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살인 - 범죄소설의 사회사
에르네스트 만델 지음, 이동연 옮김 / 이후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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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명한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자 에르네스트 만델과 추리문학의 만남이라는 신선한 테마를 가지고 있는 <즐거운 살인>은 맑스주의자가 추리문학을 통해 서구 사회의 무엇을 읽어내고 무엇을 비판할까 하는 궁금증을 유발한다. 고전 추리물 출판과 더불어 추리문학 읽기 붐이 형성되고 있는 시점이라 <즐거운 살인>의 출판은 시의적절해 보인다. 추리문학에 대한 비판적 이해를 도모할 수 있는 추리문학론이 부재한 상황에서 <즐거운 살인>은 비판적 인식이나 개괄적 지식을 독자에게 공급하는 유일한 지침이 될 것이다.

추리문학을 저급한 대중문학의 일종으로 치부하고 백안시하는 우리의 경향과는 대조적으로 서구의 경우 추리문학은 고급 예술가들과 지식인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로 대단히 활성화되고 큰 주목을 받고 있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자본주의적 발전의 형태와 속도라는 측면에서 생각해보자. 수 백 년에 걸친 완만한 발전으로 자본주의적 생활 양식과 습성이 대중들의 의식과 행동에 결정적으로 각인된 서구의 독서 환경과 우리의 속도전적인 자본주의 발전이 빚어낸 독서 환경 사이의 차이는 밑바탕에 대한 천착을 부정하고 오로지 서구 자본주의의 고급스러운 문학에 대한 탐식에 매달려 왔다. 그런 탓에 고급문화에 대한 일방적이고 수동적인 가치평가는 자연스레 대중문화에 대한 저평가로 이어진 것이다.

추리문학으로 통칭하기에 이 범주가 포괄하고 있는 모습은 다양하지만 그 중에서도 주목할 부분은 범죄소설이다. 지금도 가장 많은 서구 대중 문화가 밑바탕에 깔고 있는 것은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도덕적 일탈이다. 개인적 수준의 범죄에서부터 조직이나 국가 차원의 범죄에 이르기까지 그 모습은 다양하다. 거기서 추리나 스릴러, 공포같은 다양한 하위장르들이 탄생하고, 문학 컨텐츠는 궁극적으로 영상 컨텐츠로 탈바꿈하여 대중문화의 지층을 넓히고 있다. 유명한 고전 영화의 경우 상당수가 소설을 오리지널 소스로 하여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은 <즐거운 살인>을 통해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범죄는 인간성의 심층에 놓여 있는 인간의 욕망을 가장 솔직하게 보여주는 지표이다. 현대인은 선행보다 악행에 깊은 관심을 가지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만델이 얘기한 바이지만 현대사회가 개인에게 부과하는 억압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악행에 대한 관심이 비도덕적인 것은 아니며, 오히려 인간성에 대한 통찰을 열어주는 계기로 작용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추리문학에 대한 비판적 연구나 관심은 필요하며, 우리 사회를 통찰할 수 있는 우리 얘기의 등장은 필수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추리문학은 극소수 작가에 한정되어 있는 편이며, 우리 것에 대한 편견 탓인지 그렇게 주목받고 있지 않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고급문학주의가 대중에게 심어놓은 대중문학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 크게 작용할 것같다. 그러나 요즘의 추리 문학 붐은 '저급한 대중문학'이라는 왜곡된 망령의 힘이 미치지 않는 독자층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 아니겠느냐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우리의 문학은 그 폭이 좁고 그 영향력도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이런 경향을 불식시키고 대중들의 진정한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소설가들의 과감한 도전이 필요하다. 문학성은 그 소재에 있지 않고 그 소재를 가공하는 작가의 정신에서 비롯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과학 전문출판사 <이후>는 구태의연한 사회과학을 넘어 구태를 지양한 참신한 사회과학을 추구하는 듯하다. 소수의 젊은 인력들의 노력은 참신한 개발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즐거운 살인>에서도 적지 않게 보이는 교정 미흡의 흔적들은 그 노력을 갉아먹는 듯해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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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근대성 그 기원을 찾아서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50
고미숙 지음 / 책세상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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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근대적 개념인 주체보다는 기계라는 개념을 쓰고 싶어요. 현실을 훨씬 더 생동감 있게 반영한다고 생각되거든요. 곧, 어디에 접속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것들로 변이되고 표현된다는 점에서 주체 개념보다는 기계 개념이 더 적절하다고 봐요. 제가 쓴 글들은 제 고유의 산물이 아니에요. 저는 주변의 수많은 사건과 사유의 편린들을 `절단·채취'하는 기계였을 뿐이죠.”

이 글 서두에서 인용한 글은 김윤식이 아니라 요즘 한창 뜨고 있는 수유연구실 원장(?) 고미숙이 인터뷰 과정에서 밝힌 고미숙 표 비평론의 한 대목이다. 최근 저서인 <한국의 근대성, 그 기원을 찾아서-민족, 섹슈얼리티, 병리학>은 이러한 고미숙 표 비평론을 확인할 수 있는 예이다. 고미숙의 이 책은 개화기시가나 신문 논설을 1차 자료로 삼고, 몇 권의 책을 방법론으로 삼아 ‘썰’을 풀어나가고 있다. 이렇게 보면 책 한 권 쓰는 거 아무 것도 아니다.

1장 ‘민족’은 베네딕트 앤더슨의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 2장 ‘섹슈얼리티’는 푸코의 <사회를 보호해야한다>, 3장 ‘병리학’은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에서 아이디어를 ‘절단,채취’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고미숙과도 희번죽한 얼굴로 인터뷰까지 했던 이명원이 김윤식식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 건 왜일까. 아이디어의 출처를 밝히고 안 밝히고의 차이일까. ‘표절’은 앞으로도 수시로 우리를 뒤흔들 것이다. 그러나 과연 ‘표절’ 논쟁이 우리에게 남겨준 것은 무엇인가. 도덕성 재무장의 필요성인가, 인식과 지평의 확대인가, 아니면 상처뿐인 폐허인가.

고미숙은 단순한 사람이다. 불필요한 늬앙스를 배제하려면 ‘단순한’이라는 표현보다는 ‘심플한’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지도 모른다. 고미숙에게는 주체나 자의식이 없기 때문에 단순하거나 심플한 것이다. 그에게는 그가 말하는 ‘기계’적 역동성만이 존재하고, 그의 다른 저서 제목이 밝혀주듯 그는 ‘비평기계’일 뿐이니까. 그는 그 역동성을 사랑할 뿐, 고답적인 주체나 자의식의 환상을 벗어나 있다. 비평기계는 한 장소에 오래 머물 수 없고 끊임없이 유동한다. 그에게 장소는 문제되지 않고 기계의 움직임을 추동할 수 있는 에너지를 확보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라도 상관없다. 그것이 김윤식과 고미숙의 차이라면 차이랄 수 있다. 따라서 가라타니 고진만을 두고 본다면 김윤식과 고미숙은 인식의 전환을 보여주는 지표라고 할 수 있다. 그 과정에 이명원이 산파처럼 끼여들었던 것이다.

고미숙의 심플함은 그 나름으로 견딜만하지만 ‘비평기계’를 대하는 나같은 이는 마음이 개운치 않다. 무언가 결락된 부분을 느낀다. ‘비평기계’가 생산하는 ‘기계적 비평’을 흔쾌히 자의식 없이 좋아하기에는, 주체나 자의식을 깔끔히 벗어던지고 기계의 단순함을 만끽하기에는 우리는 여전히 주체의 장안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고미숙의 이문열 비평을 읽어보셨는가. 다른 페미니즘 비평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거기에는 파토스가 없다. 낯설다. 새로운 세대의 출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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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세계의 만남 한림신서 일본학총서 45
마리우스 B. 잰슨 지음, 장화경 옮김 / 소화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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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뉴스에서는 충격적인 보도가 흘러나왔다.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를 암살한 안중근의 처형 장면이 스틸 사진으로 공개된 것이다. 물론 그 보도가 나간 이후 유족을 비롯해 여러 사람들이 뉴스에 보도된 사진의 인물은 실제 안중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이견을 조심스레 내놓았다. 정작 여기서 문제 삼고 싶은 것은 우리들이 의사로 추모하는(그러도록 강요되어온) 안중근이 아니라 그 의거의 피해자가 된 이토 히로부미로 상징되는 일본이다. 이토는 안중근의 행위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악인으로 규정되었고, 우리에게 있어 이토는 소극적인 앎, 단순한 앎의 대상이었다. 우리에게는 적어도 일본에 한해서 보면 적극적 앎보다는 소극적 앎이 지배하고 있다. 여기에는 맹목적인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가로놓여있다. 민족주의가 끼친 해악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편견없이 일본을 바라보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길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국민의 95%는 일본에 대해서 관심도 없고 그 관심도 비이성적이다.

<일본과 세계의 만남>은 미국의 일본학 연구자 마리우스 잰슨이 지난 200여년간 일본과 세계의 만남을 외부인의 관점에서 기술하고 있다. 막부시대, 메이지시대, 20세기로 3분해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는 이 책은 근대적 격변기마다 일본이 어떤 식으로 외부세계를 이해하고 대응해나갔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에게 있어 일본 역사는 다소 생소한 존재임에 틀림없지만, 비슷한 사정에 처해 있던 우리 역사와 대비적인 위치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한일 관계를 염두에 두고 읽어나가면 흥미롭기까지 하다. 특히 근대적 격변기의 몇 몇 인물을 거멀못삼아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어 지루한 느낌도 덜하고, 명료한 느낌을 주는 논리 전개가 일본 저서를 읽을 때와는 좀 색다른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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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과 일본의 근대 이산의 책 14
마루야마 마사오+가토 슈이치 지음, 임성모 옮김 / 이산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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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과 일본의 근대>는 적어도 우리 지식계에서는 거의 시도된 바 없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일본 사상계의 거목 마루야마 마사오와 가토 슈이치가 근대와 번역의 문제를 두고 벌인 대담을 정리해놓은 책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근대가 어떻게 찾아왔는가를 되물을 수 있는 계기를 갖게 된다. 일본보다는 반세기 정도 늦게 시작된 우리의 근대는 후진국적인 조숙성의 특징인 완성과 더불어 지양을 추구해야 하는 모순적인 과정에 놓여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소개와 사회주의에 대한 반성, 문화론의 부각 등 여러 가지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번역은 단순한 기게적 언어 변환 그 이상의 깊은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포스트콜로니얼리즘에서 제기한 번역과 탈식민성 논제를 통해서 이제 번역은 근대의 심층적 의식 구조를 탐사할 수 있는 핵심적인 계기로 부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서 번역의 위상은 그에 합당한 권위를 얻지 못하고, 학문 미달 행위의 일종으로 치부되고 있는 실정이다. 번역 그 자체가 만사일 수는 없지만 번역은 적어도 정신의 기계적 수용을 넘어 한 사회의 창조와 변화를 추동할 수 있는 필수 요건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의를 달 수 없다.

일관된 형식과 논지를 갖춘 논설이 주는 유기성과 일관성을 바랄 수는 없지만 이 책을 통해 지성의 향기가 흐르는 대담의 자유로움을 충분히 만끽할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일본의 경우 번역을 둘러싼 시대 분위기의 양태, 어떤 책들이 번역되었으며 번역상의 흥미로운 점들은 어떤 것인지, 그리고 번역이 사회문화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등의 소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와 같은 포맷은 우리의 경우를 역추적할 수 있는 훌륭한 전거로서의 가치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경우 번역과 근대의 문제를 연계시켜 생각할 수 있는 경우는 흔히 개화기로 통칭되는 1890년대 이후일 것이다. 특히 모든 것이 새로 수용되며 우리 식으로 정착되던 초창기인 개화기의 경우를 검토해보는 것은 사상사적인 문제를 넘어 사회문화적으로도 현재의 맥을 짚어나가는 작업에 있어 필수적이다.

우리의 경우 번역은 원전에 대한 직접적인 접근보다는 일역본에 대한 중역의 형태를 띤 것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예를 들어 ‘필로소피’에 해당하는 우리말 ‘철학’은 일본인에 의해 조어된 인공물인데, 이런 경우는 부지기수이다. 따라서 근대적 용어가 인간 의식에 작용하는 영향력을 감안할 때 이런 사정에 대해 진지성을 발휘해 보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개칭하는 문제의 중요성 여부에 대한 당신의 감각!)

이 책은 근대의 문제를 사회문화적인 관점에서 본격적으로 사유하기 시작한 우리에게 그 자체로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는 점에서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이와 더불어 이 책의 번역을 맡은 임성모의 성실한 역주는 그 정성만으로도 읽는 이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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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야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4
권명아 지음 / 책세상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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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자기정체성을 형성해가는데 있어 가족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아버지, 어머니는 자기가 선택할 수 없는 운명처럼 존재한다. 운명이기에 어떤 계기를 통해서도 벗어나기 힘들다. 그때 그는 ‘가족 로망스’로 자기를 둘러싼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난 원래는 고귀한 집안 출신인데 어쩌다 보니까 지금처럼 되었다”는 식의 얘기를 꾸며냄으로써 그는 환상적인 만족을 느낀다. 그렇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런 문제 없어 보이는 이들에게도 ‘가족 로망스’는 필수적이다.

사회가 정체성의 위기를 겪을 때마다 가족은 다시 불려온다. 그 가족은 어떤 균열과 상처도 없는 원형의 공간, 모성의 공간으로 고난에 찬 이들의 혼란을 감싼다. 그때 그 과정은 가족주의라는 이데올로기로 명명되고 비판된다. 그러나 가족은 비판되면서 동시에 수용된다. 가족으로 돌아가라! 거기서 당신의 참 모습을 발견하라! 사회는 개인에게 그렇게 역설하고 상처입은 영혼은 알게 모르게 그곳으로 향하는 자신의 무의식을 발견하고 섬뜩함을 느낀다. 그렇다. 인간의 자궁을 빌어 태어난 그 누구에게도 가족은 끊임없이 자신의 발목을 물고 늘어지는 여귀의 집요한 손짓처럼 존재한다.

이 책은 가족을 둘러싼 서사의 기원과 생성, 그 효과의 메커니즘을 근현대 한국소설들을 통해 해명하고자 한다. 통념처럼 가족의 문제는 페미니즘적 문제의식에서 비롯되는 것만은 아니며, 모성신화와 가족주의는 일정 부분 파시즘적 형식으로 존재했음이 명백하다. 그리고 부르주아 여성 작가 전경린의 로맨스, 불륜은 근대 낭만주의 연애의 서사에 불과하다.

모두 맞는 얘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다 읽었을 때 느껴지는 허전함은 무엇일까. 상상력의 부족이랄까. 현상을 분석할 때 분석의 틀에 정공법적으로 맞아떨어지는 현상만을 취사선택할 때 아귀가 맞아떨어진다는 흡족함은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연관성이 없을 듯한 현상에 대해 본질의 잣대를 갖다댈 때의 난감함과의 부딪침을 애써 비껴갈 때 거기에는 균열을 은폐한 완벽함의 공허함만이 남는 건 아닐까. 방현석과 배수아, 신경숙의 텍스트가 일종의 취사선택의 결과라고 했을 때 그 무의식의 균열과 혼란마저도 드러냈으면 하는 것, 그것마저 보고 싶어 하는 것이 유별난 독자의 욕망이다. 따라서 가장 무난한 선택이라는 인상은 저자의 상상력에 대한 아쉬움으로 귀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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