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롤랜즈, <철학자와 늑대>

알베르 카뮈, 장그르니에, <카뮈 그르니에 서한집>

 















<철학자와 늑대>는 철학자와 늑대의 11년 동안 동거동락한 기록이라고. -늑대는 형제 관계로 철학자는 늑대를 형의 자리에 위치시켰다. 늑대는 형일 뿐만 아니라 스승이다. “그는 빛이었고 나는 그가 드리우는 그림자 속에서 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배울 수 있었던 것은 종교의 안티테제였다.”

 

<카뮈 그르니에 서한집>이 나온 줄 모르고 있었다. 카뮈가 112, 그르니에가 123통의 편지를 보냈다고. 카뮈가 시몬 베유에 우호적인 관점을 피력하자 그르니에는 그녀의 작품들을 읽고 카뮈에게 답신을 보낸다. “당신처럼 지극히 논리적인 정신의 소유자가그런 여자에게 사상적 친화력을 느낀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르니에와 카뮈, 세기의 만남이다.

 

강예린, 이치훈, <도서관 산책자>

김소연, <시옷의 세계>

신승철, <식탁위의 철학>













 


<도서관 산책자>는 숲 속 작은 시도서관에서 국립디지털 도서관까지 두 젊은 건축가의 다종다양한 도서관 탐방기라고. 제주도에 달리도서관이 있다는데 가보고 싶다.

 

<시옷의 세계>시옷으로 시작되는 말들에 관한 산문 모음집이다.

 

혼자서 떠나는 여행이 무섭지 않느냐고 묻는 친구의 물음에 지독하게 외롭다고, 무섭도록 외롭다고, 그런데 그게 참 좋다고말한다. 왜 혼자 떠나는 여행이 좋은가? “외로움의 끝자리엔 이 밤하늘만큼이나 텅 빈 생각이 홀연히 찾아오기 때문이란다.

 

<식탁위의 철학>은 온갖 음식들, 조미료들을 사유 대상으로 삼아 들뢰즈, 가타리, 스피노자, 프로이트, 푸코, 마르크스, 네그리, 비빌리오를 불러낸다. 잡채에서 라이프니츠를, 북어국에서 스피노자와 프로이트를 고춧가루에서 욕망의 미시정치에 대한 사유로, 마늘에서 라이히의 성정치로 등등. 이제 식탁은 온갖 현대 철학의 개념들이 출몰하는 공간이 된다.

 

서동욱, <일상의 모험>

서동욱, <철학연습>

줄리언 바지니, <빅 퀘스천>

이유선, <아이러니스트의 사적인 진리>

브랜드 포브스 외, <라디오헤드로 철학하기>


























 

<일상의 모험>을 읽고 철학자 서동욱을 주목했다. 시작도 끝도 없는 것, 지루하고 하찮은 것, 욕망의 유예와 행복의 지연으로 진부한 지옥의 얼굴을 하고 있는 바로 그것. 앙리 르페브르가 혁명의 장애물, , 난간이고 실패의 원인이자 결과라고 말한 그것. 진리와 구원이 없는 부재와 목마름의 자리. 서동욱은 바로 그 일상의 구체적인 맥락들, 즉 소통, , 자기기만, 유령, 관상술, 얼굴, 패션, 웰빙, 이름, 분열증의 문학, 애무의 글쓰기, 해방의 글쓰기, 노스탤지어, , 예언 따위에 철학의 빛을 비춰 그것들을 의미의 층위로 끌어낸다.

 

<철학연습>은 유용한 철학가이드라고 한다. 스피노자, 키에르케고르, 니체, 하이데거,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레비나스, 레비스트로스, 자크 라캉, 푸코, 질 들뢰즈, 자크 데리다 등.

 

질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천 개의 고원>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서동욱, <들뢰즈의 철학>

우노 구니이치, <들뢰즈 유동의 철학>

제임스 윌리엄스,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해설과 비판>


 

























<천개의 고원>은 무수한 사람들을 매혹시키고 좌절시켰나 보다. 시인도 마찬가지고 나 역시 그러했다. 번역문을 믿을 수 없어 원문 스터디까지 했었지만 , 여전히 난 들뢰즈가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고원이란 역어는 멋있긴 하지만 적확한 번역은 이라고 생각한다. 쁠랑plan쁠랑 세캉스영어로는 몽타쥬의 뜻이다. 쁠랑의 복수형이 쁠라토다. 들뢰즈 철학은 다분히 영화적이다. 들뢰즈의 언어는 왜 그렇게 난삽할까. 지적 허영의 극치의 문장들.

 

수전 손택, 데이비드 리프 엮음, <다시 태어나다>

지그문트 바우만, <이것은 일기가 아니다>



 












손택과 바우만의 일기가 책으로 나왔다.

 

손택은 기나긴 누추함과 평범함에 지나지 않는삶에 대한 보상으로 책 읽기와 글쓰기, 강연들을 찾아가 듣기, 토론 같은 지적인 활동에 몰입하고, 몸의 신성함과 동시에 항상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치열한 탐색을 한다. 더 큰 존재로 도약하고자 하는 열망은 곧 자아를 둘러싼 무지와 평범의 껍질을 벗고 다시 태어나는것과 같은 뜻이리라. 일기는 고통이라는 날줄과 야심이라는 씨줄을 엮어 생이라는 피륙을 짜는 일이다.

 

바우만은 2010912일의 일기에서 초강대국의 파산에 관해 쓴다.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테러, 오사마 빈 라덴과 그의 광신도들에 대한 징벌적 전쟁이던 이라크전은 미국의 무모함과 어리석음을 잘 드러낸 사건이다. 테러리즘에 아무 영향도 끼치지 못한 그 전쟁에 미국은 75천억 달러를 퍼붓는다. 그 돈을 4,5000명의 미국 국민과 10만명 이상의 이라크인을 죽이는 데 쓴것이다! 이라크전에서 보인 미국의 불합리하고 경솔한 무책임에서 빚어진 사태는 엄청나다. 이 전쟁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집값의 거품 상승, 월가의 조작과 폐해들”, 미국인들의 삶에 끼친 부정적인 영향들, 이 밖에 또 다른 부수적 피해를 낳은 원인이다. 미국 연방 부채가 천문학적으로 늘고 이자도 덩달아 늘어난다. 채권자들이 미국 부채를 한꺼번에 팔아치운다면 세계 경제는 곧 아마겟돈을 맞을 것이다.

 

김훈, <흑산>

 

                 












아직 <흑산>을 읽지 못했다. 이번에도 밥을 먹어야 살 수 있는

우리네 삶의 비루함을 다루는 듯하다.

 

장 보드리야르, <아메리카>

 

보드리야르가 이런 책도 썼다니!











 

우리가 반문화, 의미의 전복, 이성의 파괴와 재현의 종언 등 급진적인 기호 아래 꿈꾸어온 모든 것, 결코 정말로 실현되어본 적은 없지만 유럽에서 그토록 많은 이론적, 정치적, 미학적, 사회적 격변들을 풀어놓아 왔던 이 모든 반유토피아(anti utopie), 이 모든 것들이 여기 아메리카에서는 가장 단순하고 가장 급진적인 방식으로 실현되었다.

 

- 장 보드리야르,<아메리카>

 

제임스 커스, 니얼 퍼거슨, <콜로서스 아메리카 제국 흥망사>

리처드 커니, <이방인, , 괴물>

마이클 만, <분별없는 제국 미국의 일방주의와 패권적 신군사주의>














 

오늘날 오직 하나의 제국만이 있다. 미국은 전 지구적 제국이다.” 미국은 군사력과 경제력과 같은 경성 권력외에 연성 권력도 있다. 영어, 할리우드 영화, 패스트푸트, 선교사, 미디어, 대중문화, 팝아트 등등. 미국은 착취적 제국주의의 추악한 얼굴을 슈퍼 히어로의 가면을 쓰고 자신의 본 모습을 감춘다. 소련이 붕괴된 오늘날 미국보다 추악한 국가는 없다. 미국은 악마다.

 

주한 미군으로 근무했던 스티브 하우스는 경북 칠곡군 왜관읍 미군 기지 캠프 캐럴에서 축구장만한 한 구덩이를 파고 맹독성 발암물질이 함유된 에이전트 오렌지가 든 드럼통을 묻었다고 까발렸다.

 

조르조 아감벤, <아우슈비츠의 남는 자들>

필립 카곰, <나체의 역사>

슬라보예 지젝, <폭력이란 무엇인가>



 

아감벤의 모든 개념들은 프리모 레비의 글을 읽으면 즉각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아우슈비츠에서 포로들은 하루에도 수십 번 다른 사람들이 보는 와중에 벌거벗어야만 했다. 호모 사케르, 즉 벌거벗은 생명은 아우슈비츠로부터 연유한다.

 

아유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은 일상적인 일이었다. 그들은 살아남았기 때문에, 살아남음을 무엇으로도 가릴 수 없었기 때문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사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자는 살아남음과 관련하여 아무 죄가 없다. 그럼에도 무수한 사람들이 눈앞에서 죽어갈 때 , 그리고 어떤 행운으로 그 죽음의 대열에서 열외가 되어 살아남았을 때도 부끄러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김원일, <마당깊은 집>

송영, 조선작, 조해일, <선생과 황태자, 아메리카, 영자의 전성시대>

이청준, <눈길>

최인호, <타인의 방>














 

마당 깊은 집은 스물 두 명이 복닥거리며 사는 소사회를 이룬다. 송영의 단편 <미화 작업>에는 작은 집을 지으며 커다란 에 집착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청준의 <눈길>은 집이 실존에서 얼마나 큰 의미를 갖는가에 대한 숙고로 이끈다. 평생 살던 집을 팔어버린 어머니는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오는 아들을 위해 그 옛집을 하루 동안 빌린다. 그 집에서 따뜻한 밥을 먹고 하룻밤을 잔 아들은 떠난다. 아들을 배웅한 어머니는 눈길을 걸어 돌아온다.

 

최인호의 <타인의 방>은 주거공간이 아파트로 변해버린 뒤 사람들의 삶과 의식이 어떻게 바뀌고 소외와 물화를 껶는가를 날렵한 솜씨로 보여준다. 출장을 갔다 돌아온 남편은 아내가 없는 빈집으로 들어선다. 남자는 아내를 기다리다 점차 텅빈 아파트에서 석고상으로 변해간다. 아내는 석고상같이 딱딱하게 변해버린 남자를 다락의 잡동사니 속에 던져놓고 집을 나간다.

 

율리히 하세, 윌리엄 라지, <침묵에 다가가기>

에마뉘엘 레비나스, <모리스 블랑쇼에 대하여>

모리스 블랑쇼, <기다림 망각>

모리스 블랑쇼, <문학의 공간>















 

시인도 젊은날 모리스 블랑쇼를 만났다. 나 역시. 절판된 <문학의 공간>을 구할 수 없어 국립도서관에서 읽었다. 그때의 감동이란. 아리송한 블랑쇼 글을 따라 빙글빙글 도는 재미가 만만찮다. ‘이거라는거야? 저거라는거야?’

 

블랑쇼가 썼다던 소설까지 찾아 읽었지만 도무지 읽을 수 없었다. 은둔자로만 알고 있었는데 젊은날의 블랑쇼는 꼬박꼬박 시위에 참여했었다니!

 

유승훈, <부산은 넓다>

류신,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강상중, <도쿄 산책자>

김영하, <살인자의 기억법>

나쓰메 소세키,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4



















 

2013년 그가 뽑은 올해의 책이다. 유승훈 <부산은 넓다>는 부산에 관한 인문학적 탐색기라고. ‘부산 아케이드 프로젝트라 할만하다.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와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의 혼합이라고. <도쿄 산책자>는 거대 도시 도쿄의 탐색기록이다. 산책자 강상중은 아카사카, 롯폰기, 마루노우치 등 거품같은 도쿄의 중심지로 나갈 때마다 이상한 고양감과 서늘한 적막감이 뒤섞인 느낌에 당황했다고 실토한다.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이 이런 내용이었던가. 양녀 은희는 이미 살해당한 모녀 중의 한 사람이고, 살인마라고 믿었던 자는 형사였다니!

 

동네 서점에 가보면 출판사별로 <나는 고양이로소이다>가 쌓여있다. 소세키 열풍이라도 분 것일까

올해의 책후보에서 아깝게 탈락한 책들의 목록을 살펴보자.

 

이수영, <에티카, 자유와 긍정의 철학>

한병철, <시간의 향기>

고은의 <무제 시편>

김연수 <사월의 미, 칠월의 솔>

<밀란 쿤데라 전집>

알랭 드 보통, <영혼의 미술관>

발타자르 토마스 <우울할 땐 니체>

문성원 <철학자 구보 씨의 세상 생각>

다카무라 토모야, <작은 집을 권하다>

도미니크 로로, <소식의 즐거움>

실비아 플라스, <실비아 플라스 시 전집>

박인석, <아파트 한국 사회>

시미즈 레이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

자크 아탈리 <자크 아탈리, 등대>

 윌리엄 파워스, <속도에서 깊이로>

베르트랑 베르줄리, <내가 행복해야만 하는 이유>

마이클 폴리, <행복할 권리>

 

디지털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더 빠른 속도. 속도를 추구하다보니 우리는 깊이를 잃었다. “사고와 감정의 깊이, 인간관계의 깊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깊이가 사라지고 있다. 충만하고 의미있는 삶의 핵심이 깊이가 사라져간다는 것은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윌리엄 파워스, <속도에서 깊이로>

 


행복은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돈, 물건, 쾌락, 성공, 명성, 지위 따위를 손에 쥠으로써 갖는 즐거움과 행복은 다르다. 행복은 행복의 가능성이 불러일으키는 파동이고 전율이다. 그 가능성의 파동과 전율 속에서 갑자기 세계가 다시 마법을 발휘하고 자아가 새롭게 태어난다. 모든 것이 더 풍부해지고 낯설어지고 더 흥미로워진다. 눈은 더 명료하게 보고, 마음은 더 예리하게 생각하며, 심장은 더 강하게 느낀다. 이 세 가지가 열광과 환희와 열정 속에서 통합된다.” 


-마이클 폴리, <행복할 권리>

 

최정호 외, <산과 한국인의 삶>

최상익 외 편역, <조선시대의 금강산유기>

최안수, <겸재를 따라가는 금강산 여행>




 












시인 소동파도 고려에서 태어나 금강산이나 직접 보았으면하는 시를 남겼다지. 목판화가 류연복은 금강산연작을 그렸다. 그의 금강산 연작은 겸재의 <금강전도>와 통하는 바가 있다고. 산을 하나의 정신적 실재로 본다는 점에서.

 

반납 일에 밀려 밤새 쓴 리뷰가 A4지 스무 장에 달할 줄이야. 이제 차분히 앉아 읽지 않은 책으로 만찬을 즐길 준비를 해야겠다. 신난다. (ㅋ, 아직도 읽지 않은 책이 무수하다.) 


 -2015. 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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