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잠깐 설웁다 문학동네 시인선 90
허은실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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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냥 좋아"라는 말이 시집에선 허용될 것만 같다.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좋다는 말 한마디로 충분하다 (때로는 어떻게 말할지 애매해서 쓰질 못하지만). 그러나 여느 때와 다르게 이렇듯 길게 써내리는 이유는 담고 싶은 문장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라고, 애써 핑계를 대본다.


 예전, 대학교 강의 시간에 여성적 글쓰기에 대해 잠깐 언급이 된 적이 있었다. 대표적인 작가도 이름만 붙여서 이야기되었다. 교양 수업이라서 깊게 들어가지 않았기에 그리 영향력 있게 다가오지 않았던 설명이었다. 이 시를 읽으면서 그때의 기억이 났다. 만약 지금이었다면 허은실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밀도 있는 여성의 말', 여성이 온몸으로 부딪쳐 살아온 생애가 실려있는 시집이다. 어쩌면 여성만이 쓸 수 있는 시집인 것 같기도 한데, 시인이 하고 싶던 말이 아주 꼭꼭 담겼다. 은은하면서도 고요하면서도, 강하게  흘러나오는 언어들이 마음에 쏙 박혀온다.


"소풍이라 말하려 했는데 / 슬픔이 와 있다 (12쪽, 저녁의 호명)"
"익숙하던 것들이 먼저 배반하지 / 그러므로 어느 날 / 밥 냄새를 견딜 수 없게 되는 것 / 너의 멜로디를 참을 수 없게 되는 것 (50쪽, 입덧)"


 이토록 슬픔이 진하게 느껴지는 것도 희한한 일이다. 요즘 부쩍 무던하게 넘기곤 했던 페이지가 느즈막이 넘어간다. 한숨이 쉬어진다. 구름에 손이 닿을 것 같은 언덕에서 붉은빛이 돋았다가 어느새 어둑어둑해지는 석양을 닮았다. 저녁의 붉은 노을. 가슴이 벅차오르는 듯, 가장 행복했던 기억과 어떤 불안한 기억과 장면이 동시에 떠오르는 순간들. '한 생애의 후루룩'이라는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인생의 초입에 있는 나는 일상에서 벗어나 이 시집을 읽었을 느낌을 상상하는데도 그게 무엇인지 알 것만 같다.


"후루룩 입천장이 데이는 시절 / 어둑신한 부엌에 서서 달그락거리는 / 한 생애의 / 후루룩, (70쪽, 후루룩 - 최승자 시인에게)"


 '다 자라지도 않았는데 늙어가고 있'는 우리는, 매일 똑같은 장면과 비슷한 소음을 듣는 우리는, 사소하고 익숙한 것들에 다치고 뒹구는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며 견디고 있을까. 구수하게 흘러나오는 추억과 눈물이 핑 도는 어린 시절의 냄새 같은 것들, 그때는 떨쳐내고 싶었던 기억들. 설웁다고 말하며, 최승자를 떠올리는 시인 허은실에게서 깊은 아픔을 보다가, 제목에 붙여진 '잠깐'이라는 말에 안심을 한다. 그래, 우리는 잠깐, 잠깐씩 슬퍼하며 하루를 살아내고 있다. 잠깐, 정도라면 충분히 괜찮다. 어쩌면 이 수식어는 시인이 건네준 찰나의 위로인 것 같기도 하다.


 


20쪽, 바람이 부네, 누가 이름을 부르네
입안 가득 손톱이 차올라 / 뱉어내고 비워지지 않네 / 문을 긁다 빠진 손톱들 / 더러는 얼굴에 붙어 떨어지지 않네
숲은 수런수런 소문을 기르네 / 바람은 뼈마디를 건너 / 몸속에 신전을 짓고 / 바람에선 쇠맛이 나
어찌 오셨는지요 아흐레 아침 / 손금이 아파요 / 누가 여기다 슬픔을 슬어놓고 갔나요 / 내 혀가 말을 꾸미고 있어요

36쪽, 목 없는 나날
타인을 견디는 것과 / 외로움을 견디는 일 / 어떤 것이 더 난해한가
다 자라지도 않았는데 늙어가고 있다 / 그러나 감상은 단지 기후 같은 것
완전히 절망하지도 / 온전히 희망하지도 / 미안하지만 나의 모자여 /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47쪽, 당신의 연안
나는 당산나무 벌어진 가지 속에 / 돌 하나를 몰래 끼워둡니다 / 당신이 나무를 올려다보며 천천히 한 바퀴를 더 돕니다 /공전은 서로의 둘레를 걸어주는 일




58쪽, 이마
타인의 손에 이마를 맡기고 있을 때 / 나는 조금 선량해지는 것 같아 / 너의 양쪽 손으로 이어진 / 이마와 이마의 아득한 뒤편을 / 나는 눈을 감고 걸어가보았다
이마의 크기가 / 손바닥의 크기와 비슷한 이유를 / 알 것 같았다




84쪽, 바라나시
대답이란 날카로운 물음표 / 아가미를 꿰는 낚싯바늘이어서
가닿지 못할 음역을 / 더듬어볼 뿐
슬픔이라는 타관을 떠돌다 우리는 / 미아가 되어 / 어린 염소를 껴안고 / 오 미아미아 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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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몬드 (양장) - 제10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손원평 지음 / 창비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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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소설은 머릿속에 아몬드처럼 생긴 '아미그달라' 혹은 '편도체'의 크기가 작아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쉽게 말하면 '감정 표현 불능증'을 갖고 있는 소년의 이야기였다. 그에겐 헤쳐나가야 할 것들이 무수히 많았다. 웃어야 할 때 웃지 않았고, 슬퍼해야 할 때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어디서든 튀어 보였다. 엄마는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방법을 끈질기게 가르쳤다. 주입식 교육이었다. 문제와 모범답안을 준비하고, 가끔씩 응용문제를 내밀었다. 윤재는 입이 닳도록 외우고 익혔지만, 세상은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두 눈 뜨고 볼 수 없어 살인을 저질렀다는 사람에게 동정론이 일정도로 팍팍한 세상이었다. 선천적으로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윤재만큼이나 공감에 불능한 인간들이 허다했다.

 

 온갖 부정적인 상황으로 둘러싸인 소설이었다. 그러나 그 속에 따뜻하게 빛나고 있는 것들을 발견했을 때, 마음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소년에게 감정은 없지만, 대신 소중한 존재들이 있었다. 어쩔 땐 눈물을 글썽이면서까지 힘들게 윤재를 교육했던 엄마, 뭐든지 감싸주었던 믿음직한 할멈,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들어주고 언제나 방향을 제시해주던 심 박사, 편견 없이 자신을 바라봐 준 도라, 표현하는 방법은 서툴렀지만 세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 곤이…… 이들이 없었다면 윤재의 삶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갔을까.

 

 결말을 맞이하고, 이어서 책의 뒤편에 실린 작가의 말과 인터넷에 올라온 인터뷰 등을 찾아 읽었다. 손원평 작가는 엄마가 되고 난 후, 아이를 바라보며 소통과 감정, 사랑에 대해서 생각하며 글을 썼다고 했다. "이런 아이라면 사랑할 수 있었을까"라는 상상으로 등장인물을 만들어냈다고도 했다. 작가의 고민은 희대의 살인자가 왜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는지의 고민으로 이어진듯하다. "구할 수 없는 인간이란 없다. 구하려는 노력을 그만두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그는 무슨 의미로 그렇게 썼을까. 도와 달라는 손짓이었을까, 아니면 깊은 원망이었을까.(128쪽)" 결국, 인간이 제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게 무엇이냐는 질문이었다. 작가는 무거운 질문에 대한 답을 읽기 쉽고 깔끔한 소설로 대신했다.

 

 언젠가 우리 엄마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포기라는 게 어딨어, 내 아이인데." 소위 문제아라고 불리던 청소년을 감당하지 못하는 부모를 보고 한 말이었다. 사랑, 혹은 희망, 때로는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이거나, 작은 관심으로도 표현되는 따뜻한 감정, 그리고 소통. 이 책이 왜 좋았는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39쪽,
침묵은 과연 금이었다. 대신 ‘고마워.‘와 ‘미안해.‘는 습관처럼 입에 달고 있어야 했다. 그 두 가지 말은 곤란한 많은 상황들을 넘겨 주는 마법의 단어였다. 여기까진 쉬웠다. 상대방이 내게 천 원을 내면 거스름돈을 이삼백 원 내 주는 것과 비슷했다.
어려운 건 내가 먼저 천 원을 내는 거였다. 그러니까, 뭔가를 원한다거나 하고 싶다거나 어떤 것을 좋다고 표현하는 일들. 그런 게 힘든 이유는, 여분의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내가 먼저 돈을 내야 하는데 나는 사고 싶은 것도 없고, 얼마를 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 잔잔한 호수에 억지로 파도를 치게 만드는 것처럼 버거웠다.

128쪽,
구할 수 없는 인간이란 없다. 구하려는 노력을 그만두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그는 무슨 의미로 그렇게 썼을까. 도와 달라는 손짓이었을까, 아니면 깊은 원망이었을까.
엄마와 할멈에게 칼을 휘두른 남자와 곤이는 P.J. 놀란 같은 타입이었을까. 아니면 P.J 놀란과 가까운 건 오히려 나였을까. 나는 세상을 조금 더 이해하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내겐 곤이가 필요했다.

162쪽,
몰랐던 감정들을 이해하게 되는 게 꼭 좋기만 한 일은 아니란다. 감정이란 건 참 얄궂은 거거든. 세상이 네가 알던 것과 완전히 달라 보일 거다. 너를 둘러싼 아주 작은 것들까지도 모두 날카로운 무기로 느껴질 수도 있고, 별거 아닌 표정이나 말이 가시처럼 아프게 다가오기도 하지. 길가의 돌멩이를 보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대신 상처받을 일도 없잖니. 사람들이 자신을 차고 있다는 것도 모르니까. 하지만 자신이 하루에도 수십 번 차이고 밟히고 굴러다니고 깨진다는 걸 ‘알게 되면‘, 돌멩이의 ‘기분‘은 어떨까.



245쪽,
멀면 먼 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외면하고,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공포와 두려움이 너무 크다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껴도 행동하지 않았고 공감한다면서 쉽게 잊었다.
내가 이해하는 한, 그건 진짜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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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와 빨강
편혜영 지음 / 창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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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편혜영 작가의 『선의 법칙』 (비교적 최근 소설이다)을 읽고 나서 나는 리뷰에 이렇게 썼다. "어딘가 텁텁한 맛은 있어도, 파국으로 치달아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정도로 어둡지는 않다." 잔잔한 느낌의 소설임에도 왠지 모를 꿉꿉함이 느껴졌었는데 그 꿉꿉함이 견딜만했던 모양이었다. 파국을 그리고 있음에도 살아간다는 느낌을 주어서 희망적이긴 했었다. 그러나 『재와 빨강』을 읽고 나자, 내가 만났던 책이 편혜영 소설의 전부가 아니며 한편으론 그의 새로운 시도였고, 원래 그가 추구하던 것이 바로 이런 문학이었구나 싶었다.

 

 우연히 맨손으로 쥐를 잡는 능력을 인정받게 되어 전염병이 창궐한 국가로 발령 난 주인공. 거리는 쓰레기와 소독약 연기로 매캐하고, 그가 맞는 상황들에는 늘 불운이 감돈다. 본사로 출근하기로 하여 기다렸는데 담당자에게는 연락도 없다. 설상가상으로 아내의 끔찍한 죽음과 그 죽음에 자신이 용의자로 지목되었다는 소식까지 듣게 된다. 그는 결국 길바닥과 지하 하수도까지 내몰린다. 추락의 연속이다.
 주인공의 아내가 왜 죽었는지, 밝혀진 죽음의 시점이 왜 그의 출국 시점과 닿아 있는지, 칼을 쥐는 찰나의 느낌이 왜 익숙하게 남아있는지 소설은 구태여 차례대로 설명하진 않는다. 오로지 주인공이 나락으로 떨어지면서도 꾸역꾸역 살아남으려 애쓰는 광경을 따라갈 뿐이다.

 

 그런데 그의 모습은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가. 도시에 빠르게 전염병을 퍼뜨리는 더럽고 끔찍한 쥐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는 것 같다. 가장 후미지고 어두운 곳에 들끓는 쥐는 주인공의 인생과 연계되어 끊임없이 등장하는데, 마치 짜인 것처럼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되는 상황 속에서도 그렇다. 쥐는 그에게 때로 살기 위한 방편이 되고, 반대로 또 다른 파국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며, 때로는 궁지에 몰린 인간들보다 차라리 해롭지 않은 존재감을 과시한다. 모든 것들 중에서도 가장 웃기는 건, 주인공이 쥐를 때려죽이는 일을 하게 되면서도, 쥐의 엄청난 생존능력을 본받아 어떻게든 살아간다는 점이다.

 

 소설 전체에 퍼져 있는 불쾌감과 아이러니 속에서 맞이하는 마지막 장면은 일품이다. - 여기서 불쾌감은 소설이 아닌, 소설 속 세계에 깔린 것을 말한다 - 죽음의 냄새 대신, 그의 몸이 소독약과 약품 냄새로 뒤덮인 장면 속에선 오히려 한껏 처참한 기분이 든다. 온 세상에 있는 향기와 독한 냄새를 끼얹는다 할지라도, 그의 몸에 뒤덮인 재와 피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가 기억을 모두 잃어버리지 않는 한.

 

 공중전화에서 그가 아는 모든 이름을 부르는 장면도 비슷한 느낌을 준다. 어떻게든 살아간다 하더라도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을 잃어버린 그의 생은 허울뿐이다. 구석으로, 구석으로 내몰리면서도 어떻게든 살아가려 발버둥 치는 모습이, 자신과는 이제 아무 의미 없는 이름들을 부르짖음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과정이 도통 낯설지 않다.

책을 다 읽고 난 뒤, 작가는 왜 이런 소설을 세상에 내보이려 했을까 생각했다. 그것도 무지무지하게 살벌하게까지 써 내려갔는지 궁금했다. 그러다가 현실과 맞닿은 지점이 있을 거란 생각에 약간 소름이 끼쳤다. 부조리한 세계, 인간성의 상실, 추락한 인간의 본성, 끔찍한 전염병이 퍼져도 금방 회복하는 일상성 (혹은 불감증) 등, 그에게 영감을 준 장면들이 진짜 있을 것만 같아서.

 

 

104쪽,
바닥에 떨어진 칼이 그의 얼굴처럼 굳어 있었다. 그는 아무것도 쥐지 않은 손을 여러 번 쥐었다가 폈다. 칼을 쥔 느낌이 익숙하다고 해서, 손에 그런 느낌이 남아 있다고 해서, 손이 그 감각을 고스란히 기억한다고 해서 그가 전처를 찔렀을 리는 없었다. 칼의 손잡이는 대체로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에 어떤 것이든 일단 쥐면 익숙한 느낌이 들 것이다. 그러나 진위와는 상관없이 칼을 쥐었다 놓는 순간, 낯설고도 익숙한 떨림이 자신을 관통하는 순간, 그는 세계가 칼날만큼이나 차갑고 칼자루만큼이나 울퉁불퉁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104쪽,
바닥에 떨어진 칼이 그의 얼굴처럼 굳어 있었다. 그는 아무것도 쥐지 않은 손을 여러 번 쥐었다가 폈다. 칼을 쥔 느낌이 익숙하다고 해서, 손에 그런 느낌이 남아 있다고 해서, 손이 그 감각을 고스란히 기억한다고 해서 그가 전처를 찔렀을 리는 없었다. 칼의 손잡이는 대체로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에 어떤 것이든 일단 쥐면 익숙한 느낌이 들 것이다. 그러나 진위와는 상관없이 칼을 쥐었다 놓는 순간, 낯설고도 익숙한 떨림이 자신을 관통하는 순간, 그는 세계가 칼날만큼이나 차갑고 칼자루만큼이나 울퉁불퉁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168쪽,
그 일들로부터 수년이 흐른 지금, 그는 덥고도 더웠지만 계속해서 아내를 안고 싶게 한 파란 날개 선풍기 때문에 울 것 같았다. 건반을 누를 때마다 음이 떨려 좋은 줄도 모르고 들은 쏘나타 때문에, 지붕에 던져올린, 새가 물어갔는지 쥐가 물어갔는지 알 수 없는 부러진 앞니 때문에, 빨간색 매니큐어가 발라진 발톱 때문에 울 것만 같았다. 지나간 생애가 너무나 사소하고 볼품없어서, 그런 인생에 회한이 느껴져서는 아니었다. 사소하고도 사소한 일로 채워진 현실의 시간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234쪽,
좁은 사각형의 유리상자 안에서 그는 공연히 떠오르는 이름들을, 전처의 이름이나 유진의 이름 혹은 자신의 이름을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 동전을 넣지 않으면 어떠한 신호음도 떨어지지 않는 수화기는 묵묵히 그가 부르는 이름을 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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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급생
프레드 울만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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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결말은 몇 줄에 걸쳐 걸작 내에서도 걸작이다. 대단원을 이루는 행들에서 나는 싸움을 포기하고 눈물을 펑펑 쏟으며 울었다."

 프랑스의 작가 '장 도르메송'이 남긴 이 말은 책을 고르는데 큰 역할을 했으나 100퍼센트 믿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소설의 끝을 맞이했을 때 나는 그제야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마지막 한 줄을 손바닥으로 가린 채, 영화 속에서 충격적인 장면이나 반전이 나올 때마다 들려오던 강렬한 사운드를 상상하며 들춘 그 문장은 압권이었다. 과장이 아니었다.

 ​그리곤 다시 홀린 듯이 첫 페이지로 돌아와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파악하려 애썼다. 그러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이 책의 첫 문장과 끝 문장, 그 속에 엮어진 이야기는 완벽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동급생』이라는 책의 제목은 내 안에 더욱 깊이 각인되었다.


 소설은 유대인 소년 '한스 슈바르츠'가 "내 가장 큰 행복과 가장 큰 절망의 원천이 될 그 소년"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소년이었던 한스는 새롭게 전학을 온 귀족 소년 '콘라딘 폰 호엔펠스'와 운명적으로 서로가 맞는 친구라는 걸 직감하며 우정을 키워나간다. 독일의 아름다운 고장 슈바벤에서 그들은 청춘을 즐기고, 문학과 예술, 철학 등을 몽상한다. 비록 나치 시대였지만, 그들은 꿈을 꿔가는 소년일 뿐이었다. 어른들의 이데올로기는 중요한 일이 아니며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위기가 닥치고, 한스는 고민하기 시작한다. 왜 아버지가 콘라딘을 만나자마자 자신에게는 전혀 보인 적 없는 비굴한 태도와 극존칭을 쓰는지. 왜 콘라딘은 집에 가족들이 없을 때만 자신을 부르는지. 이러한 의문은 그리 심각한 고민이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소년 대 소년이 아닌, 가족과 가족, 뒤이어 혈통의 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이어지자 소설에는 내내 불안감과 위기가 감돈다.

 

​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더한 아름다움으로 존재했던 동급생 둘의 우정은 이 모든 갈등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그 심한 유대인 탄압 속에서 대피해 '살아남은' 한스는 놀라운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그것이 한스가 읽고, 내가 읽고, 수많은 독자가 읽고 비통해 마지않은 한 줄이며, 두 소년이 했던 대화들, 뿌리깊게 박힌 이념들, 속수무책으로 흘렀던 세월과 비극을 상상케 하는 엄청난 한 줄이다. 나는 절대로 이 한 줄을, 소년들의 우정을, 비극적인 역사에 수그러졌던 사람들을 잊지 못할 것이다.

 

 

38쪽,
<내가 그를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친구>라고 쓰기 전에 나는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뒤에도 나는 이것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으며 내가 친구를 위해 - 그야말로 기뻐하며 -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믿는다.

62쪽,
정치는 어른인 사람들의 관심사였고 우리에게는 우리 나름대로 풀어야 할 문제들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기에 가장 시급한 문제는 어떻게 하면 삶을 가장 잘 활용할 수 있을지 배우는 것이었고 이것은 삶에 어떤 목적이 있는지, 과연 있기나 한지, 또 이 놀랍고 헤아릴 수 없는 우주에서 인간의 조건이 무엇일지 알아내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었다. 우리에게는 히틀러니 무솔리니니 하는 덧없고 우스꽝스러운 인물들보다 훨씬 더 중요한, 진정하고도 영원한 의의라는 문제가 있었다.

​ 81쪽,
내가 알고 있던 것은 여기가 시작도 끝도 없는 내 나라, 내 집이며,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붉은 머리가 아니라 검은 머리로 태어났다는 사실만큼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뿐이었다. 첫째로 우리는 슈바벤 사람이었고 그다음은 독일인이었고 그다음이 유대인이었다. 내가 그 외에 달리 어떻게 느낄 수 있었을까?

111쪽,
마침내 그들을 보았을 때는 달아나고 싶어졌다. 유대인 아이의 본능적인 직감으로 볼 때, 채 몇 분도 못 가서 내 심장에 들어박히게 될 단검은 피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고통은 피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무슨 이유로 친구를 잃는 위험을 무릅써야 할까? 무슨 이유로 의심이 잠으로 달래지게 놓아두는 대신 증거를 요구해야 할까? 하지만 나는 달아날 용기도 없어서 고통에 대비해 마음을 단단히 먹고 떨리는 심정으로 기둥을 버팀목 삼아 기대어 서서 처형당할 마음의 준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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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호위
조해진 지음 / 창비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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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의 호위, 라는 제목을 발음할수록 따스한 기분이 든다. 게다가 책을 다 읽고 난 뒤에 제목을 보면 그 빛은 더욱 밝게 빛난다. 잿빛 세상에서 정처 없이 거닐 때, 혹은 도저히 길을 찾지 못할 때 우연히 빛 - 사람, 목소리, 연결되었다는 마음, 때로는 사물 등 - 의 호위를 받는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인 일이다. 다행이라고만 할까, 때로는 사람을 살릴만한 가장 강한 힘의 빛을 선사하기도 한다.

 작가의 장편소설 『로기완을 만났다』에서 느꼈던 감정은 여전하면서도, 더 깊어진 것도 같다. 작가의 말에서 "이제야 나는, 진짜 타인에 대해 쓸 수 있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고 밝히는 작가는 이번 소설집에서 시종일관 따뜻한 시선으로 타인을 본다. 유대인 등록령으로 지하창고에 은신한 유대인, 불법체류자, 역사적 폭력의 피해자, 직업을 잃은 사람들이 소설의 주인공들이며, 비슷한 사람들이 가느다란 끈으로 만나 서로를 은연중에 다독이고 '호위'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그들은 "두 사람을 태운 전혀 다른 두 척의 배가 똑같은 섬에서, 똑같은 풍랑을 견디며 잠시 표류한 적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빛의 호위')" 서로를 위로한다. 언어를 초월한 교감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용기를 주고 ('번역의 시작'), 사는 게 원래 이렇게 무서운 거냐며 편지로 한탄하기도 하고 ('산책자의 행복'), 만남을 기대하며 서로의 신념을 상상하기도 한다 ('시간의 거절').

  온전히 조해진만의 통일된 감정으로 읽고 싶어서 기다렸던 <산책자의 행복>도 너무 좋았고, 우연히 먼저 읽어본 <사물과의 작별>도 다시 읽으니 더 좋았다. 다른 작품들도 빼놓을 것들이 없었다. 상처를 받아 나약하고 무기력해진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힘들지만, 조해진 작가가 써낸 아름다운 언어들이 그 슬픔과 아픔을 중화시키고 있었다. 빛, 철컹하는 기차 소리, 봄밤의 포근한 기억, 라오슈, 언니, 이름, 노래……와 같은 언어들이 두드러져, 소설의 끝에 가려진 주인공들의 따뜻한 내일을 상상할 수 있을 정도로.

 조해진이라는 작가는 내게 이렇게 다가온다. 작은 (이란 단어를 섣불리 판단하여 불끈! 하는 사람이 없었으면-) 사람들에 집중하여 그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천천히 보듬어 나간다. 그의 시선과 손길이 참 좋아서, 한동안은 그의 이름이 적힌 소설들에 빠져있을 것 같다.

 

 

57쪽, 번역의 시작
그의 머릿속에서 나는 한글을 깨치지 못한 다섯살 아이로 남아 있었다. 그림이라면 어린 딸아이도 해독할 수 있을 거라고, 그는 생각했을지 모른다. 다리의 길이가 제각각인 의자는 불안감, 식품 판매대에 생뚱맞게 놓여 있는 곰 인형은 외로움, 갖가지 모양의 사탕들로 가득한 유리병은 그리움…… 때로는 불확실한 언어보다 형체가 뚜렷한 사물이 그 순간의 감정을 더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거라고, 나는 이 공책을 보며 배웠다.

69쪽, 사물과의 작별
긴 이야기의 끝에서 고모가 나른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렇게나 늙고 병들었는데도, 아침에 눈을 뜨면 내가 있는 곳은 여전히 그 봄밤의 태영음반사야.

114쪽, 동쪽 伯의 숲
그의 말을 듣는 동안, 내 마음속엔 삶의 끝자락에 깃발을 꽂고 어제보다 더 큰 부끄러움을 좇아 욕망 없는 정복자처럼 한걸음 한걸음 혼신의 힘으로 걸어왔을 한 인간의 긴 발자취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가 걷는 곳은 언제나 빈 들판이었고, 투명한 계단을 지나 하늘 끝까지 이어진 그 발자취는 자격을 되묻는 것으로 충만했던 내 작은 웅덩이에서 올려다본 한 인간의 별자리처럼 빛났다. 상상보다 더 환하게, 더 고독하게……

128쪽, 산책자의 행복
라오슈, 오늘 저는 부재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그건, 영원이라는 시작도 끝도 없는 선 위에서 점멸하는 작은 점, 부재함으로써 존재하는 이선을 생각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라오슈는 지금 어디에 계신가요. 어떤 언어가 라오슈의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 걸까요. 행복한가요, 라오슈? 제가 라오슈에게서 듣고 싶은 말은 사실 그뿐인데, 오늘도 저의 타전은 무력합니다.

213쪽, 문주
- 있잖아요, 왜, 사진의 접힌 부분 같은 거, 펴본 뒤에야 중요한 단서였다는 걸 알게 되는…… 내일 그분을 만나는 게 그런 과정일 수도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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