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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어도 얼어도 비틀거려도
미카엘 엥스트룀 지음, 정지인 옮김 / 낭기열라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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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봐라. 고래들은 서로 노래를 불러주고 있지. 바다 깊은 곳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무리가 흩어지지 않게 유지하는 거란다. 고래들은 신선한 공기를 마시지 않고도 한 시간 동안은 물속에 있을 수 있어 가끔가다 질식하는 일도 생기기는 하지만 말이야."

 "익사하는 건가요?"

 "그런 셈이지. 고래들이 잘못 헤어쳐서 육지 위로 올라올 때가 있는데 고래한테는 가슴뼈가 없어서 제 무게를 못 이기고 해안가에서 질식사하기도 한단다. 무리 전체가 같이 해안가로 헤엄쳐 와서 죽는 일도 있고."

 "왜 그러는 건데요?"

 "그건 아무도 몰라. 내 생각에는 지구의 자기장을 나침반으로 이용하는 고래가 자기장을 감지하는 데 문제가 생겨서 혼란을 일으킨 게 아닐까 싶구나."

 고래의 노래가 끝났다.

 미크가 다시 버튼을 누르고는 말했다. "어쩌면 육지가 그리워서 그랬는지도 몰라요."





 사람과 사람의 경계. 바다와 육지의 경계. 물속과 공기 중의 경계. 어디론가 가려는 나룻배의 흔적. 

 그것조차 남지 않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저 건너 어느 편이 있다면, 그곳에 다다른다면 그건 어떤 느낌일까. 세상 모든 경계가, 그 선의 색채가 점점 옅어지고 흐려지는 순간이 있을 것이었다. '멀어도 얼어도 비틀거려도' 속에서 모습을 나타내는 그 순간은 때로는 무척 아름답고 흐릿하여 더 선명했다. 아름다운 장면이 빛나는 반짝반짝 아이의 이야기. 이를테면 박물관에서 듣는 고래의 노래. 발보다 눈이 더 시린 스웨덴의 밤하늘에 가라앉은 별. 배에 구멍 난 채 가게 안에 잠든 악어. 나무 위에 날아다니는 긴꼬리 올빼미. 그리고 흐려지는 순간에는 뗏목을 타고 급류에 휘말리는 소년. 겁먹어도 용기있는 아이. 공기 중 먼지를 응시할 줄 아 아이. 우리는 시궁창에 있지만 몇몇은 별을 보고 있다는 오스카 와일드의 말 속에 담긴 아이. 미크가 그런 아이다. 





 미크가 보는 색채는 말이 없고 소리는 파랗거나 하얬다. 다른 것을 볼 줄 아는 아이였다. 곱고 소중한 가루를 손에 한 줌 쥔 아이. 가장 불행한 순간이 가치 있는 순간으로 자리를 마법처럼 바꾸는 순간이 있다면 그 비밀을 아는 아이. 만약 불행이 불행하고 아픔이 아프다면, 잠깐, 숨을 고르고. 상처를 없애기 전 그것이 어디 즈음 있는지를 살펴도 좋을 것이다. 불행하다 하여 감싸 안고 아프다 하여 손을 잡는 것은 우리가 보내는 시간이 결국 '행복' 내지는 '안정' 혹은 '구원'에 이르러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현재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시간과 경험을 직선으로 느끼기에 순간을 살 수가 없다. 미크가 느끼는 불행의 원천을 찾고 손을 잡으려 한다면 그것은 그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시선일 뿐이다. 그러나 손을 잡기 전에 옆에서 나란히 걸으면서 조용 그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체온을 전하는 것은 그다음에 해도 늦지 않을 만큼 단단한 아이다. 듣는 이의 고통을 말하는 자의 입술에 묻히려는 행동은 잠시 그만. 가만히 들어본다.





 "강꼬치고기 잡아본 적 있어?"

 "아뇨."

 "난 천 마리는 잡았을 거다. 콘숨의 라세랑 같이 프랑스로 수출한단다. 프랑스 사람들은 강꼬치고기의 진가를 알지. 맛이 훌륭하거든. 여기 사람들은 이제 강꼬치고기를 안 먹어."

 벵트 할아버지가 돼지고기를 우물우물 씹었다. 

 "강꼬치고기가 커요?"

 벵트 할아버지가 빈 프라이팬을 시크디에 갖다 놓았다.

 "너 나랑 같이 낚시하러 가서 고기 끌어 올리는 것 좀 도와줄래?"

 "네."

 "내일 아침 6시에 내려오너라. 옷 따뜻하게 잘 챙겨 입고."

 나가려던 미크가 문 앞에서 돌아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셀레트 호수에 고래가 한 마리 있어요."

 "고래가?"

 벵트 할아버지가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고래가 노래하는 소리를 들었어요."

 "네가 들었다는 그 소리는 얼음장 소리야. 얼음장이 생길 때 그렇게 노래를 하지. 장력 때문에 그래."

 "고래도 노래를 해요."










그것이 무엇이든 자신이 속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 때문에 자신의 존재가, 시간이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알고 있는 아이였다. 그런 아이였다.




 그렇지만 불행과 고통, 상처와 기다림 속에서 과연 가치와 의미가 어떤 순간에 드러날까?

 이런 의문에 종종 이 아이에게도 고개를 내미는데, 함께 생각하기 이전에 도와주고 손을 뻗는 것만이 옆에 앉은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곧 우리의 삶이 어떤 종류의 목표와 목적을 지닌다고 생각하는 자의 관점이리라. 곧 이것은 불행의 원천을 찾으려는 생각이다. 이것은 신에게 호소하려는 신정론의 갈래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살아있는 것이 종종 왜 아프고 고통스럽고 허탈하고 허무한지를 깨닫는 것이 괴롭지는 않다. 오히려 직선으로 나타나는 듯한 시간 속에서 우리가 처음에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우리가 왜 멀어져가는지, 우리가 왜 비틀거리는지를 알아내는 과정이 더 괴로워야 한다.





 이 괴로운 과정이 이렇게까지 무섭게 느껴졌던 것은 순전히 내가 단단하지 않고 그저 딱딱하기 때문일 것이다. 머리가 말랑말랑한 아이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줄 생각을 해본다. 한 번도 만난 적 없고 늘 만났던 나도 몰랐고 모두는 알고 있었던 아이 미크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면 그 아이는 곧바로 모든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 아이는 사자왕의 모험에 나오는 병약한 아이이기도 했고 술주정뱅이 아빠와 언젠가부터 자신을 보살펴 주지 않는 형과 함께 살던 아이이기도 했고 흡혈귀와 관 여행을 하는 아이일 수도 있다. 





어떤 아이가 스웨덴에 살았는데......

-그 아이는 머리카락 색깔이 뭐야?

아마도 눈처럼 빛나는 색일거야.

-눈도 빛이 나?

고양이가 아니니까, 눈에선 빛이 안나와.

-엄마, 아빠는 뭘 해?

엄마 아빠는 없어. 

-그럼 형은? 동생은?

아무도 없어.

-그럼 아무도 없는 곳에 살아?

응. 대신 고래가 노래하는 걸 들어. 

-고래와 밥을 먹어?

아니. 못된 사람들이 그 아이를 가두고 밥도 주지 않아.

-그런데 고래는 뭘 노래하지?







 



미크가 술주정뱅이 아빠와 형과 살다가 어느 순간 형도 집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 잠시 고모와 살다가 아동학대를 일삼는 가정에 위탁되고 죽을 힘을 다해 그 집에서 나왔을 때, 자신은 지옥에서 나왔다고 말하는 것을 정당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꼭 고통을 겪어야 할 필요는 없다. 더 강해지려면 아픔과 고통이 꼭 필요하다는 말도 있지만, 그러나 모두가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 시간의 한 형태 역시 눈처럼 녹아 없어지지 않는가. 그렇다면 굳이 강해지기 위해 그 아픔과 고통 역시 미크가 겪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미크가 반짝인다. 바로 그 이유로 미크가 빛을 내며 생생하게 살아있다. 죽지 않고서야 누구나 겪어야 할 시간,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로 하여금 우리의 시간은 가치를 갖는다. 미크는 벼랑 끝에서 균형을 잡고 서 있을 때에는 숨 한 번 잘못 쉬어도 굴러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아이다. 그것은 행복해야만 한다는 목적을 달성해야 이루어지는 삶도, 단계를 계단처럼 밟아야 하나씩 이루어지는 삶도 아니다. 그에게 행복은 즐거운 상태가 아니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은 미크에게는 '기다리면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무언가를 이겨낸 다음 소중함의 가치를 깨닫는 행위였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한가지 표정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미크가 조금씩 행복을 느끼는 순간도 분명 있다. 

고모와 함께 밤길을 걸을 때. 벵트 할아버지와 이야기할 때. 피아가 용감한 아이라고 말해줄 때. 그것은 분명 미크가 다른 이들과 함께 있는 순간이었다. 미크를 바라보노라면 행복은 감정의 형상을 띤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행복은 존재의 방식으로 드러난다. 춥지만 따뜻할 때. 떨어져 있지만 연결될 때. 물에 빠졌지만 숨을 쉴 때. 두려움과 기쁨, 불행과 행복, 무서움과 용기. 이렇게 짝지어 나타나는 상반된 각각의  모습이 우리가 가치 있다거나 의미 있다고 부르는 순간이 된다. 모든 벽이 허물어질 때 새로운 벽이 나타난다. 한 가지 색깔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닌 삶의 다양한 순간. 괴로워서 행복하거나 불편해서 가치 있는, 감정이 아닌 존재를 깨닫는 아이의 이야기를 듣기에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지만 바로 그 이유로 중요한 것들이 있다. 




바로 차갑게 얼어붙은 공기 중에 내쉬는 따뜻한 숨소리를 듣는 일. 

괴로움이 가치 있는 것으로 돌변하는 마술 같은 이야기를 듣는 일.

춥고 먼 길이지만 그래서 그 자체로 빛나는 일.

읽고 나면 그 용기가 내게도 전해지는, 그 자체로 힘을 지닌 아이의 이야기.



 


미크는 점점 더 따듯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좋기는 했지만 이상했다. 아까 점퍼도 벗어놓고 달아났는데. 밝아졌다. 빛이 보였다. 그곳에 도착한 걸까? 빛이 보여. 이제는 어디로 가게 되는 걸까? 그런데 누가 나를 끌어올렸지? 누가 내 다리를 잡아당긴 걸까?



*제목은 소설 원제.

*본문은 모두 책 인용문이며, 사진은 영화 각색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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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out 2013-09-07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이런 소설 읽기가 두려워요.
내 마음이 글의 의도와는 아주 멀어져 폭주할 것 같거든요.

Jeanne_Hebuterne 2013-09-08 10:44   좋아요 0 | URL



dreamout님, 그렇지요? 저도 그런 마음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랍니다.
누군가의 어려운 이야기를 듣는 것은 언제나 쉽지만은 않은 일이에요.


그러나 우리가 사는 삶 역시 예쁘기만 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문학이나 예술작품을 접할 때 위안과 치유를 바랄 때도 있지만 현실을 자신만의 독특한 역량으로 바라보려는 작가의 기량이 돋보이는 작품도 종종 있어요.


대상을 직시할 수도, 환원하여 볼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철저하게 응시하였는가, 자신만이 해낼 수 있는 방식으로 새로운 의식을 가지고 그려냈는가, 이런 부분을 부각시켜 보아야 하는 작품이 있는데, '멀어도 얼어도 비틀거려도'가 그런 경우였습니다. 무섭고 아픈 이야기이지만 작가가 하려는 말은 어쩌면 '안아주세요'가 아닌, '들여다 보아 주세요' 였던 것 같습니다.


환절기, 감기 조심하십시오. 주말에는 좀 더 여유를 갖고 시간을 천천히 흘려보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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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Reuters



 말문을 연 아이의 단어만큼이나 많은 수식어, 한여름의 폭염과 비만큼 상반된 생각을 여럿에게서 불러오는 작가. 이름이 브랜드 처럼 여겨지는 작가. 작품만큼이나 이름 하나로 주목받는 작가. 그의 단어, 문장, 이야기를 이제 다시 한 번 들여다 보아야 할 것 같은 작가. 




 평일 낮 대형매장에 독자들이 줄 서서 새로 나온 이 책을 받아들고 돌아갔다. 그보다 먼저 일본에서는 많은 이들이 발매 당일 자정에도 서점에서 직접 책을 사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출간 전, 제목만 알려졌을 뿐 내용 포함해 모든 것은 비밀에 부쳐졌고 출간 즉시 밤새 책을 읽고 쓴 리뷰가 속속 올라왔다고 한다. 




 많은 사람이 읽고, 많은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그만한 영향력을 가졌다는 뜻일 것이다. 이 작품의 경우 하루에 5700만 부 판매 돌파.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 말하는 전작의 세 배에 달하는 예약 판매량. 이런 수치를 거슬러 올라가면 두 작품이 보인다. 상실의 시대(원제 노르웨이의 숲)와 태엽 감는 새. 각각 한국과 영미권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언급되는 작품이다. 전자는 한국에서, 후자는 영미권에서. 그런데 작가 연보를 찾아보면, 상실의 시대는 1987년, 태엽 감는 새는 1994년 각각 출간되었다. 상실의 시대의 한국 발매 시기는 1989년인데 10만 부 돌파는 1994년이었다. 베토벤과 니체를 알아가며 밀란 쿤데라를 읽고, 운동권에서 모든 것을 이루고 모든 것을 버린 세대에서 재즈와 싱글 몰트 위스키, 미국 문화를 바탕으로 어딘가 층계참에 걸쳐 앉은 세대로 책 읽는 가장 큰 독자층이 바뀌었다는 의미.





 기록. 전언. 집계. 

 무성한 소문에 비해 간결한 이야기, 단단한 뼈대, 인물의 단순한 반응. 

 하루키에 관해 이렇게 많은 이야기와 기록과 숫자가 있는데, 정작 하루키 작품은 어떤 것일까, 궁금해져 펼쳐보게 된 책의 뼈대가 꽤 단단했다. 책을 펴자 작가의 이름 뒤에 있던 작품이 얼굴을 내밀었다. '여유롭고 스타일리쉬한, 쿨한 싱글의 일상', 곧 스타일을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잠시, 다른 방향에서 본 그의 단어들은 내게는 조금 달랐다. 




 쓰쿠루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끌어앉은 채 침대를 벗어나 파자마 차림으로 부엌에 갔다. 하이다는 벌써 옷을 갈아입고 소파에 누워 두꺼운 책을 읽고 있었다. 그는 책에 의식을 집중하고 다른 세계에 가 있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쓰쿠루가 얼굴을 보이자마자 책을 덮은 후 밝은 미소를 떠올리고, 부엌에서 커피와 오믈렛과 토스트를 만들었다. 신선한 커피향이 풍겼다. 밤과 낮을 가르는 향기이다. 두 사람은 테이블에 마주 앉아 낮게 흐르는 음악을 들으며 아침을 먹었다. 하이다는 평소처럼 짙게 구운 토스트에 꿀을 살짝 발라 먹었다. -책속에서




 질감. 양감. 촉감. 사람의 손끝과 코끝에서 빚어지는 숨소리. 하루키는 정밀한 시계의 속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이름표, 감정과 사건에 가장 간단하게 써서 박음질한 그의 표식. 

 낱말 카드. '무엇'을 보았는지, '무엇'을 하였는지. 그 '무엇'에 관한 묘사와 설명은 실제로 해보면 예상보다 어려운 것인데 하루키는 자신이 이야기하는 대상에 저러한 양감을 불어넣는다. 주인공 쓰쿠루가 무척 친한 친구들에게서 버려진 다음, 쓰쿠루에 관해서는 이러한 묘사를 한다.




 죽음의 문턱을 헤매던 반년 가까운 시간 동안 쓰쿠루는 몸무게가 7킬로그램이나 줄었다. 제대로 식사를 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어릴 적부터 비교적 통통한 얼굴이었지만 지금은 마른 탓에 가느다란 체형이 되고 말았다. 허리띠를 줄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바지를 작은 사이즈로 새로 사야 했다. 벌거벗고 서면 갈비뼈가 불거져 나와 싸구려 새장처럼 보였다. 자세가 눈에 띄게 나빠졌고, 어깨가 앞으로 기울어졌다. 살이 빠진 두 다리는 가느다란 물새 다리 같았다.-책속에서




 그러니까 쓰쿠루를 독자인 내가 바라볼 때의 인상은 '싸구려 새장'이되 '죽음의 문턱을 헤맨 뒤의 남자'가 되는 것이다. 이는 그가 만나는 여자 사라에 관한 묘사와 질적으로 다르다. 초반 사라의 얼굴 묘사-광대뼈와 입에 관한 부분을 지나면 나타나는 부분. 사라가 기분 좋게 돈을 치렀음직한 고급스럽고 자연스러운 옷. 그녀가 쓰쿠루에게 건네주는 싱가폴 면세점에서 산 입생 로랑의 넥타이. 자신이 하고 있던 넥타이를 풀고 사라가 준 새 넥타이를 하며 쓰쿠루는 자신이 하던 넥타이가 생각보다 허름해 보였고, 저도 모르게 매일 반복하는 부적절한 습관처럼 보였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물, 상표, 묘사는 하루키의 작품에서 꼭 필요한 것이 아닐까. 우리는 이 책을 펼치기 전에는 쓰쿠루도, 사라도 알 수 없다. 다루고자 하는 실존적 본질은 인물마다 각각 다른 테마에서 비롯된다. 누군가가 다른 이에 관해 제공하는 정보의 양과 질은 곧 그 자신의 관점을 철저히 반영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는 어떠한 대상도 전부 다 알 수는 없으므로. 

 아주 다른 생김에 관해 일러주는 단어. 그것이 다르다 하여 판에 박혔다든지 생동감이 덜하지는 않다. 인물에 따라 부여되는 생동감은 각각 다른 테마와 종류의 것이니까. 쓰루쿠에 관해 갈비뼈까지 묘사하는 빼기, 사라에 관해 옷자락을 묘사하는 더하기. 그러므로 하루키가 인물에게 다가가는 지점은 그 특정 낱말들까지이다. 마치 이정표와도 같이.


 


 그렇다면 왜 그는 굳이 이런 이정표를 심는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우선 하루키가 이 작품 속에서 만든 세계가 어떤 것인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즉, 세계에 관한 인식이 먼저 필요한 작업이다. 

 

 

 

 신비함. 수수께끼. 알 수 없는 것. 장르 소설이 아님에도 추리 소설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미스터리를 그의 스토리텔링에 사용한다. 하루키가 바라본 세계는 의문이 제기되고 그에 따른 행동이 있는 세계다. 바로 여기에 하루키의 특징이 있다. 그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런 식으로 사람을 성실하게 표현한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까지는 쓰지 않았으나 인간과 인간의 유대에 관심과 공감을 갖고 있다. ... 나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이것은 성장 이야기인데 크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상처도 크지 않으면 안 된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 관계에서 오는 기대와 배반. 절망과 상처. 




 대학교 2학년 7월부터 다음해 1월에 걸쳐 다자키 쓰쿠루는 거의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았다.-소설 첫 문장




 상태 후 드러나는 정황. 그 뒤 그가 죽음만을 생각하게 된 계기.

 그러나 그 뒤 도사린 더 큰 궁금증. 

 

 

 

 누구보다도 친한 친구 네 명이 다자키 쓰쿠루와 절교하는데 이유를 모르는 상황.

 죽을 듯 괴로워한 다음 그는 수영장에서 만난 하이다와 무척 친한 친구가 된다. 어느 밤, 하이다는 그의 부친이 겪은 의문을 사건을 이야기하고, 그 다음 쓰쿠루의 인생에서 사라진다.  쓰쿠루가 마침내는 역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사라를 만나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데, 사라는 마침 그에게 묻는다. '왜' 그 네 명이 그렇게 했는지를.

 

 

 



photo by Curtis Brown-literary and talent agency-http://www.curtisbrown.co.uk


 

 

 

 

  매듭 없이는 끈을 묶을 수 없다는 자명한 이치. 수수께끼는 풀려야 하므로 수수께끼이다.  마침내 쓰루쿠는 그들을 만나 대답을 듣는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 소설 속에는 수수께끼가 그대로 있다. 그가 얻은 것은 대답이 아니라 가능성이었는지도 모른다. 가능한 것과 가능하지 않은 것을 나누는 바람 소리. 




 쓰쿠루의 친구들은 저마다 색채를 띤 사람들이다. 일본어 이름의 한자 속에 깃든 색채. 

 유일하게 이름 속 색채가 아닌 '만들다'는 의미를 지닌 쓰쿠루가 집중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해나가는 일은 얼핏 보면 나아가는 일 같지만 실은 늘 제자리로 돌아오는 일이다. 매일 규칙적으로 하는 수영, 역 설계, 사라를 만나는 일.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쓰쿠루가 만드는 것이 역이라는 점이다. 도착했다 떠나고 만났다 헤어지는 공간. 더하기와 빼기가 이루어지는 공간. 




 살아가는 동안 중요한 어떤 계단 한 칸에서 우리는 무엇을 얼마나 얻을 것인가가 아니라, 얻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판단해야 할 때가 있다. 막 성장하려는 쓰쿠루는 이유를 모르고 단념하였지만,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알게 된 쓰쿠루는 의외의 결단력을 보여준다. 그는 답을 찾아내고 더해야 할 것과 빼야 할 것을 나눔으로 자신을 다시 바라본다. 아마도 이 소설이 많은 독자에게 밝은, 희망 비슷한 감정을 안겨다 주었다면 아마 그것은 이 층계참에서 하루키가 슬쩍 독자에게 쥐어 주는 것이리라. 


 

 


 그러나 앞서 말한 이 미스터리의 여운은 뜻밖에 오래 그림자를 드리운다. 뒤돌아 보면 안 된다고, 뒤돌아 보면 소금 기둥이나 돌이 된다고 신화와 성경은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하지만 해결되지 않은 일은 뒤돌아 보아야 한다. 훌훌 털어내기 위해서. 끈을 묶고 스스로 정직하게 바라보기 위해서. 그럼에도 미스터리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소설의 풀밭 곳곳에 있는 잔디와 엉겅퀴는 쓰쿠오의 알 수 없는 꿈으로, 하이다의 부친이 남긴 이야기로, 시로가 남긴 사건과 알 수 없는 결과로 여전히 그대로 있다. 질문과 답, 행위와 결과. 이것이 늘 짝으로 존재한다면 우리의 삶은 더욱 간결해질까? 신비롭기까지 한 사람의 시간은 인과와 논리의 뒷걸음질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측면에서의 관계와 세계에 관한 조명을 하루키가 시도했는데, 그의 유명세와 인세, 몇몇 작품에 관한 프리즘으로만 이 작품을 판단한다면 그것은 몹시 안타까운 일일 것이다. 


 

 


 행위, 결정, 모험, 연결. 이런 것이야말로 소설의 핵심 중 몇몇 부분일 것이다. 저마다 연결되어 소설을 구성하는 일부. 작품 속 하루키의 자아가 쓰쿠오라면, 그는 스스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끝까지 탐구한다. 그러다 마침내 자신이 따돌려지는 상황을 감내하려다 보다 쉽게 섞이는 것으로 상황을 반전시킨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세상과 좀 더 쉽게 섞이는 도취가 아닐까?

 역설적으로 이 작품 속 어느 누구도 강렬한 도취를 체험하지는 않지만 다자키 쓰쿠오만은, 현실이 아닌 그의 꿈속에서 강렬한 성행위로 도취를 맛본다. 현실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맹렬한 질투를 경험한다. 소설의 끝부분에서 그 질투가 작동하는 것은 작가가 숨겨둔 은밀한 꼬리표 같다. 이 꼬리표를 손에 쥐고, 다음 역을 찾아가는 일이 이제 남았다.



 다자키 쓰쿠오의 순례를 함께하는 독자에게 다자키 쓰쿠오는 곧 천천히 읽어야 할 글귀와도 같다. 다자키 쓰쿠오에게 자신의 마음을 이입하고 그가 생각하는 땅콩이나 칵테일을 떠올리며 그와 함께 어느 바에 들어갔다가 마침내는 핀란드까지 떠나게 된다. 그런 다음 그가 연어와 허브를 오븐에 함께 구워 레몬을 뿌리고 포테이토 샐러드를 핀란드에서 먹는 부분에서는 마침내 독자 자신의 마음과 쓰쿠오의 상태에 관한 자료를 종합하여 확인에 이른다.

 쓰쿠오가 직접 옛친구들을 만나 들은 답은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어느 정도까지는 활용할 수는 있는 정보이다. 하루키는 답을 듣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 준다. 그 점이 미스터리를 제시하고 이야기를 꾸려 나가며 독자로 하여금 나름의 해석을 할 수 있게 하는 하루키의 힘일 것이다. 

 

 



 그의 힘은 자신이 사용하는 일상의 단어, 여전히 불확실하여 가려진 완전하지 않은 답으로 존재하는 결말에 있다. 세간의 평가처럼, 반하거나 변하는 감성, 혹은 감각적이거나 깔끔해 보이는 특정 사물로 드러나는, 또는 특수 연령층에 어필한다고들 하는 어떤 표현에 관한 판단을 잠시 보류하고, 질문으로 드러난 그의 태도를 들여다본다. 

 

 



 소설 속, 나타났던 모든 미스터리에 관한 답이 1:1로 드러나지도 않는다. 

 "어떨까요? 난 모르죠. 그렇지만 아마도 그때 아버지에게는 믿느냐 안 믿느냐 문제가 아니었을 거에요(118 페이지)." 

 "우리네 인생에는 어떤 언어로도 제대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 있는 법이죠(304 페이지)." 

 "그렇지만 지금은 새벽 4시고 새도 아직 눈을 뜨지 않았어. 내 머리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상황이고. 그러니까 앞으로 사흘만 기다려 줄래?(407 페이지)"  




 하루키는 모든 것이 기계처럼 정확하지 않다는 것을 자신이 설정한 알레고리를 통해 드러내 보인다. 어려운 것을 쉬운 것처럼 말하고자 하는 의지는 소설 속 인물들이 특정한 일에 익숙해져 마침내 일상으로 자리 잡곤 하는 부분에서 슬며시 드러난다. 

 

 



 일상의 정밀함 위에 드러나는 단순한 낱말들. 

 그 말 틈을 비집고 흘려보내는 작은 바람. 

 

 

 

 하루키의 소설 속 이정표와 이름표를 따르다 보면 일상 속의 이야기가 보인다. 그 사이 크고 작은 풀리지 않거나 대답하지 않은 상처가 드러난다. 잠시 작가에 관한 세간의 평가와 열기, 뜨겁거나 차가운 무엇을 내려놓고 천천히, 그리고 태연하게 순례에 동참해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 순례 끝에 되돌아갈 곳은 스스로 얻는 답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때로는 그것은 터널일 수도, 역일 수도, 생각지도 못한 어느 먼 이국일 수도 있을 것이다. 여름이 오거나 겨울이 오니까. 우리는 몇 번의 겪지 못한 여름과 이미 겪은 겨울을 먼 미래처럼 바라보고 오래된 과거처럼 잊기도 하니까. 

 

 


 "우리는 그때 뭔가를 강하게 믿었고, 뭔가를 강하게 믿을 수 있는 자기 자신을 가졌어. 그런 마음이 그냥 어딘가로 허망하게 사라져 버리지는 않아."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눈을 감고 잠들었다. 의식을 꼬리에 매달린 빛이 멀어져 가는 마지막 특급 열차처럼 서서히 속도를 올리며 작아지더니 밤 가운데로 빠져들어 사라졌다. 그리고 자작나무 사이를 지나는 바람 소리만 남았다. -책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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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말하는 사람들 - 일러스트레이터와의 대화
박선주 지음 / 지콜론북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비둘기떼, 빗소리 자국, 거리, 꽃, 안개, 숲, 텅 빈 어느 곳. 희거나 검은 형체, 바삭한 질감, 구둣굽 소리, 색깔, 냄새, 습기와 건조함. 상상한 그 어떤 것은 내가 보았다고 믿었거나 볼 것으로  생각한 것을 확인하는 과정이도 했다. 기억한 이것이 맞고 틀림을 떠나 머릿속에서 머리 밖으로 풍선처럼 날아오르는 순간이 있다. 보는 것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는 걸, '그림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알려주었다. 






 


 

 

 


by Jon McNaught




 일러스트에 관해 말하면 어떨까? 안네 프랑크의 집에 관해서. 버스 정류장의 모습을, 아프로디테상을, 공중전화부스를, 크리스마스 산타의 행렬과 안네 프랑크의 펜 끝을 드러낸 일러스트레이션에 관해서.





 귀를 기울이면 안네 프랑크가 썼던 일기장을 펜이 스치는 소리가 들릴 것 같다. 눈으로 덮인 겨울, 크리스마스 이브가 만져질 것 같다. 책장을 넘기는 바람 소리가 들려 내 눈이 저절로 저 먼 곳을 볼 수 있는 순간이 있다. 어둠이 내린 거리, 가로등은 빛을 수줍게 밝혔고 사람들의 목소리가 두런두런 들려온 적이 있었다. 눈길이 있었고 손끝에 닿던 머플러의 감촉이 차가웠다. 길가 비둘기가 뭔가를 부리로 쪼고 있었고 노점상은 주름진 손으로 신문이며 과일을 바구니에 넣고 있었을 것이다. 바람이 살짝 불어오면 비둘기떼가 기다렸다는 듯 낙엽처럼 하늘로 오른다. 불빛에 비친 먼지가 함께 하늘거린다. 이것을 놓치며 살아가는데, 이것을 붙드는 것이 그림을 그리는 일이라면, 일러스트레이션은 이 시각적인 작업을 통해 우리에게 잊지 말라고, 감정을 우리에게 전달한다. 손끝이 찌르르해지는 책이다.







by Allessandro Sanna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잠시 들여다본다. 어떤 특정 개념의 이해를 돕기 위한 드로잉을 포함한 일체의 시각화 작업, 바로 일러스트레이션. 우리가 줄여 부르는 일러스트라 일컫는 영역. 시각 디자인의 한 분야. 인쇄매체의 영역을 벗어나 이미지를 통한 내용 전달.

 시각 예술 내에서 사진이 있는 그대로 무언가를 보여주어 신뢰감을 심어준다면 일러스트레이션은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반면 사진은 현장에서 일어난 무언가를 생생하게 기록한다. 로모와 DSLR, 노출과 조리개가 바로 사진 일부이다. 기기의 발전과 함께하는 현장성, 기록성 등의 영역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은 사진과 경쟁하지 않는다. 일러스트레이션은 그 영역의 제한을 받지 않음으로 하여 스스로 한계를 벗어난다. 



 


 일러스트레이션은 생각한 것을 마법처럼 보여준다. 재크와 콩나무의 콩나무가 하늘의 구름을 뚫고 올라갈 때, 일러스트레이터는 아마 작은 환성을 지를 것 같다. 그 최초 발생을 동굴벽화라고 해도 될까? 아니, 이집트인의 진흙, 석회석으로 그린 그림, 파라오의 수호자 호루스, 폴리페모스의 눈을 찌르는 오디세우스도 일러스트레이션의 어머니가 아니었을까? 

 



 그러다 우리가 지금 흔히 생각하는 단어를 뒤틀어 구름을 잡고 이미지를 끌고 내려와 붉은 풍선을 만들어내는 일러스트레이션의 특징은 18세기 초, 정치 풍자 일러스트레이션이 많이 제작되면서부터 그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이제는 디자인과 광고의 영역을 벗어나 독자적인 체계를 구축하는 이 일러스트레이션과 그것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이야기.





 

 


by Heidi Goennel





 알레산드로 산나, 구르부스 도간 엑스이오그루, 이성표, 이케르 스포지오, 세르주 블로크, 블랑카 고메즈, 칼레프 브라운, 마사코 쿠보, 숀 탠, 두르가바이 브얌, 제시 티스, 레아 던컨, 존 맥노트, 조란 퓬게차르, 아오이 후버 코노, 크리스토프 니만, 하이디 고넬, 해리엇 러셀, 사라 파넬리. 





 이 책을 열면 만날 수 있는 이들이다. 이들은 질문을 던지고 책을 엮은 박선주의 질문에 답하며 자신의 일러스트레이션을 소개한다. '그림으로 만나는 사람들'에 나오는 일러스트레이션은 우리 손아귀 밖에 있는 것들이었다. 내 마음을 끌었으되 내가 그리지 못했던 것들. 내가 무심히 스쳤으되 심방과 심실 어딘가에 남아있던 것들. 내가 가진 풍경의 일부, 내가 겪었던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햇볕이 내리쬐던 어느 날. 풍경을 풀어내고 상황을 제시하고 이야기를 꾸려나간다. 그것이 그들의 일부가 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말할 수 있게 되는 지점을 아무 것도 없는 공백에 펼쳐나간 이들의 대답과 필치. 





 이들은 박선주의 질문에 답하면서 그림만큼이나 자신을 드러낸다. 현재 이탈리아 만투아에서 작업 중이라는 알레산드로 산나는 아이디어와 콘셉트가 테크닉보다 먼저라는 말을 하며 색은 별로 많이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을 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여백이었고 붓 자국이었다. 작업을 위한 아이디어는 그에게 공짜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었음을 밝힌다. 나가서 주변 세상을 보기도 하고, 손이 지쳐 그릴 수 없을 때까지 그리기도 한다는 대목에서는 뉴요커의 커버를 오랫동안 담당했던 장 자끄 상뻬가 떠오르기도 했다. 그린다는 것은 보는 것이었으며 대화를 나누는 일이기도 했으며, 때로는 더이상 그릴 수 없을 만큼 그리기도 했다는 점은, 일억 시간 이상을 바쳐도 모자랄 그들의 일러스트레이션에의 애정을 드러내는 대목이기도 했다. 




 

자신의 일러스트레이션을 통해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것이 있나요? 세월이 흘러서 그리고 싶은 그림은 어떤 것인가요?

:감정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이미지는, 좋은 감정이든 나쁜 감정이든, 감정을 전해야 합니다. 보는 이가 생각하도록 만들거나, 적어도 보는 이의 기억 속에 남아야 합니다. 제 이미지들이 기억되기를 원합니다. 아주 간단한 이미지라도, 보는 이의 마음에, 그의 머리에 각인되어야 합니다. 만약 그 정신과 마음이 어린이의 것이라면 더 좋을 것입니다. 더 오랫동안 기억될 수 있다는 뜻이니까요. 



 


 그의 일러스트레이션을 살펴보면, 다른 책, 데이비드 베일즈, 테드 올랜드가 쓴 'art & fear'의 한 부분이 떠오른다. 



 텅 빈 캔버스에 가해지는 처음 몇 번의 붓질은 수많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가능성을 주지만, 최후 몇 차례의 붓질은 오로지 그 그림에만 맞는 것으로, 더이상 다른 그림이 존재할 자리는 없게 된다. 상상 속의 자굼을 실제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과정은 하나의 가능성만을 현실로 바꾸며, 매 단계는 미래의 선택들을줄여 나가는 과정이다. 그러다 어느 한 시점에 가서 그 작품은 다른 작품으로는 도저히 될 수 없게 되며, 그것이 바로 작품의 완성이다.-데이비드 베일즈, 테드 올랜드

 


 

 결국, 이것은 일러스트레이터 자신이 자기 목소리와 손길로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기 뜻대로 펼쳐 보이는 과정이되, 보는 이를 세심히 고려한 작업의 결실이다. 일러스트레이션을 짧은 흥밋거리로, 잠깐의 재미로 여기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알레산드로 산나가 그린 '안네 프랑크의 펜'을 볼 때 어떻게 한 소녀의 갇힌 마음과 그 소녀가 꿈꾸었으나 가보지 못한 세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을까? 

 구르부스 도간 엑스이오그루의 철로 위에 있는 집, 무덤을 향해 달려가는 두 군인의 일러스트레이션을 보며 어떻게 전쟁과 전투에서는 누구도 죽음이라는 같은 운명을 가졌음을, 깨닫지 않을 수 있을까? 

 세르주 블로크의 연말연시 런던 투어 관련 일러스트레이션을 보며 유쾌한 빼기의 법칙을, 블랑카 고메즈의 심플한 일러스트레이션에서 "단순함이란, 명백한 것을 빼고 의미있는 것을 더하는 것이다."라는 존 마에다의 말과 일치하는 지점을 모르는 척 할 수 있을까? 





by Gürbüz Dogan Eksioglu


 



 '다른 무엇', '새로운 무엇'에의 감동을 바라지 않는다면, 그것이 이상할 것 같다.

 노란색을 좋아해서 노란색이 들어간 일러스트레이션을 좋아할 수도 있다. 더 선명하고 진짜같이 그린 해바라기 그림을 좋아할 수도 있다. 그것을 좀 더 다르게 그린 고흐의 해바라기를 좋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이 보는 것, 생각한 것, 또는 느끼는 것을 새롭게 드러내는 해바라기밭이 있다면, 그 앞에서 어떻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 




 만일 이 세상 하나밖에 없는 사물이 단 하나의 프레임에 담긴다면 그처럼 재미없는 일도 없을 것 같다. 보고 느끼고 듣고 맛보는 모든 것이 그 모든 것의 주체인 '나'의 안팎에서 벌이는 사건도 없을 것이며, 다양한 긴장과 높낮이도 사라질 것이다. 새로움, 다채로운 색감, 의외의 선, 생각지 못한 형태가 일러스트레이터의 눈을 통해 드러난다. 일평생 단 하나의 사과만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책 속 다양한 일러스트레이션을 보노라면 하나의 사과에서 벗어난 다양한 형상과 색깔이 눈에 들어온다.


 



 보는 것은 그 속성을 들여다보아야 제대로 이루어지는 어려운 일. 머리 속에서 머리 밖으로, 풍경 속에서 밖으로 선명하고 밝은 빨간 풍선이 살짝, 하늘로 날아오르면 아마도 재크와 콩나무가 있었던 구름 위로도 올라갈 수 있을 것 같다. 상황의 핵심을 자기 눈으로 보고 듣고 느끼고 깨닫게 되는 이들의 이야기.






by Harrier Russell

 




 인터뷰와 일러스트레이션을 담아 앞으로 일러스트레이션을 하려 하거나 하고 있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당연한 말 대신, 나는 이 책이 문장부호가 알맞게 쓰인 풍경의 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처음에는 일러스트레이션의 전반적인 형태와 개성이 눈에 들어오지만, 결국 그 모든 특성은 우리가 무심코 보아 넘기는 세상의 풍경에 자리를 양보하기에. 그리고 여기에는 가벼운 깨달음이 뒤따른다. 일러스트레이션이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지만 결국, 이 틀 안에 담긴 아이디어는 우리가 지나친 것들의 합산이라는 점. 최초에 공백과 여백이 있었다면 이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제자리에 필요한 순간 있는 여백으로 있는 크리스토프 니만의 쉼표,

 무채색 거리에 점을 하나 찍듯 붉게 타오르는 알레산드로 산나의 마침표. 

 매력적이고 설명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담아낸 숀 탠의 느낌표!

 존 맥노트의 버스 정류장에는 통행 허가증 없는 줄임표가 통행 허가증 없이 가지런히......

 사진과 페인팅을 전공하고 양식화된 경향을 보이는 하이디 고넬의 일러스트레이션에는 큰따옴표가,

 블랑카 고메즈의 산뜻하고 경쾌한 일러스트레이션은 작은 따옴표를 노래한다.




 이들의 일러스트는 말을 걸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그 공기가 산뜻하여 새롭다. 마치 유월의 마지막 날이 춤을 추듯. 




 

 


by Blanca Góme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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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3-07-01 0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업을 위한 아이디어는 공짜로 하늘에서 떨어지는게 아니라'는 말씀에 동감해요.
Gürbüz Dogan Eksioglu의 나무가 통째로 하늘을 나는 그림, 여러개의 달 그림, 빨간 주전자 등은 금방 보고 지나치지 못하게 눈길을 붙드네요.
알렉산드로 산나처럼 '아이디어와 콘셉이 테크닉보다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대개 테크닉이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사람들이더라고요 ㅠㅠ

Jeanne_Hebuterne 2013-07-04 08:10   좋아요 0 | URL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도, 아마 명필이 되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붓을 써봤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적 있답니다. 뭔가를 잘하는 사람이 하는 말은, `실력은 기본, 장식은 옵션'이라는 뜻이 아닐까 싶어 의기소침해진 적도요.


최근 일러스트레이션을 담은 책을 두어 권 접했는데, 이 책의 경우 다양한 스타일의 일러스트레이션과 인터뷰가 실려 있어 보편성을 띠는 것 같아요. 이제 본격적인 장맛비가 내린답니다. 하늘에서 일억 개의 물방울이 쏟아질 텐데, hnine님의 장마용 음악과 함께 주말을 보내야겠어요!

다크아이즈 2013-07-04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러스트레이션까지 접수하시는 테른님^^*
풍경처럼 깨달음처럼 또는 배경이거나 물결인 것철럼
님의 안내로 일러스트레이션의 세계 살짝 들여다 봅니다.
후텁지근하네요. 어서 여름이 지나가길요^^*

Jeanne_Hebuterne 2013-07-19 09:42   좋아요 0 | URL



성실한 접수계 직원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만드는 댓글 고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사람도, 사람이 만든 그 무엇도 의심하는 늙은이의 고까운 자세로 대하곤 하는데 종종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좋은 작품을 접하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사실인 듯합니다.


한낮, 나무 아래서 아이스 카페라테 한 잔을 손에 들고 사진을 찍으면 여기는 캘리포니아라고 우겨도 속아 넘어갈 날씨입니다. 어느 곳은 홍콩 같을 것 같기도 하고요.


무더운 여름, 더워서 좋은 여름, 그래서 여름. 잘 보내요! :)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 - 사라지는 언어에 대한 가슴 아픈 탐사 보고서
니컬러스 에번스 지음, 김기혁.호정은 옮김 / 글항아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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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구름처럼 가볍고 바람처럼 분방해 시시각각 어디론가 이동한다. 그러다 나와 비슷한 것과 쉽게 결합한다. 다른 영들과 만나 몸을 섞는다. 몸을 불려 지상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 그늘로 단어에 수의를 입힌다. 나는 시원이자 결말, 미지이자 지, 거의 모든 것인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노래다. 나는 이런 식으로밖에 나를 설명하지 못한다. 다른 부족의 몇몇 문법을 빌려 말한대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게는 뚜렷한 얼굴이나 몸통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안다. 그리고 그게 우리 정체다.

 

 -김애란, 침묵의 미래

 

 

 김애란의 단편소설 '침묵의 미래'에는 소수언어의 마지막 화자들이 박물관을 지킨다. 마지막 화자가 숨을 거두면 그 언어는 빠르게 사라진다. 그 먹먹함을 파고드는 것은 대체재 없는 침묵이다. 말하는 없으면 소멸하여 자신의 얼굴도 이름도 목소리도 사라져 뚜렷한 형체도 없지만 그 스스로 말하는 존재, 소멸하는 언어. 말 속에 자신을 새기고 떠나고 빈자리로 몸을 움직인다. 중세 국어의 순경음 비읍의 흔적이 부산 경남 지역 사투리에서 흔적을 드러내고 제주어는 이제 관광지의 언어로 남았다. 전 세계 약 육천여 개 언어 가운데 많은 언어가 빠른 속도로 침묵에 빠져든다. 말하는 이가 있고 듣는 이가 있다. 쓰는 이가 있고 읽는 이가 있다. 침묵은 곳곳에 스며든다. 생각은 빠르게 잠식한다

 

 

 

 

 역사상 언어와 그 언어가 몸담았던 작은 사회가 이처럼 빠른 속도로 사라져간 적은 없다. 그러나 오늘날만큼 사라져가는 것의 중요성을 깨달은 적도, 아직 버티고 있는 언어들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감사해 한 적도, 이를 기록화하는 뛰어난 기술을 가진 적도 없었다.-본문 발췌

 

 

 

 

 니콜라스 에반스는 field linguist, 현장 언어학자이다. 연구실과 강의실을 벗어나 현장에서 기록되지 않은 언어를 연구하고 소수민족, 방언을 쓰는 사람들, 고어를 말하는 사람들의 말을 현장 답사를 하며 채집, 기록, 연구, 보존까지 하는데 그가 그의 저서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에서 자취를 알리는 것은 에보리진과 파푸아뉴기니의 언어까지 다양하지만 한가지 공통점을 지닌다. 사라져가는 언어라는 점. 이 책의 원제는 dying words이다. 

 

 

 있음과 없음 사이 절벽 같은 낙차를 니콜라스 에반스는 두려워한다. 모든 언어는 생각의 틀, 공유하는 인지구조를 체계화하고 소통한다. 그가 밝혔듯 어떤 언어든 언어가 전달하는 핵심은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하는가'인데 이는 결국 구성원 제각각이 사용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공공의 재원으로 쓰이는 것이다. 의미이자 존재 자체, 보이지 않지만 그 자체로 발화되고 쓰이는 순간 생명을 갖는 무엇이다. 매개체이자 형식, 개인재이자 공공재이다. 사회 없는 언어도, 언어 없는 사회도 없다. 배우고 소통하고 가르치고 충돌하고 고친 다음 다른 무엇으로 바뀐다.

 

 

 언어는 또한 역사 안에서 사회의 발전 혹은 쇠락과 그 맥을 함께 한다. 사회에는 종교, 역사, 사상이 핏줄처럼 흐른다. 일례로 다른 세계의 언어를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스페인, 포르투갈의 식민지 지배와 종교 전파를 위해서였다. 이방의 언어를 기록하기 위한 최초의 체계적 시도는 선한 것만 기록하고 사악한 것은 기록하지 말라는 교회의 지침을 따른 프란체스코회 수도사에 의한 것이었다. 수도학교 원장이었던 사아군이 수행한 업무는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이방인에 관한 관심의 표출이기도 했다. 그 목적은 물론 선교였으며 자신이 속한 집단 이익에 다름없으며 일부는 누락하고 일부는 기록하는 이중 잣대를 사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바탕에는 소통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다.

 

 

 그의 연구를 살펴보면 당시 사아군은 현재의 필드조사의 최초 수행자임을 알 수 있다. 즉 여러 곳을 여행하고 그곳 사람들의 생활을 조사하고 풍속을 그림이나 글로 남겼으며 그에 관한 설명을 남겼다. 그와 같은 국적의 스페인 사람이 아닌 현지 멕시코 부족의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모든 작업은 종교 재판에서 유죄판정, 즉 사탄숭배로 간주되어 끝나고 만다. 사회는 이렇게 때로는 언어의 틀을 규정하고 판단하기도 한다. 그 기록마저 사람의 인지 체계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간과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만져진다.

 

 

 니콜라스 에반스의 관심은 언어의 기록에도 닿는다. 그의 눈을 통해 본 가독과 기록은 뜻을 함께하지는 않더라도 맥을 함께 할 수는 있다. 책의 탄생은 다음으로 생각한다 하여도, 책이 이렇게 범용화된 것은 오래지 않다. 디지털 장비는 말하지 않아도 더하다. 물론 고가의 무거운 녹음 장비를 이끌고 밀림으로 언어 채집을 하려 들어가는 수고 대신 칩셋을 꽂은 녹음기로 그를 대신할 수 있어 다행이지만, 동시에 그는 기술이 발전함과 더불어 이미 기록한 죽은 언어를 담은 기기 자체의 사용 불가를 우려한다. 이것은 매체의 특성과 함께 오는 기록에의 양면성이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사라짐 뿐만이 아니다. 그는 모든 식음, 그 열기가 저절로 사그라져 재가 되는 과정을 걱정한다. 그 걱정은 기록과 전파로 변이한다. 조사 당시 호주 원주민 공동체의 원로가 사망하는 때도 여러 번. 그는 장례식을 여러번 참관할 때마다 하나의 사회가 죽어감을 본다. 그것이 비단 그 사회의 죽음만은 아니다. 무시당하여온 이름없는 언어가 속한 모든 문화의 소멸이다. 한 사회의 인구는 사회 집단이 가지는 질문의 척도까지도 가늠한다. 니콜라스 에반스는 매일 발화되는 언어가 어떻게 모든 것, 어떤 사회 집단 구성원들의 속도, 시간, 활동, 행위의 의도에까지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자문한다. 개별 언어는 다른 언어에 스며들 준비를 스스로 한다는 간단한 답이 나온다. 언어는 동일한 개념의 각기 다르게 존재하는 명칭만을 이르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언어는 더 넓은 문화권의 다른 단위 개념을 포용할 태세를 늘 갖추고 있다. 현상과 사물, 방향과 지시는 한 언어에서 다른 것으로 번역하는 순간 다른 단어로 종종 변모한다.

 

 

 

 이러한 다양성의 측면에서 볼 때 소수 언어의 종말은 곧 다양성의 종말이다. 언어학자들 사이에서는 인기 있는 주제가 아니지만 서사라는 장르 내에서의 언어의 다양성은 이러한 측면에서 살펴보아도 무리가 없다. 이를테면 시는 언어를 압축하여 밀도를 높여준다. 인간이 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다양한 노래를, 소설을, 발화를 가능케 한다. 일찍이 꿈꾸어보지 못했던 자유로운 형태 내에서의 창조를 꿈꾸게 한다. 곧 다양한 언어가 세상에 있을수록 다양한 생각이 가능하다

 

 

 

 생각의 발현은 언어로 하여금 그 가능성을 지닌다. 그 가능성의 소실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리하여 암울한 침묵의 미래에 정면으로 맞서는 마지막 챕터는 현장언어학자로서 당연히 취할 수 있는 견해다. 마지막 챕터, '들을 수 있을 때 들어라'에서는 사라지는 언어를 채집하는 현장에서 느낀 두려움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마지막 화자가 죽음으로 사라질 때 우리는 그 모든 것이 화석처럼 변화고 서사는 잊히고 우리가 몰랐을 비밀은 영원히 입을 다물어 새로움은 더욱 요원해지고 기록은 힘을 잃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언어의 죽음은 우리가 사는 현대의 문제에 기반을 둔다. 지속되는 사멸은 다양화의 상실을 뜻한다. 그 언어가 발화되던 사회가 가진 역사, 서사, 마음, 고유성이 침묵과 어둠에 묻혔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사라짐으로 드러내고 드러남으로 잊힌다. 잊히는는 것은 슬프지 않다. 잊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이 더 슬픈 법이다.

 

 

 

 개별의 요소는 큰 장치에 편입되고 시와 서사는 멜로디를 잃은 음악처럼 헛돈다. 니콜라스 에반스가 일반인도 읽기 쉬운 그의 저작을 통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얼음장 같은 미래다. 이러한 아카데믹한 용례와 일상적인 사례를 통해 우리가 얻는 것은, 결국 자신이 읽고 쓰고 말하는 고유의 언어를 기쁘게 지켜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타자의 언어를 배척하지 않고 자신의 말과 글만을 강요하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언어를 돌아보고 타인의 언어를 존중하는 것은, 모든 언어가 말하는 것은 그 각각의 개성이며 다양함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모든 말과 글은 그 자신만의 생명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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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3-04-26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잖아도 김애란 소설이, 이 책과 함께 읽으면 좋겠다 했었는데, 이 책과 쟌님의 글이 딱 어우러지니까 당장 이 책 사러나가야 되겠어요. 안읽은지 한오백년(노래부름) 된 이상문학상 수상집도요! 이제는 수상집이 나오면, 이건 또 당선작 상금이 얼마야, 뭐 이런것부터 찾아봅니다..^^

인간이 신에게 도전하기 전에는 하나의 언어였다고 하잖아요. 언어가 같다면 지금처럼 싸울일도 없었을까요, 아니면 아랍권, 라틴권, 영미권 뭐 이런 문화권 자체가 존재할일이 없었을까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모든 말과 글도 그렇고, 쟌님의 글들도 자신만의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 같아요!

좋은 오후!

Jeanne_Hebuterne 2013-04-29 09:05   좋아요 1 | URL
아무렴 그렇죠. 그렇고 말고요. 한오백년 사자는데 웬 성화겠습니까(각종 문학상 상금, 부럽습니다.)

저는 이러한 책이 낯설어서 아주 느리게 느리게 읽었지만, 언어학자가 쓴 책이라고 보기에는 상당히 친근해지려는 노력을 많이 하려 한 듯합니다. 지금도 니콜라스 에반스는 오스트레일리아의 대학교 강단에서 강의를 계속해오기도 한다는 소식을 떠올려본다면 이 학자는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서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기울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만큼 지금 다양성이 사라져가고 여러 언어가 사멸해가는 현실이 안타까운 것이겠지요. 경각심과 지식은 이럴 때 보면 비례해요.

김애란의 소설은 때로는 소설 쓰기의 얌전한 모범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하였어요. 데뷔작에서부터 지금까지의 작품을 살짝 떠올려보면, 자신의 탄생에 관한 관심과 자전적 성향을 역사와 적당히 섞는 재주를 점점 다듬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지요. 아이리시스 님은 김애란의 이상 문학상 수상작과 이 책을 어떻게 읽으실지 무척 궁금합니다. 같은 작품을 읽을 때에도 사람마다 느낌이 다른 것이 문학 아니겠어요? 그런 점이 또 무척 재미있어서 서재의 글을 읽기도 하고요.

언어가 같았다면, 어땠을까요? 어쩌면 사람들은 언어의 다름과 더불어 어른이 되면 점차 완고해져서 자신이 옳다는 가정을 지나치게 굳건하게 다져서 그 과정에서 싸우는 것이 아닐까요? 동시에 종종 영어 안에서도 영국식과 미국식('butt'이 영국에서는 담배꽁초, 미국에서는 엉덩이라고 하지요?)영어가 충돌한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사람들의 충돌에는 언어의 틀도 어느 정도 관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쓰는 사람의 손을 떠는 글은 독자적으로 생명을 가진다는데 모쪼록 완전하지는 못하더라도 조금씩 형상을 다듬어 나갔음 하는 바람으로 서재 생활을 하는데, 칭찬(맞지요?) 고맙습니다.

자, 이제 저는 이 시각 즈음 되면 이렇게 말해야겠지요?

좋은 아침!
 
철학자의 디자인 공부 - 불필요한 것들이 넘쳐나는 세상 속에서
스테판 비알 지음, 이소영 옮김 / 홍시 / 201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왜 어떤 책의 표지는 다른 책의 표지보다 아름다운지, 왜 어떤 회사의 휴대전화는 다른 회사의 제품보다 사용감이 좋은지, 왜 저 자동차는 다른 자동차보다 날렵한지 궁금했다. 여자의 머리카락처럼 아홉 가지 흉을 가리는 일일 거라 생각한 적도 있었고 마이클 잭슨의 성형처럼 다른 자아 소유의 문제일 거라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나는 디자인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발생하는 차원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디자인은 스스로 말한다. 동시에 홀로 존재해서는 안 된다. 이 묘한 역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부서로 취급받기도 하고 단순히 '예쁘게 만드는 것'의 문제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디자인은 기술과 함께 혁신을 이룬다. 세상을 발전시키는 것은 과학과 기술의 영역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정작 그 발전의 계단을 오르게 하는 원동력은 디자인이라고 생각한다. 히틀러가 독일 모든 국민에게 보급하기 위해 제작을 지시하여 만든 폭스바겐 비틀은 그 자체가 혁신이었다. 수용 불가능한 차체에 수용해야만 하는 모든 기술을 넣은, 엑스선을 투과했을 때 일 인치의 빈 공간도 없는 혁신은 디자인의 모든 단계가 정직하게 이루어진 결과물이다. 



 그 과정을 에코 불에서 강의하는 프랑스 철학자 스테판 비알은 세 가지 단계로 나눈다. 사람들의 필요를 관찰하는 단계, 실험 단계, 실행 단계. 무엇이 필요한지를 살피고 아이디어로 만들면서 배운다. 구상은 결코 실현 '이전에' 오지 않고 실현 '이후에' 온다. 실행 단계에서 디자인은 능동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디자이너가 하는 선택에 모두가 관여하게 된다. 무엇을 구상했다 한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디자인의 영역에 있다. 모든 사물이 아니라 모든 것이. 디자인은 모든 역설과 현상의 총합이었다. 단지 공기같이 당연하게 느껴져 인지하지 못했을 뿐이다.



 스테판 비알은 이 역설을 설명하고 디자인에 대해 고찰을 하기 위해 먼저 디자인이라는 단어의 어원, 디자인의 역사를 이 책에서 설명한다. '구별되는 기호로 나타내다, 선으로 그리다, 가리키다'라는 의미의 라틴어에서 파생된 이 단어는 지금 생각하는 이 개념은 19세기 중반 영국에서 태어나 20세기 초에 독일에서 고안되었으며 미국에서 구현되었다. 무엇이든 만들기 좋아했던 영국의 관리 헨리 콜이 '기능'과 '장식', '지능'을 조화롭게 연결하는 공업 생산 원칙을 확립하고 예술의 위대함과 기계의 능숙한 솜씨를 결합하고자 하는 의도로 만국 공산 박람회(흔히 만국 박람회라고 일컬었다)를 개최한다. 그 후 윌리엄 모리스는 장식미술에 관해 '나는 내 삶의 물질적인 틀이 쾌적하고 아름다우며 너그럽기를 요구한다.' 라고 1884년의 저술에서 말하였고 독일에서는 발터 그로피우스가 주도한 바우하우스가 수공업과 미술에 중심을 두고 두각을 드러낸다. 미국에서는 산업 디자인의 형태로 25년의 세월에 걸쳐 그 틀을 형성했다. 이 짧은 역사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디자인은 산업에 맞서 나타난 것이 아니다. 산업과 더불어 나타난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디자이너는 자본주의와 공범 의식을 느끼고 필요하지 않은 것을 필요한 것처럼 포장했다는 소비를 부추겼다는 죄의식을 떠안고, 때로는 사회 체제를 수용할 수밖에 없다는 데에서 오는 자괴감마저 안고 있다. 




앞 장에서분명히 보았듯이 마케팅 디자인은 현실이고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현실이며, 명확히 규정되는 현실이고, 우리가 받아들이는 현실이다. 여기서 마케팅 디자인이라는 말로내가 의미하고자 하는 바는 시장을 '수단'인 동시에 '목적'으로 파악하는 디자인 활동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디자인에 윤리가 있다면, 이 윤리는 "단순한 수단이자 도구, 과정의 역할로, 즉 여러 수단 중 하나로 시장을 제한해야 하며 시장을 결코 목표나 목적, 의도로, 다시 말해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는 원리에만 기반을 둘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칸트 식으로 만든 다음 명령을디자이너의 도덕률로 세울 것을 제안한다. "그대가 사용자들에게 제공하는 디자인 프로젝트에서만큼이나 디자이너로 살아가는 그대의 사람됨에서도 언제나 시장을 결코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다룰 수 있도록 행동하라." 이것이야말로 디자이너의 정언 명령이다. 이것이 없다면 디자인은 맹목적인 성격을 띠고, 디자이너는 전반적인 무책임과 역설적인 광기 사이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존재가 되고 만다. 디자이너의 윤리성이라는 문제는 디자인의 정체성이라는 문제의 일부다. 바로 그런 까닭에 "이 분야가 시작될 때부터 디자이너는 마치 원죄를 회개하기라도 하듯이 자신의 활동을 끊임없이 정당화해온 것이다.-57페이지




 디자이너는 스스로 윤리적 입장을 정해야 한다. 동시에 디자이너의 시니피앙은 소비자의 시니피에를 넘어서야 한다. 존재하는 것이 아닌 발생하는 것이다. 디자인은 형태와 기능의 합치, 본질로의 환원, 기능과 단순함의 결합을 통한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활동은 디자인의 도덕적 토대 없이는 존재가 불가능했다. 수단을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목표는 자본을 넘어서 사회를 조각하는 작업을 하는 일이라고 스테판 비알은 주장한다. 사회를 구현하고, 우리가 숨을 쉬는 환경을 개선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나타날 수 있는 문제에 대처할 수 있는 아이디어, 이것이 진정한 디자이너의 목표이다.



'디자인적 사고'라는 말은 정확히 말해 "디자인을 하나의 생각으로 생각"하려고 한다는 뜻이다. 결국 이 표현은 디자인에 고유한 사고 절차를 의미하는 '디자인 사고 프로세스'의 약어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암시하는 바는, 디자인은 철학 활동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무엇보다도 생각하는 사람의 실천이거나 사유 방식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디자인은, 주체가 생각한다는 사실만으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ㅈ어의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디자이너다"가 된다는 말이다. 이 때, 디자인은 데카르트의 자아처럼 생각하는 주체로서만 존재한다. 따라서 디자인은 특히 "생각하는 사물"이라고 할 수 있다.-130페이지




 



 

 벨리브는 일정금액을 예치금으로 두고 연간 29유로를 내고 30분 내 어디서나 사용할 수 있는 파리의 자전거 이용 시스템. 자전거와 주차대의 군더더기 없는 형태, 파리 시민이 도시를 이동하는 방법을 변화시킴으로써 형태조화 효과와 사회조형 효과, 경험 효과를 발생시킨다. 그러나 그 이전에 또다른 디자인 효과는 아름다움의 효과를 가장 먼저 가져온다. 공간, 입체, 구성, 조형, 섬유, 모든 것에서 드러나는 디자인의 첫번째 효과는 형태적 아름다움의 효과. 이 즐거움을 하찮은 것, 없어도 되는 것으로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름다움의 추구는 인간의 근본을 이루는 정신이 아니던가. 사람은 모든 존재를 유용하게 여기고 잘 견딜 수 있게 하기 위해 디자인을 필요로 한다. 장식 이전의 아름다움을, 기능을 통해 장식의 의미와 정당성을 재확인하게 된다. 필립 스탁의 '라 마리' 의자는 순수함, 가벼움, 유동성을 지닌다.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사용자의 편리한 이용을 도모하며 사물의 유동성을 고려했다. 우아한 선, 섬세한 윤곽, 입체의 순수함, 덩어리의 균형, 테두리의 사정, 드로잉의 완벽함, 시각적인 유혹, 그래픽의 매혹. 스테판 비알은 이런 조건을 형태조화의 조건으로 규정한다. 






 사람은 사물 속에서 살아간다. 무언가를 만지거나 활용한다. 살아가며 느끼고, 경험하는 무엇을 디자인은 돕는다. 더 나은 디자인은 더 좋은 경험을 낳는다. 사용자는 사물을 통해 무언가를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을 할 수 있다. 이것은 곧 그 사물이 우리 자체라는 뜻은 아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사물은 앞에서 언급한 아름다움, 형태조화, 경제성, 사회조형의 효과를 넘어서고 이 개념들을 합치시키는 '경험 효과'를 불러일으킨다는 뜻이다. 







 기본에 충실하면서 군더더기 없는 디자인, 유려한 미관, 일체의 통일감, 이런 최초의 시각적 흥분을 넘어서면 맥은 일상적으로 사용하며 활용 콘텐츠 접근성, 공간 절약성을 통해 경험치를 가중시킨다. 본체가 모니터 안의 공간으로 사라진 이 기기를 사용하는 이는 필시 공간을 절약하고 효율적으로 활용하게 된다. 가구를 배열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고 실내 구도를 바꿀 수 있다. 디자인은 이 모든 조건을 아울러 매 순간 우리를 끌어당긴다.  



 디자인을 미학적 가치를 담은 활동의 결과물로 보자면, 모든 미학적 경험은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어떠한 활동과 사물을 통해 내가 무엇을 경험했는가 하는 것이다. 나는 그로 무엇을 느꼈고 어떤 것을 새롭게 일구어냈는가? 이것으로 하여금 나의 무엇이 달라졌고 나는 어떤 의미를 얻었는가? 디자이너와 디자이너의 제품을 사용하는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위가 날마다 살아있는, 살아가는 삶의 영속성과 일치하도록 행동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일상의 사물을 재구성하고 활용하며 삶의 각도를 재단하고 사물을 의미 있게 활용하고 바라보아야 한다. 

 디자인의 가치와 혁신은 바로 이러한 시각에서 드러날 것이다. 




디자이너는 기법과 용도, 다른 사람들의 행동과 그 자신의 행동에 호기심을 느끼는 사람이다. 그는 사용하는 물건에 우아함과 시적인 정취를 불어넣고, 삶의 매순간을 특별한 순간으로 태어나게 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런 일은 그저 찻잔을 살짝 들어 올리면서도 가능하다. 또 식기를 사용하면서도 가능하다. 그리고 자동차 문을 밀면서도 가능하다. 우리의 직업은 이 모든 순간을 양질의 순간으로 만드는 일, 물건이 우리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반대로 우리 안에 있는 더 나은 것을 드러나게 해주는 역할을 하도록 만드는 일이다.

-파트릭 주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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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2-10-03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런 책도 읽으시네요. (제가 안 읽으면 남들도 안 읽을 거라고 생각하는 바보스런 놀라움!) 디자인은 그저 만들기에 불과한 활동이 아니군요. 산다는 게 그냥 시간을 흘려보내는 게 아니듯이... 디자이너의 마음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도 꽤 생생한 느낌일 것 같아요. 오랜만에 들려봅니다 ''

Jeanne_Hebuterne 2012-10-05 12:36   좋아요 0 | URL
저도 그래요, 제가 안읽으면 남들도 안읽을거라 생각하는 습관이오! 디자인이 궁금해서 읽었는데 쉽고 재미있어요. 모르고 지나치기 쉬운 많은 면을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주어요. 왜 사람들에게 어떤 물건이 필요한지, 존재 가치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면서 디자이너가 하는 일을 상세히 알려준답니다.
추석 잘 보내셨지요? 이제 가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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