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서울, 삼풍 - 사회적 기억을 위한 삼풍백화점 참사 기록
서울문화재단 기획, 메모리[人]서울프로젝트 기억수집가 지음 / 동아시아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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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종종 텔레비전에서 ‘삼풍 백화점 붕괴사고’를 보았을 땐 그리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와르르, 몇 초 만에 무너지는 모습을 볼 땐, ‘건물은 이렇게 무섭게 무너지는구나’ 했고, 매몰되었지만 기적같이 살아난 생존자를 볼 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희생자들을 생각하는 건 그냥, 너무 큰 고통이었다. 조금 나이가 들어 되새기는 삼풍 백화점 사고에는 더 많은 생각들이 달라붙었다. 젊었던 엄마도, 대학생이었던 나도 백화점 건물 안에서 일했다. 만약 당시였다면 업무 도중 빠릿빠릿한 눈치로 무슨 일이 생긴다는 것을 감지한 뒤 빠져나올 수 있었을까.

<1995년 서울, 삼풍>은 지은이 이름에 적힌 ‘기억 수집가’라는 이름에서도 볼 수 있듯, 다양한 방면에서 사고를 접했던 이들의 기억을 꼼꼼하게 재조립한 책이다. 생존자, 희생자의 유족, 지인, 사건을 담당했던 경찰, 구조 작업을 담당했던 소방관, 민간 구조자, 건축업자, 기자, 의사, 봉사자…… 각자의 역할을 다하며 힘썼던 사람들과, 지금까지도 슬픔을 견디며 살고 있는 사람들의 구술을 통해 당시의 상황과 현재까지 이어오는 고통에 대하여 상세하게 전한다. 구술자의 심리와 행동을 괄호 안의 지문으로 강조함으로써 더욱 생생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부분적으로만 알고 있었던 사고의 정황 속에는 몰랐던 사실도 정말 많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상함’을 감지했으나 갖가지 이유로 피하지 못했고, 역시나 주변 건물의 사람들과 민간 봉사자들은 직접적으로 수색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절도를 목적으로 봉사에 합류한 사람들도 정말 많았다고). 당시 응급 의학 자체가 미비한 상태여서 체계적인 제도 없이 우왕좌왕하는 일이 많았으나 그러한 환경 속에서도 생명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분들이 너무나 많았다. 불과 몇 초 만에 무너진 건물 때문에 시신을 찾을 수 없는 유족들이 있었고 난지도에 버려진 건물 잔해 속 부분 시신까지도 간절하게 바라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안타까운 이야기도 있었다.

“건축은 의사, 변호사처럼 사회정의에 이바지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건축가나 건축계 사람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부당한 요구에 굴복하면 그런 결과들이 초래됩니다. 고객이 이렇게 해달라 요구할 때 건축가가 이런 이유로 안된다 했으면 절대 무너지지 않았겠죠. 그런데, 네, 알아서 하세요. 도장 찍어줍니다.” 건축에 대한 이 한 마디가 가장 마음에 와닿았다. 사실은 건축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무언가를 만들 때는 마땅히 지켜야 할 일들이 때때로 무시된다. 수많은 안타까운 사고의 시작이 작은 한 마디라고 생각하면 순간 섬뜩해진다.

2014년 세월호 사고 이후 ‘기억’의 슬로건이 대두된 이후로, 2년 뒤 이 책이 출간되었다 (종종 구술자의 발언에서 세월호에 대한 언급이 등장하기도 한다). 세월호 유족들에 관련한 비방이 거세질 때, 지겹다는 말이 지나치게 많이 들려올 때, 세월호가 지겹다는 이들에게 삼풍 생존자가 쓴다는 글을 접했던 기억이 난다(링크).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며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사람이지만, 인간의 예의로서 가장 우선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기억하는 일’이다. 매번 기억하며 우울 속에서 살아갈 리 만무하지만, 감시의 역할로도 기억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기억을 이렇듯 온전히, 한숨과 말줄임표 하나까지 꼼꼼히 담아준 이 책은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

 

이 친구가 무너지기 30분 전 저한테 전화를 했어요. ‘백화점이 너무 덥다. 옥상에 균열이 생겼는데 그것 때문에 에어컨이 멈췄다더라. 그런데 이상하다, 분위기가.’ 이 친구가 1층 로비 바로 앞에서 근무하니까 사람들이 나가는 게 보이잖아요. 윗사람들, 경영진들이 굉장히 급박하고 왠지 모르게 긴장된 모습으로 빠져나간다는 거예요. "이상해." 계속 그러더라고요. 그래도 우리는 상상할 수 없잖아요, 백화점이 무너질 거라는 걸. 저도 좀 이상한 느낌에 "너도 매장 두고 퇴근하는 건 어때?" 그랬어요. 그랬더니 "저 물건들 비싸잖아. 누가 훔쳐 가면 어떡해. 내 책임이 될 텐데" 하더라고요.

평생 잊혀지지 않는 분이 계셨는데 아주 작고 왜소한 체구에 도배, 페인트 일하는 분이에요. 저희가 엄청난 먼지와 악취 속에서 숨쉬기도 힘들어하면서 작업하는 걸 보고 안타까웠는지 커다란 널빤지를 가지고 오셨어요. 합판 부스러기인데 저희가 굴을 파고 안에 들어가 작업을 할 때 바깥에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공기를 불어넣어주셨어요. 작업이 끝날 때까지. 뒤에서 공기를 넣어주면요, 작업 환경이 정말 좋아져요. 작업하다가 뒤돌아보면 온몸에 땀을 흘리면서, 안경 고쳐 쓰고 닦아가면서 저희에게 계속 부채질을 해주시는 거예요. 저는 그 분이 진짜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분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저희가 한 명이라도 더 구할 수 있지 않았나 싶어요. 구조 대원들 모두 입 모아 말했어요. ‘저 아저씨는 상 받아야 할 사람’이라고.

생활이 안 된다, 이 정도는 아닌데 무너질 걸 항상 대비하죠. 어디로 튈까, 그런 생각을 해요. 위에서 뭐만 떨어져도 무서워요. 이게 어쩔 수 없는 거 같아요. 뭐가 흔들리기만 해도 겁나고 바람이 불어서 문 같은 게 꽝 닫혀서 아래층이나 위층이 울리면 ‘아, 문 좀 잠가놓지’ 이런 생각 하죠. 고층도 싫어 못 살겠어요. 어쩌다 한번 누구네 집에 놀러가면 몰라도 고층에서는 못 살아요.



죽은 자와 산 자의 짐은 다릅니다. 죽은 자는 자신의 짐을 산 자한테 떠넘기고 가요. 살아 있는 자는 그 짐을 평생 지고 가는 거죠.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고 30년이 지나도 짐의 무게는 똑같습니다. 달라지는 것이 뭐냐, 내가 달라져요. 건장한 스무 살 짜리 애가 들던 짐의 무게와 지금 드는 짐의 무게가 똑같습니다. 나이 드신 분들이 옛날 생각하실 적에 더 아파하고 슬퍼하잖아요. 제가 남기고 싶은 말은요, ‘내년이면 괜찮아질 거다, 몇십 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다’가 아닙니다. ‘몇십 년 후에는 더 힘들어질 거다. (죽은 자가 남긴 짐의) 무게가 더 무겁게 느껴진다’입니다. 그러나 꼭 남기고 싶어요 ‘그러나’라는 단어를요. 또 아직 끝난 게 아니고 진행 중이라는 ‘ing’라는 단어를요. 견디고 또 참아내면 저희 세대로 끝나겠죠. 하지만 제 자식 세대가 그 짐을 들고 가게된다면 못 견딜 것 같아요, 너무 힘들어서.



그러니, 우리는 필사적으로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실 도시는, 특히 우리의 일상이 이뤄지는 한국의 도시들은, 망각을 근본 원리로 하고 있다. 재난에 의하여 먼저 간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들, 친구들, 이웃들의 상흔은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에 의하여 자연 치유되도록 방치되고 있다. 일종의 무책임한 운명론이 그 상흔들을 압도해버린다. 누군가가 기억을 하고자 하면, 왜 기억하는가, 무슨 의도로 기억을 하려고 하는가, 라고 윽박지른다. 우연적인 사고로 축소하여 도시 일상의 바깥으로,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밀어낸다. 대책은 고사하고 원인조차 밝혀지지 않거나, 고의적으로 밝히지 않으려는 힘들이 모든 상처 입은 자들과 고인들을 망각의 저편으로 밀어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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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아비 (리마스터판) 창비 리마스터 소설선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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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이 좋아”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고작 몇 권의 책을 읽고 나서 ‘좋아하는 작가’라 말하기는 어쩐지 어색한 기분이 든다. 김애란은 내게 이런 기분으로 다가오는 작가였다. 연이어 단편집을 읽었고, 단편의 한 글귀를 입에서 오물오물 되뇌기도 했으나, 완전히 다 알지 못하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스무 살 즈음에 『침이 고인다』를 만났고, 중반 즈음에 『비행운』을 읽었다. 이후 『바깥은 여름』을 읽으면서 감동했다. 우연히 세월의 흐름에 따라 만나게 된 김애란의 소설은 함께 연결되어 나이 드는 동질감을 느끼게 했지만, 그의 ‘처음’을 알지 못해 허전한 느낌이 남아 있었다.

2005년에 첫 출간된 소설집이 십여 년을 지나 새 옷을 입고 나왔다. 순서가 바뀌고 작가의 말도 새롭게 적어 넣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반가운 기회로 김애란의 풋풋한 첫 소설집 『달려라, 아비』를 만나게 되었다. 작가의 초기작을 만나는 것은 늘 신선하고 재미있는 경험이지만, 이번에는 빠져 있던 퍼즐 조각을 찾은 듯 유독 즐거운 기분이다.

이십 대에 들어서고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나는 전혀 어른이 된 것 같진 않지만 그때와 현저히 달라진 존재를 느낀다. 그때는 내 생애 가장 우습고도 밝은 시기였다. 마음은 조금 부풀어 있고 살짝 열려 있었다. 겁이 나도, 살짝 열린 틈으로 무엇이든 들어올 수 있었다. 내가 원하는 기회, 내가 하고 싶은 상상 속에 잠깐이라도 발을 담가볼 수 있었다. 지금의 나이가 돼서야 볼 수 있는 것이 있는 것처럼, 그때의 나이에만 볼 수 있는 것이 있었다. 풋풋한 스물, 나는 이 책을 보면서 다시 또 한 번 나의 시간을 생각한다.

만나지 못했지만 늘 가슴 한편에 있는 동경의 대상을 생각한다. 표제작인 <달려라, 아비>, 그리고 <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 <사랑의 인사>라는 단편들은 부재하는 누군가를 궁금해하고 그리워하는 면에서 비슷한 결을 가진 소설이었다. 그 누군가는 종종 아버지의 존재로 비춰졌다. 어머니와 아버지, 가족을 이야기할 때 면 조절하기 힘든 감정을 적당한 온도로 전하고 있었다. <그녀가 잠 못 드는 이유가 있다>, <나는 편의점에 간다>는 탁월한 심리 묘사가 돋보이는 단편들이었다. 건조하면서도 섬짓한 분위기의 이 소설들이 유독 좋았다. 글을 쓰는 존재로서의 고뇌가 느껴졌던 <영원한 화자>, <종이 물고기>도 기억에 남는다.

소설 속에는 작가의 책을 좋아한 이유이기도 했던, 문장의 신선한 표현력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 초기작의 산뜻하고 가벼운 느낌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첫’ 소설의 무거운 고뇌 또한 들어 있는 듯했다. 마치 뼈 있는 농담을 듣는 기분이라 할까. 물론 조금 더 매만져진 지금의 김애란이 나는 더 좋긴 하지만, 첫 소설의 매력을 느끼는 것도 재미난 경험이었다.

 

어머니는 발가벗은 채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내 얼굴을 큰 손으로 몇번이나 쓸어주었다. 나는 어머니가 좋았지만 그것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 몰라 자꾸만 인상을 썼다. 나는 내가 얼굴 주름을 구길수록 어머니가 자주 웃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나는 사랑이란 어쩌면 함께 웃는 것이 아니라 한쪽이 우스워지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P39

어쩌면 ‘나는 사려깊은 사람’이라는 식으로도 나를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나는 따뜻한 사람이지만, 당신보다 당신의 절망을 경청하고 있는 나의 예의바름을 더 사랑한다는 점에서 무레한 사람이다. 나는 오만한 사람을 미워하지만 겸손한 사람은 의심하는 사람이다. 나는 모두가 좋아하는 그림 앞에서 내가 그동안 그것을 ‘그다지’ 좋아한 것은 아니라고 부정하는 사람이다. 나는 자신에 대해서는 ‘당신들이 모르는 내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타인에 대해서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은 모르지만 나는 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는 동의하지 않아도 끄덕이는 사람, 나는 불안한 수다쟁이, 나는 나의 이야기,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사람, 나는 나의 각주들이다. - P127

"죄송합니다." 나는 그가 건네는 포장 만두를 받아들었다. 볼일이 끝난 뒤에도 내가 계속 꼼짝 않자, 청년은 나를 이상한 듯 쳐다보았다. 나는 그에게 뭔가 얘기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그런데 도통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나는 한참 망설이다 어물쩍 한마디 내뱉고는 큐마트를 나왔다. "문자 왔어요." - P237

바람이 들고 날 때마다 모든 벽면이 바깥을 향해 천천히 부풀어올랐다 다시 원상태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럴 때면 다섯개의 벽면에 붙은 포스트잇이 일제히 파르르 몸을 떨었다. 그러자 더욱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그 방 전체가 하나의 종이 비늘이 달린 물고기가 되어 부드럽게 세상을 헤엄쳐 다니는 상상을 했다. 마치 자신이 물고기 지느러미 옆에 붙어 있는 것 같았고, 반대로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 있는 듯한기분도 느꼈다. 대체 어디가 안이고 밖인지 알 수 없었다.


-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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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통 안의 소녀 소설의 첫 만남 15
김초엽 지음, 근하 그림 / 창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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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초엽이라는 신예 작가의 이름은 다른 책을 읽다가 알았다. (기억이 뚜렷하지 않지만) 한 작가 혹은 평론가가 인터뷰 중 요즘 주목하고 있는 작품에 대해 말했고,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수록된 김초엽 작가의 <관내분실>이라는 단편을 콕 집어 언급했다. 이 언급이 아니었더라면, 늘 과학을 불친절하게 여기는 내가 그의 책을 읽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기도 하지만 그저 추천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동안 어려워하던 과학 소설과는 조금 다르게 가까이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좋은 작품은 모두들 알아보는 것인지, 이제 부쩍 김초엽 작가의 이름이 종종 보이기 시작한다. 단편집을 읽기 전 소설을 처음 만나는 사람들을 위한 얇은 책을 먼저 읽기로 했다.

<원통 안의 소녀>는 공기와 날씨를 통제할 수 있는 미래 도시를 배경으로 한다. 걷잡을 수 없이 상태가 악화되는 대기오염의 위기 속에서 분진형 나노봇 ‘에어로이드’가 개발된다. 가정용 공기청정기 대용이었던 에어로이드는 점차 공공분사 시스템을 통해 대기와 날씨를 제어할 수 있는 용도로도 쓰이게 된다. 이제 사람들은 깨끗한 환경 속에 살게 되었지만, 극소수의 사람들이 에어로이드를 위한 합성 물질인 ‘베타-프로니틴’에 대한 이상 면역 반응을 보였다. 주인공인 ‘지유’는 그중 하나였다. 온갖 집중 치료는 소용이 없었고 방독면 없이 밖을 돌아다닐 수 없었다. 다행히 열 살 무렵 ‘프로텍터’라 불리는 원통형 차량이 지유에게 제공되었다. 대가는 다큐멘터리를 찍는 것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원통 안의 소녀’를 알게 되었으나 그동안의 고통을 생각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공기 중의 에어로이드 농도가 옅어지는 비 오는 날을 제외하곤, 지유는 플라스틱 차량을 벗어나 걸을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스피커로 낯선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 목소리의 정체는 무엇이고, 어떻게 연락이 되는 것일까.

늘 미세먼지 걱정에 시달리는 오염된 세계에서 소설 속 상상은 그리 먼 미래가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공기가 깨끗해진다는 상상은 행복하지만 모두가 편리한 세상을 만끽할 때 어떤 누군가는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다. 최악의 상황이라면 고통을 느낄 수도 있었다. 사실 이렇게 깊게는 생각해보지 못했던 가정이었다.

과학의 편리함을 부정할 수는 없다. 우리는 과학 덕분에 너무도 빠르고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나 ‘가능성’을 생각하는 소설은 너무나 따뜻했다. 과학의 편리함 속에 ‘누군가의 소외’와 ‘불편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짚어주는 저자의 시선이 너무나 고맙고 안심이 되었다. 세상이 더욱더 빨라지고 편리해져도 이런 마음만 있다면 다행일 것 같다.

 

괜히 억울한 기분에 지유는 프로텍터의 안쪽 벽을 툭 쳤다. 이런 걸 타고 다니는 이상 움직임이 둔할 수밖에 없다. 투명한 원통이라고는 해도 여기저기 달린 공기 정화용 장비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시야가 가려진다. 그런 점을 들어서 동정심에 호소해 보지 뭐. 설마 가난한 학생에게 다 물어내라고 하지는 않겠지. 못된 생각인가?

지유는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동정이 싫다면서 결국엔 동정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다.
- P33

‘아마 이제 노아를 만날 일은 없겠지. 우리는 그냥 나쁜 사고로 엮이게 된 사이니까.’ 지유는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쓸쓸했다. 목소리만 알고 있는 상대에게 며칠 만에 정을 붙이다니.
- P46

지유는 이 도시가 싫지 않았다. 하지만 가끔은 에어로이드가 없는 도시를 상상했다. 그건 언제나 모순적인 감정이었다. 도시의 사람들은 언제나 친절하고 다정하고 멀리 있었다. 이 도시 역시 마찬가지였다. 햇볕을 머금은, 물기 어린, 비가 온 다음 날이면 곳곳이 반짝이며 빛나는 …… 그러나 자유를 위해 설계되지 않은 도시. 평생을 이곳에 살았지만 지유는 여전히 이곳의 여행자였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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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아니 에르노 지음, 이재룡 옮김 / 비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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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는가. ‘잊고 싶다’는 수식어는 부정적인 감정을 동반한다. 그것은 잠깐 지나가는 감정이 아닌, 일종의 터닝 포인트다. 선득하고 끈적하게 따라오는 까만 그림자 같은 것. 발을 담그다가 점차 허우적거리게 만드는 깊은 웅덩이 같은 것. 누구에게나 존재할 것 같지만 기억의 회상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느냐에 따라 고통의 정도가 달라지는.

"6월 어느 일요일 정오가 지났을 무렵,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다." <부끄러움>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말다툼 끝에 어머니를 지하실로 끌고 들어간 아버지에 손에는 낫이 들려 있었다. 날카로운 비명과 울음이 가득했던 끔찍했던 순간. 이후 부모님은 평소와 다르지 않게 행동하며 일상을 산다. 아무렇지 않게 무마된 기억은 지워지지 않은 채 화자의 마음속에 남아있다.

그렇게 남은 감정은 다름 아닌 ‘부끄러움’이다. 이것은 흔히 말하는 부끄러움의 정의, 가벼운 수치심이나 슬픔을 넘어 다양한 감정의 복합체로 여겨진다. 소설은 이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에 대해 설명하기 위하여, 어릴 적 ‘나’를 둘러싼 세계를 정밀하게 되짚는다. 전쟁 이후의 궁핍한 생활, 열두 살의 순수한 나이, 서로를 감시하는 주변 사람들 …… 가족과 학교, 시골 마을의 굴레 안에서 ‘나’는 이제 친구들과 다르게 자신이 불행 속에 소속되었다고 ― 부끄러움 속에 편입되었다고 생각한다. 그가 바라보는 풍경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다.

 이 소설은 그저 세밀한 감정을 늘어놓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감정의 해부학 (작품 소개 _신수정 평론가)’에 가깝다. 뼛속 깊이 스며든 감정을 이리도 정확하게 알 수 있었던 것은 작가가 그 감정을 이미 처절하게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경험하지 않은 것은 쓰지 않는다.”는 작가 ‘아니 에르노’의 철칙대로 쓰였으나, 이 소설에 투영된 기억은 작가의 어떤 자전적 경험보다도 더욱 어려웠던 것이라 작가는 밝히고 있다.

 

“나는 처음으로 이 장면을 글로 옮겼다. 지금까지는 일기에서조차 이렇게 쓰는 것이 불가능하게 여겨졌다. 마치 징벌을 야기하는 금지된 행위처럼. 어떤 글이든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는 금기. (이전처럼 여전히 글을 쓸 수 있으며 아무런 끔찍한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방금 전에 확인하니 드는 일종의 안도감.)”

트라우마를 고백하기로 결정했던 순간부터, 글을 완성하고, 그토록 감추려 했던 기억이 세상에 모두 알려지기까지 작가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거라 짐작한다. 그리고 그 고통은 소설 속에, 마침표 하나까지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누군가의 마음의 심연을 이리도 가까이 들여다보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다. 깊고 깊다.

 

며칠 전부터 나는 1952년 6월의 일요일과 함께 있었다. 그 사건에 대해 쓸 때면 그때 일이 ‘또렷하게’ 보였다. 형태도, 색깔도. 심지어 목소리까지도 들렸다. 지금 그 장면은 흐릿하고 앞뒤가 맞지 않는 무성 영화로 변해 마치 해독 장치도 없는 유선 방송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그 장면을 언어와한다 해도 의미의 부재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1952년부터 항상 그래왔듯, 그것은 광기와 죽음의 장면이었고, 나는 내 삶의 다른 사건들의 고통을 가늠하기 위해 항상 그 장면과 비교했지만, 그와 같은 것을 찾아내지 못했다.

내게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나 주변 세계를 생각할 때 사용했던 단어들을 되찾는 일이다. 정상적인 것과 용납될 수 없는 것, 심지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1995년의 나라는 여자는, 조그만 자시 도시와 자기 가족 그리고 사립학교만 알고 있어서 사용할 수 있는 단어가 제한되었던 1952년의 소녀 속으로 다시 들어갈 수 없다. 그 소녀 앞에는 살아야 할 무한한 시간이 놓여 있었다.

열두 살 시절의 세계의 법칙을 드러내다 보니 꿈속에서 느꼈던 미세한 중압감과 폐쇄감이 슬며시 나를 사로잡는다. 내가 찾아낸 어휘들은 불투명하고, 요지부동의 바윗덩어리이다. 명확한 이미지는 빠져 있는 어휘들. 사전을 찾으면 나오고 무슨 뜻인지 알 수 있는 그런 의미마저도 빠져 있는 어휘들. 그 주위에는 어떤 초월도 꿈도 없다. 그저 물질들처럼 있다. 내 유년 시절의 사물과 사람들에게 밀접하게 연결되어 하나가 된 일상어. 내가 딱히 가지고 놀아볼 수 없는 언어들. 일종의 법령집.

우리는 술을 마시지 않거나 싸우지 않는 사람 또는 시내에 갈 때 정장을 차려입는 사람 같은 정상적인 범주에 더 이상 포함되지 않았다. 개학일마다 깨끗한 교복을 입고 예쁜 기도서를 가지고 있으며 어디에서나 1등을 하고 기도문을 줄줄 외웠지만, 나는 더 이상 다른 여학생과 같지 않았다. 나는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만 것이다. 순진무구한 사립학교에서는 알지 말아야 할 것을 알았고, 그것을 통해 말끝마다 "아무튼 그런 걸 보고 사는 게 불행한 일이야"라는 이야기 속에 범람하는 폭력, 알코올의존증, 정신병의 세계 속에 딱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식으로 소속되고 말았다.

그해 여름의 이미지를 하나하나 거론하면서 나는 내가 ‘그제서야 나는 알게 됐다’라든지 ‘나는 -를 깨달았다’라고 쓰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는데, 이런 단어는 체험한 상황에 대한 명징한 의식이 있음을 상정한다. 거기에는 이 단어들을 모든 의미 외적인 것에 고정시키는 부끄러움의 느낌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무거움, 그 무화 작용을 내가 느끼지 않도록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이 최후의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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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나 2 - 개정판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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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에 관련한 이야기들을 부쩍 많이 접하고 있다. 여성이 사회적으로 약자라는 점을 자각하기 시작하고부터 관심은 점점 다른 대상으로 확대되었다. 인종 차별은 성별에 관련한 논쟁만큼이나 뜨겁고 오래된 화두가 아닐 수 없다. 관련된 많은 책을 우연히 읽어보긴 했지만 <아메리카나>는 정말로 독특한 느낌을 자아내는 책이다. 인종 차별의 피해를 집중적으로 그리지 않고 세련된 방식으로 풍자하고 설명한다. 그리고 당황스러울 정도로 현실적이다. 흑인 여성 ― 온갖 상황의 차별을 경험했을 법한 ― 이 겪은 일들을 이토록 상세하고 현실적으로 부딪쳐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나이지리아의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난 이페멜루는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넓은 땅으로 향하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가족들도, 열렬히 사랑했던 남자친구도 뒤로 한채 먼 곳으로 떠났지만, 찬란하게 빛날 거라 여겼던 아메리칸드림은 금세 실체를 드러낸다. 피부색으로 인한 차별은 물론이고, 흑인마저도 출신지에 따른 암묵적인 계급으로 나뉘는 사회. 사람들은 “차별하지 않는다"라고 당당하게 말하며, 때로는 인종에 관한 어떤 단어라도 말하기 어려워하고 말을 삼간다. 그러나 이페멜루는 곱슬거리는 머리와 미국 악센트가 없는 영어와 같은, 자신의 본 모습을 지닌 채로 어떤 전문적인 일도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당신이 인종이 문제가 안 됐다고 말하는 유일한 이유는 당신이 그랬길 바라기 때문이에요. 우리 모두 바라죠.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에요.” (109쪽, <2권>)

어떻게든 살아남아 미국 사회에 스며들기 위한 노력은 종종 주인공에게 좌절감을 불러일으키고, 결국 환멸을 느낀 그는 아예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자유롭고 당당했던 본성을 되찾기 위해 노력한다. 그가 겪고 느낀 바를, 인종에 대한 단상을, 블로그에 적나라하게 적으면서 인기를 끌게 되고, 마침내 미국에 정착하는 듯했지만 다시 고향인 나이지리아로 발길을 돌린다. 소설 속에선 이페멜루를 포함하여 그의 학창시절 남자친구였던 오빈제, 그밖에 다양한 인종과 계급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복잡한 미국 사회만큼이나 다양한 캐릭터들의 대화들 속에는 가감 없는 현실이 스며들어 있다. 2권에서는 각 장마다 이페멜루가 작성한 듯한 가상의 블로그 글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부분이 굉장히 인상 깊다.

소설은 ‘아메리카나’로서 성공하려 했던 사람들의 성장을 그리는 듯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완벽한 성장이라고 하기엔 조금 부족한 감이 있다. (그의 전작 <보라색 히비스커스>도 그러하듯이) 주인공은 모두 완벽하지 않다. 당당하게 변화한 이페멜루 또한 때로는 머뭇거리기도 하고 실수를 한다. 블로그에 신랄하게 글을 써내리면서도 말이다. 연애와 관련한 그의 사생활 또한 그저 아름답지만은 않다. 가끔은 히스테릭하기도 하고, 혼란스럽고 불안한 감정은 소설 속에 그대로 표현된다. 신념을 가진 사람도 모든 행동을 완벽히 할 수는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불완전한 세계에서 허우적거리는 그들은 주인공이지만 너무도 평범한 인간이며, 소설은 이상적 미래를 포함하지 않은 채 철저히 현재진행형으로 변화를 염두해두고 있는 듯 보였다.

단 한 가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결말인데, <아메리카나> 속에는 페미니즘과 인종에 관한 담론을 포함하여 많은 복합적인 삶의 장면들과, 영혼의 단짝인 오빈제와 이페멜루의 인연을 중심으로 사랑에 대한 이야기 또한 담겨 있다. 그 둘이 만나기까지 각자의 길고 긴 싸움이 있었으나 나는 그들의 마지막에서 마치 소설 <스토너>를 읽을 때와 같은 왠지 모를 찝찝함을 느꼈다. 그들의 사랑을 정당화하기 위해 누군가는 무언가 이상해서 함께 살 수 없는 사람으로 그려야만 하는지. 그들이 많은 역경을 건너온 만큼 조금 더 성숙하고 당당한 사람이길 바랐다.

 

 

 

"2층요." 그녀는 그를 집안에 들이면서 아까는 저런 쾌활함이 그의 몸속 어디에 숨어 있었던 걸가 생각했다. 그녀는 트고 갈라진 입술에 마른 살 껍질이 붙어 있던 그 사내를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때때로 미국에서는 인종과 계층이 동의어다."는 포스트를 그의 극적인 태도 변화 이야기로 시작해서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낼 것이다. 내게 돈이 얼마나 많은지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가 보기에 내 외모는 그 위풍당당한 저택의 주인에 적합한 것이 아니었다. 미국의 공적 담론에서 ‘흑인’이라는 집합 명사는 ‘가난한 백인’과 곧잘 짝을 이룬다. ‘가난한 흑인과 가난한 백인’이 아니다. ‘흑인과 가난한 백인’인 것이다. 실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P281

그녀는 전화를 끊고 난 뒤에야 부끄러움이 솟아올라 얼룩처럼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에게 고맙다고 한 것, ‘발음이 미국인 같다’는 말을 열심히 화환으로 만들어 자기 목에 건 것이 수치스러웠다. 미국인처럼 말한다는 게 어째서 찬사 받을 만한 업적이란 말인가? 그녀는 이겼다. 크리스티나 토머스, 눈빛만으로 그녀를 작고 의기소침한 짐승처럼 움츠러들게 만들었던 허연 얼굴의 크리스티나 토머스도 이제는 정상적으로 이야기할 터였다. 그녀는 정말로 이겼지만 그것은 무의미한 승리였다. - P295

"제 생각에 이 나라의 계급은 사람들이 숨 쉬는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스며 있는 것 같아요. 모두가 자기 위치를 알죠. 심지어 계급 사회에 분노하는 사람들도 어떤 식으로든 자기 위치를 받아들이고 있어요." 오빈제가 말했다. "이 나라에서는 백인 남자애와 흑인 여자애가 같은 노동자 동네에서 자랐다면 얼마든지 같이 어울릴 수 있고 인종은 2차적인 문제일 뿐이에요. 하지만 미국에서는 백인 남자애와 흑인 여자애가 같은 동네에서 자랐다 해도 인종이 1차적인 문제가 될 거예요."

- P85

알렉사와 다른 손님들, 어쩌면 조지나조차도 누군가가 전쟁으로부터, 또는 인간의 영혼을 파괴하는 가난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은 이해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다는 사실이 가져다주는 억압적인 무기력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은 욕구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오빈제 같은 사람들, 즉 유복하게 자랐지만 불만에 빠져 있고 태어날 때부터 고국이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보도록 길들어진, 진정한 삶은 그 다른 곳에 있다고 영구불변하게 확신하는 사람들이 단지 떠나기 위해 ― 그중 어느 누구도 굶주리거나 강간당하거나 마을이 불타지 않았지만 그저 선택의 가능성과 확실성에 목말라서 ― 위험한 일, 불법적인 일을 하기로 결심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 P87

아는지 모르겠지만, 사실은 미국인 흑인들도 인종 때문이 아니길 ‘원한다’. 그들은 인종 차별 짓거리가 일어나지 않길 바란다. 그러니까 어쩌면 그들이 인종 대문이라고 말할 때는, 어쩌면 정말로 인종 때문이어서가 아닐까? "나는 색맹이야."라고 말하지 마라. 당신이 정말 색맹이라면 당신은 병원에 가 봐야 하고, 그 말은 텔레비전에 어떤 흑인이 당신 동네에서 일어난 범죄의 용의자라고 나올 때 당신이 보는 것은 흐릿한 회보라색의 허여멀건 사람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종 얘기가 지겨워." 혹은 "인류는 하나야."라고 말하지 마라. 미국인 흑인들도 인종 얘기가 지겹다. 그들도 이런 얘기를 할 필요가 없길 바란다. 하지만 더러운 일은 계속 일어난다. -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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