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북서로 진로를 돌리고 남쪽으로 튀어

 

1

 

낮이면 침대 머리 쪽 창으로 쨍하니 해가 든다. 엄마가 어디선가 대추를 잔뜩 주워오더니 그 볕에다 말린답시고 넓은 쟁반에 담아 창틀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대추를 잊었다. 간밤에 바람이 세게 일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바람을 타고 낙하한 특공대추들이 옆에서 떼로 자고 있었다. 장미꽃잎이 흩뿌려진 하얀 침대 위에서 순결하게 숙면을 취하는 동화나라 공주처럼, 대추에 둘러싸여 밤을 보냈던가. 게다가 이쪽저쪽 고약하게 뒤채며 잤더니 놈들의 상당수는 이미 엉덩이, 옆구리 등등의 습격에 으깨져 사경을 헤매고 있었는데, 그 덕에 알싸한 대추향이 온몸에 골고루 배었다. 잠자는 숲속의 syo는 대추왕자의 적극적이며 파멸적인 애무를 받고 마침내 삼계탕이 되어 눈을 뜬 것이다.

 

그래서인지 점심에는 삼계탕을 먹었다.

 

 

 

2

 

도서관에 도착하자마자 2층에 들러 타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반납했다. 그리고 바로 3층 종합자료실에 올라가 다른 책들을 반납했다. 잠깐 신간 서가를 둘러보는데, 모퉁이를 돌다 어떤 할아버지와 살짝쿵 부딪혔다. 작은 목소리로 죄송합니다, 했더니 고개를 한 번 끄덕이시고는 syo를 물끄러미 바라보신다. 허허, 것 참, 이라고 말하면서 다시 모퉁이를 돌아섰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는 아까 2층에서 책 반납할 때, 책상 앞에 앉아 있다가 내 쪽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오시던 그 할아버지랑 되게 흡사하게 생겼는데? 흥미를 끄는 책이 없다 싶어서 다시 2층 종합자료실로 내려갔다. 슬쩍 좌석 쪽을 바라봤더니 아까 봤던 할아버지가 없었다. 그렇다면 2층 할아버지와 3층 할아버지는 동일인물인 것인가. , 하고 마르크스 코너를 서성거리는데, 2층 할아버지와 동일인물인 3층 할아버지가 슬그머니 나타나더니 회계학 코너를 등지고 서서 은근슬쩍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가? 아니, 그렇다면 이 할아버지는 2층 할아버지 3층 할아버지 도로 2층 할아버지라는 말인데, 아니 도대체 저 232 할아버지는 왜 그런 복잡한 할아버지가 되어야만 했던 거지? 설마, 나를? 아니면 혹시....... 대추를? 아까 부딪혔을 때 맡아버리신 걸까, 내 몸에 짙게 밴 대추의 붉고 달달한 피 냄새를?

 

232 할아버지의 유년 시절에 대추에 얽힌 아련한 사연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할아버지의 거동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수상했다. 의식하지 않은 척, 다시 3층으로 올라가 한국사(911) 코너에서 잠시 뭉개다 고개를 들었더니, 2323 할아버지는 동남아사(914) 코너에서 이런 저런 책을 뺐다 꽂았다 하며 슬금슬금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재빠르게 일본사(913)를 점령하고, 중국 7천년 역사(912....)를 역시 파죽지세로 제끼며 마침내 이쪽으로 육박하는데....... 대추 냄새 맡고 싶으시면 말씀을 하시지, 왜 꼭 이런 B급 공포영화 분위기를 조성하시나요, 라고 마음속으로만 외치고 나는 재빨리 100번 대 철학 코너로 퇴각했다.

 

무려 800을 건너뛰었으니, 설마 여기까지 쫓아오겠어? 하고 방만하게 생각했던 게 패착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책을 뒤적거리고 있었더니, 어느새 서가 반대쪽 끝에 나타난 2323 할아버지는 이제 아예 대놓고 옆에 서서 이 책 저 책을 괜히 만지고 계셨다. 에이, 좋다. 맡아요. 실컷 맡으시라구요, 라고 역시 마음속으로만 크게 외치고 syo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책이나 살펴보았다. 그러다 syo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시학>을 뽑아들었는데, 2323 할아버지가 슥 보더니 핏 웃으며(분명 웃었어. 핏 그랬다고! 내가 들었어!) 니체의 <차라투스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뽑아 드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는 괜히 그 책을 펼쳐서 보는 척 꼼짝 않고 서서는 힐끗힐끗 다시 syo를 보는 2323 할아버지. syo가 다시 가라타니 고진의 <철학의 기원>을 꺼냈더니, 2323 할아버지, 보던 책을 탁 덮어 옆구리에 끼우더니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책 한 권을 슥 빼면서 헛기침을 헴, 하시는데(분명 여길 보라고 낸 헛기침이었다니까!) 봤더니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꺼내고 계신 것이다. 그제야 syo는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저 할아버지가 지금 syo에게 무슨 게임을 제안하고 있는지를. 이건 대추의 문제가 아니라 대출의 문제라는 것을.

 

공방공방



질 수야 없지. syo가 스피노자의 <에티카>(집에 있다)를 꺼낸다. 그걸 본 할아버지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를 꺼낸다. 뒤이어 syo가 후설의 <순수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의 이념들 1>(역시 집에 있다)로 공격을 걸었더니, 할아버지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으로 받아친다. 만만치가 않다. syo가 헤겔의 <정신현상학>(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공격이었는데)으로 밭다리를 걸자, 할아버지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로 되친다!



다시 공방공방공방



그저 잠깐의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syo의 손에는 이렇게 읽지도 않을(못할) 책들이 잔뜩 들려 있었다. 그러나 그건 적도 마찬가지. 허접이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상대방이 허접이라는 사실을. 저 할아버지도, 분명히 저거 다 못 읽는다. 할아버지도 지금 되게 복잡한 표정이다. 이거 다 읽을 생각 없다. 그냥 여기서 하하하 웃으며 다시 조신하게 모든 책들을 꽂아놓을 수도 있다. 물론 당신이 먼저 꽂아 놓는다면! 그러나 할아버지는 먼저 수건을 던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syo가 이 책을 다 내려놓기만 하면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도 이 책을 다 내려놓고 유유히 자리를 뜰 것이라고 그의 눈은 명백하게 말하는 중이었다그 사실을 감지하자 갑자기 빡쳤다. 그렇단 말이지?

 

syo가 보무도 당당하게 자동 대출기 쪽으로 다가갔다. 2323 할아버지가 뒤따라왔다. syo가 책을 대출했다. 2323 할아버지는 사서에게 대출을 요청했다. syo가 책을 가방에 전부 집어넣었다. 2323 할아버지의 대출은 아직 처리 중이다. syo3층을 나왔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나타나기 전에 2층에서 책을 죄다 반납했다! 그리고는 잠깐 좌석에 앉아 출입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2323 할아버지가 3층에서 대출한 책을 들고 2층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무언가를 찾듯 두리번거리셨고, syo와 눈이 마주쳤다. syo가 자리에서 일어나 할아버지께로 다가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선생님, 저쪽에 앉아서 읽으세요. 그리고 syo는 그길로 도서관을 빠져나와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3

 

흔들리는 버스를 타고 오며 생각했다. 어쩌면 23232 할아버지는 그냥 syo와 놀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었는데. 청년이 평일 낮에 도서관에 오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인데, 심지어 그 청년이 몸에서 대추 냄새까지 나는 청년이라니, 호기심이 생겼을 수도 있지. 그래서 그 청년은 뭘 읽는가 싶어서 들키지 않고 조용히(라고 생각하셨을 것 같다) 훔쳐봤더니, 또 내가 좋아하는 철학책을 읽는 거라, 아니, 평일 낮에 도서관에 와서 철학책 읽는 대추냄새 나는 청년이라니, 하고 할아버지는 어쩐지 syo가 대견했을 수도 있지. 그래서 조금 장난을 친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정말 그 책들을 같이 읽고 싶으셨을 수도(그러나 전 아닙니다) 있지. 근데 니가 그걸 저렇게......

 

, 하고 웃지만 않으셨어도 좋았을 텐데요......

 

좀 더 다정한 사람이 되자. 모르는 이에게도.

 

 

 

 

읽은 책들



김불꽃, 예의 없는 새끼들 때문에 열받아서 쓴 생활 예절

한길석 외, B급 철학

이한규, 청소년을 위한 소크라테스와의 대화

숀 세이어즈, 숀 세이어즈의 플라톤 국가 해설

 



읽는 책들



박정자, 플라톤의 예술노트

빌 브라이슨, 나를 부르는 숲

줄리언 반스, 연애의 기억

정재승, 열두 발자국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서정욱, 철학의 고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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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10-04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추의 문제가 아니고 대출의 문제였던 것이었습니다!!!! ㅎㅎ 2층에 가서 다시 반납했다 이거 완전 쫓고 쫓기는 액션스릴러물~

syo 2018-10-04 21:02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 도서관에 가면 재미난 일이 종종 생기더라구요. 도서관 체질인가보다ㅎ

psyche 2018-10-04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층에서 내려와 2층에서 반납했다는 말에 풋,하고 웃었네요.
사실은 푸하하 하고 웃었습니다...할아버지 책이 무거우셨을텐데 쇼님 가신 후에 반납하셨겠죠?

syo 2018-10-05 01:15   좋아요 0 | URL
아마두요? ㅎㅎㅎ 어쩌면 할아버지도 제가 사라지고 나서 굉장히 안심했을 수도....
정말 괜한 기싸움이었던 거였으면 좋겠습니다 ㅎ

다락방 2018-10-05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B급 철학] 어때요?

2. 삼계탕 먹고싶다...

syo 2018-10-05 09:36   좋아요 0 | URL
1. 삼계탕이 좋습니다.
2. 이하동문.

목나무 2018-10-05 09: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두 도서관에서 이런 게임해보고싶다~~~~~~를 외치게 되는 사랑스런 에피소드입니다 ㅎㅎ

syo 2018-10-05 09:37   좋아요 0 | URL
전 괜히 찔리더라구요. 할아버지는 진심이었을까봐.... ㅎㅎㅎㅎㅎㅎ

비공개 2018-10-05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편의 소설을 읽는 듯 짜릿한 재미를 느끼며 읽었습니다 ^^ 대추먹고 싶네요...

syo 2018-10-05 10:12   좋아요 0 | URL
막상 전 삼계탕에서 대추를 걷어내고 먹는 스타일이라는..... ㅎㅎㅎ

레삭매냐 2018-10-05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오님의 글에서 예전에 제가 알던 분의
향기가 나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분은 지금 소설가가 되셨죠.

syo 2018-10-05 11:04   좋아요 0 | URL
아니 제 글에서 말입니까? ㅎㅎㅎ

정말 그렇다면 그 분의 ‘향기‘까지는 아니고 ‘냄새‘ 혹은 ‘낌새‘ 정도가 아닐까요ㅎㅎㅎ

cyrus 2018-10-05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겉모습으로 판단하면 안 되지만, 도서관에 가면 꾀죄죄한 복장에, 얼빠진 표정을 지으면서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있어요. syo님도 알다시피 중앙도서관에는 종종 이상한(?) 사람들이 돌아다녀요. 알 수 없는 말로 혼잣말하면서 어슬렁거리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일부러 피하면서 다녀요.. ^^;;

syo 2018-10-05 13:53   좋아요 0 | URL
도서관은 참 아이러닉한 공간이죠? 이성과 광기가 공존하는 ㅎㅎㅎㅎㅎ 저도 도서관에만 가면 평소보다 조금은 더 미친 놈이 되는 것 같거든요 ^-^

stella.K 2018-10-05 14: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괜찮은 단편 소설 같군요. 역시...!

엉뚱하게 스요님 글을 읽으면서 예전에 책 제목만 가지고도
단편 소설을 쓸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요.ㅋㅋ

syo 2018-10-05 16:38   좋아요 1 | URL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노래방 책을 뒤적거리면서 노래 제목만 가지고 이야기를 만들 수 있겠다 싶었지요.

근데 그러고 얼마 안 있자 그 비슷한 컨셉의 노래가 나오더라구요.
에픽하이의 선곡표였나? 뭐 그런 이름의 노래였는데 ㅎ

2018-10-05 16: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0-05 16: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덴마크 2018-10-09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활예절 책소개에 들어갔다가 23232 할아버지 이야기 너무 재미나게 읽고 인사드리고 갑니다! 23232 할아버지는 친구를 찾고계셨을 것 같은 아쉬움이.. 독자로서 진하게 남네요 23232 할아버지와 스요님과의 대화가 책으로 나왔다면! +_+

syo 2018-10-09 08:49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덴마크님^-^
이런, 막상 책 정보는 1도 없는 긴 글 읽게 해드려서 죄송하고 또 감사합니다......
늦었지만 그 책은 사실 그다지 추천할 만하지 않습니다 ㅎㅎㅎ

독서괭 2018-10-09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 아무튼, 입문서보다 아무튼, 도서관 쓰셔야겠어요ㅋ 사실 별거 아닐 수 있는 일도 이렇게 재미나게 쓰시다니~^^

syo 2018-10-09 22:28   좋아요 0 | URL
도서관은 정말 보물창고네요 ㅎㅎㅎㅎㅎ 가도가도 새로운 유형의 유쾌한 인물들이 자꾸 등장한다!

가왕 2019-02-22 0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모 루덴스‘라는 책이 갑자기 떠오르네요. ㅎㅎ

syo 2019-02-22 09:07   좋아요 0 | URL
그분께도 호모 루덴스적 상황이었기를 바랄 뿐입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