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움직이는 유대인의 모든것
김욱 지음 / 지훈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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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권유도 7

 

유대인은 유대교라는 종교적 합일성을 통해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한 단일정신의 군락이다.

국경과 언어의 장벽이 허물어진 현대 사회에서 '민족의 정체성'은 편협한 민족주의적

발상에 근거한 구시대적 명제이기는 하나 수 천 년을 떠돌이적 삶을 살아오면서 또 그 어떤

민족보다도 더 가혹한 냉대와 멸시 그리고 탄압을 받았으나 아직도 지구상에서 살아지지

않고 오히려 더 떳떳한 그들, '유대 민족'에 대한 저력을 확인해 보지 않고 위와같은 논리를

덮어 두기에는 뭔가 찜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 작품을 읽는 사람들에게 이 작품이 다가가는 정도와 느낌은 각양 각색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단순한 '유대 민족의 고난사'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유대 민족의

'세계 역사 등장기' 정도로 이해하고 싶었으나, 작품 구석구석에서 묘사되고 있는 그네들의

'인내심''절대자에 대한 믿음'을 보는 대목에서는 등골이 오싹할 정도의 한기를 느낀

그런 작품이었다.

 

그들이 5000년을 준비했다는 탈무드의 내용도 그렇고 '사업 = 우물'이라는 논리,

특히 세계의 내노라하는 전쟁의 이면에는 반드시 유대인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그 전쟁을

통해 한 몫 단단히 잡고 있다는 내용에서는 고개를 흔들 수밖에 없었다.

'독한 놈들........' 하면서 말이다.

 

유대인, 그들은 불특정 다수의 민족들로부터 갖은 압박과 피박을 받았음에도 그들은

웃었으며 또 그들은 존재해 왔다. 작품은 유대 민족의 저변에 흐르는 정신적, 상황적 실태

를 적나라하게 밝히고 있는데, 단순히 유대 민족들의 고난사로 이해치 말고 유대 민족의

알려지지 않은 민족 투쟁사라는 측면으로 이해하고 읽으면 좋은 성과가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정말 '유대인은 대단하다'라는 인식보다는 그들로부터 오늘을 사는

우리 민족이 아니 내가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확실히 확인해 보는 그런 시간이었다.

작품의 주요 부분을 발췌하면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아 내가 알고 있는 잡상식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쓰지 않고 책의 주요 내용을 발췌해서 요약해 정리해 보았다.

 

 

   우리의 상식을 넓혀 주는 유대인에 관한 상식 문구들

 

- 유대인이 하나님을 부를 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또 자신들을 가르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이라고 부른다. 

- 1299'영국 정부'는 유대인 성서와 율법 책인 '토라'와 유대교 잠언집으로 불리우는 

   '탈무드'를 소각할 것을 법으로 정한 뒤 유대인에게 다른 곳으로 이주할 것을 명한다.

   당시 영국은 문명국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문맹율이 높았으나 유대인들은 6~7세만 되면

   아이들이 읽고 쓸 줄 알았기 때문에 영국 정부는 유대인들이 무서워 그렇게 했던 것이다.

- '토라'에는 하나님과 유대인과의 계약 관계를 담고 있기 때문에 생명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 중의 보물이라고 한다.

- 고대에는 유대인을 '히브리인(Ivrim)'이라고 불렀는데 '이브리'에서 유래한 말로서 

   '우리와 다른 인종'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유대인 노예들이 건설한 축조물이다.

   '개는 식탁에 앉혀도 히브리 노예는 앉힐 수 없다'고 할 정도로 유대인을 피박했다.

- 아브라함은 바로 유대인의 시작인데, '모세''강물에서 건진 아이'라는 뜻임.

- 모세가 시나이 산 부근에서 유대인을 대표해 하나님과 종교적 계약을 맺는데 이것이 

   '십계명'.

- 유대인 격리 수용지구를 뜻하는 '게토(ghetto)'라는 말은 1516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 에스파냐 정부가 유대인을 박해한 이유는 이교도인 그들이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 5세기부터 17세기 말까지 자행된 유럽의 유대인 박해는 1789년 발발한 '프랑스 대혁명

   부터 누그러졌다.

- 유대인들의 즐겨 쓰는 '루프트 멘슈(공기)'라는 단어의 의미는 '사물로 고정되는 대신

   기체가 됨으로써 타인의 손아귀에 쥐어지지 않는 것'을 말하는 데, 오랜 박해와 인고의

   세월이 그들의 가치와 개념을 여타 민족과 확연히 구분시키는 것으로 박해받던 시절

   유대인을 정신적으로 이끌어 주던 단어라고 한다. 

- 기독교인들이 볼 때 유대인은 예수를 살해한 죄로 민족 전체가 나라를 잃고 떠도는 저주

   받은 백성에 불과했다. 그들의 처지를 동정하거나 자비를 베푸는 행위는 유대인에게

   벌을 내린 하나님에 대한 일종의 모독으로까지 간주되었다.

- 로마 카톨릭은 유대 사회에 가장 적대적인 세력이었는데, 가톨릭의 선구자 '바올로'는 

   물론 교황의 시초가 된 '베드로' 역시 유대인이라고 한다.

- 메시아는 히브리어로 '마쉬아흐(Maschiach)'라고 하는데,

   이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고대 유대인이 왕에게 성스러운 기름을 붓던데서

   유래한 말이다헬라어로 하면 '크리스토스(Christos)'이며 여기서 그리스도가 나왔다.

- 가톨릭이 그리스도의 열 두 제자 가운데 '베드로'를 첫 번째로 여기는 까닭은 그리스도가

   베드로에게 천국의 문을 관할하는 열쇠를 맡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베드로의 본명은 '시몬'으로 갈릴리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던 뱃사람이었다.

- 이슬람이 유대인과 다른 점은 아브라함과 여종 '하갈' 사이에 태어난 이스마엘 후손임.

   이와 달리 유대인은 아브라함과 본처인 '사라'사이에 태어난 이삭의 후손임을 자처 한다.

- 유대인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도시는 예루살렘에 아니라 미국의 뉴욕이다.

- 현대 사회로 대변되는 새로운 삶의 양식이 구축되는 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마르크스, 프로이트, 아인슈타인 모두 유대인이다.

- 유대인들은 생업을 가르켜 '우물'이라는 은유적으로 표현하길 좋아하는 데, 이들은 일생

   을 통해 우물을 3개 정도는 항상 마련해 두었다고 한다.

- 유대인에게 '거지(슈노렐)'라는 직업도 있다. 이들은 학식도 높고, 가정도 있다

   전통적으로 이들 거지를 가르켜 '하나님의 배려'라고 부른다. , 누군가에게 선행을

   베풀 수 있게끔 하나님이 거지들을 예비했다는 뜻이다.

- 인류가 시작된 '아담'은 유대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과 계약을 맺지 않았기

   때문임. 오직 유대인만이 하나님과 계약을 맺을 수 있다는 자긍심이 오랜 박해 속에서도

   민족의 정체성을 지켜낸 배경이었으며, 모든 분야를 막론하고 유대인들이 성공할 수

   있었던 삶의 모태이다.

- 유대인은 고통이 인내를 낳고, 인내가 수고를 낳으며, 수고가 결국 성공을 낳는다고는 

   전통적인 가르침을 철저하게 신봉하고 있다.

- 유대인들에게 있어서의 '유월절'400년간 지속된 이집트의 박해에서도 그들 문화에

   동화되지 않았으며,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을 기념하는 날로서 모든 음식은 삶을수록

   부드러워지지만 달걀은 더욱 단단해지기 때문에 이 날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삶은 달걀

   을 먹는다고 한다

- 유대인은 실패를 기억하지 않는다. 성공을 기념하지도 않는다. 오직 고난과 역경만을

   기억하고 기념한다.

- 미국에 있는 '홀로코스트' 기념관의 미국식 정식 이름은 '대학살 순교와 영웅(미국 친구)

   들의 기념관'으로, 히브리어 정식 명칭은 '야드 바셈'이라고 하는데 이는 '이름을 기억다

   는 뜻이라고 한다.

- 유대인의 속담에 "돈을 벌고 싶다면 혼란을 틈타라"라는 말이 있다. 역사적으로 전쟁의

   비극이 있을 적마다 유대인들에게는 비극이 아닌 기회였다.

   (알렉산더 대왕의 페르시아 원정, 나폴레옹이 일으킨 전쟁 등)

- 나폴레옹과 영국이 전쟁을 벌이자 각각의 군대에 군자금을 '로트실트 형제' 가 댔는데,

   셋째가 밀은 영국이 승리하자 '붉은 방패'라는 뜻이 담긴 독일어 'Rothschld' 에 귀족

   호칭을 하사하고 영국식 발음인 '로스차일드'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 로스차일드는 철도 회사를 운영했는데 철도가 안고 있는 운송적 가치보다 정보적 가치를

   더 높게 평가했다. 그래서 한 량의 객차마다 정보원을 배치해 닥치는 대로 정보를 수집해

   정치권에 제공했다.

- 강한 자가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살아남는 자가 승리하는 것이다.

- 유대인이 가장 치욕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노년에 자식의 도움이 필요할 때'라고 한다.

- 사업상의 신뢰는 반드시 지키나, 인간적으로는 신뢰하지 않는 것이 유대인의 철학이다.

- '싱크 탱크'를 최초로 생각해 낸 집단이 바로 유태인이다. 싱크 탱크는 한마디로 권위를

   부정하는 데서 출발하는 데 존재의 가장 큰 이유는 권력에 대한 비판이다.

- 유대인과 몽골족은 성벽을 거부함으로써 성공한 대표적인 민족이다.

- 유대계 인물들은 분야를 막론하고 자신의 고유한 색깔을 찾아냄으로써 성공을 이뤄

   냈으며, 성공한 유대인으로 회자되고 있는 사람의 특징은 모두 기존의 막강한 권위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 탈무드의 맨 마지막 장은 항상 여백이다. 그 이유는 유대인의 삶이 계속되는 한 탈무드의

   지혜도 계속될 것이라는 의미에서다.

- 구약성서의 아가, 잠언, 전도서의 저자는 솔로몬 왕으로, 그는 유대인 최초로 그들만의

   성전을 건축한 인물이다. 잠언의 히브리어 제목은 '미실레 셸로모'로 이는 '솔로몬왕이

   가르치는 슬기로운 삶의 지혜'라는 의미로, 전도서의 히브리어 제목은 '코헬렛'으로 이는

   '백성에게 지혜를 전파한다'라는 의미다.

- 유대인의 자식 교육 방식 '나보다 단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된다'이다.

- 영어의 'jewish mother'라는 단어는 '유대인 어머니'라는 뜻도 있지만 '어머니들의

   극성스런 치맛바람'이라는 뜻도 있다.

- 아파도 눈물이 나오고, 웃어도 눈물이 나오나 웃을 때의 눈물은 눈동자를 빨갛게 만들지 

   않는다.

- 설득은 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이지 관계를 돈돈히 만드는 데 적합한 방법이 아니다.

- 현대사회에서 자녀에게 올바른 감수성과 정확한 판단력을 길러 주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 아이들이 어른들의 세계에 다가 오지 못하도록 하는 이유는 어른에게만 주어진 책임과

   특권을 아이들에게 일깨워 주기 위해서이다.

- 인생은 'what'을 찾아 떠나는 인생이다. 'what'을 상실한 인생이 'how'를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 묵묵히 자신의 정신을 가다듬는 자만이 훗날 남과 다를 수 있다.(중국, 강엄)

 

[가정 교육에 관한 그들의 지혜]

- 아버지를 뜻하는 히브리어 '압바(abba)''교사, 선생'이라는 뜻도 담고 있다.

- 방관도 교육이며 인간의 가장 오래된 학교는 체험이다

- 지혜는 듣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데서 시작한다.

- 하나를 듣고 한 가지를 외우는 것보다, 반마디 말을 듣고 세 마디 말을 할 수 있어야

   진정한 교육이다.

- 받아 들이고 받아 들이지 않고는 전적으로 아이의 타고난 개성과 능력에 달려 있다.

- 싫다면 할 필요가 없다. 다만 하고 싶다면 마지막까지 포기해서는 안 된다.

- 자녀를 주의하라, 그 아이들은 온 몸으로 듣고, 기억한다.

 

[책에 언급되어 있는 탈무드의 가르침]

 

유대인이 위기 때마다 다가올 변화를 예측하고 방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태의 핵심인 

    인간의 본직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수를 준비했기 때문인데 그것이 5000년에 걸쳐

    준비한 '탈무드'이다.

 

노아의 방주 당시 모두가 쌍을 이루어 배에 타라고 했으나 '(')'은 혼자 탈 수 밖에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홀로 남은 '()'에게 같이 가자고 하자 ''은 같이 배에 타는

     조건으로 ''에게 어디든 함께 다니자고 제안했다.

     그 후로 ''이 있는 곳에는 항시 ''이 따라 다니게 되었다고 한다.

 

인간이 처음 ''을 마셨을 때는 양처럼 순해진다. 조금 더 마시면 '사자'처럼 분노하고,

     그 보다 더 마시면 '돼지'처럼 지저분해 진다. 더욱 많이 마시면 '원숭이'처럼 춤을

     추거나 노래를 한다. 이는 악마가 인간에게 준 선물이었다.

 

사람은 태어날 때 손을 쥐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을 쥘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죽을 때 손을 펴는 이유는 그것이 거짓이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악마는 사람을 찾으러 다니기 힘들 때마다 자신을 대신해 ''을 보낸다.

 

가장 강한 인간이란 자신의 마음을 조절할 수 있는 인간이다.

 

일생을 살아가면서 나타나는 남자의 일곱 가지 변화

   1) 한 살은 왕            2) 두 살은 돼지                   3) 열 살은 염소새끼

   4) 열 여덟은 말        5) 결혼 한 후 당나귀      6) 중년은 개         7) 노년은 원숭이

  

탈무드의 동화에 하나님이 인간의 눈을 '검은자위''흰자위'를 주신 이유를 인간은

    어두운 부분을 통해서 만이 참다운 인생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간의 마음이 거만해지려고 할 적마다 조물주가 모든 만물 가운데 가장 맨 마지막에

    만든 것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떠 올려라.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에서 만든 이유는 그녀가 늘 남자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존재

    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이다.

 

□ 남자는 결혼하면 죄가 늘어난다. 아내를 이유없이 괴롭히지 말라. 하나님이 그녀의

    눈물을 세고 계신다.

 

나를 아는 것이 최고의 지혜다. 죄는 처음에는 여자처럼 약하지만, 내버려 두면

    남자처럼 강해진다. 죄는 처음에는 거미줄처럼 가늘지만, 나중에는 배를 묶을 수 있는

    밧줄처럼 단단해 진다.

 

소문은 살인보다 위험하다. 살인은 한 사람만 죽일 수 있지만, 소문은 한꺼번에

    세 사람을 죽이기 때문이다. 소문을 퍼트린 사람, 그 소문을 믿는 사람, 그리고 소문의

    주인공이 그들이다. 손가락이 자유로이 움직이는 까닭은 소문을 듣지 않기 위해서다

    소문이 들리면 서둘러 귀를 막아라.

 

안식일을 가르켜 '3의 눈'이라고 한다. 6일 동안 육신의 두 눈으로 세상을 바라

    보았다면 안식일의 휴식으로 나를 바라보라는 뜻이라고 한다.

 

현인이 되는 7가지 조건

   1) 자신보다 현명한 사람이 있으면 침묵하라

   2) 남이 이야기할 때 말허리를 자를지 마라

   3) 대답할 때 당황하지 마라

   4) 늘 알아듣기 쉬운 말로 질문하고, 조리 있게 대답하라

   5) 먼저 쉬운 일부터 시작하고, 어려운 일은 뒤로 미루라

   6) 자신이 모를 때는 인정하라

   7) 사실을 인정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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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조선의 난세를 넘다 이한우의 군주열전
이한우 지음 / 해냄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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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추천권유도 10

 

선조의 시대는 조선 건국 때부터 이어져 온 '공신 훈구' 시대의 종언을 고하고, '사림(士林)정치'의 

시대를 연 조선 역사의 전환점이 된 시대라 한다.

선조 시대를 조명하기 이전에, 중종 14년에 사림에 의해 공격을 받아 사사된 [조광조]대한 

이해가 있어야 할 것이다. 조광조를 빼고서는 중종, 인종, 명종 및 선조로 이어지는 관련 역사를 

정확히 이야기할 수, 이해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반정으로 [연산군]을 내몰고 왕위에 오른 [중종]은 약한 자신의 권력 기반을 신진 세력을 통해 

강화하려는 구상을 하게 된다. 이때 이조판서 '안당'의 천거로 조정에 진출한 [조광조]를 활용

하고자 한다. 조광조는 도학정치의 양대 목표인 '소격서 철폐''현량과 도입'을 추진하여 

성공을 이루는 등 중종의 총애를 받으며 개혁 사업을 추진해 나가는데, 한 발 더 나아가 기득권의

아킬레스건이나 마찬가지인 '위훈 공신'삭제를 '대사간 이성동'과 함께 추진하게 된다

'위훈 공신'이라 함은 연산군을 몰아 낼 때 공훈을 세운 사람들에게 내린 벼슬로 당시 시대적 

혼란상을 틈타 아무런 공적도 없는 인물들이 자신의 공적을 포장해 혹은 유력자의 공훈에 끼워

넣기 식으로 국가로부터 벼슬과 훈작을 받은 것으로 당시 '위훈 공신' 문제는 기득권 세력의 

큰 아킬레스건이었다.

이는 연산군을 몰아내는데 공을 세운 '위훈 공신'들을 견제하려는 중종의 구상과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급속히 진행되게 된다.

 

훈구 세력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곱 차례에 걸친 강력한 주청 끝에 조광조는 자신의 

계획을 관철시킨다. 조광조가 추진한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수구 기득권 세력의 강한 반동을 

불러 일으킨다.

위훈 공신의 중 한 명의 자식이 바로 [희빈 홍씨]로 희빈은 당시 중종으로부터 총애를 받고 있던 

[경빈 박씨]를 통해 중종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일대 사건을 기획하게 되는데 그 사건이 바로 

조광조가 연루된 '주초위왕(走肖爲王)'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최고 개혁가 조광조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

이렇게 죽은 조광조의 복권을 논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불궤(不軌) , 반역을 의미하는 것과 

동일시 되던 시대였다.

 

선조가 즉위하기 전까지 형제간 왕위에 오르는 순서의 문제는 있었지만 왕후의 몸에서 나지 

않은 임금이 왕위에 오르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때문에 '방계 승통'의 문제는 늘 선조를 따라 

다니는 아킬레스 건이었다.

 

명종 18년 명종의 장자인 [순회세자]1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성종의 아버지인 [의경세자]에 이어 두 번째로 터진 국가적인 비극이었다. 세자를 국본(國本)이라 

하여 중히 여겼기 때문에 [순회 세자]의 죽음은 왕실 뿐 아니라 조선의 장래를 뒤흔들어 놓을 수 

있는 비극적인 중대 사안이었다.

공교롭게도 명종에 앞선 '인종'도 후손 없이 죽었기 때문에 [순회세자]의 죽음은 조선 왕실의 

후계 문제를 오리무중으로 몰아넣는 계기가 된다. 명종이 죽기 직전 어머니인 인종의 비인 

[문정왕후]는 적장자로 명종의 계비 중에서 자신과 사이가 가장 좋았던 [창빈 안씨]자식 중 

'덕흥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후계자로 지목하게 된다. (을축년의 하서)

 

명종 당시의 정치, 사회적인 상황을 점검해 보면 정치 세력들은 당파를 만들어 당쟁의 불씨를 

만들고 있었으며, 사회적으로는 민심이 흉흉하여 도적(임꺽정)이 활개를 치던 시기로 선조는 

어린 나이(16)에 왕위에 즉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나이에 걸맞지 않는 영민한 행동(유모의 

궁궐 출입 사건, 환관 감축 등)으로 세인들의 관심은 물론 칭송을 한 몸에 받게 된다

여기에 덧붙여 집권 초기 [영의정 이준경] 등과 같은 우직하고도 충직한 신하가 선조를 든든하게 

보좌하고 있었기 때문에 또 [문정왕후]와 어머니 [인순왕후]의 든든한 후원으로 비록 정통성이 

떨어지기는 하였지만 왕권의 연착륙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보여진다.

 

선조는 즉위 초기, 말수도 없고 너무 내성적이어서 신하들과 왕족의 우려를 자아냈으나 명종의 

'국상 예'가 끝나자 경연에 적극 참여하여 반론하고 질문을 하기 시작했는데 매우 논리 정연하고 

세밀했다고 한다. 이렇듯 선조는 즉위 당시부터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는 몇 가지(권한 이양 및 파천 등) 불비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그것은 

국가적 재난 대처에 대한 학습이 전혀 안 되어 일어난 사항이 아닌가 생각한다.

예로서 영국의 왕세자를 비롯한 비록 형식적이지만 왕의 제도가 살아 있는 국가들의 왕위 승계 

예정자들을 보면 대개가 군 출신이거나 해당 국가의 군사학 관련 학교를 졸업한 것을 알 수 

있는, 이는 국가 위기 시에 지도자로서의 그 진가를 발휘하는 연습을 평시에 교육시켜 놓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시에 많은 위기 시 '극복 연습' '대처 방법을 훈련'하는 

곳으로 적당한 분야가 군대 밖에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선조는 그런 연습 즉, 국난 위기 시 리더로서 대처하는 연습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 아마 당시의 왕위 계승자들 대부분이 그러했을 것으로 생각되기도 하지만 실제적으로 전 

국토가 전쟁터로 변한 당시에는 더 심했을 것이다 -

그러했기 때문에 자신의 왕세자가 적에게 인질로 잡히고, 선조 자신도 야음을 틈타 백성을 

속이고 북으로 북으로 도망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비록 혜안(명나라의 쇠퇴, 왜의 재침 등)을 가진 선조라 할지라도 최전선에서 

적군과 싸우고 있는 장수에게 감 놔라, 대추 놔라 일일이 지시하는 모습과 자신의 지시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고 전투 중인 장수에게 징계를 내리는 모습 또한 전쟁 중인 상태에서 왕위를 

이양하겠다고 난리를 피는 모습은 한 국가의 지도자인 왕이 아닌 옹졸하고, 치졸한 인간의 

전형이었다고 밖에는 달리 평가할 게 없을 정도로 정말 안타까움 그 자체였

하지만 더 안타까운 것은 자신의 잘못 혹은 오판으로 인한 벌어진 사항까지도 전부 신하들의 

잘못(파천 혹은 몽진)된 보필로 돌리는 모습은 왕으로서 절대 보여 주어서는 안 될 행동이었다고 

생각한다.

 

작품을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상식을 뒤집는 두 가지 사실이 있다.

 

하나는 여진 정벌의 영웅 [신립 장군]에 관한 것이다.

선조는 자식 중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자식으로 [신성군]을 꼽고 있었으며 나중에 신성군을 

[신립의 딸]과 혼인시켜 신립 장군과는 사돈관계였다. 임진왜란 당시 여진 정벌의 영웅이었던 

신립 장군이 강에 뛰어들어 자결하고 마는데, 이유는 자신의 판단 실수로 적에게 전략적 요충지

(충주)를 너무 쉽게 내 주어 자책감으로 탄금대에서 자결했다고 한다.

역사는 마치 신립을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인물처럼 묘사하고 있으나 그의 딸이 신성군

(인조의 큰 아버지)과 혼인을 했고, 그의 매부 구사맹은 인조의 생부인 정원군의 장인이었기 

때문에 후손들이 그렇게 밖에 기록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언급되고 있다.

 

두 번째는 임진왜란 당시 우리를 도운 [명나라의 원군]에 관한 부분이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는 쇄국 일변도의 정책을 펼쳐 덩치만 컸지 제국이라 할 것도 없을 정도로 

엉망인 나라였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따라서 명나라는 왜군과 싸울 의향도, 전략도 세우지 

않은 채 형제국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출병을 하였으나 왜군과의 싸움보다 협상을 통해 종전

(終戰)을 도모하려 했다고 한다

여기서 '기미론'이 나오는 데, '기미'란 명나라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관직을 내리고 일본의 

조공을 받아 들이는 조건으로 강화를 맺으려는 움직임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들은 과거 역사 시간에 마치 임진왜란 당시 우리를 적극 도와 준 나라로 명나라를 들고 

있으니 뭘 몰라도 한 참 모르는 이야기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조는 역사적으로 문제가 되어 오던 가장 큰 사건을 하나 해결한다.

바로 "종계변무(宗系辨誣)" 수정 사건이다. 종계변무란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고려 말의 

권신이었던 이인임의 아들이라고 '대명회전'에 잘못 기록된 사항을 수정하려는 숙원사업을 

말하는 것으로, 선조 이전부터 수 많은 왕들과 신하들이 중국 측과 접촉하여 그 조항의 변경을 

추진하려고 중국에서 온 사절이나, 중국에 있는 권력층들에게 줄을 대고 틈틈이 로비를 해 

왔다고 한다. 그러나 종계변무 수정에 관여하였던 인물들은 조선의 이런 곤란한 점을 노려 

뇌물만 챙겨 먹고, 수정해 주지도, 할 의사도 없이 속만 끓여 왔다고 한다.

선조는 이 조항에 대한 변경을 무작정 요구하지 말고 중국의 역학구도가 바뀌는 시점에 집중 

로비하여 이를 바로 잡자는 전략을 세워 이를 관철시켰다고 한다.

 

종계변무의 문구 수정 사항은 잘못된 서술에 대한 문구를 수정했다는 단순함을 뛰어 넘어 

조선 건국 이래 가장 골치 아픈 사건을 해결함으로써 조상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동시에 자신 

역시 '후궁의 손자'라는 태생적 콤플렉스를 제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FK고 굳은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상기의 내용은 작품에서 언급되고 있는 내용을 나름 정리해 놓은 것인데,

나는 작품을 나름대로 분석하여 선조를, 그 당시의 정치, 경제적 사항에 대해 의미를 두기 위해 

몇 가지 주제로 나누어 정리해 보았다.

 

1. 절대 권력자에게 맞서기 보다는 충성이 최선이다. 

선조(하성군)의 할머니 [창빈 안씨]는 명종비인 [문정왕후]의 절대 신임을 받았다고 한다.

, 빈의 자격으로 감히 왕의 총애를 독차지 하려 하지 않고 항시 온화한 성품으로 당시의 

실권자인 [문정왕후]의 총애를 받았다. 다시 말해 '알아서 기었다'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반대로 [창빈 안씨]보다 서열상 위인 [경빈 박씨]는 자신의 아들 '복성군'을 명종의 후임으로 

앉히고자 모사를 꾸미다 [문정왕후]에게 발각되어 아들과 함께 사약을 받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고 한다.

하여간 무조건 절대자에게는 맞서기 보다는 멍청스러울 정도로 충성을 다하는 그런 부하로 

인식되게 하는 게 상책이 아닌가 생각한다.

 

2. 좋은 스승이 많았다.

조선 국왕 27명 중에서 가장 스승 복이 많았던 인물이었다.

당대의 석학이었던 이황, 기대승, 이이, 노수신 등과 같이 성리학의 최고봉을 자랑하는 이들이 

선조에게 학문적 기초를 놓아 주었다. 실록 어디를 보아도 선조가 하성군 시절 누구로부터 어떤 

교육을 체계적으로 개인 교육을 받았는지 언급된 기록은 없다.

전통적으로 조선 왕실에서는 자칫 권력 투쟁에 휘말릴 수 있기 때문에 왕과 같은 서열에 있는 

종친들의 학문 연마는 금기시 하는 것을 관례화하였다고 하는데, 특히 명종은 어린 하성군에게 

왕실의 직접적인 후계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파격적으로 '왕손 사부'를 임명하여 교육을 받도록

했다고 한다.

권좌에 오른 직후 '이준경'은 통치자로서의 기본 소양을 함양시키고자 제일 먼저 '이황'선조의 

스승으로 삼도록 천거해 이를 관철시킨다. 이황을 스승으로 천거한 이유는 '현실과 이상이 적절

하게 조화를 이루며 당면한 국리민복과 부국강병의 과제를 해결해 가는 국왕의 모습'을 만들려 

했었기 때문으로 생각되어진다.

선조가 개인적으로도 존경하였던 이황은 '소학''땅에 떨어진 ''를 바로 세우는 출발점이 될 

수 있는 책'이라 하여 '소학'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다고 한다. 이후 선조의 스승으로 이황의 

추천을 받은 정지연과 그의 추천을 받은 인물 '이산해''이 이'가 있었다.

선조의 교육 방향을 놓고 [이준경][이 이]는 언쟁을 벌이게 되는데, 언쟁은 왕의 '경연장'으로

까지 번져 권력 투쟁의 장으로 바뀌고 만다. 또 하나 중대한 사항은 선조의 교과목이었다.

선조의 학습 과목 편성은 주로 '주자학' 일변도로 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결국 선조로 하여금 

주자학은 물론 중국에 대해 자발적인 굴종으로 나아가게 하는 폐단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3. 이준경과 같은 멸사 봉공의 자세를 견지한 충직한 신하가 있었다.

이준경은 '실록' 등에서 평소 중망(重望)이 있어 나라 사람들이 그를 믿고 의지 하였다고 기록될 

정도로 신망이 높았던 인물이었다.

이준경은 당시 그의 형 '이윤경'과 함께 '이봉(二鳳)'이란 애칭으로 불렸다. 그는 선조 등극 초기 

명종비인 [인순왕후]에게 '수렴첨정'을 권하여 승낙을 받아 이를 시행하게 하는 등 선조 초기 

정권 안정에 기틀을 다지는 데 큰 공헌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선조 5년 이준경이 세상을 떠나면서 선조에게 통치에 관한 유언을 하는데,

첫째 말하는 것을 준엄하게 하고 아랫사람을 대할 때 포용하고 공손히 대하고

둘째 신하가 진언할 경우 너그러이 포용하고 예우해 주고

셋째 군자와 소인을 분간하고

넷째 사사로운 붕당을 깨트릴 것

등을 강조한다. 이렇듯 그는 죽으면서까지도 선조의 통치 기반이 영속되기를 기원하였다.

 

역사가들은 "선조의 시대를 연 것은 이준경이지만 선조의 치세를 뒷받침해 준 인물들을

길러 낸 것은 이황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4. 선조는 심성이 유약한 반면, 변덕이 심하였다.

선조의 소심함과 자신감 결여는 두고두고 신하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데 이는 결국 선조에 

대한 불신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정통성을 지니지 못하고 출발한 선조는 당쟁이 극에 달했을 때에 별다른 조치 내지는 방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항시 미온적이고 수세적이었는데 선조가 그리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대안 부재'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조선 권력자들 간의 당파 싸움이 어느 정도 심했는지 전란으로 인한 몽진의 와중에서도 지속

되어 선조의 심신을 끝까지 괴롭혔다고 한다. 이는 정파간의 싸움이 치열해서 그런 현상이 

일어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근본적으로는 선조의 심성이 유약해서 나타난 현상으로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또 선조의 유약한 심성을 엿볼 수 있는 행동 중의 하나가 바로 아버지에 대한 처우 문제로 

자신의 아버지인 '덕흥 대원군'을 추존왕으로 추대하지 않은 것과 [광해군 시대]의 권력 투쟁 

구도가 광해군과 신성군의 대립으로 나타난 일차적 이유가 유약한 심성의 소유자 선조에게 

있다는 것이 사학자들의 공통된 평가라고 한다.

 

반면에 선조의 변덕을 가늠할 수 있는 사건이 몇 가지 있는데,

선조 24년 자신 스스로 공론화하던 [세자 책봉 문제]를 신하인 '정철'이 정식 공론화시키자

그 이야기를 꺼낸 정철을 심하게 질책을 하였고, 임진왜란 중에 '아홉 번'에 걸친 '양위 파동'은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사건이었다고 할 것이다.

더욱 한심스러운 것은 임진왜란 당시 백성들을 속여 가며 '파천'을 가장 먼저 이야기하고, 단행한 

사람은 바로 '선조 자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정 대신만 갖고 나무라고 있는데 왕으로서 또한 

지도자로서 보여서는 안 되는 행동을 보이고 있는 점은 한편의 희극이었다고 밖에는 설명이 

안 된다 할 것이다.

 

선조는 '후퇴하는 왜군을 추격해 섬멸하라'는 자신의 명령대신 방비를 하면서 전투를 벌이는 

것이 타당하다고 건의를 한 전투 현장의 장수 이순신 역시 극도로 불신하고, 미워한다.

더욱 압권인 것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선조는 '공신대감'을 선정하여 포상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책임을 '비변사''도원수'의 책임으로 하는 돌리는 모습을 보여 준 것은 변덕과 옹졸함의 

극치를 보여 준 행동이었다고 생각한다.

 

5. 국가 존망의 위기에 대비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임진왜란 당시 [우찬성 최 황]이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탄 듯 결정을 내리는 선조에게 

신하로서는 도가 지나친 지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선조는 마냥 소극적인 지시로 일관하고 있다.

 

"모든 것은 비변사에 내리면 비변사가 자세히 살핀다. 내가 친히 보더라도 무슨 일을 하겠는가."

 

선조의 이 답변은 위기에 대처하는 정신 자세가 어떠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 아닌가 

생각한다. 선조는 외세에 대비코자 이이로 하여금 군사를 양병토록 지시하는 등 나름 대비는 

하려고 하였으나 '유성룡' 등에 의한 반대로 이를 관철시키지 못한다. 왕으로서 국가의 위기 

사태가 직면하였다고 판단되면 어떠한 반대가 있더라도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자세가

있었어야 되지 않은가 생각한다.

또한 왜란이 한창일 때 '몽진'을 하면서 보여 준 선조의 행동은 전혀 국가 존망의 위기를 극복해 

보려는 의자가 전혀 없어 보이는 왕으로 비춰지고 있어 못 내 아쉬운 점으로 남고 있다.

위에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더욱 웃긴 것은 전쟁 중에 있는 상태에서 나라의 왕이라는 사람이 

'권력을 세자에게 이양'하겠다고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하는 것과 여차하면 명나라 쪽으로 도망갈

궁리를 하고 있는 점은 정말로 그 분이 조선의 왕이었는지가 의심될 정도였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6. 발전적인 논쟁과 함께 언로가 살아 있었다. 

허접하고도 저질스런 당파 싸움말고 고차원적인 논쟁이 선조 시대에 있었다.

그런 논쟁을 한 대표적인 두 축이 바로 '이준경''이 이'.

이준경은 이 이의 급진 개혁을 위험스럽게 보았고, 이 이는 이준경이 낡은 세력의 대표자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항시 부딪혔었다. 성격적으로도 이 이는 직선적이고, 논리적

이어서 일도양단(一刀兩斷)을 좋아 했다. 조선의 맹자라는 별명은 그래서 붙은 것이다.

이 이는 이준경이 죽자 그가 선조에게 올린 '유서장'을 논박하는 '논붕당소'를 올리게 되는데

이는 이준경이 유서장에 언급하며 우려한 붕당에 대한 우려를 쓸데 없는 것이라고 반박하기 위해

작성한 것이었으나 끝내는 이준경이 예언한 대로 붕당이 생성되어 갖은 음모를 펼치게 되자 

'이 이'는 어느 한 쪽에 서기 보다는 비교적 중립적 입장에서 붕당을 조정, 화해시키려는 데 많은 노력을 쏟았다고 한다.

 

선조 13년 충북 음죽에 사는 [전욱]이라는 한 진사가 선조에게 조정이 불협화음을 내고 있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리는 데 선조는 이를 묵살하지 않고 적극 수용해 진상 규명을 시키게 한 것만 

보아도 언로는 살아 있었다고 보여 진다.

 

영의정 이산해와 좌의장 유성룡 모두 동인이었다.

왜란 발발직전 조정은 이미 동인이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고 동인의 대일 전략은 기본적으로 

'선린 외교'였다. 이 이가 10만 양병설을 외칠 때 유성룡이 이를 적극 반대하고 나선 것은 자신들

가 달랐기 때문에 부정을 위한 부정을 한 것이 아니라 일단 '선린 외교를 통해 문제를 

풀기 위해 노력해 볼 것을 강력 주청하였기 때문이다.

또 당시의 언로가 살아 있었다는 증거는 위에서도 몇 번 언급되고 있지만 '수렴 첨정' 관한 

사항이다.

 

선조 등극 초기 명종비인 [인순왕후]에게 '수렴첨정'을 권하여 승낙을 받아내 이를 시행하는 

과정과 세월이 흘러 신하 '백인걸'이 인순왕후에게 섭정을 거둬 줄 것을 요구해 이를 관철시키는 

내용은 절대자와 신하간에 언로가 살아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 언로가 살아 있지 

않았다면 언감생심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게 나의 시각이다.

 

위에서 언급한 나의 시각이 '선조'를 전부 평가할 수 없다.

- 누가 인정해 주지도 않겠지만 -

분명한 하나의 사실은 선조는 참 지난한 삶을 살았다고 밖에는 달리 표현되지를 않는다.

왕위 계승, 임진란, 당파 싸움 등등등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을 것으로 생각은 되나, 준비 안 된 

왕권 계승으로 맘 고생이 상당히 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선조를 통해 진정한 리더의 표상을 다시 한 번 그려보는 계기가 되었다.

 

책으로부터 얻는 지식들

- 나라에 큰 공이 있을 때는 조(), 덕이 있는 인물이었을 때는 종()을 붙였다.

 

- 하성군이 즉위하면서 하성군의 아버지 덕흥군은 [대원군]이 된다

   조선 시대의 대원군 제도는 이때 생겨난 것이다. 다른 두 대원군은 철종의 아버지

   '전계 대원군', 고종의 친아버지인 '흥선 대원군'이 있다.

 

- 태강릉이라 불리는 태릉과 강릉은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 윤씨의 능과 그녀의 아들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의 능을 일컫는 말이다.,

 

- 선조의 측근 기대승은 전한(典翰)이란 벼슬에 있었는데, 이는 왕의 문서를 작성하는

   지체교의 일을 하면서 경연관도 겸임하는 중요 자리였다.

 

- 어진 이를 알아보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알고서 신임하는 것이 더 어렵다.(기대승)

 

- 이이가 선조에게 올린 [동호문답]은 임금의 학문하는 방법과 정치라는 도리를 문답체로

   정리한 것이다. 또 내성외왕을 이루라며 '성학집요'도 올렸다.

 

- '선묘보감'이란 실록 중에서 선조 시대의 통치와 관련된 기록들만 따로 정리한 일종의 

   다이제스트 실록을 말한다.

 

- 홍문관 관리들이 의기투합해서 중종에게 학문과 정치, 민생을 바로 잡을 것을 청하는

   유명한 상소는 '일강구목소'이다.

 

- 중국 명나라에서는 중기부터 양명학이 지식 사회는 물론 정치세계까지 석권하다시피

   했다. 주자학은 이론을 중시했고, 양명학은 실천 중시 학문이다.

 

- 조선에 양명학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인물이 남언경이며 실록에 근거해 보면 '주역'

   처음으로 공부한 국왕은 태종 이방원이다.

 

- 오활하다는 말은 '우활(迂闊)하다'에서 온 것으로 세심하지 못하고 부주의하며 덜렁거려

   일을 믿고 맡길 수 없다는 뜻이다.

 

- 태종이 처남 형제들을 몰살 시킨 이유는 왕권을 농락할 수 있는 붕당을 이루려는 조짐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조 때와 유사한 붕당의 조짐이 있었던 것은 성종 때부터이다.

 

- '지제교'란 국왕의 공식 문서를 짓는 일을 하는 직책.

 

- 성리학자들 사이에서 형서(邢恕)라는 인물은 배신의 대명사이다.

 

- 후궁의 서열

   (1) ---> 귀인(1) ---> 소의(2) ---> 숙의(2) ---> 소용(3

    ---> 숙용(3) ---> 소원(4) ---> 숙원(4)

- 조선 시대에는 5명의 추존된 왕이 있었는데

   1) 성종의 의경세자 -----------> 덕종

   2)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 -------> 원종

   3) 영조의 배다른 형제 ---------> 진종과 장조(사도세자)

   4) 헌종의 아버지 -------------> 익종

 

-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완성하자 선조는 관계자에게 포상을 하게 되는데,

   이 중에 동시 통역사안 [홍순언]이 들어가 있었는데 이를 통해 명나라 장수 '석성'과의

   관계를 돈독히 해 친한파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 우리는 임진왜란이라고 부르지만 일본은 '부로쿠의 역'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고 한다

   이는 분로쿠 천왕 시대에 일어난 전쟁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정유재란은 '게이초의 역

   이라고 부른다.

 

- 원균과 그의 아들 원사웅, 원연, 원전은 모두 임진왜란 당시 왜적에 맞서서 싸우다

   전부 전사했다.

 

- 왜놈의 새끼들이 부산에 첫발을 내디딘 지 67개월 10만에 전쟁이 종료됨.

 * (나의 생각) 일제 36년하고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합치고 가끔 노략질까지 합치면 거의

                   반세기를 우리를 못살게 군 놈들로 판단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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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 명인과 딴따라를 가르는 한 끗 - 사료 속 옛 음악꾼들에게 배우는 삶의 통찰
서신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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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권유도 8

 

작품은 우리 선조들 중에서 역사적으로 혹은 역사의 뒤안길에서 예술 분야에서 추앙받고

있는 분들의 입신 과정에 대한 이야기로 한 번쯤은 읽어 볼만한 내용이기는 하나,

초판 발행 이후 작자께서 많은 보완을 이룬 뒤 내 놓은 작품이라고 언급하고 있지만

전체적인 내용 구성에 아쉬움이 짙게 배어져 나온 작품이었다.

차라리 작품의 내용을 상징적인 분류로 나누지 말고 소재별로 즉 그림, 소리, 글 등으로

나누어 그 중에서 대표적 인물에 대한 심도 있는 내용의 접근이 있었으면 알찬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든다.

작가께 거짓을 이야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당시 명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약간의 스토리

텔링적 요소를 가감하여 묘사를 하였다면 읽는 독자들이 전체적인 맥락차원에서 해당

인물을 이해하는데 더 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어짜피 소개되고 있는 글이 설화적 요소가 상당히 가미되어 직접적인 증거를 찾을 수

없는 내용으로 되어 있어 약간은 허무맹랑한 이야기 즉, 바람이 멈추고, 폭포 소리를 뚫고

소리가 퍼져 나갔다는 등의 이야기로 묘사가 되고 있어 초반부에서 독자를 끌어 당기는

묘미가 작품 내내 진전되다 보니 그다지 몰입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따라서 나는 작품을 통해 저자의 의도와는 달리 명인들의 노력에 대한 이야기 보다는 나름

느꼈던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를 해 보고자 한다.

 

어쨌든 명인이란 몰입과 열정, 연습 그리고 자신이 몸 담은 분야에 대한 절절한 애정이

어우러져 그들을 명인 반열에 올려놓는 원동력이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작품에서 내가 받았던 몇 가지 감동적인 이야기

사례1 우륵과 충주 탄금대

신라에 의해 가야가 망하자 우륵은 가야금을 들고 진흥왕에게 투항한다. 진흥왕은 우륵을

충주의 탄금대(彈琴臺) 주변에 거처를 마련해 준다. , 금을 타는 누대라는 뜻의 탄금대가

그래서 생긴 지명이라고 한다.

사례2 백아와 종자기

백아는 자기의 음악을 이해해 준 유일한 친구 종자기가 죽음을 맞게 되자 자신의 거문고

줄을 끊고 다시는 연주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백아절현, 伯牙絶絃)

 

사례 3 술이부작의 관점에 따른 의도하지 않은 사대정신

공자는 자신의 저서를 술이부작 수준으로 스스로 폄하하자 이후 유학자들은 공자의 이런

기조를 유지한 채 성인의 말을 가장 가깝게 표현하거나 옛 것에 대해 가장 근사하게 모방

하는 것을 절대 가치로 생각했다.

이런 정신은 서예, 회화 및 음악 분야에서도 나타나 중국 명필의 서첩, 중국 화가의 화첩을

보고 흉내 내는 데 온힘을 기우렸던 것이다.

 

사례 4 형가와 고점리

형가라는 사람이 진시황을 살해하기 위해 자객으로 침입하지만 실패하자 그의 친구

고점리가 스스로 장님이 되어 진시황의 악공으로 들어가 진시황을 살해하려 하나 실패

하고 만다.

 

사례 5 음악인의 외길을 가기 위해

진나라 악사 '사광'은 귀를 예민하게 유지하기 위하여 스스로 눈을 찔러 장님이 된다.

 

사례 6. 수레 모는 기술

조나라 양왕은 수레 모는 기술이 부족했다. 그래서 수레 모는 특별 교육을 왕오기로부터

받는데, 경주를 할 때마다 매번 양왕이 지자 화를 내면서 자신에게 수레 모는 기술을

가르쳐 주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고 이야기하자 왕오기가 정색을 하고는

저는 모든 기술을 알려드렸습니다. 하지만 정작 왕께서 그것을 잘못 사용하셨습니다.

수레를 몰 때 제일 중요한 것은 말의 몸과 수레를 일치시켜 안정되게 하고, 수레 모는

자의 마음이 말과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결과입니다.

왕께서는 앞섰을 때나 뒤처져 있을 때나 마음이 모두 제게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왕께서 어떻게 말과 조화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뒤진 까닭입니다.”

진정한 경쟁은 오늘의 나어제의 나와 하는 것입니다. 가장 무서운 적은 내 안에

있습니다.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사람이 진정한 승자입니다.

 

 

작품으로부터 얻은 지식

 

- 서예 필체는 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 5가지가 있는데,

   전국시대부터 진나라 때까지 전서와 예서만 사용되었다. 한나라 때부터 실용적인 용도로

   만 사용되던 해서, 행서, 초서를 예술적인 경지로 끌어 올린 이가 왕희지다.

 

- 학문하는 방법은 다른 것이 없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길 가는 사람이라도 붙잡고 그에게

   물어보는 것이 최선이다.(박지원)

 

- 거안제미(擧案齊眉) 밥상을 눈썹 높이로 들어 공손히 남편 앞에 가지고 간다는 뜻

  

- 가야의 가실왕은 우륵에게 소리를 어찌 한 가지로만 할 수 있겠냐면서 중국 악기

   연주하던 우륵을 격려해서 만든 것이 가야금이다.

 

- '개수란 거지의 우두머리를 뜻하며 우리말로는 꼭지단이라고도 한다.

 

- 한단학보(邯鄲學步) 한단 사람들의 걸음걸이를 배움. 한단지보(邯鄲之步).

   () 나라의 젊은이[수릉여자壽陵餘子]가 한단에 가서 그 곳 사람들의 걸음걸이를

   배우다가 자기 나라에 돌아올 때, 한단 걸음걸이도 되지 않고 연의 본디 걸음도 잊어버려

   기어서 돌아오더라는 고사성어

 

- 쟁선공후(爭先恐後) 앞서기를 다투고 뒤처지는 것을 두려워 한다는 뜻

   , 앞자리만 다투며 싸우다가 좋지 못한 일을 당하고 마는 삶을 경계하는 말

  

- 벼슬아치들은 진심이든 진심이 아니든 자신의 욕심 없음과 세상과 맞지 않음을 말할 때

   늘 귀거래사(歸去來辭) ,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외쳤다

 

- 술이부작(述而不作) 공자의 성품은 겸손하여 자신의 저술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옛사람의 설을 저술했을 뿐 창작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옛것을 좋아하는 것만큼

    은 노팽(은나라의 현인)과 비교할 수 있다.

   , 자신의 저술이나 창작을 두고 저자가 겸손의 뜻으로 하는 말이다.

 

- 공휴일궤(功虧一簣) 아홉 길 산을 쌓는 데 한 삼태기의 흙이 모자라 공이 한꺼번에

   무너진다는 이야기로 조금만 더 하면 목적을 이룰 수 있는데 한 삼태기가 부족해서

   헛된 일이 되었다는 뜻

 

- 대교약졸(大巧若拙) 아주 교묘한 재주를 가진 사람은 그 재주를 자랑하지 아니하므로

   언뜻 보기에는 서투른 것 같음. 즉 겸손과 깨달음은 서로 통한다. 자만하지 않는 한결

   같음. 남을 인정할 줄 아는 넉넉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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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를 말하다 - 이덕일 역사평설
이덕일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2년 6월
평점 :
품절


추천권유도 9

 

작품은 나에게 생뚱맞게도 [하인리히 법칙]을 다시 한 번 생각하는 단초를 제공했다.

[하인리히 법칙]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주지하고 있는 바와 같이

1930년대 초 미국의 보험회사 직원이었던 H. W. 하인리히가 '사고나 재난은 발생 전에

여러 차례 징후가 나타나므로 이에 대한 분석과 준비를 통해 미리 예방할 수 있다'

징후에 관한 법칙으로 오늘날 산업재해 예방에 관한 가장 권위 있는 이론으로 널리 받아

들여지고 있는 법칙을 말하는데,

그는 수천 건의 사례 분석을 통해

'사고는 예측하지 못하는 한 순간에 갑자기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전에 여러 번 경고성

징후를 보낸다

고 주장하며 이를 [1 : 29 : 300의 법칙]으로 정립한 이론인데, 나는 작품 속에서 근대사의

여러 편린들의 애환과 뒷 이야기를 접하면서 그 모든 것이 518년 이씨 조선을 끝내 망국으

로 이끈 어떤 단초처럼 여기게 되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어떤 이유에서 주장하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조선 망국의 배경을 '서인'과 후예인

'노론'이 조선을 시대 착오적인 방향으로 이끈 단초로 1623인조 반정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역사를 깊이 있게 연구하거나 역사적 사실의 인과 관계에 대한 공부가 부족한

나로서는 작가의 그런 주장에 뭐라 반박할 근거도 마땅하지 않아 그저 답답할 따름으로

저자의 주장을 그냥 받아 들이기로 했다.

 

그렇다면 여타의 다른 단초들은 무엇일까?

나는 과거에 독서일기를 작성하며 주장을 했지만 조선 망국의 원인에 대해 어떤 변명이나

누구를 원망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작품을 읽는 내내 그래도 누군가 역사적

단초를 제공한 '인물'이나 '사건'을 들어 보라고 묻는다면 여러 작품을 통해 내가 느낀

점은 바로 멀리는 '송시열과 그 일파' 및 '고종'일 것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 작품의 주제가 근대이기 때문에 송시열과 관련된 이야기는 배제하겠다 - 

 

제일 첫 번째 이유는 '아버지 대원군에 대한 반발심'에 기인한 것으로서 저자도 주장하고

있지만 고종은 아버지인 대원군에 대한 이유 없는 반발심으로 어떤 사안이 벌어지면 깊이

있는 성찰대신 아버지가 추진했던 모든 것을 반대로만 이끌려 했었다는 점이다.

특히 작품을 통해 처음 확인한 사항으로 작품 61쪽을 보면, 고종의 명으로 '신헌'이라는

인물이 주도가 되어 일본과 '한일 수호조규'를 체결하는데, 이에 대한 체결 과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수호 조약의 체결 과정 속에 담긴 배경이 [하인리히 법칙]에서 이야기하는

큰 사건의 또 다른 단초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1876년 고종은 격렬한 반발이 예상됐던 것과는 달리 개방에 적극적이었다. 고종은 대원군

의 모든 정책을 뒤집는 것을 정책의 대강으로 잡았고, 일본이 내미는 13개 조약문에 대한

세밀한 검토도 없이 무관 출신인 신헌에게 전권을 위임한다. 신헌은 국가적인 중차대한

사건에 대한 전권을 사양하며 세부지침을 고종에게 요구하였으나 고종은 이를 거부한다.

따라서 신조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숙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한일 수호 조약'이 체결

되는데 조약은 일본의 안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를 신호탄으로 한반도의 일본 병합이 이루어졌다고 저자는 주장하고 있다.

두 번째 이유는 [하인리히 법칙]의 직접적인 단초가 되는 것은 '고종의 성향'에 기인한

것으로 고종을 한마디로 '정확한 심중'을 파악 할 수 없는 대표적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고종의 대표적인 이중적 성향이 바로 나라 잃은 백성들이 독립 운동을 펼치자 이를 적극

지지하면서, 뒤로는 관료들에게는 독립운동 진압 명령과 함께 해당 부대를 격려하는 등의

이중 플레이를 하고 있었으며, 망국으로 이끈 '을사오적'을 처단해 줄 것을 요청하며 애국

충신들이 줄줄이 자결하자 그 후손들에게 '충신'이라며 각종 휘호와 상을 내리면서 한편,

을사오적들에게 난세에 훌륭한 일들을 수행하였다고 ''을 내리는 이중적인 통치 행태를

보이고 있는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 이런 이중적 통치 스타일이 [하인리히 법칙]의 최종 결과론적인 사건인 '조선 병합'

원인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작품에 나타난 사건을 통해 과거에 일어났던 우리 민족의 치욕적인 역사적 사실 속에

숨겨진 [하인리히 법칙]에 부응하는 단초들에 대해 살펴 보았다면,

작금의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 속에서 또 다른 [하인리히 법칙]의 원리에 적용

당할 사건의 단초는 없는지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의 우리 사회를 돌아보자. 장난이 아니다.

[하인리히 법칙]을 아는지, 모르고 있는지 아니면 알고 있는데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다.

눈만 뜨고 정치인들이 만나기만 하면 ‘4대강 다툼’, ‘강정마을 해군 기지 설치 반대’,

툭하면 거리로 산으로, 들로 나가서 '산 자여 따르라'를 목 쉬게 터져 부르지를 않나,

사사건건 화제의 일만 터졌다 하면 시위하시는 분들에게 힘을 주시고자 나서시는 신부님,

목사님, 수녀님, 스님들, 대를 이은 음서제도를 꿈꾸는 공기업의 자녀 특채 의혹들, 무더위

속에 절전을 감수하게 한 일부 몰지각한 공기업 직원들의 행태, 고위층 고매하신 분들의

성접대 사건, 역사 교과서가 왜곡 되었다고 연일 난리를 치고 계시는 고매한 학자님들,

철거 업체로부터 돈을 받고 골프 치시다 잡히시는 분, 우리의 멀쩡한 자식 40여명이 몰살

당했는데 원인은 좌초에 의한 폭발이라고 우기시는 분들, 그저 장난으로 이야기한 것을

갖고 '반란죄'로 몰아가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 우기시는 어느 여전사분과 국민을 대표

하라고 뽑아 놨더니 위대한 지도자 동지를 결사 옹위해 보자는 색깔이 불분명한 집단들,

슈퍼 갑의 횡포와 비정규직의 자살이니 하루도 빠짐 없이 언론을 장식하고 있음에도 모든

이런 사건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시는 위정자가 득실거리는 지구상에서 그 어느 곳보다

가장 찝찝하고 개운치 않은 사건이 연일 터지는 그런 나라이다.

이 모든 사건이 끝 모를 방향으로 모든 사건들이 달려가고 있지만 어느 하나 나서서

진정은커녕 오늘도 거리로 나서서 천막 안에서 농성을 되풀이 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은

또 다른 결과물을 도출하려는 [하인리히 법칙]의 또 다른 단초가 아닐까?

무엇을 하자는 이야기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이를 말렸다가는 너도 '같은 놈'이라고 눈에 쌍심지를 키고 덤벼드는 게 일상화 된 우리의

현실을 바라 보면서 사회의 구성원이자 어느 정도 책임을 부여 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나로서는 해 볼만한 게 별로 없다.

일본의 수상이라는 대동아 전쟁 전범의 외손주라는 색히나 그 나라의 도지사가 위안부

문제, 핵 오염 물질 방출 문제 등에 대해 헛지랄, 헛소리를 해도 아무 소리도 못하고

오히려 그들보다는 모든 문제는 '다카키 마사오' 자식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난리를 치는

나라인데 어느 누가 무서워하겠는가?

나는 작품을 이렇게 해석하고 싶다.

한일 합방을 기점으로 앞에 나타났던 여러 불쾌한 사건은 '한일 합방'이라는 정점으로

치닫는 증상들이었고, 그 이후에 벌어진 내용을 언급하고 있는 사항은 '한일 합방'

버금가는 새로운 [하인리히 법칙]의 또 다른 단초가 생성되고 있는 사항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진정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미래를 걱정하는 지도자 집단이라면 과거의 잘 못을 바로 잡는

문제도 중요하겠지만 지금 닥쳐온 문제, 펼쳐질 문제에 대해 국민의 뜻을 모아 발전적인

방향으로 대처해 보겠다고 발 벗고 나서는 위정자 한 분이라도 보았으면 소원이 없겠다.

작품 속에서 언급된 [하인리히 법칙]의 여러 단초들

 

[고종의 오판]

 

- 러일전쟁은 190428일 일본이 요동반도 남단의 여순항을 기습 공격해 일어난

  전쟁으로 인천 앞바다에 있던 러시아의 '바라크함' '코리예츠함'을 격침시킨 그 다음날

  정식 선전 포고를 했다.

 

- 212일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는 한국 영토의 무제한 징발권을 명시한 '한일

   의정서'를 이지용(외부대신 서리 및 육군참장)과 함께 고종에게 강요함.

 

- 고종은 러시아의 전력을 믿고 러시아의 승리를 점쳤으나 일본은 '아카시 모토지로'라는

  인물의 첩보 공작으로 러시아 내부를 분열시켜 불리한 전세임에도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아카시는 스위스로 망명해 있던 '레닌'에게도 접근하여 19051월 러시아 혁명의 도화

  선이 된 '피의 일요일 사건'에도 깊이 간여하였다고 한다. 당시 이 모든 활동에 소요되는

  자금을 군부에 요구해 얻어 냈는데 작전금은 당시 100만엔으로 현재의 화폐 가치로

  400억엔(54,000억원)정도였다고 한다.

 

[을사늑약과 고종의 이중 행보]

 

- 러일전쟁 직후 고종은 이승만을 미국에 밀사로 파견하지만 이미 일본으로 마음이 돌아선

  주미 공사 김윤정의 비협조와 미국(가쓰라-태프트 밀약)과 영국(영일 동맹)으로부터

  '한국에 대한 일본의 정치, 경제적 이익을 승인'받았기 때문에 이승만의 활동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포츠머스 강화 조약'을 주도한 루스벨트는 '노벨 평화상'을 받는다.

- 1905년 이토 히로부미가 방한 직전 송병준이 주축이 된 '일진회 선언'을 발표하는 데,

  '한국이 부강해졌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까지'라는 단서를 달아 '을사늑약'을 체결해

  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넘겨준다.

  조약 체결의 주역은 외부대신 박제순,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으로 소위 '을사 오적이 이들이다.

      

[고종의 이중적 행보의 여러 증거들]

 

을사오적에 대한 처단을 요구하는 상소와 자결자들이 속출하자 고종은 이들에게 시호와

    훈장을 내리는 동시에 을사오적들에게도 힘을 합쳐 국사를 잘 돌보라고 격려를 하는 등

    이중적 태도를 보인다.

 

고종의 통치의 한 특징이 '밀지 정치'인데 의병은 고종이 몰래 내린 밀지에 따라

     거병하고, 이를 진압하는 부대는 고종의 공개된 명령에 따라 진압에 나셨다고 한다.

 

헤이그 밀서 사건으로 통감 이토가 고종에게 책임을 묻자, 고종은 '짐은 그 사건과

    아무 관계도 없고 모두 헤이그에 있는 자들이 밀서를 위조한 것'이라 주장했다고 한다.

 

[국제정세]

 

- 고종과 고종이 보낸 밀사들은 일본이 빼앗은 한국의 외교권을 되돌려 받는 것이 '평화'

   고 생각했지만 열강들이 충돌하지 않고 약소국을 차지하는 것이 그들이 생각하는

   평화였다.

 

[헤이그 밀사 파견에 따른 후유증]

 

- 송병준은 '일본으로 건너가 일황에게 사과하든지 대한문에 나가 주차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에게 항복하든지 선택'할 것을 강요

 

- 이완용은 칼을 빼 들고 고함을 지르며

   '폐하께서는 지금이 어떤 세상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협박했고 대신들도 물러날

    것을 종용했다고 함.

 

- 고종은 자신의 자리를 황태자에게 물려주고 대리청정을 하겠다는 의견을 피력했으나

   일제와 친일 내각이 억지로 '양위식'으로 둔갑시켜 고종과 황태자가 불참한 가운데 식을

   거행해 고종의 시대를 끝내게 한다  

 

[일본의 이토가 헌법을 만든 순간부터 시작된 아시아의 고통]

 

- '대일본 제국은 만세일계 천황이 통치한다'(1)'메이지 헌법 3조에서는 '천황은

   신성하며 침범할 수 없다'는 조항과 훗날 아시아인들에 커다란 고통을 안겨 주는 빌미를

   제공하는 단초가 된 제12조의 '천황은 육, 해군의 편제 및 상비군의 숫자를 결정한다'

   조항은 군부가 내각에서 통제권을 벗어나 천황에게만 소속된다는 통수권 개념으로

   침략전쟁을 일으키는 빌미가 된다.

 

[이토 히로부미의 추도식과 고종]

 

- 이토 히로부미 장례식에 내각 대신들의 강권에 못 이겨 고종은 조문한다.

 

[우리 영토의 확정]

 

- 간도는 현재의 중국 길림, 요령성 일대의 '서간도'와 두만강 북부 '북간도'의 통칭으로

   따라서 서간도를 평안북도에, ‘동간도(북간도)’를 함경도에 편입시키고 관리를 임명해

   간도에 상주시켰고, 현지의 백성들조차도 대한제국에 세금을 납부하였다.

 

- 일제는 190994일 북경에서 '간도에 관한 청일협정'을 맺어 남만주 철도 부설권을

   얻는 대신 간도를 청나라에 넘겨 주었다.

 

[대표적인 친일파의 발언들]

 

- '혈의 누'의 작가 이인직은

   ⦁ 역사적 사실에서 보면 일한병합이라는 것은 결국 종주국이었던 중국으로부터

        일본으로 옮기는 것

   ⦁ 조선 국민은 대일본제국의 국민으로서 그 위치를 향상시키는 일이다.

  라는 망발의 극치를 했다고 한다 ---> 이 색히 작품을 괜히 봤다

 

[매국 협상 30분만에 500년 조선을 팔다]

 

- 일본은 1909년 안중근 의사의 거사를 한일 합방을 앞당기는 계기로 설명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이미 이토가 그 해 4월 총리대신 가쓰라, 외무대신 고무라와 3자 회합을 통해

   한국 병합을 찬성했고, 일본 각의는 7월 한국 병합에 관한 건을 통과시켰다.

 

[일본이 통치권을 빼앗은 직후 한 행위]

 

'토지 조사법'같은 법을 제정해 일제의 물적 수탈 기반을 만드는 일

     ---> 한반도 땅의 40%를 찬탈한다.

각종 고시 제정을 통한 민중의 반발을 누르는 일

은사금 지급을 통한 기득권층을 상대로 한 회유 정책

또한 일본 내각은 '시정방침'이라는 것을 발표, 한국에는 일본 헌법을 시행하지 않고

'대권'에 의한 통치 즉, 일왕의 자의에 의해 다스리도록 했다. 특히 일왕의 위임을 받은

조선 총독이 제령으로 직접 통치하는 지역이었는데 일왕의 칙령 제324호 제1조는

'조선에서 법률을 요하는 사항은 조선 총독의 명령으로 규정할 수 있다'로 명시,

이는 한국을 착취의 대상으로 바라보았다는 것이다.

또한 총독부의 '행정명령'을 어기면 재판 없이 구속되거나 벌금이 부과되고 심하면

'태형'까지 맞아야 했다. 일제는 '독립운동은 상놈들이나 하는 것'이라는 선전을 펼친

결과, 양반 사대부 출신으로 독립운동에 나선 인물이 그리 많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선각자들의 독립운동]

 

- 조선의 병합과 아울러 세상을 원망하던 양명학의 대가인 이건승과 이건방은 자결을

  택하는 대신 후학 양성에 힘을 쏟는다.

  , 교육으로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는 의식아래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인다. 뿐만 아니라

  정원하, 이상룡, 홍승헌, 이상설, 이회영, 이관직 선생 등이 민족의 미래를 위해 활동하신

  분들이다.  

 

[경학사의 태동과 그 의의]

 

- 조선인들의 자치와 독립운동을 위한 '경학사'라는 민간 조직을 만들었는데, 경학사는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공부하는 주경야독을 표방하였는데, 경학사는 대한민국이란

   민주공화정제의 뿌리가 되었다.

 

- 1911년 큰 흉작으로 경학사는 더 이상 유지가 어렵게 되었으며 1912년 새로운 한인 자치

  조직인 부민단이 신흥무관학교와 같이 새로이 조직된다.

      

[신흥군관학교]

 

-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원인 중 하나는 군사력의 열세이다.

   조선의 군사력은 1802년 노론의 영수인 영의정 심환지가 정조가 창설한 장용영이

   폐지되면서 결정타를 맞는다.

 

- 이회영 선생은 신흥군관학교 설립을 가장 먼저 앞장서 제창하신 분이다.

   이때 군사 교육 계획에 참여하신 분들이 김형선, 이장녕, 이관 등 세 분으로 신흥무관

   학교의 신()자는 신민회에서 떠온 것이고 흥()자는 다시 일어난다는 의미에서 교명을

   지은 것인데, 중국인들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최초엔 '신흥강습소'라는 이름으로 출발.

 

[경제적 수탈과 3.1운동]

 

- 일제가 실시한 조선 토지 사업의 가장 큰 문제는 수조권(收租權)을 무시한 데 있었다.

   세금을 거두는 권리인 수조권이 왕실 또는 국가기관에 있는 토지가 공전, 개인에게는

   '사전'이 있었는데 이를 무시하고 대다수의 토지를 국유지화하면서 이 소유가 궁극에는 

   조선총독부의 소유가 되면서 경제적 수탈이 더욱 심해졌다.

 

- 일부 친일 사대부와 모리배들이 마을의 공유지를 사유지라 신고를 하고 조선총독부는

   이를 식민통치의 근간으로 삼기 위해 특혜처럼 인정해 주는 일이 많아져 민족간의

   분열을 획책하는 부수적인 효과까지 노렸다.

 

- 토지 조사사업이 끝난 이듬해 전 민족적인 3.1운동이 일어난 것은 우연의 결과가 아님.

 

[민족사학의 말살과 회사령]

 

- 우리 사회의 문제 가운데 하나인 '사학법' 문제도 일제시대부터 태동된 문제를 그대로

   안고 있다. , 한국인들이 한국에 대한 지식을 많이 갖고 있으면 통치가 어렵다고 판단,

   일제는 교육시스템 및 허가 방법을 철저하게 장악해 1906'사립학교령'을 발표해

   한국인들이 신청한 1,217개교 가운데 42개교만 인가하고 1,175개는 퇴출시켰던 반면

   당시 조선에 들어와 있던 외국인이 설립한 종교 사학은 778개교 전부를 인가해 줌.

 

- 사학에 갈 수 없게 된 대부분의 학생들이 '서당'을 찾기 시작하자 일제는 다시 1918

   '서당규칙'을 공표해 서당도 통제하기 시작한다.

  

- 일제는 민족 자본이 형성되는 것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 '회사령'을 발표한다.

   1914년 회사령 발표 이후 국내에 설립된 회사수는 109개였는데, 자본금 규모는

   1,790만원 으로 일본인은 회사수가 68(지본금 919만원) 내국인 회사는 21(자본금

   178) 일본인과 합동으로 설립한 회사는 20개사(자본금 610만원) 수준이었다고 한다.

   이 역시 3.1운동을 촉발시킨 원인이 되기도 하는데 1920년에 폐지된다.

 

[쌀 소동과 3.1운동]

 

- 일본은 '영일동맹'을 무기 삼아 유럽 전선에 직접 참전하지도 않고 막대한 이익을 본

  수혜국이 된다. 일본은 19148월 독일에 선전 포고하면서 독일 조차지였던 중국

  산둥반도의 교주만을 점령하고 청도를 차지한다.

  이를 계기로 '채무국'이었던 일본은 '채권국'으로 탈바꿈하게 됨과 동시에 농업 국가에서

  공업국가로 탈바꿈하게 된다.

 

- 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로 바뀌면서 쌀 생산량이 감소하자 일본내 민심이 흉흉해지자

  이를 잠재우기 위해 조선 총독 데라우찌는 국내에서의 곡물 수탈에 더 혈안이 된다.

   

* 임시정부 이후의 사건에 대한 사항은 작금 우리 사회의 역사 인식에 관한 관점의

  다양화로 또 일부 '다름''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학자들이 많아 나마저 '이것이

  옳고, 저것은 틀리다'는 이야기로 새로운 불씨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 여기서는 자제하려

  한다.

  분명한 것은 역사는 우리의 또 다른 얼굴이라는 사실과 그 관점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성을 인정하는 수준에서 이야기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자신만의 논리와

  주장을 이야기하는 무리가 많아 개인적으로 좀 더 많은 연구가 있어야 할 것으로 판단돼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기타 지식]

 

- 세종실록 30(1448) 대군은 60, 제군 및 공주는 50, 2품 이상은 40, 3이하는

   30칸으로 주택 규모를 법제화하였다.  

 

- 전통 사대부 출신인 홍양호는 일본에 가는 통신사 일행에게 벗나무 묘목을 부탁해

   서울 우이동을 벚꽃 경승지로 만든 인물이라고 한다.

 

* 본 독후감은 지난 2013년에 작성되어 싯점상 내용이 다를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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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이이 직간
이이 지음, 오세진 옮김 / 홍익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추천권유도 9

 

조직과 군주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용기가 없다면 공직을 맡지마라

 

작품은 율곡 이이가 어린 제왕(선조 임금)에게 군주로서의 기본자세에 대해 제언하고 있는

두 개의 작품 즉, <동호문답(東湖問答)><만언봉사(萬言封事)>의 내용에 대해 풀이한

내용이다.

알고 있는 바와같이 동호문답은 중국과 조선의 역대 임금과 신하, 그들이 겪은 정치적

성공과 실패의 예를 살펴보고, 당대 정치 제도의 폐단과 개선방향을 논하는 내용이며

만언봉사는 기이한 자연 현상이 일어나자 선조가 제언을 구하는 교서를 내린 데 대해

율곡이 올린 상소로 동호문답에 비해 제도의 폐단이 상세히 언급되면서 대안도 더

구체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특징이 있다.(소새글 작품에서 일부 발췌)

따라서 본 작품 중 특정 부분을 발췌하여 이를 집중적으로 논하거나 율곡 선생이 주장한

내용에 대해 그 깊이를 논하는 것은 역사학자나 사학자들이 할 몫이고 평범한 범부인 내가

할 소임은 읽고 느낀 점에 대해 개인적인 의견을 피력하는 수준에서 작품에 대한 소회를 정리하는 것이 바른 자세가 아닌가 생각한다.

- 한가지 분명한 것은 동호문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전에 대한 해박한 사전

  지식이 있지 않고는 쉽게 이해하기가 어렵다 -

아무튼 상기 두 문건은 율곡의 정치 개혁론이 요약적으로 담겨 있는 귀중한 자료로 조선

후기의 경세 사상가들은 이를 자신들의 사상적 자원으로 활용했다 한다.

 

작품 내용에 들어가기에 앞서 저자는 작품 서두에 본 작품을 통해 오늘날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 상황과 비교해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1) 정치 개혁에 시기를 탓하지 마라

   2) 정치가들은 무사안일에 젖어 나라를 개선하려 노력하지 않고 있다

   3) 정치가들이 몸을 사리며 눈치만 보고 자신의 견해를 개진하려 않고 있다

   4) 인재를 힘들게 뽑아 놓고도 전폭적으로 신뢰를 하지 않고 있다

   5) 관료집단의 무능력과 부패 문제가 심각하다

   6) 최소한의 생계가 해결된 다음, 도덕적인 시민과 윤리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다

   7) 좋은 정치란 부모가 자신을 돌보듯이 하는 정치다

   8) 통치 지도자의 엄정함은 공정함에서 나온다

   9) 과거사를 청산하는 것이 좋은 정치의 시작이다

  10) 교사의 처우개선과 교사직에 대한 인식 개선이 이루어져야 양질의 교육이 가능하다

  11) 지도자는 측근은 경계하고 올곧은 관료를 가까이 해야 한다

  12) 간신을 경계하라

  13) 공직을 파고 사는 행위를 근절해야 한다

  14) 정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지 제도로 하는 것이 아니다

  15) 정치인은 언제나 비방을 받는다. 옳은 일이라면 소신을 가지고 비방에 흔들리자 마라

 

등을 제시하고 있는데, 구구절절 우리의 가슴을 찌르는 내용이 아닌가 생각한다.

저자의 이런 주장은 작품 전체를 집필하면서 저자 나름대로의 소회를 적은 것으로 나는

이해하고자 한다.

분명하게 드는 생각은 오늘날과 같이 정치, 경제적으로 혼돈과 혼란의 깊이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작금, 우리에게 사회의 변신과 개혁을 위해,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해

율곡 선생만큼 혼신의 힘을 다해 변화를 외칠 수 있는 지도자가 절실히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하지만 어디를 둘러보아도 우리의 위정자들은 한심한 계파 싸움과 당리당략의 울타리

안에서 영역 싸움만을 하고 있는 모습이 한심스러울 뿐이다

[대통령에게 욕을 퍼붓는다고 생각할만큼 직언을 할 용기가 없다면 그 자리에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 비난받지 않는다면 많을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모든 사람

 을 만족시킬 수 는 없다]

이 이야기는 미국의 백악관 비서실장과 두 번의 국방부 장관을 역임한 럼즈펠드

이야기인데, 이 시대 이 땅에서 이런 용기를 갖고 우리의 지도자를 보필하고 있는 인물이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든 독서의 시간이었다.

 

[동호문답(東湖問答)]

- 군주의 명철함은 바른 견해를 가졌느냐 아니냐에 달린 것이지 총명한지 아닌지의

   문제는 아니다.

- 큰일을 할 임금은 존경하고 신임하는 신하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 지위에 걸맞는 임금과 재상이 있으면 그런 때가 곧 이상적인 통치가 실현될 수 있는

   시대이다.

- 나라가 잘 다스려지거나 그렇지 않음은 사람에게 달려 있지 에 달려 있는 게 아니다.

   ‘라는 것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 간사한 신하를 변별해내는 방법에는 이치를 궁구하는 것(窮理)보다 좋은 것이 없고

   어진 신하를 알아보는 방법에는 공정한 마음(公心)’을 갖는 것보다 좋은 수가 없다

   이치를 궁구하는 것과 공정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은 모두 욕망을 적게 하는 것(寡慾)’

   에서 시작한다.

- 형벌은 후손에게 미치지 않게 하고 포상은 후세에 미치도록 하라

- 백성을 다스리는 방도에 궁함이 있으면 성왕의 법제라도 고쳐야 한다

 

[만언봉사(萬言封事)]

- 사람이 성실함이 없으면 어떤 일도 안 된다(자사, 子思)

- 지극한 성실로 임하는데도 다른 사람을 감동시키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맹자, 孟子)

- 잘 다스려지는 세상에서는 덕을 높은 가치로 여기고, 어지러운 세상에서는 말을 높은

   가치로 여긴다(소옹, 邵雍)

- 임금의 자기수양 중 성학을 열심히 배워 성의와 정심의 효과를 최대한 끌어낸다것은

   큰 뜻을 세웠다고 해도 반드시 배움으로 그것을 충실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 후에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안과 밖이 서로 의존하고 도와서 품은 큰 뜻에 실제가

   위배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학문하는 방법은 성인의 가르침 속에 주어져 있는 데 요약

   하면 크게 세 가지로 궁리(窮理, 이치를 깊이 탐구하는 것)‘, ’거경(居敬, 경건함에 머무

   는 것)‘, ’역행(力行, 도덕 원칙을 힘써 실천하는 것)입니다.

   궁리는 반드시 독서를 통해 밝게 이해하고 옛 역사를 조사해 검증하는 것이며

   거경 은 마음을 다잡을 때는 반드시 경계하고 조심하며 두려워하는 태도를 가져야 하며,

   ‘역행 은 끊임없이 힘쓰며 밤낮으로 게으르게 행동하지 않는 것이다

- 정치 지도자는 엄정해질 필요가 있는데, 그 엄정함은 외적인 모습보다는 공정함, 명료한

   상황 판단에서 나온다.

- 임금(지도자)은 엄한 것인지 아닌지를 걱정하지 말고 공정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걱정

   하여야 합니다. 공정하면 사리가 분명하게 되고, 사리가 분명하게 이해되면 엄함이

   그 속에 있다.

- 조선시대에도 최고 통치자의 비자금과 그것을 관리하는 관원이 있었는데, 비자금은

   내수사(內需司)’라는 국가기관에서 관리했다

    내수사는 하나의 관아이지만 관리인이 조정 신료가 아닌 환관으로 구성되었고,

    내수사에 관한 공무는 승정원을 거치지 않고 환관이 임금에게 직계하는 형태로 운영

    되었다. 내수사 노비는 왕실이 소유한 농장을 경작하거나 공물을 납부하는 일을 했는데

    그들은 상전이 왕실이라는 점에서 일반 공노비나 사노비보다 실제적으로 높은 지위와

    권한을 누렸다. 특히 내수 혁파론의 주된 내용은 내수사의 고리대 운영에 관한

    것이었다.

    '환관'의 주요 업무는 궁궐의 음식을 감독하거나 주방, , , 왕실의 농토, 내수사를

    관리하거나 창고나 문을 지키고 왕명을 출납하는 일 등이었는데 그 중 왕명의 출납을

    맡은 환관을 승전색(承傳色)이라 하였다. 환관은 님금의 비자금을 관리해줄 뿐만

    아니라 정치에 개입할 정도로 권력을 가질 수 있는 자리였기 때문에 조선 후기에는

    혁파의 대상이 되지만 내수사와 환관이 갖는 공통점이 임금의 사적인 영역인 관계로

    개혁의 어려움이 따랐다. 따라서 율곡은 가장 공적이어야 할 임금이 사적인 재물,

    사적인 하인을 갖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하였다.

 

작품을 덮으며 이 시대를 살고 있는 한 사람으로써 정치와 경제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상식적 사항을 사주하거나 행동을 하고 있는 인간들에 대해 지적하고,

질타하고 싶은 이야기가 어디 한 두 개이겠는가,

앞을 봐도 답답한 마음이요 뒤를 보아도 깜깜한 그런 절벽인 상황인데 말이다.

그런 내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지금 몸담고 있는 우리 회사와 조직을 위해

율곡 선생께서 피를 쏟는 심정으로 올린 내용을 근간으로 회사 발전에 도움이 되는 것을

발췌해 이를 응용하여 회사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일부 전개를 해 보았다.

그래서 그런지 과거 내가 근무했던 중소기업에는 외국인 근로자들이 20여명 있는데 그들

은 한결같이 나를 향해 외치는 말은 항상 고맙습니’, ‘감사합니다이다.

내가 그들에게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마음으로 다가갔고, 그들을 자국인과 동일

하게 대우해 주었을 뿐이고, 어렵고 힘든 일이 있으면 그들의 부모나 형제같이 행동하고

그들 입장에서 그들을 이해해 주었을 뿐이다.

그랬더니 품질의 안정화는 물론 생산성과 직원들간의 단합이 그 어느 때보다 돈돈해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계약이 만료되어 한국을 떠나게 된 외국인 근로자가 나를 찾아와 그들 전통 방식으로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날 때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었다.

그 직원이 떠나며 한국인 특히 나에 대한 인간적인 정과 함께 한국 사람이 참 좋다는 것을

확인하고 떠난다는 이야기를 할 때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엇이 올라왔음을 이야기

하고 싶다.

이 땅의 위정자들이여 제발 정신차리고 국민의 심정을 헤아리는 그런 정치를 하소서!!!

그것도 싫으면 나 정도만이라도 해 보시라!!!!!!

그럼 최소한 욕은 먹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내 생각이 틀렸나요???

 

작품을 읽으며 올바른 신하참 신하의 길에 대해 여러 문헌과 자료를 찾아 작품과

어울린다고 생각되는 내용 두 가지를 첨부해 본다.

중국 전한시대에 유향(劉向)’이라는 학자가 바른 신하와 나쁜 신하를 각각 여섯 가지로

구분한 육정육사(六正六邪)라는 지침이 있는데,

  

[바른 신하]

   - 앞일을 헤아려 군주에게 선정을 베풀도록 유도하는 성신(聖臣)

   - 좋은 계획을 진언하고 옳은 길로 가도록 보필하는 양신(良臣)

   - 어진 사람을 적극 추천하는 충신(忠臣)

   - 일을 잘 처리해 군주를 편안하게 하는 지신(智臣)

   - 원칙을 존중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는 정신(貞臣)

   - 잘못을 거침없이 지적하는 직신(直臣)

 

[나쁜 신하]

   - 녹을 탐하고 지위에 안주하는 구신(具伸)

   - 아첨을 일삼는 유신(諛臣)

   - 겉과 속이 달라 판단을 흐리게 하는 간신(奸臣)

   - 남을 참소해 분열을 일으키는 참신(讒臣)

   - 개인적 이익만 추구하는 적신(賊臣)

   - 군주의 혜안을 가려 나라를 망치는 망국신(亡國臣)

 

순자(荀子)신하의 길을 다섯 가지로 나누었는데,

   1) : 명령을 따르고 군주를 이롭게 한다. 현군 아래 현신이 있는 경우로 올바른

                지시를 올바르게 잘 따르니 매사 순조롭다.

   ​2) : 명령을 거스르며 군주를 이롭게 하는 것으로 무조건적 충성이 아니다.

   ​​3) : 명령을 따르는데 군주를 이롭게 하지 못하며 군주의 잘못을 눈 감는 것.

   ​4) : 명령을 거슬러 군주를 이롭지 못하게 한다.

   5) 국적國賊 : 군주의 명예나 치욕, 나라의 흥망에 관심없고 구차하게 영합해 녹봉이나

                       받는다.

 

   책으로부터 얻는 지식

 

- 동호(東湖)란 조선의 유망한 젊은 문신들이 왕으로부터 사가독서를 받아서 책을

   읽으며 학문을 정진하던 곳 

- 겸선(兼善) 모든 사람을 선하게 함

- () 벼슬의 유무와 상관없이 도학에 종사하는 사람

- 자수(自守) 행동이나 말을 스스로 조심하여 지킨다

- 우활(迂闊) 뜻이 지극히 높지만 현실의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 간담상조(肝膽相照) 서로 간과 쓸개를 꺼내 보일 정도로 숨기는 것이 없고 속 깊은

   이야기까지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교제를 말함

- 늠양(廩養) 관리에게 봉급을 주는 양속

- 하재(下齋) 성균관에 있던 학생 기숙사로 서재(西齋)라고도 함

- 나직법(羅織法) 없는 죄를 만들어 내어 무고한 자를 처벌하는 법

- ‘재이란 하늘이 내린 재앙이나 괴의한 일로써 천재지변과는 다르다.

   피전감선(避殿減膳)이란 임금이 재이를 당했을 때 근심하는 뜻으로 궁궐을 떠나

   더 누추한 곳에 거처하고 임금님의 밥상의 가지수를 줄이는 것

- 조등(刁蹬) 간계를 써서 공납 물품의 시세를 크게 올리는 것

- 채수(債帥) 뇌물을 주고 관직을 사서 장군이 된 사람

- 척간(擲姦) 부정이 있는지의 여부를 조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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