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는 고양이 기분을 몰라 - 어느 심리학자의 물렁한 삶에 찾아온 작고 따스하고 산뜻한 골칫거리
닐스 우덴베리 지음, 신견식 옮김 / 샘터사 / 201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은 고양이는 이튿날부터 꾸준히 나타났는데 가만 보니 우리 정원 창고에 자리를 잡은 듯싶었다. 




 어쩌다 키우게 된 고양이 이야기. 큰 목소리도 짙은 그림자도 없는 조용조용 나직나직한 목소리. 



 반려동물 이야기를 하는 많은 사람의 목소리는 종종 같은 톤의 음색을 띤다. 그것은 종종 사랑이 지나쳐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쓸 겨를이 없을 때도 있고, 익숙해진 생활을 이야기하느라 듣는 귀를 피곤하게 할 때도 있다. 어쩔 수 없는 일 일지도 모른다. 모든 반려동물에 관한 이야기는 하나의 사랑 이야기니까. 




 그것은 자신과 감정을 공유하는 대상을 향한 연서, 혹은 하나의 인격체를 그리워하는 편지. 

 '박사는 고양이 기분을 몰라'에는 감정이 극에 달하는 끓는점이 높다. 액체가 기화되기 시작하는 지점, 그 비등점이 높다는 것은, 어쩌다 키우기 시작한 '나비'라는 고양이를 세상 유일한 것으로 두되 자신의 위치를 동등한 집사의 자리에 놓음에서 비롯된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비의 어떤 특성, 나비가 글쓴이에게 오게 된 계기, 나비를 떠나보내게 될 때를 생각하는 집사로서의 박사의 모습을 살폈지만, 그 어디에서도 감정의 과잉과 고양이에 대한 신격화는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멀리서 조금씩 가까이, 천천히 거리를 두며 고양이 나비와 저자가 나누는 이야기에 관한 책.





 어느 날 작은 고양이가 저자 닐스 우덴베리의 집에 나타난다. 처음부터 키울 생각은 없었기에 늘   두고 보던 그 모습이 눈에 밟히기 시작한다. 고양이는 고양이대로 저자의 집 헛간을 자기 집으로 삼았고 저자는 저자대로 고양이를 그대로 둔다. 눈에 익숙한 고양이가 며칠 안 보일 때도 있고 저자가 집을 비울 때도 있다. 고양이는 선택하고, 글쓴이는 받아들인다. 받아들여진 후의 고양이는 천천히 집 안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고, 그런 고양이를 가족들이 함께 돌보기로 한 다음에야 고양이와의 함께 살기가 시작된다.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곁을 서로 내어주기. 밥을 같이 먹기. 이야기와 체온을 나누기.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하나씩 조금씩 주고 반응을 살피는 것. 어느 날에는 햇볕을 쬐는 고양이를, 또 어느 날에는 무언가에 집중해서 응시하는 고양이를 바라보는 것. 사람이 고양이를 보는 것일까, 고양이가 사람을 보는 것일까? 확실한 것은 반려동물과 인간과의 관계는, 세상에서 가장 바람직한 관계의 한가지 양상을 띤다. 공감하되 간섭하지 않는 것. 필요충분조건의 모든 조건을 갖추지는 않지만 어떤 몇 가지를 갖춘 관계. 이런 관계를 갖는다는 것, 어떤 기분일까?





아침에 우리는 창문을 연다. 나비는 한동안 밖에 나가 있었지만 곧 돌아온다. 차가운 편북풍이 불어서 일주일 만에 처음으로 아침 식사를 집 안에서 한다. 나비는 창문을 들락거린다. 여기저기 검사하며 돌아다닌다. 개들이 사라졌다는 걸 직접 확인하고 싶은 걸까? 내가 뭘 알겠는가.




 섣불리 다가서지 않고 쉽사리 참견하지 않는다. 언젠가 한 번씩 있었을 수도 있는 사람과 동물의 감정 공유는 '섣불리 다가서지 않기'에서 시작한다는 생각이 든다. 언어처럼 간접적인 것이 있을까? 소리처럼 직접적인 것이 있을까? '초록색'이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우리의 세계를 한정한다. 나머지의 모든 아흔아홉 개의 색은 사라진다. 사람이 느껴 표현하는 감정을 언어가 다른 동물이 더 잘 느낀다는 것이 나는 늘 신기했으나, 이제는 그 생각의 기본 바탕이 바뀌는 경험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된다. 모든 사랑하는 대상이 꼭 그렇게 숨 막히는 관계는 아니라는 것. 이렇게 담담하고 별것 아닌 이야기도 있을 수 있다는 것. 그 애정의 비등점이 낮은가 싶어 천천히 글쓴이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조용히 햇볕을 쬐는 고양이 나비가 보인다. 





 3 킬로도 안 나가는 이렇게 작은 생명이 어떻게 내게 이런 안정감을 불어넣는 걸까? 나는 나비보다 훨신 더 힘이 세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손쉽게 이 녀석을 망가뜨릴 수 있다. 나비는 나를 능가할 그런 힘이 없다. 나비가 내게 보이는 신뢰가 그렇게 중요한 걸까? 내가 보여준 자비심과 호감을 나비는 고맙게 받아들인다.



 인간의 언어로 말하지 않지만, 고양이의 입장에서는 인간 역시 고양이의 언어로 말하지 않는다. 대신 서로가 서로를 선택한다. 혹은 받아들인다. 즉, 인정한다. 저자는 나비가 자신을 찾아와 자신의 고양이가 되었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나비의 몸뚱이에 곧바로 다가서면 물러서며 나비는 불안해하고, 저자는 이것이 '위에서 오는 공격에 대한 공포는 굶주린 독수리가 많은 아프리카 평원에서 진화한 모든 작은 동물의 뇌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고 하며 고양이의 움츠러듦을 이해한다. 뾰족한 귀, 동그란 눈, 돋아난 수염, 복슬복슬한 털. 조용한 걸음걸이와 종종 내는 그르렁거리는 소리. 




 세모꼴 두 귀는 여러 방향으로 향할 수 있고 예리한 두 눈은 칠흑같이 어두운 열대의 밤에도 먹잇감을 찾을 수 있으며 코는 개만큼 예민하지는 못하더라도 상당히 무딘 후각을 지닌 인간보다 상대적으로 더 발달했다. ... 나는 고양이의 안정적인 성격 형성도 역시 인간처럼 초기 경험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믿는다. 때로 우리 고양이가 인간과의 관게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신하지 못하는 걸 보곤 하는데 그럴 때면 나비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고 싶어진다. 하지만 나는 당연히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추측하되 확신하지 않고 확신하지 않되 무시하지 않는다. 조심스러운 관찰과 서로가 공유하는 집안의 공기. 이 책의 어조가 내도록 무심하고 차가워 보인다면 그것은 이 조심스런 관찰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누군가를 애정을 가지고 지켜보는 마음을 이야기하는 목소리. 동시에 서로는 다른 존재이며, 다를 수밖에 없음을 명확하게 선을 긋는 저자를 보노라면, 이 책은 아주 담담하고 조용한 러브레터라는 생각이 든다. 고양이 한 마리가 온 도시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는 기적은 없지만, 대신 함께 살아가는 조용한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책.




나비도 우리와 지낸 뒤로 달라졌다. 몸과 마음이 다 무르익은 듯하다. 장난기를 ㅇ맇었다기보다는 잘 자라서 제 처지를 더 제대로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추위와 배고픔에 떨며 내 정원 바구니를 안식처로 삼던 덜 자란 고양이가 이제 자신만만한 집고양이로 발전해 숙녀의 풍모와 나름의 버릇도 갖추었다. 어느 때는 주인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똑바로 훈련받아 까다로운 고양이를 어떻게 대할지 안다는 것을 각인하고 만족하는 듯싶기도 하다. 물론 녀석이 옳다. 우리가 고양이를 잡았을 뿐만 아니라 고양이도 우리를 길들여진 집사로 만들었다. 우리는 쌍방이 기쁘도록 서로 길들였다. 

 나로서는 고양이 세계를 조금이라도 파악하려는 것이 철학적 과제가 되었다. 나비는 어쨌든 내 일상적 사교 활동의 일부고, 가장 가까운 이를 이해하려는 것은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그것이 설령 고양이라 할지라도. 



 그래서 고양이, 아내, 나는 쭉 함께 살기를 기대한다. 고양이는 15년 넘게 살 수 있으니 오래 책임져야 한다. 내가 그때까지 살아 있다면 아흔 살이 된다. 아마 그 나이까지 못 갈지도 모른다. 나비가 나와 아내보다 오래 살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그것도 뭔가 마음에 든다. 가까이에 나비를 두고 내 침대에서 죽는다는 생각을 해볼 수도 있겠다. 그만큼 우리는 좋은 동무가 되었다.


 


 *따옴표 안의 인용은 모두 이 책에서.

 *원래 제목은 'old man and cat'.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