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앙투아네트 운명의 24시간 - 왕실의 운명을 건 최후의 도박, 바렌 도주 사건
나카노 교코 지음, 이연식 옮김 / 이봄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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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노도에 위기감을 느낀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1791년, 스웨덴 귀족 페르센의 도움을 받아 변장을 한 채로 튈르리 궁전의 삼엄함 경비를 뚫고 도망쳤지만 목적지까지 거의 다 가서는 벽촌 바렌에서 발각되어 굴욕적으로 체포되었고, 증오 속에 파리로 호송되는 최악의 결말을 맞았다. 이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바렌 도주 사건'이다.




  너무나도 드라마틱해서 수많은 변주를 낳는 어떤 일. 그 수많은 변주가 각각 다른 호흡으로 말하는 하나의 정황. 그 모든 것이 '기록'을 바탕으로 할 때 나는 그 중심에  역사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카노 교코의 '마리 앙투아네트 운명의 24시간'은 슈테판 츠바이크가 쓴 마리 앙투아네트 평전의  레이스와도 같이 느껴진다. 사실에 근거했으며 틀림이 없다. 고증을 바탕으로 한 저자의 상상력이 글을 풍성하게 부풀린다. 이 부드럽고 드라마틱하며 위엄있고 우아하지만 숨 가쁜 사건을 어떻게 읽어야 했을까. 나카노 교코의 시선은 명확하다. 소설보다 더 꿈같고 역사보다 더 진짜 같은 필치의 츠바이크를 번역했던 저자는 바렌 도주 사건에 집중한다. 번역자의 각주이자 링크인 셈이다. 




 이 각주는 물론 실체를 전제한다. 그 실체는 곧 평전임을 생각해 보면, 독자는 평전의 특성을 먼저 떠올리게 될 것이다. 평전, 그것은 죽은 사람을 다루는 장르이다. 당연히 대상과 직접 대화할 수 없음을 뜻한다. 이는 곧 평전을 쓸 때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자료, 자료, 자료, 또 자료라는 점을 알려준다. 죽은 이 앞에서 그를 볼 수 없는 산 자들은 알 수 없다. 대상을 볼 수 없기에 흔적을 뒤쫓는 작업 도중 만나는 것은 쓰는 자의 해석이다. 실제 얼마나 많은 죽은 자들을 산 자들은 땅에 묻었다 꺼냈다 분탕질을 했다가 다시 피라미드까지 세우는 작업을 해왔던가? 잔 다르크는 흔적도 없이 죽었다가 성녀가 되었는가 하면 다시 희대의 정신분열자가 되었다가 성모 마리아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그것은 살아있는 자들의 정신이 외출하여 그런 것이 아니다. 단지 살아있는 자들이 자신의 시대에서 벗어나지 못해 일어나는 희비극일 뿐. 마리 앙투아네트 역시 그렇다. 살아생전 평가는 둘째치고, 시체조차 어딘가 유기되었다가 지금 파리 생 드니 대성당에 가면 루이 18세 당시 만든 조형물이 있다. 왜곡과 굴절로 얼룩진 시간의 프리즘이다.




 그 순간 그 프리즘을 통과하는 드라마. 나카노 교코는 바렌 도주 사건 당시 24시간을 종으로, 마리 앙투아네트라는 인물을 횡으로 꿰뚫는 시도를 한다. 간결하고 명료하면서도 따뜻하다. 감상적이지 않으면서도 감성적이다. 현재를 잊지 않으면서도 과거를 쉽게 설명한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나카노 교코의 자료를 챙기는 세심함, 인물에 대한 애정을 간직하는 섬세함이다. 펜을 잡은 손에 성격이 있다면, 픽션을 쓰는 손과 논픽션을 쓰는 손은 정반대의 성격을 지녔다. 더 냉정하고 차가운 쪽은 픽션이다. 주제와 무관한 것은 아무리 아름다워도 버린다. 논픽션은 다르다. 주제와 무관해도 취재한 것을 차마 버릴 수 없다. 그 많은 기록 앞에서, 버릴 것과 취할 것을 구분하기 위해서 기준 삼아야 할 것이 무엇일까. 나카노 교코는 아마 대상의 성격을 가장 잘 규정할 수 있는 정신성이라고 말할 것이다. 실제 이 책에서 나카노 교코가 말하는 정신성은 일화를 통해 입체적으로 독자 앞에 드러난다.



 

 +가구도 없는 텅 빈 방들, 지저분한 벽, 깨진 창, 뒤틀려 잘 닫히지 않는 문, 들끓는 쥐, 그리고 마음대로 들어와 사는 빈민들...... 1789년 10월, 혁명의 불길에 휘말려 베르사유 궁전에서 강제 연행되어 온 왕가의 새 거천느 이처럼 황폐하기 짝이 없었다. 날 때부터 사치스럽게만 살아온 왕태자 루이 샤를은 앙투아네트를 올려다보며 "어머니, 여기는 꽤나 지저분하네요." 라고 정직한 감상을 말했다. 왕비의 대답은 훌륭했다. "여기는 루이 14세께서 편안하게 지내신 곳이에요. 우리가 더 많은 것을 바라서는 안됩니다."



 +불행해지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앙투아네트의 편지)


+앙투아네트는 베일을 걷어올려 홍조로 물든 뺨을 드러내며 슈아죌에게 맨 먼저 "페르센은 무사할까요?"라고 물었다. 



 이 모든 장면은 기록을 근거로 한다. 추측은 신문기사의 접속사와 같다. 쓰는 이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읽는 이는 그 보이지 않는 흔적을 들이쉰다. 사실과 사실을 연결하면 실제 그 상황에 우연히 있었던 마리 앙투아네트의 옷자락이 보인다. 옷자락은 살짝 바닥을 한 번 쓸고 지나갈 때도 있고 무겁게 질질 끌릴 때도 있다. 바닥에 닿을락 말락 움직이기도 하고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 때도 있다. 무엇보다도 나카노 교코의 글을 지탱하는 것은 생명력이다. 옷자락 자체에는 생명이 없되 움직이는 그 그림자를 보노라면 상황이 소설처럼 펼쳐진다. 곧, 이야기가 펼쳐진다. 하지만 이것은 실제 있었던 사건임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것은 인용과 기록의 출처가 아닌 현재와의 극명한 대비이다. 감상은 쉽다. 우수는 미적지근하다. 동정은 질척거린다. 왜곡은 끈적인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시선을 거두지 않되 과거의 호흡을 막아버리지 않는 것. 




 어떠한 사건이든 그 인물이 처한 상황에서 바라보려는 시선이 필요하다. 나는 이것을 '이해'라고 부른다. '순수의 시대'에서 뉴랜드 아처와 올랜스카가 무도회에서 서로 바라만 보고 있었던 순간에 그들은 소심해서라든지 덜 사랑해서가 그랬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손을 내미는 그 순간의 파장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젊은 베르터의 고뇌'에서 베르터가 로테와 사랑에 빠진 것은 그저 로테의 미모나 재력 때문이 아니었다. 괴테가 그 작품을 쓸 당시 '사랑'은 자신의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위대한 정신작용이었기 때문에 베르터의 권총자살을 로맨틱한 사랑의 실패라고 말한다면 이는 작품의 심각한 오독이다. '이성과 감성'에서 굳이 남자에게 '나를 택할 것이 아니라 결혼을 약속한 여자에게 돌아가 충직함을 완성하세요'라고 말하는 여인은 그를 떠보려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사랑이라는 개념이 지금과 달랐기 때문이다. 즉, '약속을 지키는 것' , 그것을 이행함에 있어 예를 완성하는 신의성실의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마리 앙투아네트 운명의 24시간'은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무척 친절한 책이다.




+게다가 또다른 문제. 어떻게든 가져가고 싶은 짐-왕과 왕비의 위엄을 보여주는 호화로운 의복-이 부피가 크고 무거워서 이륜마차에는 실을 수 없었다. ... 겨우 옷 때문이라니, 얼마나 어리석은 노릇인가......

 그렇게 비웃는 것은 현대인의 감각일 뿐이다. 당시는 입고 있는 것이 그 인간의 신분, 지위, 재산의 증표였던 시대였다. 차림새에 대한 집착은 곧 자긍심에 대한 집착이다. 당시의 엄격한 계급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들에게, 설령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국면일지라도, 자신의 신분에 걸맞게 입지 못하고 공적인 장소에 나선다는 것은 더할나위 없는 수치였다.



+왕은 페르센 백작을 질투하고 있었다...... 맨 처음 떠오른 생각이 그것이었다. 궁정의 법도에서는 부부가 저마다 애인을 갖고, 결코 질투를 하지 않는 것이 미덕이었다. 결혼은 가계를 잇고 번영시키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그런 정략으로 엮인 남녀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가소로운 노릇이고, 진정한 사랑은 결혼 뒤에 비로소 시작하는 것이라는 사고방식이었다.



+그들은 모든 걸 왕비의 탓으로 돌렸다. 국고가 텅 비게 된 것은 사치스러운 왕비의 탓, 궁정의 풍기가 문란한 것도 남녀를 가리지 않고 상대한다는 색정광인 왕비 탓, 국제관계가 악화된 것도 모국 오스트리아를 편드는 왕비의 탓이었다. 후사가 좀처럼 태어나지 않는 것은 물론 왕이 올바른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것까지, 왕비가 좋지 못한 의견을 불어넣어 왕을 어지럽히기 때문이었다. 왕비는 무죄라고 증명된 '목걸이 사건'도 실은 보석광인 왕비가 꾸민 일로, 실물은 아직 그녀가 갖고 있는 게 틀림없다. 모든 재액은 전부, 그 '머리 빈' '오스트리아 암캐' 앙투아네트에게 책임이 있었던 것이다. 





 어여쁜 황태자비, 자애로운 프랑스의 어머니, 색정광, 암캐, 동성애자, 적자 부인.

 이 다채로운 호칭의 그 옆에는 우유부단하고 때와 장소를 제대로 파악 못 하고 모든 것에 지친 루이 16세가 있었다. 실제 이 결정적인 24시간 동안 그는 부지런히 시간을 기록한다. 지체해서는 안되는 때 느긋해 한다. 모습을 드러내서는 안되는 순간, 마차에서 내려 농부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절대 신분을 들켜서는 안되는 때에 '내가 바로 프랑스의 국왕이다.'라고 외친다. 성격이 운명을 좌우한다지만 실제 저자가 들여다본 이 24시간, 그리고 이 24시간이 관통하는 프랑스 혁명의 지축을 앞당긴 것은 성격과 더불어 그 누구도 미리 알 수 없는 '운'이었다. 바렌 사건은 잘못된 인물, 어긋난 사건, 놓쳐버린 배경이 만든 눈의 결정과도 같다. 교코가 재현하는 이 24시간 내도록 루이 16세는 전진해야 할 때 주저한다. 후회해야 할 때 낙심한다. 인내해야 할 때 초조해 한다. 무엇보다도 도망칠 거라면, 도망치는 것에만 전념해야 한다는 저자의 평이 무색하도록 바렌 도주 사건 실패는 과거와 함께 결정체로 남았다. 그런데 그 결정체가 땅에 떨어지기 직전 그 어떤 사랑 한 조각.




 '나의 목숨과도 같은 사람이었던 그녀는 이제 없다. 신이시여. 왜 저를 이렇게 벌하십니까......왜 나는 그녀의 곁에서 죽지 못했던 것인가. 6월 20일 그날에 그녀를 위해 죽었더라면, 지금 이렇게 영원히 가책을 느끼면서 생이 끝날 때까지 고통을 끌어안고 가는 것보다 훨씬 행복했을 것이다.'



 그가 여동생에게 쓴 편지에서와같이, 페르센은 실제 '천 번이라도 목숨을 바치겠습니다'라고 말하며 현재 화폐가치로 한화 1200억 원에 이르는 자금을 조달하고 왕족 여섯 명을 모든 감시를 따돌리고 피신시킨다. '단 한 번도, 단 한 순간도 사랑하지 않았던 적이 없는' , 그러나 '친정과 손잡고 프랑스를 팔아넘기려는 오스트리아 암캐'라고 불리는 사람을 위해. 바렌 도주사건 실패 다섯 달 뒤, '하지만 만나러 가겠습니다.'라는 편지를 보내고 지명수배를 뚫고 튈르리 궁까지 마리 앙투아네트를 몰래 만나러 온다. 물론 그 뒤에도 '나는 오직 당신을 섬기기 위해 살고 있습니다'라고 말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또다시 탈출 계획을 꾸민다. 이쯤 되면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로맨스가 있고, 서스펜스가 전반을 지배한다. 도도하고 극적인 성격이 차츰 우아함을 되찾는다. 




 문제는 이 모든 여정이 '있음 직한 이야기'가 아닌 프랑스 대혁명을 향해 가는 길에 일어난 사건이었다는 점이다. 결국, 시대에 부합하는가, 부합하지 않는가의 질문에 대한 답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저자는 에필로그를 통해 영국과 같은 입헌군주제도 고려했던 루이 16세와 달리 마리 앙투아네트와 페르센은 타고난 계급주의자였음을 지적한다. 인류가 평등하다는 사상은 가당치 않으며, 신민은 국왕의 절대권력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음을 말하며 저자는 다시 한 번, 친절하게 덧붙인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이를 비난해봐야 소용없다. 사람은 자신이 놓인 입장에서 생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생각은 인권사상이 확산되는 흐름 속에서 시대에 한참 뒤떨어진 것이었다.'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단어의 조합은 필연적으로 1789년 바스티유 함락의 이미지를 불러일으킨다. 그렇다면 왜 하필 바렌 사건을 이렇게 현미경으로 들여다보아야 했을까? 이 종과 횡의 호흡을 읽으면 혁명의 추이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서민은 바스티유 이후에도 힘들게 살았다. 베르사유는 그대로였다. 실제 바스티유 함락은 1789년, 바렌 사건은 1791년, 마리 앙투아네트 처형은 1793년이었다. 시간이 서서히 움직이는 동안 1791년, 여섯 명의 왕족이 탄 베를린 마차는 긴 여정 동안 아무런 의심을 받지 않고 빠져나갔다. 그러나 시간이 어긋났고 도망은 포기 혹은 성공이 아닌 실패에 그쳤다. 종종 나는 이 도주가 성공했더라면, 혹은 아예 일어나지 않았다면, 하고 생각해 본다. 아주 작은 나사 하나가 빠져도 축이 흔들리는 거대한 모형 앞에 선 듯. 그러나 이 모형은 너무나도 굳건하여 가정 자체를 허락하지 않는다. 제아무리 여인의 숨결 같은 로코코가 아름다워도 그 아름다움은 강철의 틀 속에서만 하늘거릴 뿐. 결정적인 드라마, 정확한 사료, 섬세한 상상, 인물에의 애정, 균형잡힌 관점. 나카노 교코의 재현은 한 인간이 스스로 행동을 통해 성격을 드러내게 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정치적으로도 바람직하다.






 바이용은 국민의회의 의결서를 루이에게 건넸다. 사실상의 체포장이었다. '누구든지 국왕의 이동을 저지하고 필요한 조치를 강구할 것, 그리고 왕은 의회의 결정에 따를 것' 이라고 명기되어 있었다. 

 "그럼, 프랑스에는 더이상 국왕이 없는 것이군."

 루이는 그렇게 말하고 의결서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 앙투아네트가 즉각 그걸 집어 마룻바닥에 던지면서 분노를 터뜨렸다. "이런 종이 쪼가리로 우리를 모욕하다니 용서할 수 없어요!" 왕보다 훨씬 왕다운 태도라고 할 수 있었다. 홍조로 물들어 아름다운 그 얼굴에 바이용까지 압도당해 뭐라 대꾸하지도 못하고 멍하니 왕비를 바라보았다.

 긴 침묵 끝에 슈아죌이 종이를 주워 다시 테이블 위에 놓았다. 입구에는 어느새 소스와 드루에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앙투아네트와 엘리자베트 둘 다 베일을 내려 얼굴을 가렸다.




+모든 인용은 '마리 앙투아네트 운명의 24시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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