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를 말하다 - 이덕일 역사평설
이덕일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2년 6월
평점 :
품절


추천권유도 9

 

작품은 나에게 생뚱맞게도 [하인리히 법칙]을 다시 한 번 생각하는 단초를 제공했다.

[하인리히 법칙]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주지하고 있는 바와 같이

1930년대 초 미국의 보험회사 직원이었던 H. W. 하인리히가 '사고나 재난은 발생 전에

여러 차례 징후가 나타나므로 이에 대한 분석과 준비를 통해 미리 예방할 수 있다'

징후에 관한 법칙으로 오늘날 산업재해 예방에 관한 가장 권위 있는 이론으로 널리 받아

들여지고 있는 법칙을 말하는데,

그는 수천 건의 사례 분석을 통해

'사고는 예측하지 못하는 한 순간에 갑자기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전에 여러 번 경고성

징후를 보낸다

고 주장하며 이를 [1 : 29 : 300의 법칙]으로 정립한 이론인데, 나는 작품 속에서 근대사의

여러 편린들의 애환과 뒷 이야기를 접하면서 그 모든 것이 518년 이씨 조선을 끝내 망국으

로 이끈 어떤 단초처럼 여기게 되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어떤 이유에서 주장하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조선 망국의 배경을 '서인'과 후예인

'노론'이 조선을 시대 착오적인 방향으로 이끈 단초로 1623인조 반정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역사를 깊이 있게 연구하거나 역사적 사실의 인과 관계에 대한 공부가 부족한

나로서는 작가의 그런 주장에 뭐라 반박할 근거도 마땅하지 않아 그저 답답할 따름으로

저자의 주장을 그냥 받아 들이기로 했다.

 

그렇다면 여타의 다른 단초들은 무엇일까?

나는 과거에 독서일기를 작성하며 주장을 했지만 조선 망국의 원인에 대해 어떤 변명이나

누구를 원망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작품을 읽는 내내 그래도 누군가 역사적

단초를 제공한 '인물'이나 '사건'을 들어 보라고 묻는다면 여러 작품을 통해 내가 느낀

점은 바로 멀리는 '송시열과 그 일파' 및 '고종'일 것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 작품의 주제가 근대이기 때문에 송시열과 관련된 이야기는 배제하겠다 - 

 

제일 첫 번째 이유는 '아버지 대원군에 대한 반발심'에 기인한 것으로서 저자도 주장하고

있지만 고종은 아버지인 대원군에 대한 이유 없는 반발심으로 어떤 사안이 벌어지면 깊이

있는 성찰대신 아버지가 추진했던 모든 것을 반대로만 이끌려 했었다는 점이다.

특히 작품을 통해 처음 확인한 사항으로 작품 61쪽을 보면, 고종의 명으로 '신헌'이라는

인물이 주도가 되어 일본과 '한일 수호조규'를 체결하는데, 이에 대한 체결 과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수호 조약의 체결 과정 속에 담긴 배경이 [하인리히 법칙]에서 이야기하는

큰 사건의 또 다른 단초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1876년 고종은 격렬한 반발이 예상됐던 것과는 달리 개방에 적극적이었다. 고종은 대원군

의 모든 정책을 뒤집는 것을 정책의 대강으로 잡았고, 일본이 내미는 13개 조약문에 대한

세밀한 검토도 없이 무관 출신인 신헌에게 전권을 위임한다. 신헌은 국가적인 중차대한

사건에 대한 전권을 사양하며 세부지침을 고종에게 요구하였으나 고종은 이를 거부한다.

따라서 신조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숙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한일 수호 조약'이 체결

되는데 조약은 일본의 안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를 신호탄으로 한반도의 일본 병합이 이루어졌다고 저자는 주장하고 있다.

두 번째 이유는 [하인리히 법칙]의 직접적인 단초가 되는 것은 '고종의 성향'에 기인한

것으로 고종을 한마디로 '정확한 심중'을 파악 할 수 없는 대표적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고종의 대표적인 이중적 성향이 바로 나라 잃은 백성들이 독립 운동을 펼치자 이를 적극

지지하면서, 뒤로는 관료들에게는 독립운동 진압 명령과 함께 해당 부대를 격려하는 등의

이중 플레이를 하고 있었으며, 망국으로 이끈 '을사오적'을 처단해 줄 것을 요청하며 애국

충신들이 줄줄이 자결하자 그 후손들에게 '충신'이라며 각종 휘호와 상을 내리면서 한편,

을사오적들에게 난세에 훌륭한 일들을 수행하였다고 ''을 내리는 이중적인 통치 행태를

보이고 있는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 이런 이중적 통치 스타일이 [하인리히 법칙]의 최종 결과론적인 사건인 '조선 병합'

원인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작품에 나타난 사건을 통해 과거에 일어났던 우리 민족의 치욕적인 역사적 사실 속에

숨겨진 [하인리히 법칙]에 부응하는 단초들에 대해 살펴 보았다면,

작금의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 속에서 또 다른 [하인리히 법칙]의 원리에 적용

당할 사건의 단초는 없는지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의 우리 사회를 돌아보자. 장난이 아니다.

[하인리히 법칙]을 아는지, 모르고 있는지 아니면 알고 있는데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다.

눈만 뜨고 정치인들이 만나기만 하면 ‘4대강 다툼’, ‘강정마을 해군 기지 설치 반대’,

툭하면 거리로 산으로, 들로 나가서 '산 자여 따르라'를 목 쉬게 터져 부르지를 않나,

사사건건 화제의 일만 터졌다 하면 시위하시는 분들에게 힘을 주시고자 나서시는 신부님,

목사님, 수녀님, 스님들, 대를 이은 음서제도를 꿈꾸는 공기업의 자녀 특채 의혹들, 무더위

속에 절전을 감수하게 한 일부 몰지각한 공기업 직원들의 행태, 고위층 고매하신 분들의

성접대 사건, 역사 교과서가 왜곡 되었다고 연일 난리를 치고 계시는 고매한 학자님들,

철거 업체로부터 돈을 받고 골프 치시다 잡히시는 분, 우리의 멀쩡한 자식 40여명이 몰살

당했는데 원인은 좌초에 의한 폭발이라고 우기시는 분들, 그저 장난으로 이야기한 것을

갖고 '반란죄'로 몰아가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 우기시는 어느 여전사분과 국민을 대표

하라고 뽑아 놨더니 위대한 지도자 동지를 결사 옹위해 보자는 색깔이 불분명한 집단들,

슈퍼 갑의 횡포와 비정규직의 자살이니 하루도 빠짐 없이 언론을 장식하고 있음에도 모든

이런 사건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시는 위정자가 득실거리는 지구상에서 그 어느 곳보다

가장 찝찝하고 개운치 않은 사건이 연일 터지는 그런 나라이다.

이 모든 사건이 끝 모를 방향으로 모든 사건들이 달려가고 있지만 어느 하나 나서서

진정은커녕 오늘도 거리로 나서서 천막 안에서 농성을 되풀이 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은

또 다른 결과물을 도출하려는 [하인리히 법칙]의 또 다른 단초가 아닐까?

무엇을 하자는 이야기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이를 말렸다가는 너도 '같은 놈'이라고 눈에 쌍심지를 키고 덤벼드는 게 일상화 된 우리의

현실을 바라 보면서 사회의 구성원이자 어느 정도 책임을 부여 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나로서는 해 볼만한 게 별로 없다.

일본의 수상이라는 대동아 전쟁 전범의 외손주라는 색히나 그 나라의 도지사가 위안부

문제, 핵 오염 물질 방출 문제 등에 대해 헛지랄, 헛소리를 해도 아무 소리도 못하고

오히려 그들보다는 모든 문제는 '다카키 마사오' 자식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난리를 치는

나라인데 어느 누가 무서워하겠는가?

나는 작품을 이렇게 해석하고 싶다.

한일 합방을 기점으로 앞에 나타났던 여러 불쾌한 사건은 '한일 합방'이라는 정점으로

치닫는 증상들이었고, 그 이후에 벌어진 내용을 언급하고 있는 사항은 '한일 합방'

버금가는 새로운 [하인리히 법칙]의 또 다른 단초가 생성되고 있는 사항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진정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미래를 걱정하는 지도자 집단이라면 과거의 잘 못을 바로 잡는

문제도 중요하겠지만 지금 닥쳐온 문제, 펼쳐질 문제에 대해 국민의 뜻을 모아 발전적인

방향으로 대처해 보겠다고 발 벗고 나서는 위정자 한 분이라도 보았으면 소원이 없겠다.

작품 속에서 언급된 [하인리히 법칙]의 여러 단초들

 

[고종의 오판]

 

- 러일전쟁은 190428일 일본이 요동반도 남단의 여순항을 기습 공격해 일어난

  전쟁으로 인천 앞바다에 있던 러시아의 '바라크함' '코리예츠함'을 격침시킨 그 다음날

  정식 선전 포고를 했다.

 

- 212일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는 한국 영토의 무제한 징발권을 명시한 '한일

   의정서'를 이지용(외부대신 서리 및 육군참장)과 함께 고종에게 강요함.

 

- 고종은 러시아의 전력을 믿고 러시아의 승리를 점쳤으나 일본은 '아카시 모토지로'라는

  인물의 첩보 공작으로 러시아 내부를 분열시켜 불리한 전세임에도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아카시는 스위스로 망명해 있던 '레닌'에게도 접근하여 19051월 러시아 혁명의 도화

  선이 된 '피의 일요일 사건'에도 깊이 간여하였다고 한다. 당시 이 모든 활동에 소요되는

  자금을 군부에 요구해 얻어 냈는데 작전금은 당시 100만엔으로 현재의 화폐 가치로

  400억엔(54,000억원)정도였다고 한다.

 

[을사늑약과 고종의 이중 행보]

 

- 러일전쟁 직후 고종은 이승만을 미국에 밀사로 파견하지만 이미 일본으로 마음이 돌아선

  주미 공사 김윤정의 비협조와 미국(가쓰라-태프트 밀약)과 영국(영일 동맹)으로부터

  '한국에 대한 일본의 정치, 경제적 이익을 승인'받았기 때문에 이승만의 활동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포츠머스 강화 조약'을 주도한 루스벨트는 '노벨 평화상'을 받는다.

- 1905년 이토 히로부미가 방한 직전 송병준이 주축이 된 '일진회 선언'을 발표하는 데,

  '한국이 부강해졌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까지'라는 단서를 달아 '을사늑약'을 체결해

  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넘겨준다.

  조약 체결의 주역은 외부대신 박제순,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으로 소위 '을사 오적이 이들이다.

      

[고종의 이중적 행보의 여러 증거들]

 

을사오적에 대한 처단을 요구하는 상소와 자결자들이 속출하자 고종은 이들에게 시호와

    훈장을 내리는 동시에 을사오적들에게도 힘을 합쳐 국사를 잘 돌보라고 격려를 하는 등

    이중적 태도를 보인다.

 

고종의 통치의 한 특징이 '밀지 정치'인데 의병은 고종이 몰래 내린 밀지에 따라

     거병하고, 이를 진압하는 부대는 고종의 공개된 명령에 따라 진압에 나셨다고 한다.

 

헤이그 밀서 사건으로 통감 이토가 고종에게 책임을 묻자, 고종은 '짐은 그 사건과

    아무 관계도 없고 모두 헤이그에 있는 자들이 밀서를 위조한 것'이라 주장했다고 한다.

 

[국제정세]

 

- 고종과 고종이 보낸 밀사들은 일본이 빼앗은 한국의 외교권을 되돌려 받는 것이 '평화'

   고 생각했지만 열강들이 충돌하지 않고 약소국을 차지하는 것이 그들이 생각하는

   평화였다.

 

[헤이그 밀사 파견에 따른 후유증]

 

- 송병준은 '일본으로 건너가 일황에게 사과하든지 대한문에 나가 주차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에게 항복하든지 선택'할 것을 강요

 

- 이완용은 칼을 빼 들고 고함을 지르며

   '폐하께서는 지금이 어떤 세상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협박했고 대신들도 물러날

    것을 종용했다고 함.

 

- 고종은 자신의 자리를 황태자에게 물려주고 대리청정을 하겠다는 의견을 피력했으나

   일제와 친일 내각이 억지로 '양위식'으로 둔갑시켜 고종과 황태자가 불참한 가운데 식을

   거행해 고종의 시대를 끝내게 한다  

 

[일본의 이토가 헌법을 만든 순간부터 시작된 아시아의 고통]

 

- '대일본 제국은 만세일계 천황이 통치한다'(1)'메이지 헌법 3조에서는 '천황은

   신성하며 침범할 수 없다'는 조항과 훗날 아시아인들에 커다란 고통을 안겨 주는 빌미를

   제공하는 단초가 된 제12조의 '천황은 육, 해군의 편제 및 상비군의 숫자를 결정한다'

   조항은 군부가 내각에서 통제권을 벗어나 천황에게만 소속된다는 통수권 개념으로

   침략전쟁을 일으키는 빌미가 된다.

 

[이토 히로부미의 추도식과 고종]

 

- 이토 히로부미 장례식에 내각 대신들의 강권에 못 이겨 고종은 조문한다.

 

[우리 영토의 확정]

 

- 간도는 현재의 중국 길림, 요령성 일대의 '서간도'와 두만강 북부 '북간도'의 통칭으로

   따라서 서간도를 평안북도에, ‘동간도(북간도)’를 함경도에 편입시키고 관리를 임명해

   간도에 상주시켰고, 현지의 백성들조차도 대한제국에 세금을 납부하였다.

 

- 일제는 190994일 북경에서 '간도에 관한 청일협정'을 맺어 남만주 철도 부설권을

   얻는 대신 간도를 청나라에 넘겨 주었다.

 

[대표적인 친일파의 발언들]

 

- '혈의 누'의 작가 이인직은

   ⦁ 역사적 사실에서 보면 일한병합이라는 것은 결국 종주국이었던 중국으로부터

        일본으로 옮기는 것

   ⦁ 조선 국민은 대일본제국의 국민으로서 그 위치를 향상시키는 일이다.

  라는 망발의 극치를 했다고 한다 ---> 이 색히 작품을 괜히 봤다

 

[매국 협상 30분만에 500년 조선을 팔다]

 

- 일본은 1909년 안중근 의사의 거사를 한일 합방을 앞당기는 계기로 설명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이미 이토가 그 해 4월 총리대신 가쓰라, 외무대신 고무라와 3자 회합을 통해

   한국 병합을 찬성했고, 일본 각의는 7월 한국 병합에 관한 건을 통과시켰다.

 

[일본이 통치권을 빼앗은 직후 한 행위]

 

'토지 조사법'같은 법을 제정해 일제의 물적 수탈 기반을 만드는 일

     ---> 한반도 땅의 40%를 찬탈한다.

각종 고시 제정을 통한 민중의 반발을 누르는 일

은사금 지급을 통한 기득권층을 상대로 한 회유 정책

또한 일본 내각은 '시정방침'이라는 것을 발표, 한국에는 일본 헌법을 시행하지 않고

'대권'에 의한 통치 즉, 일왕의 자의에 의해 다스리도록 했다. 특히 일왕의 위임을 받은

조선 총독이 제령으로 직접 통치하는 지역이었는데 일왕의 칙령 제324호 제1조는

'조선에서 법률을 요하는 사항은 조선 총독의 명령으로 규정할 수 있다'로 명시,

이는 한국을 착취의 대상으로 바라보았다는 것이다.

또한 총독부의 '행정명령'을 어기면 재판 없이 구속되거나 벌금이 부과되고 심하면

'태형'까지 맞아야 했다. 일제는 '독립운동은 상놈들이나 하는 것'이라는 선전을 펼친

결과, 양반 사대부 출신으로 독립운동에 나선 인물이 그리 많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선각자들의 독립운동]

 

- 조선의 병합과 아울러 세상을 원망하던 양명학의 대가인 이건승과 이건방은 자결을

  택하는 대신 후학 양성에 힘을 쏟는다.

  , 교육으로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는 의식아래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인다. 뿐만 아니라

  정원하, 이상룡, 홍승헌, 이상설, 이회영, 이관직 선생 등이 민족의 미래를 위해 활동하신

  분들이다.  

 

[경학사의 태동과 그 의의]

 

- 조선인들의 자치와 독립운동을 위한 '경학사'라는 민간 조직을 만들었는데, 경학사는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공부하는 주경야독을 표방하였는데, 경학사는 대한민국이란

   민주공화정제의 뿌리가 되었다.

 

- 1911년 큰 흉작으로 경학사는 더 이상 유지가 어렵게 되었으며 1912년 새로운 한인 자치

  조직인 부민단이 신흥무관학교와 같이 새로이 조직된다.

      

[신흥군관학교]

 

-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원인 중 하나는 군사력의 열세이다.

   조선의 군사력은 1802년 노론의 영수인 영의정 심환지가 정조가 창설한 장용영이

   폐지되면서 결정타를 맞는다.

 

- 이회영 선생은 신흥군관학교 설립을 가장 먼저 앞장서 제창하신 분이다.

   이때 군사 교육 계획에 참여하신 분들이 김형선, 이장녕, 이관 등 세 분으로 신흥무관

   학교의 신()자는 신민회에서 떠온 것이고 흥()자는 다시 일어난다는 의미에서 교명을

   지은 것인데, 중국인들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최초엔 '신흥강습소'라는 이름으로 출발.

 

[경제적 수탈과 3.1운동]

 

- 일제가 실시한 조선 토지 사업의 가장 큰 문제는 수조권(收租權)을 무시한 데 있었다.

   세금을 거두는 권리인 수조권이 왕실 또는 국가기관에 있는 토지가 공전, 개인에게는

   '사전'이 있었는데 이를 무시하고 대다수의 토지를 국유지화하면서 이 소유가 궁극에는 

   조선총독부의 소유가 되면서 경제적 수탈이 더욱 심해졌다.

 

- 일부 친일 사대부와 모리배들이 마을의 공유지를 사유지라 신고를 하고 조선총독부는

   이를 식민통치의 근간으로 삼기 위해 특혜처럼 인정해 주는 일이 많아져 민족간의

   분열을 획책하는 부수적인 효과까지 노렸다.

 

- 토지 조사사업이 끝난 이듬해 전 민족적인 3.1운동이 일어난 것은 우연의 결과가 아님.

 

[민족사학의 말살과 회사령]

 

- 우리 사회의 문제 가운데 하나인 '사학법' 문제도 일제시대부터 태동된 문제를 그대로

   안고 있다. , 한국인들이 한국에 대한 지식을 많이 갖고 있으면 통치가 어렵다고 판단,

   일제는 교육시스템 및 허가 방법을 철저하게 장악해 1906'사립학교령'을 발표해

   한국인들이 신청한 1,217개교 가운데 42개교만 인가하고 1,175개는 퇴출시켰던 반면

   당시 조선에 들어와 있던 외국인이 설립한 종교 사학은 778개교 전부를 인가해 줌.

 

- 사학에 갈 수 없게 된 대부분의 학생들이 '서당'을 찾기 시작하자 일제는 다시 1918

   '서당규칙'을 공표해 서당도 통제하기 시작한다.

  

- 일제는 민족 자본이 형성되는 것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 '회사령'을 발표한다.

   1914년 회사령 발표 이후 국내에 설립된 회사수는 109개였는데, 자본금 규모는

   1,790만원 으로 일본인은 회사수가 68(지본금 919만원) 내국인 회사는 21(자본금

   178) 일본인과 합동으로 설립한 회사는 20개사(자본금 610만원) 수준이었다고 한다.

   이 역시 3.1운동을 촉발시킨 원인이 되기도 하는데 1920년에 폐지된다.

 

[쌀 소동과 3.1운동]

 

- 일본은 '영일동맹'을 무기 삼아 유럽 전선에 직접 참전하지도 않고 막대한 이익을 본

  수혜국이 된다. 일본은 19148월 독일에 선전 포고하면서 독일 조차지였던 중국

  산둥반도의 교주만을 점령하고 청도를 차지한다.

  이를 계기로 '채무국'이었던 일본은 '채권국'으로 탈바꿈하게 됨과 동시에 농업 국가에서

  공업국가로 탈바꿈하게 된다.

 

- 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로 바뀌면서 쌀 생산량이 감소하자 일본내 민심이 흉흉해지자

  이를 잠재우기 위해 조선 총독 데라우찌는 국내에서의 곡물 수탈에 더 혈안이 된다.

   

* 임시정부 이후의 사건에 대한 사항은 작금 우리 사회의 역사 인식에 관한 관점의

  다양화로 또 일부 '다름''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학자들이 많아 나마저 '이것이

  옳고, 저것은 틀리다'는 이야기로 새로운 불씨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 여기서는 자제하려

  한다.

  분명한 것은 역사는 우리의 또 다른 얼굴이라는 사실과 그 관점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성을 인정하는 수준에서 이야기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자신만의 논리와

  주장을 이야기하는 무리가 많아 개인적으로 좀 더 많은 연구가 있어야 할 것으로 판단돼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기타 지식]

 

- 세종실록 30(1448) 대군은 60, 제군 및 공주는 50, 2품 이상은 40, 3이하는

   30칸으로 주택 규모를 법제화하였다.  

 

- 전통 사대부 출신인 홍양호는 일본에 가는 통신사 일행에게 벗나무 묘목을 부탁해

   서울 우이동을 벚꽃 경승지로 만든 인물이라고 한다.

 

* 본 독후감은 지난 2013년에 작성되어 싯점상 내용이 다를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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