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해보겠습니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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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에 표지 사진을 띄워놓고 며칠째 멍 때리며 시간을 보냈고, 이제는 써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너무 좋아서 오히려 쓰기 머뭇거려진다고 하면 될까. 좋은 정도를 어떤 말로 어떻게 전달해야 될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전에 읽었던 황정은 작가의 『백의 그림자』 생각이 났다. 전체적인 인상으론 두 소설이 비슷하게 좋았는데, 순간순간 멈춰읽은 부분들을 생각하자면 내게는 『계속해보겠습니다』가 더 강한 기억으로 남을 것 같았다. 신기하게도 그리 강렬하지도 않고 담담한데 무언가 콕콕 찌르는듯한 인물의 대사 한 줄이 아로새겨지는 순간들. 그것을 생각하자면.

 

소라, 나나, 나기. 세 인물이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담담한 어조지만 고백이라 할 수 있는 깊은 말들을 꺼내놓는다. 소라와 나나는 자매, 나기는 옆집에 살던 가족 같은 친구(오라버니)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함께 해온 사이로 굳이 무엇인가를 하지 않아도 서로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며 살아간다.

 

- 그런데도 때때로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순자의 전심전력보다는 애자의 전심전력이 완전한 것은 아닐까. 남몰래 이렇게 생각하고는 하는 나나는 아무래도, 애자와 가장 닮은 천성을 지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심전력, 그러므로 나나는 그것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154쪽)

 

셋의 고백이 모두가 소중하지만, 서사로 따지자면 중심에 있는 것은 나나의 고백이다. 나나는 임신을 하고, 소라는 그것을 자연스럽게 눈치채고, 나기는 그들에게 생겨나는 자그만 균열들을 지켜보며 과거를 회상한다. 나나의 임신이 그리 큰 균열이 될만한 것이냐 묻는다면 그것이 혼전임신인 것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애자'라고 부르는 나나와 소라의 어머니와 얽혀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허무에 빠져버리고 아이들도 제대로 돌보지 않았던 애자. 사랑이 넘치는 이름이었던 애자는 어느 순간부터 '아무래도 좋을 것'들로만 세상을 채우고, 마치 인생이 중단된 것처럼 살았었다.

 

"엄마가 되는 것은 애자가 되는 것"이라는 말을 꺼내던 소라와, "애자와 같은 전심전력을 가장 경계하고 있다"는 나나는 변해가기 시작한다. 태어나고 싶다고 열심히 꿈을 보내오는 뱃속의 아이를 통해 계속해보리라, 다짐한다.

 

그리 밝지 않은 세계에 놓여있는 그들이지만, 작가가 만들어낸 언어들이 처연한 그들의 세계를 덮고, 계속해서 살아가리라 다짐하는 모습은 우울함을 씻는다. 또한, 썩은 떡을 먹고 있던 아이들에게 "이 떡이 맛있으니 아줌마네 밥과 바꿔 먹자"며 끝까지 삼키던 나기의 엄마 순자, 아픔이 있지만 자매를 보듬는 나기의 모습은 '어쨌든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큰 힘이 된다. 책의 제목이 '계속하겠습니다'가 아닌 '계속해보겠습니다'인 것도 무시할 수는 없다. 하찮고 무의미해 보일지 모르지만 작은 시도와 희망이 담겨 있으므로. 멸종이 아니라 어쨌든 '살아가고' 있으므로.

 

 

12쪽,
아무래도 좋을 일과 아무래도 좋을 것.
살아가려면 세계를 그런 것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 좋다고 애자는 말한다.

26쪽,
어, 할 새가 있었을까? 어, 할 새도 없었을까? 누구도 모르지, 그 빈틈없는 회전 사이에서 시간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흘렀는지도 몰라. 어쩌면 어, 만으로는 부족할 정도로 긴 순간이었는지도 몰라. 어, 만으로는 부족해서 어어어어어 그렇게 한동안 이어지고도 부족할 만큼, 그건 긴 순간이었는지도 몰라. 길고 길어 누구의 생각보다도 긴, 이윽고 그가 그 틈을 다 통과했을 때 그건 더는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닌거야. 모습도 아닌거야.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그런 모습이 되고 만 거야. 그렇게 될 뿐. 인간은 그렇게 될 뿐.

104쪽,
사랑에 관해서라면 그 정도의 감정이 적당하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윽고 괜찮아지는 정도. 헤어지더라도 배신을 당하더라도 어느 한쪽이 불시에 사라지더라도 이윽고 괜찮아, 라고 할 수 있는 정도. 그 정도가 좋습니다.

119쪽,
집으로 모세씨를 불러들여 소라에게 소개한다는 것은 나나의 세계에서 가장 연한 부분을 모세씨와 만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나기 오라버니만이 접근하고 접촉할 수 있던 그 세계를, 금주씨의 죽음과 이미 상당히 죽어버린 애자와 뒤틀림이 담긴 세계를 열어 보인다는 의미입니다. 나나의 내면에서 그 부분은 잠잠한 듯 보여도 끊임없이 떨고 진동하는 곳, 가장 민감한 비늘이 돋는 곳.

160쪽,
잊지 마. 내가 이렇게 아플 수 있으면 남도 이렇게 아플 수 있다는 거. 제대로 연결해서 생각해야 해. 그런데 이렇게 연결하는 것은 의외로 당연하게 일어나는 일은 아닐지도 몰라. 오히려 그런 것쯤 없는 셈으로 여기며 지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는 정도인지도 몰라. 그러니까 기억해두지 않으면 안돼. 안 그러면 잊어먹게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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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D 2017-07-16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좋아서 머뭇거리셨다는 말씀에 ‘아핫!‘했습니다.
전 왜그런지 너무 완벽하게 맘에들었던 책들은 리뷰를 거의 쓰지 못해요. 마치 제 못난 리뷰가 그 책의 감동을 축소시킬 것이 염려되서랄까요.^^ 머뭇거리신 리뷰 꼼꼼하게 잘 읽고 좋아요 누르고 갑니다^^ 잘 읽어용 :)

시읽는리니 2017-08-05 03:07   좋아요 0 | URL
공감해요. 그래서 더 어렵게 읽었고, 어렵게 쓴 리뷰에요. 좋은 마음을 제대로 전달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ㅎㅎㅎ 꼼꼼하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리제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