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기

 

아직 저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제 마음속에는 많은 금기가 있습니다

얼마든지 될 일도 우선 안 된다고 합니다

 

혹시 당신은 저의 금기가 아니신지요

당신은 저에게 금기를 주시고

홀로 자유로우신가요

 

휘어진 느티나무 가지가

저의 집 지붕 위에 드리우듯이

저로부터 당신은 떠나지 않습니다 14

 

눈물

 

너의 눈에 흐르는 눈물 아주 투명해 살갗까지 비치는

눈물 너의 얼굴, 너의 몸 속까지 환히 비치는 눈물 너의

몸 전체를 고요한 나무의 투명한 물관으로 만드는 눈물

어떤 몸부림도, 어떤 아우성도 멎은 곳에서 흐르는 눈물

어떤 몸부림도, 어떤 아우성도 고요한 나라의 눈물 수만

광년 먼 먼 별에서 흐르는 눈물 수만 광년 먼 먼 별에서

이제 막 너의 눈에 닿은 눈물......이제 막 숨거두는 빛

처럼 나는 네 눈물 속에 녹는다 95

 

2

 

한 발을 디딜 때마다 나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지막 발자국이 이어져 길이 되었다 재 속에서 태어난 길,

죽음을 딛고 선 길이 고운 당신의 발 아래 놓여 있다

 

당신은 나의 길을 밟고 멀어져가신다 99

 

 

그 여름의 끝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

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

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

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117

 

요즈음 나는 당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세계앞에서 있다. ‘당신앞에서 나는 여태껏 경험해보지 못한 경건한 느낌을 갖는다. 처음으로 나는 당신과 연애한다. ‘당신은 내가 찾아헤매던 숨은 그림이고, 나의 삶은 당신이라는 집으로 가는 길이다. 나는 아직도 정면으로 당신의 얼굴을 마주본 적이 없다. 언제나 당신은 어렴풋한 모습으로 내 앞에 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이 비할 바 없이 깊고 단순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당신의 단순함은 바로 당신의 깊이다 126

 

나는 지금 이성복이 자신의 시라는 그릇을 통하여 내게 들려준 쓸쓸하지만 아름다운 사람 노래들의 악보를 뒤적거리고 있다. 고통에서 치욕으로, 치욕에서 사랑으로 자신의 길을 걸어간 이 미완성의 기록들에 어떤 새로운 악보가 덧붙여질 것인가. 우리가 가지 못한 길이 저렇게 끝없이 계속되고 있듯이 이 미완성의 악보 또한 어쩌면 영원히 도달하지 못할 완성을 향하여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139

 

나와 세계, 내용과 형식의 일치라는 어려운 작업을, 만남과 헤어짐, 끊어짐과 이어짐의 변증을 통하여 동시에 수행해나가는 이 뛰어난 역설의 시편들은 전통의 계승과 변모라는 차원에서 한국시의 새로운 가능성의 장으로 남아 있다. 시와 삶의 팽팽한 대립과 긴장으로부터 시와 삶의 일치를 통한 삶의 비밀에 관한 통찰로 움직여간 그의 시세계가, 자신이 이미 표명했던 이미지의 결여라는 필연적인 한계를 당신의 깊이에 대한 인식을 통하여 심화하며, ‘당신에 대한 사랑을 통하여 확대할 때, 우리는 그 가능성이 구체화된 아주 크고 넓은 그릇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138

 

사랑의 체험은 남의 말을 듣기 위해 필요하고 고통의 체험은 그 말의 깊이를 느끼기 위해 필요하다. 음악이 우리의 가슴 안에 울리기 위해서 우리의 마음속에는 울림의 공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울림은 빈 공간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고통의 체험이 없는 사람에게는 마음속에 빈 공간이 없고 빈 공간이 없이는 울림이 불가능하다. 12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또 비가 오면

 

사랑하는 어머니 비에 젖으신다

사랑하는 어머니 물에 잠기신다

살 속으로 물이 들어가 몸이 불어나도

사랑하는 어머니 미동도 않으신다

빗물이 눈 속 깊은 곳을 적시고

귓속으로 들어가 무수한 물방울을 만들어도

사랑하는 어머니 미동도 않으신다

발밑 잡초가 키를 덮고 아카시아 뿌리가

입 속에 뻗어도 어머니, 뜨거운

어머니 입김 내게로 불어온다

 

창을 닫고 귀를 막아도 들리는 빗소리,

사랑하는 어머니 비에 젖으신다

사랑하는 어머니 물에 잠기신다 44

 

그의 집 지붕 위엔

 

그의 집 지붕 위엔 두 개의 첨탑이 솟아 있었다

아버지, 하고 그는 큰 소리로 불렀다

 

폐가 앞에서 삼 년을 기다리다가

그는 또 걷기 시작했다 자기를 무너뜨리며

 

온종일 그는 걸었다 자기를 무너뜨리며

다시 걸었다 어두운 궁륭에선 태아처럼 꼬부리고 잤다

일어나 다시 걸었다

 

좋은 약도, 사랑도 소용없이

그는 걸어갔다 열덩어리 해가 꺼지지 않는 길을 68

 

세월의 습곡이여, 기억의 단층이여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날들이 흘러갔다

강이 하늘로 흐를 때,

명절 떡쌀에 햇살이 부서질 때

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날들이 흘러갔다

흐르는 안개가 아마포처럼 몸에 감길 때,

짐 실은 말 뒷다리가 사람 다리보다 아름다울 때

삶이 가엾다면 우린 거기

묶일 수밖에 없다 16

 

푸른 풀이여

 

푸른 풀이여

풀 위에 누운 두려움이여

내가 죽고 무엇이 더 죽어야

푸른 네 줄기가 꺾이겠는가

 

푸른 풀이여

어느 시대, 어느 고을에서도 멀리

무덤 뚜껑을 열고 보는

완강한 물결이여

 

어는 세대로부터

배다른 다른 세대로까지

물결치듯 너울대는

무겁디, 무거운 어깨춤이여

 

자꾸만 안으로 감기는 푸른 눈썹이여

잦아들지 않는, 잦아들지 않는 푸른 경련이여 39

 

 

 

저렇게 버리고도 남는 것이 삶이라면

우리는 어디서 죽을 것인가

저렇게 흐르고도 지치지 않는 것이 희망이라면

우리는 언제 절망할 것인가

 

해도 달도 숨은 흐린 날

인기척 없는 강가에 서면,

물결 위에 실려가는 조그만 마분지 조각이

미지의 중심에 아픈 배를 비빈다 41

 

그대 위의 푸른 나뭇가지들

 

그대 위의 푸른 나뭇가지들

그 위로 밤,

그 위로 하늘, 갈라터진 별들

 

마음의 갈기가 잔잔히 흔들리고

잊혀진 곳에서 수문 열리는 소리

 

그대가 헤매는 거리를 다 헤매고

마침내 그대 자신을 헤맬 때

기다리라, 기다리라

 

기적처럼 떠오를 푸른 잎사귀 58

 

오래 고통받은 사람은

 

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알 것이다

지는 해의 힘없는 햇빛 한 가닥에도

날카로운 풀잎이 땅에 처지는 것을

 

그 살에 묻히는 소리없는 괴로움을

제 입술로 핥아주는 가녀린 풀잎

 

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알 것이다

그토록 피해다녔던 치욕이 뻑뻑한,

뻑뻑한 사랑이었음을

 

소리없이 돌아온 부끄러운 이들의 손을 잡고

맞대인 이마에서 이는 따스한 불,

 

오래 고통받은 이여

네 가슴의 얼마간을

나는 덥힐 수 있으리라 71

 

환청일기

 

붉은 열매들이 환청의 하늘 위에 시들고 있다

나는 들지 않는 칼을 들고 내 희망을 자른다

내가 귀기울일 때마다 그들은 울음을 그친다

 

우리의 그리움 뒤쪽에 사는 것들이여,

그들은 흙으로 얼굴을 뭉개고 운다 74

 

밤이 오면 길이

 

밤이 오면 길이

그대를 데려가리라

그대여 머뭇거리지 마라

물결 위에 뜨는 죽은 아이처럼

우리는 어머니 눈길 위에 떠 있고,

이제 막 날개 펴는 괴로움 하나도

오래 전에 예정된 것이었다

그대여 지나가는 낯선 새들이 오면

그대 가슴속 더운 곳에 눕혀라

그대 괴로움이 그대 뜻이 아니듯이

그들은 너무 먼 곳에서 왔다

바람 부는 날 유도화의 잦은 떨림처럼

순한 날들이 오기까지,

그대여 밤이 오는 쪽으로

다가오는 길을 보아라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길이

그대를 데려가리라 82

 

이성복이 그린 화자 나의 삶의 도정은 통과 제의적 도정이다. 치욕적인 삶, 죽지 못하게 하는 어머니, 저 세계로의 길 떠남, 되돌아옴이라는 네 단계의 도정은 시련과 극복, 죽음과 재생이라는 통과 제의의 도정이다. 그것은 삶의 표면에서 일어난 도정이며 동시에 삶의 내부에서 얼어난 도정이다. 그 도정은 그것이 시작과 종말을 같이 보여준다는 점에서 서사적 도정이다. 서정적 자아는 회상의 달무리 속에서 삶과 삶을 이루는 사물을 본다. 그런 의미에서 통과 제의적 도정은 서정적 도정이 아니다. 그것은 사건의 선적 움직임에 관련되어 있는 도정이다. 9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떤 싸움의 기록

 

그는 아버지의 다리를 잡고 개새끼 건방진 자식 하며 비틀거리며 아버지의 샤쓰를 찢어발기고 아버지는 주먹을 휘둘러 그의 얼굴을 내리쳤지만 나는 보고만 있었다 그는 또 눈알을 부라리며 이 씨발놈아 비겁한 놈아 하며 아버지의 팔을 꺾었고 아버지는 겨우 그의 모가지를 문 밖으로 밀쳐냈다 나는 보고만 있었다 그는 신발 신은 채 마루로 다시 기어 올라 술병을 치켜들고 아버지를 내리 찍으려 할 때 어머니와 큰누나와 작은누나의 비명, 나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땀 냄새와 술 냄새를 맡으며 그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소리 질렀다 죽여 버릴 테야 법도 모르는 놈 나는 개처럼 울부짖었다 죽여 버릴 테야 별은 안 보이고 갸웃이 열린 문 틈으로 사람들의 얼굴이 라일락꽃어럼 반짝였다 나는 또 한번 소리 질렀다 이 동네는 법도 없는 동네냐 법도 없어 법도 그러나 나의 팔은 죄 짓기 싫어 가볍게 떨었다 근처 시장에서 바람이 비린내를 몰아왔다 문 열어 두어라 되돌아올 때까지 톡, 톡 물 듣는 소리를 지우며 아버지는 말했다 55

 

그 날

 

그날 아버지는 일곱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시에 학교로 갔다 그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날 역전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날 아버지는 미수금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 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점 치는 노인과 변통의 다정함을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63

 

그러나 어느날 우연히

 

어느날 갑자기 망치는 못을 박지 못하고 어느날 갑자기 비는 잠들지 못한다 어느날 갑자기 재벌의 아들과 고관의 딸이 결혼하고 내 아버지는 예고 없이 해고된다 어느날 가자기 새는 갓낳은 제 새끼를 쪼아먹고 캬바레에서 춤추던 유부녀들 얼굴 가린 채 줄줄이 끌려나오고 어느날 갑자기 내 친구들은 고시에 합격하거나 문단에 데뷔하거나 미국으로 발령을 받는다 어느날 갑자기 벽돌을 나르던 조랑말이 왼쪽 뒷다리를 삐고 과로한 운전수는 달리는 버스 핸들 앞에서 졸도한다

 

어느날 갑자기 미루나무는 뿌리채 뽑히고 선생은 생선이 되고 아이들은 발랑까지고 어떤 노래는 금지되고 어떤 사람은 수상해지고 고양이 새끼는 이빨을 드러낸다 어느날 갑자기 꽃입은 발톱으로 변하고 처녀는 양로원으로 가고 엽기 살인범은 불심 검문에서 체포되고 어느날 갑자기 괘종시계는 멎고 내 아버지는 오른팔을 못 쓰고 수도꼭지는 헛돈다

어느날 갑자기 여드름 투성이 소년은 풀 먹인 군복을 입고 돌아오고 조울증의 사내는 종적을 감추고 어느날 갑자기 일흔이 넘은 노파의 배에서 동덩이 같은 태아가 꺼내지고 죽은 줄만 알았던 삼촌이 사할린에서 편지를 보내 온다 어느날 갑자기, 갑자기 옆집 아이가 트럭에 깔리고 축대와 뚝에 금이 가고 월급이 오르고 바짓단이 튿어지고 연꽃이 피고 갑자기, 한약방 주인은 국회의원이 된다 어느날 갑자기, 갑자기 장님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걷고 갑자기, *이 서지 않는다

 

어느날 갑자기 주민증을 잃고 주소와 생년월일을 까먹고 갑자기, 왜 사는지 도무지 알 수 없고

 

그러나 어느날 우연히 풀섶 아래 돌쩌귀를 들치면 얼마나 많은 불개미들이 꼬물거리며 죽은 지렁이를 갉아 먹고 얼마나 많은 하얀 개미 알들이 꿈꾸며 흙 한점 묻지 않고 가지런히 놓여 있는지 72

 

몽매일기

 

1

한 시대의 여물인 고통과 한 시대의 신발인 절망감 너는 나는 물이요 웃는 물이요 너는 표현할 수 없었다 한 시대의 비행과 한 시대의 불혹증을 한 시대의 길가에서 너는 사랑의 편지를 주웠지만 아무에게도 전하지 않았다 너는 사망했다 그리고 먹고 마셨다 한 시대의 습기와 한 시대의 노린내를 너는 두 개의 입으로 토해 냈다 자고 나면 햇볕에 이불을 말리고 떠벌려 입을 말리고 시들어 갔다

 

2

처음엔 물건이 사라지고 다음엔 물건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고 한 세대가 오고 또 한 세대가 간다 처음엔 비 맞은 성냥이 안 켜지고 다음엔 비 맞은 해바라기가 빛난다 끔찍하다 비 맞은 공포여, 웃음과 신음의 화촉

 

어떻든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어떻든 살 수 없다는 마음을 업고 발바닥이 땅을 업고 그림자가 실물을 업고 쓰레기가 밥상을 업고 입이 자꾸만, 항문을 빨고

 

천국은 유곽의 창이요 뜨물처럼 오는 희망, 희망 - 늙은 권투 선수

 

처음엔 고통이 사라지고 다음엔 고통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고 뒤집힌 눈, 잔물결 지는 눈썹, 영화는 끝났고 다시 시작된다

 

3

거룩한 거룩한 거룩한 지연 지루한 사랑 마음이 물질이 될 때까지 견디기 못 견디기 고통은 제가 고통인 줄 모르고 고통은 제가 고통인 줄 미처, 모르고 여기는 아님 여기서 기쁨까지 거리, 파동 여기서 죽음까지 거리, 파동 껴안은 사람들 사이의 무한한 거리, 파동 여기는 아님 여기 있으면서 거기 가기 여기 있으면서 거기 안 가기 여기는 아님 거기 가기 거기 안 가기 여기는 아님 피는 강물 소리를 꿈꾸기 달맞이꽃, 노오란 신음 소리를 꿈꾸기 한 고통이 다른 고통을 부르기 다른 고통이 대답하기 대답 안 하기 대답하기 여기는 아님 78

 

아들에게

 

아들아 시를 쓰면서 나는 사랑을 배웠다 폭력이 없는 나라, 그곳에 조금씩 다가갔다 폭력이 없는 나라, 머리카락에 머리카락 눕듯 사람들 어울리는 곳, 아들아 네 마음 속이었다 아들아 시를 쓰면서 나는 遲鈍의 감칠맛을 알게 되었다 지겹고 지겨운 일이다 가슴이 콩콩 뛰어도 쥐새끼 한 마리 나타나지 않는다 지겹고 지겹고 무덥다 그러나 늦게 오는 사람이 안 온다는 보장은 없다 늦게 오는 사람이 드디어 오면 나는 그와 함께 네 마음 속에 입장할 것이다 발가락마다 싹이 돋을 것이다 손가락마다 이파리 돋을 것이다 다알리아 구근 같은 내 아들아 네가 내 말을 믿으면 다알리아 꽃이 될 것이다 틀림없이 된다 믿음으로 세운 천국을 믿음으로 부술 수도 있다 믿음으로 안 되는 일은 없다 아들아 시를 쓰면서 나는 내 나이 또래의 작부들과 작부들의 물수건과 속쓰림을 만끽하였다 시를 쓰고 쓰고 쓰고서도 남는 작부들, 물수건, 속쓰림.....사랑을 응시하는 것이다 빈 말이라도 따뜻이 말해 주는 것이다 아들아 빈 말이 따뜻한 시대가 왔으니 만끽하여라 한 시대의 어리석음과 또 한 시대의 송구스러움을 마셔라 마음껏 마시고 나서 토하지 마라 아들아 시를 쓰면서 나는 고향을 버렸다 꿈엔들 네 고향을 묻지 마라 생각지도 마라 지금은 고향 대신 물이 흐르고 고향 대신 재가 뿌려진다 우리는 누구나 성기 끝에서 왔고 칼 끝을 향해 간다 성기로 칼을 찌를 수는 없다 찌르기 전에 한 번 더 깊이 찔려라 찔리고 나서도 피를 부르지 마라 아들아 길게 찔리고 피 안 흘리는 순간, 고요한 시, 고요한 사랑을 받아라 네게 준다 받아라 88

 

더 살 수 없는 곳에서 사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우연히 스치는 질문 - 새는 어떻게 집을 짓는가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풀잎도 잠을 자는가, 대답하지 못했지만 너는 거기서 살았다 붉게 물들어 담벽을 타고 오르며 동네 아이들 노래 속에 가라앉으며 그리고 어느날 너는 집을 비워 줘야 했다 트럭이 오고 세간을 싣고 여러번 너는 뒤돌아 보아야 했다. 58 모래내 1978

 

남들처럼 나도 두어 번 연애에 실패했고 그저 실패했을 뿐, 그때마다 유행가가 얼마만큼 절실한지 알았고 노는 사람이나 놀리는 사람이나 그리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세월은 언제나 나보다 앞서 갔고 나는 또 몇 번씩 그 비좁고 습기찬 문간을 지나가야 했다 99 세월에 대하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생각보다 길이를 재는 데 소홀했다. 몇 번 수정을 요구받고서야 근사해진다. 명암도 앞원기둥이 뒤보다 밝아야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기본을 의식하면서 끝까지 가야 더 조화가 있을 듯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밤빛

이젠 더 헤아리지 않아

마음들이
어디로 가는지

마음들이
어디쯤 머무는지

마음이
지나온 자취들을

이젠 더 이상 찾지않아

마음들에
말걸지 않아

마음들로
마음주지 못해

마음이
움트는 곳을 보지않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