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장군 홍범도
이동순 지음 / 한길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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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벌어진 가슴, 다부진 체격, 짙고 숱 많은 눈썹은 활처럼 굽었고, 두 눈은 슬픈 코끼리를 닮았다. - P60

홍범도는 키가 190 정도로 무척 컸고 단단한 체격이었다고 전해진다. 남아 있는 사진을 봐도 '건장함'이 느껴진다고 할까. 책에서의 '슬픈 코끼리의 두 눈을 닮았다'는 표현이 특히나 인상적이었다.

이 책은 1982년부터 2003년까지 저자가 쓴 민족서사시를 기반으로 하여 산문적 서술로 바꾸고 최신 역사 사료를 업데이트하여 다듬어낸 평전이다. 저자는 시인이자 문학평론가로 그 때문인지 문체 자체가 물 흐르듯 하여 책 내용이 딱딱하거나 지루하지 않게 느껴지지 않아 좋았다. 대화문들을 읽을 때는 마치 홍범도 장군의 목소리를 듣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했다.

홍범도의 일대기를 몇 년만에 읽게 되었다. '청산리 대첩, 봉오동 전투, 흑하 사변' 등 교과서에서 붙박이처럼 배우는 사건이지만 어떠한 배경에 의해서 일어났고 어떤 과정으로 일어났는지 다시 한 번 정리할 수 있어 좋은 경험이었다고 여긴다.

홍범도의 원래 이름은 범동이었다. 어머니는 산독으로 돌아가셨고 아버지가 동냥젖을 먹여 가며 키우셨으나 아버지도 8살 때 돌아가신 뒤로는 홀로 살아가야 했다. 남의 눈칫밥을 얻어가며 살아간다는 게 어디 쉬운가. 그럼에도 맡은 일을 잘 해냈는데 3년간 일했던 제지소에서 품삯을 미루고 주지 않아 제지소 주인을 때리고 도망쳐 산으로 들어가게 된다. 금강산 신계사에서 수계를 받고 지담 스님의 상좌가 된 홍범도는 스님으로부터 '범도'라는 이름을 부여받게 된다. 범동이 범도가 된 순간이었다. 나를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분노와 치기가 많았을 나이, 범도가 되면서 그는 큰 그릇의 사람이 되어 백성을 돕겠다는 포부를 품게 된다. 범도라는 이름을 얻게된 것도 모자라 이 곳에서 아내 분을 만나 아이를 가지게 되어 강원도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사연이 흥미로웠다. 강원도에서는 매일 사격 연습을 하며 단련했다고 한다.

을미 사변, 단발령 이후 전국적인 의병이 일어난다. 이 때 주도적인 의병 세력 중 한 명은 유인석이었다. 홍범도는 강원도 철원 보개산으로 들어가서 유인석의 부대를 마주한다. 이 때 유인석은 홍범도의 기개에 인상이 깊었는지 '여천汝千'이라는 호를 내렸주었다고. 그 후로도 둘은 서찰을 주고 받으며 뜻깊은 인연을 이어간다. 유인석은 홍범도의 항일무장투쟁 활동을 지지했지만 그의 투지만으로 싸우는 모습은 옳은 방향이 아니라며 충고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유인석은 홍범도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스승 같은 존재가 아니었나 싶다.

홍범도는 사포수로 사냥하고 가족들은 농사를 지어 생활을 했다. 처음에는 사냥꾼 사포계에 포함되어 활동하다가 후에 차도선, 송상봉이 지휘하는 의병대와 조직을 합친다. 1907년 일제가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공포하자 그의 의병대 활동에도 영향을 주게 되지만 수차례의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며 유명세를 얻게 된다. 주로 일진회 회원을 처단하거나 일본군 토벌대의 사무실, 통신 기관 등을 파괴하는 일을 행했는데 각지에서 의병대 활동을 위한 의연금을 보내올 정도로 응원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홍범도는 이 때 신출귀몰-(날아다니는 장군: 飛將軍)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에 슬픔들이 이어졌다. 일본군은 의병대 내부의 반일 역량을 분해시키기 위해 차도선에게 접근했는데 이 때 휘하 부하들과 함께 일본군에 투항해 귀순하고 만 것이다. 일본군은 홍범도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고 그의 가족도 대상이었다. 첫째인 홍양순은 홍범도와 함께 의병 활동을 하고 있었기에 무사했으나 단양 이씨(홍범도의 아내)는 둘째 용환이를 빼돌리고 정작 본인은 유치장에 갇혀 모진 고문과 협박에 못 이겨 사망하고 만다. 1908년 바배기 전투에서 첫째인 홍양순이 사망하였다. 이후에 둘째인 용환이도 병으로 앓다 사망한다. 어릴 적 부모와 일찍 헤어진 그는 가족과의 애착이 무척 컸을 것이다. 그런데 세월은 그의 단란한 가정을 가만 내버려두지 않았다. 독립 운동을 하지 않고 평범한 사람으로 살았더라면 좀 더 단란함을 오래 유지할 수 있었겠지만 그는 그 삶을 택하지 않았다. 

상황은 갈수록 홍범도 의병대에 불리해져 갔다. 총은 있지만 탄약이 떨어져 쏠 수 없어 숨어다니는 상황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전투 의욕을 상실한 탈주자들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결단을 내린 그, 가려는 의지가 있는 40명만 데리고 압록강을 건너기로 한다.
두만강 너머는 일찍부터 조선에 살던 많은 백성들의 이주가 이어졌다. 주로 북방 지역에 살던 이주가 많았는데 고향 땅이 점차 살기 팍팍해졌던 탓이 클 것이다. 처음으로 이주한 조선 백성들은 터를 잡고 척박한 그 땅을 개간해나갔다. 이후 점차 이주하는 백성들이 늘어 1920년대가 되면 20만명이 된다. 그 곳에 살던 중국, 러시아인들도 조선인들의 농사 능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는 이야기를 몇몇 책에서 보았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두만강을 넘어 연해주 땅으로 간 홍범도는 그 곳에 있는 독립군 세력과 연합하여 독립 운동을 전개한다. 대표적인 전투가 1920년 10월부터 11월 사이에 이어진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다. 유리한 지형에 효과적인 전략과 전술을 결합한 완벽한 아군의 승리인 동시에 일본군에게는 무참한 패배를 안긴 전투였다. 다만 일본군의 패배는 그들을 복수심에 불타 오르게 해 조선인 동포들을 무참하게 학살하는 참극을 낳게 하였다.

이후 만주의 독립운동 세력 9개의 단체가 모여 대한독립단 단체를 만들지만 내부 노선의 차이가 존재하는 상태에서 갈등은 잠복해 있었다. 러시아 백군이 홍군에 의해 박살이 나고 연합국 최고회의는 1920년 1월 16일 볼셰비키 정권과의 통상을 재개하면서 군대 철수를 선언했지만 일본은 버팅기며 철수하지 않고 있었다. 같은 해 4월에 러시아 빨치산 부대가 니콜리스크에 와 있던 일본군을 살해하면서 연해주의 러시아 혁명군 무장해제를 요구, 블라디보스토크와 니콜리스크 등지의 한인독립운동세력에 대한 공격 및 학살을 벌인다. 이 때 최재형을 비롯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사망했다. 이것이 '4월참변'이다.
문제는 일본군이 4월 참변 이후에도 철수하지 않은 채 한인마을을 공격하는 와중에 1921년 3월 소련정부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는 모든 대한독립단 부대를 소련군 한인보병자유대대에 강제편입시키는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다. 자유시에 집결하라는 요구를 한쪽은 받아들이고 다른 한쪽은 거부하면서 분열은 증대한다. 이것이 흑하 사변의 계기가 되었다. 홍범도는 이 때 독립 세력 간의 갈등을 보며 무척 환멸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통합하기 위한 그의 노력은 쉽지 않았고 결국 흑하사변이라는 비극으로 끝맺음이 났다. 서로 총을 겨눈 상황에서 발생한 사건은 그에게 큰 상실감과 슬픔을 남겼다.


2021년 8월 15일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담긴 관이 크즐오르다 공항을 출발하여 같은날 저녁 서울공항에 도착했다. 8월 17일 정부는 홍범도 장군에게 건국 훈장 최고의 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8월 18일 국립대전현충원 제3묘역에 안장되어 78년 만의 고향 땅에 묻혔다. 


"이 땅에서 왜적을 말끔히 물리치는 날, 그날에 나는 비로소 죽을 수 있으리라. 그날까지 나는 제국주의자 침략자들과 싸우고 또 싸우리라. - P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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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3-09-06 19: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긴 글 쓰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거리의화가 2023-09-07 09:03   좋아요 0 | URL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희선 2023-09-09 02: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020년에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 100년 기념 우표가 나왔어요 2021년엔 유해가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2023년엔... 나라를 생각한 홍범도 장군일 텐데... 봐야 하는 건 안 보고 다른 걸 보는군요 한국 사람이 다 그런 건 아니어서 다행이네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3-09-09 08:22   좋아요 1 | URL
네. 기념우표 소식은 들었는데 정작 사지는 못했어요. 예전엔 그런거 나오면 곧잘 사곤 했는데 정작 제가 관리도 못해서 안 사게 되더군요.
이념에 의한 정쟁이 피곤합니다. 정작 중요한 나라 현안들은 다 내팽개쳐져있어서 한숨이 나네요.
 
크리티크M Critique M 2023 Vol.6 - 마녀들이 돌아왔다
김정희 외 지음 / 르몽드디플로마티크(잡지)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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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섹션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 이 잡지를 애써 구매하고 읽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녀들이 돌아왔다> 섹션은 내 기대를 대체적으로 충족시켰다.

아무래도 국내 필자가 쓴 내용들이 나와 대체적으로 더 맞는 것 같았고 '마녀사냥' 이라는 키워드 때문인지 페데리치의 <캘리번과 마녀>는 기본적으로 대부분의 칼럼에서 언급되었다.


그리고 내가 이 잡지를 읽기 전 그 책을 읽었던 것이 도움이 되었다.


페데리치는 중세 유럽에서 억압당한 여성의 역사를 연구하면서 여성들이 어떠한 배경 속에서 마녀로 몰렸는지를 밝히고 있다. 소외된 여성이 마녀로 몰렸다. 정부와 교회는 주류에서 벗어난 여성들을 공격해 기준을 세웠다. 사회의 틀에서 벗어난 여성들, 즉 독신으로 사는 여성, 자유분방한 여성, 부랑자 여성, 근대 의학이 등장해 이 시기에 사라져가는 민간요법을 잘 아는 여성들이 타깃이었다. [ 재조명되는 마녀의 시대 by 나이케 데크슨 ]

중국에 양리라는 코미디언이 마녀사냥으로 집중 포화를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다큐 <피의 연대기>를 다룬 칼럼도 인상적이었다(다큐를 막상 보지는 못했지만 여자들이라면 공감할 수밖에 없는 내용). 


이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칼럼은 현대미술에서 제의로 표현되는 예술가의 표현 방식에 대한 것이었다. 덕분에 나는 이 예술가의 이름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아브라모비치, 이름이 알려진 만큼 아시는 분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유명세(!)를 탄 작품 때문에 그녀는 이후 활동에 큰 영향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사실 한국 현대 미술계에도 초기 박영숙 선생님 등이 활동을 시작하신 후 오늘날에는 점점 더 많은 여성 예술가들의 활발한 활동이 이어지는 것 같다. 현대 미술은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 멀리하고 있었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서 조금씩 이해도를 높여가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한여름의 더위에 고기와 지방이 부패하는 악취가 지하에 가득했다. 흰 옷을 입은 여자가 소뼈 더미 위에 앉아 브러시를 들고 뼈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 있었다. 그가 부르는 노래는 고향인 유고 슬라비아의 민요였다. 노래를 부르며 뼈를 닦다가 울부짖는 행위가 나흘 동안 지속되었다. 1997년 6월, 비엔날레에서 선보인 퍼포먼스 작품 <발칸 바로크>(1997)다. 영적인 에너지를 탐구하고 신체를 적극 활용하며 파격적인 형태를 선보이는 작품들 때문이기는 하지만 결정타는 <영혼요리>(1996) 때문이다. (...)


<발칸 바로크>는 1990년대 발칸 반도에 피바람을 불러온 전쟁의 참혹함을 고발하고, 고향인 유고 슬라비아가 자행한 대량 학살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속죄의 퍼포먼스였다. 완전한 외부인이 아니었던 그는 전쟁과 인종 청소에 대해 강력하게 발언하기도, 그렇다고 외면할수도 없었기에 피를 닦아내고 노래하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삶에 쌓인 업을 지워내고 희생자들의 안녕을 빌었던 것이다. - [ 현대미술의 제의적 순간, 마녀와 예술가 사이 by 김지연 ]



다만 아쉬운 것은 성서에서의 마녀, 악마의 이미지에 대한 해석인데 내가 잘 이해를 하지 못하는 바람에 그냥 훓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성서에 대한 이해, 그리고 그에 의구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덧) 100자평을 쓰기에는 모자란 것 같고 리뷰 쓰기에는 내용이 빈약한 것 같았지만 100자가 넘어서 리뷰로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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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3-09-05 07: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화가님 빠르게 읽으셨네요! 👍👍👍
역시 성경 공부는 언젠가 해야 하는 숙제일까요.. ㅠㅠ

거리의화가 2023-09-05 09:15   좋아요 1 | URL
잡지는 오래 읽으면 좀... 한 번에 후딱!ㅎㅎ 근데 내용이 은근히 많아서 나중엔 대강 훓어 읽은 느낌이!
뒷부분의 성경 인문학도 그렇고 <마녀들이 돌아왔다> 섹션에도 관련 칼럼이 있었는데 내용이 제겐 많이 어려웠습니다. 성경 공부까지 할 시간은 안 되는 것이 현실!ㅎㅎㅎ

건수하 2023-09-05 08: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직 펴보지 못했는데 화가님 리뷰를 보니 얼른 펴봐야 될 것 같습니다.
리뷰 남겨주셔서 감사해요!

거리의화가 2023-09-05 09:14   좋아요 1 | URL
수하님 저야말로 감사하죠. 덕분에 구매해서 읽게 되었네요^^*

미미 2023-09-05 1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중국 코미디언 양리를 검색해 봤는데 우리나라 게임 업계의 여성혐오가
떠올랐어요. 저도 마저 읽어야겠습니다. ^^

거리의화가 2023-09-05 11:31   좋아요 1 | URL
맞아요 미미님. 저는 코미디를 좋아하는 사람인데 왜 남성들이 여성들을 대상으로 하는 성적 농담이나 개그는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면서 그 반대는 포화를 가하는가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 있어요. 정작 양리는 자신이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는데 남성들의 공격이 참... 아무튼 미미님 즐독하시길요!
 
하버드 중국사 원.명 - 곤경에 빠진 제국 하버드 중국사
티모시 브룩 지음, 조영헌 옮김 / 너머북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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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중엽부터 17세기 중엽 사이에 중국에는 두 왕조가 군림했다. 첫 번째 왕조는 1271년 건립한 원으로, 쿠빌라이 칸은 세계 정복자 칭기즈 칸의 손자였다. 다음 왕조는 명으로, 주원장이 1368년 건립했으나 1644년 북방 초원에서 내려온 만주족에 의해 전복되었다. 원-명은 중국의 전제 체제를 구축했고, 중국 사회를 확대가족 집단으로 재편했으며, 상업적 부가 집중되기 쉽도록 중국의 가치를 재조정한 왕조였다. 원-명 시대는 기후학자들이 '소빙하기'라 부르는 시기와 일치했다. 원-명 사람들은 안으로는 이상 기후에 시달리고, 해안에는 외국 상인이 끈질기게 출현하는 통에 더욱 가중된 혼란을 겪었다. 그 가운데 과거의 전례에 집착하며 이를 모범으로 삼고자 하는 이들이 있었다. 반대로 어떤 이들은 과거는 버리고 새로운 방식을 받아들여 그 안에서 자기를 위한 공간을 찾았다. 원-명 시대가 대단히 혼돈스럽고 불화不和의 사회였던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 P15~18

하버드 중국사 이번 편은 13세기부터 17세기, 장장 4세기에 걸친 시기를 다룬다. 송을 정복한 몽골은 중국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가 필요했는데 이를 위해 전 정권의 합법적 계승자임을 선언하는 동시에 역사를 수집하여 기록하였다. 명은 몽골이 지배한 영역보다 축소된 영토를 얻은 대신 중화를 회복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중국인은 몽골을 '호'라고 여겼으므로, 몽골인에게 스스로 '화'의 지위를 획득했다고 주장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좀 더 포괄적인 '일통一統'이라는 개념을 찾아냈다. 쿠빌라이는 여러 민족을 자기의 통치권 아래에 두어 하나의 백성으로 만들고 자기를 하늘의 아들, 즉 천자라고 주장했다.
원이 중국 전통 왕조의 하나로 자리매김하는 데는 요사, 금사, 송사라는 세 왕조의 정사 편찬 작업이 큰 도움이 되었다. 더 나아가 쿠빌라이는 또다시 중국인의 권고를 받아들여 국가 규모의 지방지를 편찬하도록 했다. 이 안에는 모든 영토를 포괄하는 지리와 행정 명부, 그리고 인물에 대한 기술이 담겼다.
주원장은 몽골 지역과 시베리아 영토를 포기해야 했다. '천하일통', '국조일통', '일통만방' 같은 표현들이 주원장 때뿐만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지속해서 국가적 담론을 지배했다. - P66~67

나는 성격이 다른 두 왕조를 저자가 왜 한 권에 다루려는 선택을 했을까 궁금했다. 이는 결국 두 왕조 모두 공통적으로 기후 재난의 시기를 겪었기 때문이었다. 가뭄과 홍수, 기근, 메뚜기 때의 공격, 소빙하기로 평년보다 낮아진 기온 때문에 농업을 기본 산업으로 운영되는 국가의 입장에서 큰 혼란이 초래되었다. 책에는 '아홉 번의 늪'이라고 표현이 되어 있는데 한 번 올 때마다 짧으면 2~3년인 경우도 있지만 길면 15년이 이어진 경우도 있었다. 장기간의 재난을 개념화하기 위해 저자는 '슬라우'(번역서에는 늪이라고 표현됨)라는 고어를 사용했다. 슬라우는 거름을 모아두는 곳으로 나그네가 빠지기 쉬운 웅덩이 또는 저지대를 지칭하는 용어인데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진 곤란한 상황을 묘사하는 은유로 사용된다. 
날씨는 살아가는 데 가장 기본이 되는 물질적 조건이다. 당시 사람들도 이상 기후 및 재난에 관한 기록을 정사에 기록했고 기후를 바탕으로 앞으로의 재난을 예측하기도 했다. 기후 문제가 역사서에 등장한다는 게 놀라울 수도 있겠지만 나는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오늘날에도 매일의 날씨는 사람들의 기분을 좌우하는 데 영향을 미치지 않는가. 점점 온난화되는 기후로 인해 이미 지구는 병들어 이상 기후로 나타나고 지구인들은 고스란히 그 피해를 받고 있는 중이다. 하물며 이 시기에 사는 사람들은 농업에 종사했다. 농사를 짓고 먹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가뭄, 홍수, 한파 등은 흉작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명은 장자 계승이 기본 원칙이었지만 몽골은 형제 상속을 기본 원칙으로 하여 쿠릴타이에서 경쟁자를 물리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때문에 원은 우구데이 사망 이후에 끊임없이 상속을 둘러싼 분열과 갈등이 지속된다. 원 왕조가 오래 가지 못했던 이유 중 가장 큰 것이 이 왕위 계승의 시스템 때문이 아닐까 싶다.
왕위 계승에 장자 상속제가 여전히 유효했으나, 다른 요소도 개입할 수 있었다. 칸은 경쟁자와의 경쟁에서 승리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에 '쿠릴타이'라고 부르는 귀족들의 회합에서도 선거로 지배권을 비준받아야 했다. 부친을 계승하려고 형제들이 경쟁하는 관습을 '테니스트리tanistry'(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지방에 거주하던 고대 게일Gael인의 계승 제도를 가리키는 말로, 가장 능력 있는 사람이 재산과 지위를 계승하는 관행을 일컫는다.)라고 부르는데, 이 과정에서 형제 간의 살육은 비일비재했으며, 이를 '유혈의 테니스트리'라고 부른다. - P162~163

명은 5차례의 정치적인 중대 위기(호유용의 변, 정난의 변, 토목의 변, 대례의 논쟁, 국본의 위기)를 겪었다. 다섯 사건 대부분이 왕위 계승 등의 문제로 왕권과 신권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여 피바람이 일어난 것이다. 왕조의 합법성을 지켜낸다는 명분을 내건 황제의 바람이 한 쪽을 담당했다면 나머지는 충신의 의무를 지켜내기 위함이라는 관료들의 논리가 있었다.

명의 정치 문제는 그 원인을 비극적인 결함으로 보기보다는 '타협의 문제'로 보는 편이 적합할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통치자와 고위 관료 사이에 독재 정치를 수긍하는 '충성' 조항이 있다고 이해한다. 따라서 잘못은 관료에게만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통치자가 처신을 잘하는지 못하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사실 황제는 독재 정치 시스템의 본질이자 국가의 근본이었고, 그 왕조의 생존을 보증하는 확실하고도 유일한 담보였다. 황제는 권력의 한계를 뛰어넘고자 했으나 그 방법을 몰랐고, 관료들은 황제를 섬기는 일에 앞서 나라를 위해 지켜야 할 원칙이 있다고 믿었으면서도 그 원칙을 버리고 황제를 택했다. 이러한 관계에서 발생한 충성은 결국 통치자와 관료 모두를 딜레마에 빠뜨렸다. - P203~204

원-명 시기 중국의 경제가 성장하면서 정치와 사회의 수준은 따라 높아졌고 농상공업의 발전으로 도시가 발전하자 교류가 활발해졌다. 경제가 발전하면서 거래되는 물품의 가치가 높아졌고 단위가 큰 물건을 구입할 때 휴대가 편리한 은의 필요성이 증대했다. 1436년 명이 일부 지역의 세금을 은으로 납부하도록 하자 은납화가 더욱 가속화되었다. 하지만 조정은 개인이 귀금속을 보유하는 것에 대해 우려하였기 때문에 국내 은광 개발을 제한하여 은 품귀 현상을 빚게 된다. 16세기 후반 일본과 페루에서 막대한 은이 유입이 되고 나서야 상황이 개선된다. 원-명 시대에는 늘어난 교류만큼 새로운 문물과 사상을 받아들이기 좋은 조건이 되었다.
다양한 상품이 막대한 규모로 생산, 유통, 소비되면서 황실, 권세가 뿐 아니라 집에 막대한 물품을 쌓아놓은 창고를 소유한 거부(대상大商)가 생겨난다. 돈만큼이나 취향이 경제를 구성하는 중요 기반이 되면서 미적 안목이 있는 감정가들의 몸 값도 자연스레 올라가게 된다. 이제는 사치품을 살 만한 형편이 되는지의 여부보다 어떤 사치품을 구매하는지가 더 중요해졌다. 책에서는 명 말 수집가들 중 가흥에서 거부가 된 이일화라는 사람의 물품 획득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 때 서적, 가구, 도자기, 서예와 회화 등 다양한 물품이 거래되었다. 이일화는 진정한 문화물을 소유하는 것이란 좋은 양육과 교육을 받은 증거라고 간주했다. 그는 투자나 사회적 지위 때문에 명품을 수집하는 부자가 아니라 사심 없이 문화적 전통을 전수하는 자임을 인정받고 싶어했다. 덕분에 오늘날 우리가 일컫는 '중국 문화'가 형성될 수 있었다.

원-명은 가족의 사회적 성격이 변화되는 시기였다. 당의 오래된 귀족 가문은 사라졌고, 송의 왕실 가문도 사멸하고 있었다. 명 때는 조상의 연원을 원 이전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뼈대 있는 가문이 드물었다. 원-명에도 훌륭한 가문은 계속 출현했지만, 그들은 과거의 명문가들보다 빠르게 사라졌다. 따라서 개인의 정체성과 위상은 국가가 아니라 그 개인과 얽힌 사람들에 의해 결정되었다. 친족망이 사람들의 삶에 기반이 되었다고 한다면, 성의 구별은 친족망을 구성하는 원칙이었고 남성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형성되었다. 부계 사회 유지를 위해 사회적으로 관혼상제가 정례화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사후 세계가 어떠한지, 물질세계의 본질은 어떻게 규정되는지, 지구는 평평한지, 도덕적인 삶은 어떤 것인지 다양한 의견을 나눌 준비가 되었다. 특히 16~17세기가 되면 사람들은 세상을 탐구하고 책을 참조하며 고정 관념을 타개해 나갔다.

만력 연간 지식인들 사이에는 이미 격물格物이라고 하는, 사리事理에 대한 진지한 탐구가 내재했던 터라 이들에게 원형 지구 이론은 쉽게 침투될 수 있었다. 그들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수학과 천문학의 기초를 잘 다진 뒤 우주에 대한 논의를 전개한다는 점을 인정했다. ... 이로 인해 천원지방이라는 자기들의 논리가 훼손됨에도 불구하고, 지식인들은 선교사들의 논증을 신뢰하게 되었다. - P345
만력 연간 지식인들 사이에 예수회 선교사들의 영향력이 대단히 크기는 했으나, 믿음이 변화하게 된 계기는 단지 소수의 유럽인 때문만은 아니었다. 명 후기 사회 내부에 가해진 각종 압력 때문에도 기존의 믿음은 끊임없이 요동했다. 가령 만력과 천계天啓(명의 15대 황제) 연간의 정치적 문란, 급속한 상업화, 신분 질서의 변동, 변경 지방의 군사적 위기, 그리고 환경 조건의 악화 또한 믿음을 변화하게 만든 주요 원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거의 믿음을 더는 고수하기 어렵다고 느낀 일부 사람이 주로 제도권 밖에서 새로운 세계관을 찾기 시작했다. - P346

'세계 경제'라는 말은 지중해 유럽을 연구하는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1902~1985)이 만들어낸 용어로, 본래 의미는 모든 세계의 경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실질적인 의미는 빨라야 18세기부터 통용되기 시작했다. 본래 세계 경제라는 말은 정기적인 교역망을 통해 수준 높은 통합 경제를 이루어내면서도, 내부적으로는 노동 분업이 자치적으로 지속되는 광대한 지역을 의미했다. '세계 경제'가 가지만의 '세계'를 꾸릴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상대적인 자치성 덕분이었다. ...
남중국해는 상대적으로 자치적이었지만 내부적으로는 통합된 무역 구역이었다. 북쪽으로는 중국 상인이, 남쪽으로는 이슬람 상인이 조직적으로 진출하면서 15세기 후반 그 모습을 드러냈다. 정화 원정단도 이 구역에 중국인들의 참여를 확대시키는 데 기여했다고 보아야 한다. 하지만 국가 주도의 항해로는 아무리 해도 그러한 세계 경제를 창출할 수 없었다. 오직 교역이 조공을 뛰어넘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 P440~441

두 차례의 만력의 늪과 숭정의 늪, 그리고 만주족의 출현은 명의 붕괴로 이어졌다. 숭정의 늪 때는 하필 재난으로 전염병이 돌고 상업 경제가 중단되었으며 식량이 줄어들어 곡물 가격이 치솟았다. 국가 재정이 악화되자 정부 조달에 의존했던 북방 지역은 타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고 그 곳에 있던 병사들이 도망쳐 반란을 일으키는 사태가 이어지게 된다. 청이 들어선 후 명의 생존자들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만주 정권에 복종했다. 하지만 순순히 항복하지 않은 저항군은 만주군에 의해서 처형되거나 자살로 끝이 났다. 청은 다민족의 통합을 주장하며 들어섰다. 만주족은 제국을 대대적으로 개편하지 않고 명의 사회 질서를 그대로 이어갔다. 이후에는 청에 대한 저항의 불도 사그러들었고 명의 백성은 청의 백성이 되었다.

만력의 늪과 숭정의 늪은 농업 지식의 결핍이라는 함정에 걸려든 사태이기도 했고, 동시에 나라 안팎에서 진행된 엄청난 변화의 물결에 휘말린 사건이기도 했다. 남중국해에 세계 경제가 성장함에 다라 명의 경제는 연안으로 이동되었고, 물가 역시 단순히 국내 시장에 좌우된 것이 아니라(국내 시장이 좀 더 크긴 했다) 남아메리카와 남아시아 및 유럽의 수요와 공급에 따라 재조정되었다. 새로운 사상 또한 혼란을 더욱 부채질했다. 기존의 문제에 새로운 문제가 겹치면서, 아무리 훌륭한 전략가라도 체제 재정비의 과제 앞에서는 당혹스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1644년 청의 등장과 함께 세계 제국들의 급격한 재편이 없었다 하더라도, 적어도 이러한 당혹감 때문에 명은 끝났을 것이다. 만주족은 국경을 차단하고 황제를 칸으로 교체했으며, 제국이 되려는 야망을 부활시켰다.- P512

이 책은 원-명 시기를 환경적 접근을 통해 다루었다는 것이 특징이다. 다만 시기적으로 더 짧기는 하지만 원에 대한 설명은 너무 소략하고 대부분이 명의 체제를 설명하기 위해 할애된 점이 아쉬웠다. 차라리 분권을 해서 각각을 충분히 다루는 것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경제, 국제-교역, 환경적 접근이 특히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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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시, 백 편 - 한국 시의 독보적 개성, 백석 깊이 읽기
이숭원 엮음 / 태학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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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적으로 고독과 우수의 정서가 느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려 애썼던 흔적이 엿보였다. 세심한 관찰력과 돋보이는 묘사, 맛깔나는 단어와 문장들을 보면 감탄을 연발하게 된다. 인간과 세상에 대한 연민과 따뜻한 시선이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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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09-04 10: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본 백석으로 읽었습니다.
옛 정서와 모더니티를 지향하는 지식인의 정서가 복합되어 있는 그의 시에서 그리움도 사랑도 갈등도 느꼈었습니다.

거리의화가 2023-09-04 11:02   좋아요 1 | URL
맞아요. 정작 백석 시인은 외모도 그렇고 엘리트 코스를 밟았는데 시에서 느껴지는 향토, 토속성이 놀랍더라구요^^ 그리움이란 정서가 전반적으로 잘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8 - 소돔과 고모라 2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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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무심한 나그네여,
내 어깨에 이마를 대고 꿈을 꾸지 않으려오?

나는 그녀의 머리를 붙들고, 석양빛 속에 멀리 푸르스름한 골짜기들이 나란히 사슬을 이루며 닫혀 있는 지평선까지 펼쳐지는 그 물에 잠긴 말 없는 커다란 초원을 가리켰다. - P25

나와 알베르틴은 베르뒤랭 부인의 만찬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들은 동시에르 역에 가기 전까지 빈 객차만 찾아다니며 틈만 나면 포옹을 하는 등 화기애애했다. 역에 도착하니 생루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생루는 나와 알베르틴의 관계를 인지했기 때문에 알베르틴의 반응을 무시하려고 했고 이를 느낀 알베르틴이 화가 나서 다다다다(!) 하면서 분위기가 싸해졌다. 뒤에 화해를 했지만 이전에도 알베르틴이 생루에게 보인 호의에 질투를 느꼈기에 이번에도 나는 내심 둘의 만남이 불편했던 것이다.

아무튼 둘은 베르뒤랭 부인의 살롱으로 이동했고 이번에도 사교 모임의 장면은 계속 이어진다. 기존에 게르망트 사람들이 아닌 지난 번 모임부터 등장한 베르뒤랭 부인과 셰르바토프 대공 부인, 캉브르메르 부인이 새롭게 등장했다. 주최자가 모임을 개최할 결정을 하면 모임을 위한 준비는 그때부터 시작된다, 물밑 교섭이라고 해야 할까, "우리 이런 모임합니다. 꼭 오세요. 이런 것을 할 예정입니다. 어때요?" 모임의 주최자가 어떤 훌륭한 가문과 출신이냐가 중요하겠지만 주최자도, 참석자들도 여기에 누가 참여하느냐에 따라 모임의 질이 결정된다고 판단한다. 따라서 사교계에는 주최자와 참석자들을 둘러싸고 질투를 넘어선 암투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참석한 뒤에는 어떤가. 상대방을 깎아내리고 자신은 높이면서 시간을 보낸다. 나는 이런 과정이 너무 부담스럽고 지루해서 '제발 좀 끝나라!'를 연발하고 있었다. 만약 내가 이 시기에 태어났다면 이런 곳 참여는 결단코 사절이었을 것 같다. 내가 하필 공주이거나 아니면 부유한 귀족이나 부유한 상공업자 출신 딸이어서 가야 하는 상황이었더라도 어떻게든 그 상황을 피하며 다니지 않았을까 싶다.

베르뒤랭 살롱은 음악의 전당으로 통했다(뱅퇴유 소나타도 탄생했다는데 소나타 이름은 가상이고 당연히 실제 모델은 따로 있다. 이런 장치들을 끊임없이 심어두면서 독자로 하여금 유추해보게 하는 프루스트는 역시 대단하다). 셰르바토프 대공 부인은 부를 이용해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데리고 모임에 참석했다. 참석자 가운데에는 아카데미 회원인 브리쇼, 유명 학자인 코타르, 바이올리니스트 모렐, 샤를뤼스씨도 있었다. 독자들도 유추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 베르뒤랭 댁과 캉브르메르 댁 사이는 불꽃을 튀기며 설전을 벌였고 당연한 듯 사이는 좋지 않아졌다. 사교계에서 얻어야 할 가르침은 무엇일까, 주최자와 참석자 간에 화합을 표방하며 마련한 자리였다지만 모임이 파하면 허무해지는 것처럼 닿을 수 없는 것을 쫓으려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내게는 그대만이 우리가 늘 찾는 사람으로 보였도다."
그 작은 동아리 회장은 죽을 때까지 ‘신도‘를 확보하고 싶어, 대공 부인에게 두 사람 중 나중에 죽는 사람이 먼저 죽은 사람 곁에 묻히자고 제안했다. 낯선 사람들 앞에서 - 그중에는 멸시 받는 게 가장 고통스러워서 우리 자신이 가장 많이 속이는 자, 즉 우리 자신도 포함하여 - 셰르바토프 대공 부인은 세 여인과의 우정, 즉 대공비와 베르뒤랭 부인, 그리고 뛰트뷔스 부인과의 우정이, 그녀의 의지와 무관한 대홍수가 일어나서 나머지 모두를 파괴하고 나타난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자신이 여느 다른 우정보다 좋아해서 고른 것이며, 또 고독과 검소함의 취향이 그 선택을 제한한 그런 유일한 우정처럼 보이게 하려고 노력했다. - P46~47

인간은 하룻저녁에도 보통 때는 환대를 받던 모임에서 자신이 지나치게 경박하고 유식한 체하며 세련되지 못하고 무신경한 사람 취급을 받는다고 짐작하면서 비참한 마음으로 귀가한다. 그가 남들에게 엉뚱하거나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 보이는 것은 흔히 여론이나 조직의 문제 때문이다. 흔히 그는 이런 사람들이 자신보다 가치가 없다는 걸 아주 잘 안다. 그들이 자신에 대해 하는 암묵적인 비난의 도움을 받아 그 궤변을 쉽게 분석할 수 있으며, 그래서 그들을 방문하고 편지를 쓰고 싶지만, 보다 신중한 그는 다음주에 있을 초대를 기다리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때로 이런 실총은 하룻저녁으로 끝나지 않고 여러 달 계속되기도 한다. 사교계의 불안정한 판단에서 비롯된 실총은 그 불안정성을 더욱 가중시킨다. - P176~177

오늘날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세계의 중심이라고 여기며 시간을 보낸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는 우리를 위대한 ‘전체‘ 속에 녹아들게 하는 불교의 니르바나(涅槃] 같은 훌륭한 학설을 이론적으로는 전혀 반대하지 않습니다.(그 전체가 지적인 차원에서는, 뮌헨과 옥스퍼드와 마찬가지로, 파리 근교인 아니에르나 부아콜롱브보다 훨씬 파리에 가까우니까요.) 그러나 일본군이 어쩌면 우리 비잔틴 문명 바로 가까이에 있을지도 모르는 지금, 사회주의의 반군국주의자들이 자유시의 주요 가치에 대해 심각하게 토론하는 건, 훌륭한 프랑스인으로서 또는 훌륭한 유럽인으로서 적절한 행동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고 브리쇼가 말했다. - P186~187

사실 몇몇 사람들은 ㅡ 내 경우에는 유년 시절부터 그러했지만 - 타인이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고정된 가치를 가진 온갖 것들, 즉 재산이며 성공이며 높은 지위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환영이다. 그들은 이런저런 환영을 만나기 위해 모든 걸 실행하고 이용하면서 나머지는 희생한다. 그러나 환영은 지체하지 않고 곧 사라진다. 그러면 우리는 비록 첫 번째 환영으로 다시 돌아가는 일이 있을지언정 다른 환영을 쫓아 나선다. - P286

알베르틴은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나는 알베르틴과 매일 밖으로 나가 산책을 했다. 나와 알베르틴의 관계는 그렇다면 이제 흔들림 없이 갈 수 있는 것인가. 그치만 어머니는 나와 알베르틴의 만남이 아주 만족스럽지는 않았던 것 같다. 물론 어느 부모고 자식의 만남을 100% 지지해준다는 것은 쉽지 않다. 내 자식을 진심으로 좋아한다고 해도 상대를 받아들이는 것은 또 하나의 영역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아마 세월이 가면 나도 그 애는 바로 그런 사람이란다라고 말할 수 있겠지. 그리고 나는 그 아이가 너를 행복하게만 해 준다면 항상 좋게 생각할 거다. 그러나 나의 행복을 결정하는 일을 내 손에 맡기는 이런 말을 통해, 어머니는 예전에 아버지가 내게 「페드르」를 보러 가는 것을, 특히 작가가 되는 것을 허락해 주었을 때 나를 사로잡았던 것과 같은 의혹의 상태로 빠져들게 했는데, 그때 나는 갑자기 막중한 책임감과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또 나날이 우리의 미래를 은폐하는 타인의 명령에 따르는 일을 멈추고 드디어 진지하게 성숙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우리 각자의 재량에 맡겨진 유일한 삶을 살기 시작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를 사로잡는 그런 우울한 감정을 느꼈다. - P133~134

어둠이 내렸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이 언제나 이렇게 옆에 있는 것임을 떠올리며, 스카프와 토크 모자와 더불어 내 몸에 밀착한 그녀를 느끼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었는지! 어쩌면 나는 알베르틴을 사랑하는 건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 사랑을 그녀가 알아차리도록 내버려 둘 용기는 없었다. 설령 그 사랑이 내 마음속에 존재한다해도, 경험에 의해 검증되지 않는 한 그것은 가치 없는 진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사랑이란 내게 실현될 수 없으며 삶의 영역 밖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였다. 나의 질투로 말하자면, 내가 알베르틴과 영원히 결별할 때라야 거기서 완전히 회복될 수 있음에도, 이런 질투심이 오히려 가능한 한 그녀 곁에서 떨어져 있지 않도록 부추겼다. 나는 그녀 옆에서도 질투를 느낄 수 있었지만, 그 질투를 내 마음속에 다시 깨어나게 하는 상황이 재개되지 않도록 조처했다. - P290~291

계속되는 알베르틴을 향한 질투의 감정으로 나는 헤어질 생각을 했고 어머니께도 결별하겠다 말씀드린다. 어머니의 반응은 "잘 생각했다." 였다. 역시 그런가. 하지만 어머니의 마음처럼 쉽사리 되지는 않을 것 같다. 떠나겠다던 나의 결심은 오히려 알베르틴을 더 붙잡게 만드는(붙잡고자 했던)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알베르틴은 만나면 만날수록 더 타오르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었나보다.
질투라는 감정은 생각보다 쉽게 사그러들지 않는다고 여긴다. 이것이 없다면 사랑이 시시해질 수도 있겠지, 그러나 질투는 그만큼 피곤한 것이기도 하다. 나는 정말로 밀당을 못하는 타입이어서 연애할 때 그 피곤하고 지지고볶고 하는 것을 왜 하나 생각할 때가 있었다. 밀당은 자연스럽지 않고 부자연스러운데 왜 이것을 하는 거지? 아무튼 내게는 여전히 멀고도 험한 밀당의 길...

그녀는 덧붙였다. "당신을 떠나지 않겠어요. 이곳에 계속 있을게요."그녀는 바로 ― 그녀만이 내게 줄 수 있는 ㅡ 나를 타오르게 하는 독약에 맞선 유일한 해독제를, 게다가 독약과 같은 종류의 약을 주었는데, 즉 하나는 달콤하고, 다른 하나는 쓴 것으로 둘 다 똑같이 알베르틴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바로 그 순간 나의 병(病)인 알베르틴은 내게 고통을 유발하기를 포기했고, 그러자 이번에는 나의 약(藥)인 알베르틴이 나를 회복기에 접어든 환자처럼 온순하게 만들었다. - P472~473


"특히," 하고 베르뒤랭씨의 말을 듣지 못한 코타르가 브리쇼에게 말했다. "베르뒤랭 부인 앞에서는 ‘모튀스(motus)‘하기요." "걱정 마시오. 오! 코타르, 당신은 테오크리토스의 말처럼 현자를 상대하고있소. 게다가 베르뒤랭 씨의 말이 맞아요. 우리가 슬퍼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하고 덧붙였다. 그는 언어 형태와 그것이 자신의 마음속에 유발하는 관념을 비교할 수는 있었지만, 정교함이 부족한 탓에 베르뒤랭 씨의 말에서 가장 용기 있는 금욕주의적 표현을 발견하고 감탄했다. - P89

베르뒤랭 부인은 진짜 뛰어난 사람들은 수많은 미친 짓을 한다고 확신했다. 거기에는 뭔가 진실이 담겨 있지만 틀린 생각이다. 물론 사람의 ‘광기‘란 견디기 힘든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깨닫게 되는 불균형은, 보통 섬세한 생각을 하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은 인간의 두뇌에 섬세한 생각이 들어가면서 생기는 결과이다. 그래서 우리는 매력적인 사람들의 기이한 모습에 분노하는데, 사실 매력적인 사람치고 기이한 점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다. - P160

자동차는 아픈 사람도 그가 원하는 곳까지 데려다 주어, 그 장소를 개별적인 기호 혹은 대용품이 없는 변치 않는 아름다움의 본질로 여기는 것을 내가 이제껏 그래 왔던 것처럼 ㅡ 방해한다. 또 자동차는 아마도 내가 예전에 파리에서 발베크에 갈 때 탔던 기차처럼, 그곳을 일상적인 삶의 우연성에서 벗어난 목적지, 우리가 출발할 때면 거의 이상적으로 보이고 도착할 때도 여전히 그렇게 남아 있는 목적지로 만들어주지 못했다. - P273

우리에게는 몇몇 새들에게 있는 방향 감각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거리감과 시정감(視程感)도 부족하여 우리 생각은 전혀 하지도 않는 이해 당사자의 관심을 그들과는 반대로 매우 가깝게 상상하며, 또 그런 시간 동안 우리가 오히려 다른 이들의 걱정거리가 되고 있음은 짐작하지 못한다. 이렇게 샤를뤼스 씨는, 자신이 헤엄치는 모습을 반사하는 물이 어항 유리 너머로까지 펼쳐져 있다고 믿는 물고기처럼 착각 속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물고기는 옆 그늘에서 자신의 뛰노는 모습을 쫓으며 즐거워하는 산책자나, 예기치 못한 운명의 순간에 지금 남작에게는 훗날로 미뤄진 ―자신이 좋아하던 그곳에서 무자비하게 끄집어내어 다른 곳으로 내던질 그 전능한 양어가(養魚家)(파리에서 이 양어가는 베르뒤랭 부인일 것이다.)의 모습은 보지 못한다. - P345

지금 내가 상륙한 곳은 무시무시한 ‘미지의 땅‘이었으며, 예상치 못한 새로운 고통의 시대가 열렸다. 그렇지만 우리를 함몰시키는 이 현실의 홍수는 비록 우리의 소심하고도 미미한 가정에 비하면 엄청난 것이라 할지라도, 이미 그 가정을 통해 예상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지금 막 들은, 알베르틴과 뱅퇴유 양의 우정과도 같은, 내 정신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을 테지만 앙드레 곁에 있는 알베르틴을 보면서 어렴풋이 불안에 떨며 두려워했던 것이다. - P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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