명 존재한다. 오랫동안 내가 잊고 있었고, 내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삭제된 그것이.


 



 절망에 앞서 웃음이 먼저 나오던 만차의 상황이 희비극이라면, 따스한 작은 둥지 속 생쥐를 뒤늦게 걱정하는 한탸의 상황은 부조리극에 가깝다. 

 원인과 결과가 분명하지도 않고, 앞에 했던 질문에 대한 답이 뒤에 나오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살아가는 모습 그 자체가 아닐까. 그저 작은 둥지 안에서 새끼들을 낳고 키우고, 추우면 따뜻한 품안에 웅크리는 생쥐를 떠올리는 한탸가 보아온 것이 무언이던가. 왕실의 문장이 찍힌 책, 노자의 도덕경, 니체와 사르트르, 카뮈.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코카콜라를 마시며 그리스와 불가리아 휴가를 생각하는 신식 노동자들 앞에서 무너진다. 똥스키 사건으로 만차의 삶이 제2막으로 들어섰다면, 신식 컨베이어벨트 앞에서 한탸의 삶은 막장으로 들어선다. 갱도의 끝, 더는 갈 곳이 없음을 깨달은 그가 찾는 곳은 그가 평생을 바쳐온 압축기이다. 





 평생을 우체국에서 일하느라 등이 굽고 무릎이 불편한 동료들을 보던 '우체국'의 찰스 부코스키가 그려낸 노동, 접시닦이부터 시작해 그날그날 찾아드는 잡일을 하고 공원 벤치나 구빈원에서 체험한 조지 오웰의 밑바닥. 찰스 부코스키가 그의 노동을 담배 한 개비 후 느껴지는 쓴맛처럼, 조지 오웰이 그의 노동을 걸인의 너덜거리는 신발 밑창처럼 그렸다면 보후밀 흐라발은 한 세계의 종말을 담담하게 바라보는 늙은 노동자의 회상을 더없이 깊은 명상으로 보여준다. 

 조금의 술 한 잔과 아스라한 모닥불 연기를 쐬고 나면 천천히 다가오는 맑은 새벽. 

 사라져가는 것들이 쌓인 새벽, 무리가 아닌 그 속에 스민 한 사람의 몸냄새가 풍겨오는 밤의 끝.







 여행의 끝, 어둠 속의 집을 보면 조용히 안도감이 든다. 여전히 낱말과 글씨 앞에서 조용해지고 뒷마당의 새들에게 줄 모이를 사게 된다. 꼬리털을 살짝 스치며 지나가는 고양이를 보면 고향의 '새첩다'는 말을 떠올리다 그곳 공기를 생각하기도 한다. 잘 돌아와 반갑다는 인사를 들으며 눈뜨고 잠드는 생활. 한탸의 생활처럼 바깥이 아수라장이어도 여전히 호기심과 품위를 유지하고픈 인간적인 욕망 하나쯤을 품은 생활로 돌아와 다시 한번 책장을 열었다 닫는 봄날에 스치는 시 같은 소설.





...이 작품을 규정하는 키워드가 있다면 자유나 저항 같은 거창한 단어보다 '연민'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도처에 허무가 널려 있어도 삶은 자체의 생명력으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불가항력적이면서 매력적인 것임을 흐라발은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일상의 삶이 신성화되어 예배의 노래 같기도 한, 짧지만 강렬한 이 책을 읽노라면 책을 관통하는 한줄기 바람, 성령이기도 한 숨결에 단숨에 실려가는 느낌이 든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을 두고 흐라발 자신은 자신의 삶과 작품 전체를 상징하는, 그가 쓴 책들 가운데 가장 사랑하는 책이라고 고백했다. 그가 세상에 온 건 '너무 시끄러운 고독'을 쓰기 위해서였다고.-역자 후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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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04-10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를 못하겠더라고요. 그런게 서재브리핑에 이 글에 대한 리뷰를 쟌님이 썼다고 뜬 순간, 이 분은 좋아했을 것이다! 단번에 생각했어요. 아니나다를까, 별 다섯이네요. 훗.

Jeanne_Hebuterne 2017-04-10 10:21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다락방님.
책은 요즈음 많이 읽었는데 리뷰에 많이 소홀했었어요. 엄중히 감시받는 열차라는 보후밀 흐라발의 전작이 참 좋아서 이 책도 기대가 컸는데, 전 이 책이 산문을 가장한 시 같이 느껴졌어요. 한 글자 한 글자를 꾹꾹 눌러 쓰고, 앞에서 보고 뒤에서 보고. 그런데, (제가 너무 똥똥거리나 싶지만) 똥스키 부분은 우습지 않던가요ㅠㅠ 전 우리집 고양이 김칼리의 풍성한 털 탓에 못볼 것을 본 적이 꽤 되어서 꼭 만차 라는 여자친구가 김칼리같더라구요! (아무개 님이나 하이드 님은 나를 이해할 것이야...라고 집사를 끌어들여 보는데, 이건 김칼리만 이런지도ㅠㅠ)
너무나도 귀엽고 우아하게 아아아아?? 하면서 다가오는데 풍성한 꼬리털에 그것을 본 순간..만차가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남의 일 같지가 않았어요..

더군다나 책을 압축통에 늘 넣고, 온갖 책을 다 접하는 남자라니, 묘한 동질감을 느끼기도 했고, 그 스스로가 압축통에 들어가게 될 때엔 이렇게 사라지다니, 슬프기도 하고. 보후밀 흐라발은 늘 제겐 마지막 페이지를 다 읽자마자 다시 앞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작가였어요. 줄리언 반스가 톱니바퀴처럼 낱말을 딱닥 맞춘다면 흐라발은 돌림노래, 푸가의 울림을 만드는 작가랄까요.

미세먼지 조심하시고, 또 자주 뵈어요^^

mysuvin 2017-04-14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렵다 그래서 장바구니에 담아놓고...이러다 해를 넘기겠구나 싶을 정도로 뒤로 밀리고 있는데 한 번 도전해 볼까 싶네요. 이렇게 예쁜 리뷰는 오랜만에 읽어봐요~♥ 다른 리뷰들도 천천히 보고 가야겠어요!

Jeanne_Hebuterne 2017-04-19 10:22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mysuvin님!
실은 저 이 책 읽는데 시간이 정말 오래 걸렸어요. 앞에 한 페이지 읽었다가 다시 되돌아가서 또 읽고, 이게 무슨 말이지? 하며 또 곱씹고, 뒷장 먼저 쓰윽 훑어보기도 하다보니 책은 얇은데 정말 오래 걸렸어요.
오래, 천천히, 조용히 들여다보아야 하는 얼굴이 있는 것처럼 책들도 그런듯 합니다. 한번에 빨려들게 하고 일체의 거부감도 없이 읽다가 책장을 덮고나면 줄거리가 두번다시 기억나지 않는 종류도 있고, 반대로 계속 나를 튕겨내고, 밀어내고..그러나 책장을 덮고나면 종종 오랫동안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이 책은 후자의 경우에요. 저는 두 경우 모두 우리 삶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벚꽃이 질 즈음에는 이런 느긋한 독서도 좋을 것 같아요.
미세먼지 조심합시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