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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
미야모토 테루 지음, 송태욱 옮김 / 바다출판사 / 2016년 1월
평점 :
금수錦繡
1.수를 놓은 직물
2.아름다운 직물이나 화려한 의복
3.아름다운 단풍이나 꽃을 비유하는 말
4.시문, 훌륭한 문장을 비유하는 말
금방이라도 변할 것 같은 빛을 바탕으로 흩날리고 바스러지는 잎사귀, 한글과 한자로 쓰인 책 제목과 작가의 이름. 1982년, 미야모토 테루가 쓴 흰 아름다운 책을 손에 넣었습니다.
햇빛이 넘치고 바람이 가득하던 날, 집에 돌아오던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하늘이 유난히 파랗고 높은 날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마 길가 담장을 따라 자란 푸른색 나뭇잎이 더 눈에 띄었고, 그 푸른색 속의 노란빛도 더 그랬겠지요. 나뭇잎은 온통 짙은 초록색이었어요. 그런 초록의 나뭇잎이 담장을 둘러 빼곡했는데, 그중 유난히 샛노란 개나리 빛의 뭔가가 눈에 띄었어요. 늦거나 이른 봄꽃인가, 싶어 보았더니 그 샛노란 빛깔은 나무의 여리고 아픈 잎사귀였습니다. 너무 연약해서 꽃으로 보이는 잎을 만지려다가, 마침 머리 위에서 새가 크게 울어 집으로 걸음을 재촉했어요. 그것과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지만, 갑자기 작년에 읽었던 미야모토 테루의 '금수'가 다시 떠올라 책장을 펼쳤습니다. 재독을 잘 하지 않지만, 다시 따라가는 이 남녀의 편지는 제 기억과는 다른 부분이 조금씩 있었어요.
어느날 새벽 5시에 사건을 알리는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2층 침실에서 자고 있던 저는 가정부인 이쿠코 씨가 깨워 일어났습니다.
"야스아키 씨께 큰일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쿠코 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목소리가 떨려 저는 심상치 않은 사건이 일어났다는 걸 직감했습니다. 저는 파자마 위에 카디건을 걸치고 계단을 뛰어내려 갔습니다. 전화를 받아 보니 굵고 차분한 목소리로 경찰서라고 하면서 아리마 야스아키 씨와 어떤 관계냐고 물었습니다.
"안사람입니다만." 저는 추위와 동요로 떨릴 것 같은 목소리를 억누르며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잠시 침묵이 이어지고 나서 사무적인 어조로 당신 남편으로 보이는 남성이 아라시야마의 여관에서 동반자살 사건을 일으켰다, 상대 여성은 사망했지만 남편은 어쩌면 목숨을 건질지도 모르겠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데 아주 엄중한 상태이니 당장 오시라, 하며 병원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아키와 아리마는 이혼하게 됩니다. 십 년의 시간이 흘러 마음이 무뎌질 무렵 자오의 달리아 화원에서 돗코누마로 오르는 케이블카 리프트 안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고, 아키가 아리마의 주소를 알아내어 편지를 보내지요. 아키는 그저 당시 동반자살 사건을 일으켰던 여자, 유카코의 부친이 자살 사건 이후 자신을 방문하여 사과했던 일을 전하는 걸 목적으로 우편함에 이 편지를 넣는다고 썼지만...... 정말, 그랬을까요?
저는 이 때로는 조용하고 때로는 섬뜩한 이야기가 주는 매력에 다시 빨려 들어갔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야기가 어느정도 자극적이고, 미야모토 테루에게는 뒷페이지를 궁금하게 만드는 재주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 인물들의 마음이 심연에서 차츰 뭍으로 오르는 과정에서 나름의 해방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살인은 격정의 범죄입니다. 어지간한 마음의 동요, 혹은 계획이 있지 않고서야 벌이기 힘든 일이지요. 그런데 이 유카코 라는 여성은 내연관계에 있던 아리마를 찌르고, 자신도 찔러 스스로 죽고 맙니다. 그 격정이 어쩌면 그렇게 활짝 핀 꽃 같은 자기까지 죽인 것일까. 그리고 그 뒤 시간은 왜 그렇게 잔인한 것일까. 그런 생각이 처음 이 책을 읽을 때 들었다면, 어젯밤 다시 읽었을 땐 이 두 사람의 차분한 격정이 향하는 방향이 꼭 사람의 인생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아키와 아리마, 이 두 사람의 편지가 모조리 제 마음과 쏙 닮았다고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이를테면 아리마는 유카코에 대해 써내려간 아리마의 편지에 격분해서 물음표를 잔뜩 넣은 편지를 쓰게 되고, 아리마는 그에 대해 '저에게 유카코와의 전말을 써야 할 의무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답신을 보낼 때가 그랬어요.
또는, 기막힌 사업 아이템을 내놓고도 오히려 아리마에게 '역시 당신은 대단한 사람이에요. 저 같은 사람은 결국 여자라니까요. 거기까지 머리가 안 돌아가요.' 라고 레이코가 감탄할 때엔 슬프기도 했어요. 아리마가 어떻게 움직일지 다 예측하고 그에 선수를 두는 대담한 이 사람이, 1982년의 여자였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고서야 이 이야기는 다른 시대의 이야기라는 것을 다시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소설은 작은 이야기입니다. 그 속에서 무엇이 정말 리얼한 것일까요? 저는 이야기가 시대를 벗어날 수도, 혹은 시대를 반영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언제가 될지 모를 미래의 독자는 책을 읽기에 앞서 그 책이 언제 일어난 어떤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지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내가 어떤 책을 읽고 앞으로 부모님에게 효도해야겠다든지, 혼외정사를 하는 사람들을 벌주어야겠다든지 하는 일체의 도덕적 판단을 하게 된다면 그 소설은 실패한 소설입니다. 그 속의 미학적 구조와 진정 작가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않고 지나치게 되었다는 말이니까요.
그러나 오히려 이 책의 모든 인물은 도덕, 윤리의 축이 아닌 뭔가 다른 저마다의 기준으로 움직인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키가 혼외정사로 아이까지 둔 남편에게 화를 내지 않는 것은 그를 사랑하지 않아서였다, 라고 합니다만 아키야말로 자기 인생의 패턴을 찾아내려고 노력했던 사람입니다. 신기한 것은, 아키의 그 노력이 출구를 찾게 되는 것은 오히려 가장 비논리적인 레이코의 할머니 이야기를 듣고서 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학실한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깨달은 것은 아니다. 군대로 끌려간 네 아들이 먼 남방에서 차례로 죽어 나간 뒤 곧바로 종전을 맞이하고, 그리고 1년 가까이 지나 나는 쉰 한 살이 되려 하고 있었다. 내 아들들은 왜 서른도 안 되어 죽어야만 했는지를 생각하면서 불탄 들판인 더운 오사카의 어느 거리를 걷고 있다가 문득 생각한 것이다. 나는 어쩌면 죽은 아들들과 또 어딘가에서 만날지도 모른다. 아니, 반드시 만날 것이다. 그것도 내세가 아니라 이 세계에서 다시 귀여운 아들들 중 세 명을 만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비할 데 없는 기쁨이 느껴져 눈물을 흘리고, 비할 데 없는 슬픔도 느껴져 눈물을 흘렸다. 나는 네 개밖에 없는 손가락을 몸빼 바지의 주머니에서 꺼내 햇빛에 비추어 보았다. 나는 내내 서서 그 기분 나쁜 손을 얼마나 오랫동안 응시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것은 나 자신도 오싹해질 만큼 추하고 무서웠다. 하지만 그 추함과 무서움의 덩어리 같은 타고난, 네 개밖에 없는 손이 왠지 이 세상에서 다시 한번 아들들과 틀림없이 만날 거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던 것이다.
레이코의 할머니는 왼손 손가락이 네 개였습니다. 이 손가락이 네 개라는 것과 전사한 아들들을 다시 만날 것이라는 믿음은 실은 전혀 관계가 없지요. 그러나 할머니는 자신의 손가락 네 개와 전사한 아들 중 셋을 떠올립니다. 자살한 아들인 겐스케는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을 테니까, 만날 수 없다는 생각, 그러나 셋은 꼭 만나게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어쩌면 도저히 만날 수 없는 겐스케를 가장 사랑스럽고 가장 가여운 아이로 마음속에 품고요.
어쩌면, 우리가 살아있는 일은 종종 이상할 만큼 인과관계를 벗어납니다. 아키의 두 남편이 외도한 것은 아키의 행동과 무관한 일입니다. 아리마가 백화점 6층 침구 매장에 발을 들인 것과 아키가 낳은 아이가 아주 아팠던 것에도 아무런 인과관계는 없습니다. 그러나 아키는 필시 누군가와 결혼해도 딴 여자에게 남편을 빼앗기는 업보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며, 자신에게 무엇이 부족한지를 알아내려고까지 합니다. 이것은 손에 쥔 카드와 빼앗긴 카드를 비교해보려고 하는 노력이지요.
자신의 무엇인가가 원인과 결과가 되어 지금에 되돌아온 것이라고 생각하던 아키가 오히려 홀가분해 하는 것, 레이코의 할머니가 아들을 만날 것이라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것, 아리마가 지도를 펴고 오늘은 어디로 가볼까, 하며 미용실을 찾아 발걸음을 옮기는 것.
이 세 사람의 이야기가 길가 담장을 따라 웃자란 푸른색 나무의 꽃같던 노랑 잎사귀 같이 느껴졌습니다. 종종 하늘이 높고 푸르거나 낮은 회색빛으로 내려앉으면 어떻게든 흔들리거나 언젠가는 사라질 그 꽃같던 잎사귀.
소설 속 아키는 내도록 십년 전의 전남편의 자살 사건을 잊지 못하다가 모든 것을 알게 된 다음 더이상 뒤돌아보지 않게 됩니다. 두 사람이 나누는 편지는 그러므로 긴 터널을 빠져나가려는 사람의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와도 같습니다. 빠져나가고 나서야 손에 쥔 것을 조용히 내려놓을 수 있는 그런 터널이, 너무 길거나 짧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인간의 바람이지만 그것조차도 시간의 일이겠지요.
나이프로 자신의 목을 찔러 죽은 세오 유카코 씨. 죽어 있는 자신을 바라보았으면서도 다시 살아 돌아온 당신. 나이 들어 한층 일에 집중하고 있는 쓸쓸한 아버지. 또 하나의 숨겨진 가정을 갖고 그 여자와의 사이에 태어난 세 살짜리 여자아이의 아버지로서 고심하고 있을 가쓰누마 소이치로. 당신이 고양이에게 먹히는 쥐를 봤던 바로 그 시각에 근처 달리아 화원의 벤치에 앉아 무한한 별들을 바라보았던 저와 기요타카. 우리의 생명이란 얼마나 불가사의한 법칙과 구조를 숨기고 있는 것일까요?
언제까지 써도 끝에 없습니다. 드디어 펜을 놓을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우주에서, 불가사의한 법칙과 구조를 숨기고 있는 우주에서 당신과 레이코 씨가 앞으로도 쭉 행복하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이 편지를 봉투에 넣고 발신인을 쓰고 우표를 붙이고 나면 오랜만에 모차르트의 <39번> 심포니에 귀를 기울이려고 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아무쪼록 내내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안녕히.
그럼 이만 줄입니다.
11월 18일
가쓰누마 아키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