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의 마음
김금희 지음 / 창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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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그 속에 꼬깃꼬깃 채워진 기억들은 처음엔 말랑했던 마음을 점차로 굳어져 버리게 만든다. 크고 작고, 얼마나 더 슬프고 힘들고 하는 것들은 속도의 차이일 뿐. 굳어진 마음을 부여잡고 억지로 미소를 띠며 오늘을 견디고 또 견디는 건 다 똑같다. 그렇게 굳어져 버린 마음은 마음으로 푼다. 누군가와 만나고 같은 처지로 위안을 받으며 때로는 쓸데없는 이야기들로 시간을 채우고 마음은 말랑해지게 만드는 일. 누군가와 공유하는 게 상처라는 것은 슬프지만, 그것을 함께 견딜 수 있다는 것은 또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마음으로 마음을 만지작거릴 수 있다는 것은 또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경애(敬愛)의 마음>에는 유독 마음이 쓰이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제목은 ‘경애’이지만 느닷없이 초반부터 ‘상수’가 먼저 등장하고, 상수는 상상력 넘치고 무모하고 또 정이 많은 인물이고, 그는 또 경애를 만나고 경애는 상수만큼이나 좋은 사람이고, 그들이 같은 공간에서 만나고 추억하는 많은 인물들이 이상하게 마음에 들어오는 소설이다. 그중 가장 존재감이 두드러지는 인물은 단연 경애와 상수인데, 둘이 가지고 있는 기억의 접점이 하나씩 드러나면서 마음이 포개어지는 과정이 섬세하게 그려진다. 경애와 상수는 갑작스러운 사고로 소중한 사람인 E를 잃었고, 소중한 사람을 온전히 떠나보내지 못한 채 마음을 걸어 잠갔다. 그렇게 수많은 오늘을 버텨온 그들은 서로가 서로인지를 모른 채 ‘언니는 죄가 없다’라는 연애 상담 페이지에서 인연을 이어나갔고, 일터에서 만나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된다. 경애는 시종일관 담담하고 차분하다. 상수는  다소 유머스러울 정도로 무모하고 우직한 면이 있다. 평범하지 않은 그들의 만남에는 진심이 있어 잔잔하게 마음에 폭 잠긴다.

두 마음의 파동 이외에도, 소설은 다양한 이야깃거리가 쌓여 있다. 욕심 때문에 모두를 죽게 만든 화재사건의 트라우마에 대하여, 용서와 회개의 의미에 대하여, 부당함을 지적하면 또다시 부당함으로 일관하는 기업의 횡포에 대하여, 여성의 연대에 대하여, 사랑에 대하여, 그리고 그 모든 일들에서 절대로 폐기되지 말아야 하는 마음에 관하여.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많은 말을 삼키고 내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위로받을 것이다. 소설 속 경애와 상수의 시선을 따라가며 그들이 했던 것처럼, 소설 속의 이야기와 내가 사는 현실의 접점을 찾아가면서.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나는 항상 같은 ‘오늘’을 견디고, ‘내일’을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여러 소중한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엄청나게 대단하고 거창한 것은 아니지만, 사소한 기억과 만남과 한마디의 말들. 모두가 ‘마음’이 담긴 것이었다.




● 24쪽,
누구를 인정하기 위해서 자신을 깎아내릴 필요는 없어. 사는 건 시소의 문제가 아니라 그네의 문제 같은 거니까. 각자 발을 굴러서 그냥 최대로 공중을 느끼다가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내려오는 거야. 서로가 서로의 옆에서 그저 각자의 그네를 밀어내는 거야.

● 92쪽,
어느날 시장에 갔다가 옥수수가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경애는 이삼일에 한번씩 나가서 옥수수를 사왔다. 옥수수의 힘센 잎들, 동물의 것처럼 부드러운 수염, 그리고 아주 꽉 차오른 알갱이들을 보고 있으면 창으로 문득 들어오는 밤바람을 느끼듯 어떤 환기가 들면서 산다, 라는 말이 생각나곤 했다. 경애가 이방에서 하릴없이 웅크리고 앉아 있는 동안에도 여전히 저 밖에는 ‘산다’라는 것이 있어서 수많은 것들이 생장하며 싸우며 견디고 있다는 것.

● 172쪽,
마음을 폐기하지 마세요. 마음은 그렇게 어느 부분을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우리는 조금 부스러지기는 했지만 파괴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언제든 강변북로를 혼자 달려 돌아올 수 있잖습니까. 건강하세요. 잘 먹고요, 고기도 좋지만 가끔은 야채를, 아니 그냥 잘 지내요. 그것이 우리의 최종 매뉴얼이에요.

● 217쪽,
우리는 같은 사람들이었을까. 그러니까 누워서 종일 음악만 듣다가 먼저 배고픈 사람이 일어나 라면을 끓였던 스무살 시절의 우리와, 한강에서 오리배를 보고 있던 지난 계절의 우리는 같은 사람이었을까. 각자 다른 차를 타고 강변북로를 달렸던 그 밤의 우리가 같았을까. 어쩌면 손상된 것이 아닐까. 제대로 봉인되어 있던 것을 뜯어서 엉망으로 만든 것이 아닐까.

● 305쪽,
지하상가를 지나다 노숙하는 여자와 아기를 보았을 때 경애가 무심코 했던 불행이라는 언급을 정정하던 E는 그때 겨우 열여덟의 소년이었다. 그런 깊이를 가지기 위해서는 얼마나 반복된 현실과의 충돌이 있었을까. 마치 운석이 수없이 충돌해 만들어진 달의 크리에이터처럼 일상의 어떤 일들이 E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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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과거를 지워드립니다
비프케 로렌츠 지음, 서유리 옮김 / 레드박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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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여행 이야기가 매력적인 건, 인생의 불확실성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선택’의 순간들을 조금 더 세심하게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이다. 선택의 순간들은 우리의 인생에서 수만 개, 아니 셀 수도 없는 무한의 갈림길을 마주치는 것과 같다. 어떠한 선택은 때론 행복과 엄청난 쾌감을, 어떠한 선택은 우리를 무너지게 만드는 좌절과 슬픔을 주기도 하는데, 이런 선택의 순간을 내 손으로 다시 바꿀 수 있다면 어떨까. 행복할까, 아니면 불행할까. 소설 <당신의 과거를 지워드립니다>는 엄연히 말해서 이제껏 보아왔던 시간여행의 스토리와는 조금 다르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의 나쁜 부분을 ‘수정’할 수 있다는 어마어마한 판타지를 담고 있다.

 

게다가 주인공인 찰리는 온갖 수치스러운 기억들과 트라우마를 안고 제멋대로 살아가면서, 최근엔 기대를 품고 간 동창회에서 첫사랑 남자에게 이용까지 당해 엄청난 망신을 당한 참이다. 아마도 많은 독자들이 말로는 뱉지 않아도 잠깐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 차라리 바꾸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결국, 더 이상 찌질이로 살고 싶지 않다며 과거를 바꿔주겠다는 사람을 찾아간 찰리는 자신의 지우고 싶은 기억들 몇 가지를 없애버리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선택은 늘 다른 선택과, 다른 상황과 연계되어 있지 않은가. 찰리가 사는 세상은 완전히 바뀌어버린다. 온갖 호화로운 일상, 꿈에 그리던 모습들이 눈앞에 펼쳐져 기쁘면서도 어딘가 시원치 않은 구석들이 존재한다. 왜일까.

 

과거의 선택을 후회하거나 바꾸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누구에게나 수치스러운 기억 하나쯤은 있으니까. 나쁜 과거는 불현듯 찾아와 기억의 주인을 괴롭힌다. 전혀 그것과 상관없는 생각을 하다가도 반짝 떠오를 때는 얼마나 야속한지. 부끄러운 기억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기분 좋은 생각으로 나쁜 기억을 없애버리려고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은 지워지지 않고 기억도 생생하다. 그러나 소설은 아마도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과거를 뼈저리게 후회하고 없애버리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반성할 것은 반성하고 책임질 일은 책임지고, 만약 과거로 인해 무엇인가 틀어졌다 하더라도 다시 좋은 (내가 원하는) 모양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것. 결국 과거를 받아들이고, 현재와 미래를 더 잘 살아가는 것이 작가가 생각하는 ‘행복’이다.

 

소설의 구성과 주제는 다소 식상한 부분이 있지만, 꽤 많은 분량 안에서 흐트러지지 않고 메시지를 전달한다. 또한 그 전달 방식이 누구나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기에 이 소설이 많은 사랑을 받은 게 아닌가 생각된다. 영화의 장면이 바뀌는 듯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소설 속에선 주인공이 가장 사랑하는 노래 가사까지 담겨, 다양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오랫동안 스테디셀러로 사랑을 받은 이유를 알게 되었고, 새롭게 옷을 입고 재출간한 책이 이 책을 모르는 또 다른 사람에게 현재의 행복을 찾아줄 수 있기를 바란다.

 

 


34쪽,
게오르크 아저씨가 팀에게서 동창회 주소록을 빼앗아 고이 접은 다음 편지 봉투에 넣어 나에게 전해주었다. 게오르크 아저씨는 지금 내 심정이 어떨지 눈치챈 모양이었다. 사실 나는 예전에 같이 학교를 다녔던 동창생들이 어떻게 살고 있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다들 성공해서 탄탄대로를 달리든 말든 나만 가만 내버려두면 그만이었다. 그런데도 왜 갑자기 이렇게 기분이 꿀꿀할까?

 

129쪽,
만약 그럴 수 있다면? 문득 다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는 마술이나 마법 따위는 믿지 않는다. 심지어 오늘의 운세도 믿지 않아 아예 읽지 않는 사람이다. 하지만 만약 정말로 그럴 수 있다면? 나는 이런 생각을 집어치웠다. 이런 생각 자체가 말이 안 된다! 그네에 앉아 있는 아이가 또다시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나도 다섯 살 때는 저렇게 귀여웠을 것이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단지 내가 믿지 않기 때문에 절호의 기회를 날려버리는 거라면?

 

138쪽,
“제가 처음에 말씀드렸다시피 우리의 인생은 수백만, 수천만 개의 다양한 가능성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무한히 많은 숫자 조합이 가능한 숫자 자물쇠처럼 말이죠. 우리가 왼쪽으로 가면 오른쪽으로 갔을 때와 전혀 다른 인생이 펼쳐지는 거죠. 출근을 단 5분만 늦게 했어도 우리의 남은 인생에 평생 영향을 미쳤을 사람을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어요.”

 

372쪽,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내가 결국 입을 뗐다.
“뭔가가 빠진 느낌이에요.”
게오르크 아저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아신다고요?”
아저씨는 조용히 웃었다. 그러더니 내 손을 꽉 잡고 내 눈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어떤 일들은 바로 우리 코앞에 너무 가까이 있어서 우리가 걸려 넘어져도 못 알아차리는 경우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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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 - 제8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 문학동네 청소년 39
이꽃님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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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의 일들이 모두 세세하게 기억나진 않는다. 그러나 뭉뚱그려 생각해보면 나는 속 썩이는 딸은 아니었어도, 매사에 무관심한 딸이었던 것 같다. 고마움은 알았지만 표현하지 못했고, 미안함을 말하는 것도 얼마나 어려웠는지. 부모님의 표정과 말을 읽어내지 못했고, 만약 읽어낸다 하더라도 진심으로 받아들일 생각을 하지도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사실, 이런 일들이 결코 나한테만 일어났던 일은 아닐 것이다. 청소년기, 정도와 상황의 차이는 있어도 우리는 누구나 이런 어려운 시기를 보낸다.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가족’이란 존재가 참을 수 없이 어렵고 혼란해지는 시절.

 

“나이를 먹는다는 건 억울하게 늙기만 하는 건가, 정말 좋은 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걸까. 다행히 있긴 있더라고. 그게 뭐냐면 다른 사람의 감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는 거야. 나이를 먹는다는 건 어쩌면 그 시간 동안 다른 사람의 마음을, 감정을 이해하려고 연습하는 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라는 제목의 소설 속에서 이런 성장의 시간들을 재미있게 표현하는데, 바로 이 구절이다. 이제 어른이 되었고 그런 시절이 완벽하게 끝나버린 것 같진 않지만, 가족과의 관계 속에서 감정을 생각하는 일은 꽤 늘었다. ‘감정을 이해하려고 연습하는 시간’. 아마도 그 연습의 시간들은, 내가 지금의 부모님 나이가 될 때까지 계속해서 이어지지 않을까.

「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는 처음부터 끝까지 편지로만 쓴 소설이다. 2016년에 사는 은유라는 소녀가 아빠의 제안으로 1년 뒤의 자신에게 편지를 쓰게 되는데, 이 편지는 우연히 1982년에 사는 (동명의) 은유라는 소녀에게 닿게 된다는 이야기. 두 소녀 모두 이 믿기 힘든 시간여행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장차 서로에게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흥미로운 점은 현재의 시간보다 과거의 시간이 더욱 빠르게 흘러간다는 것. 현재의 ‘은유’가 편지를 쓰고 부치는 동안, 과거의 ‘은유’의 시간은 부리나케 흘러간다. 어느새 과거의 ‘은유’는 현재의 ‘은유’보다 더 많은 세월을 산 ‘언니’가 되어 있다.

 

현재를 사는 은유는, 아빠는 절대로 말해주지 않는 엄마의 존재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는다. 과거의 시간이 빠르게 흐르고, 현재의 시간이 천천히 머물러 있다면, 대체 누구인지 알 수가 없는 엄마라는 존재를 찾는데 힘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둘은 약간의 힌트를 나누고, 점점 엄마의 정체에 가까이 다가간다. 그리고 그들의 시간도 점점 가까워진다. 시간이 맞닿는 지점에서 둘은 어떻게 만나게 될까.

 

마냥 귀여운 시간여행 소설인 줄 알았는데, 마지막 몇 페이지를 들추는 순간 탄성이 터져 나왔다. 제목은, 바로 이런 의미였구나, 시간을 이렇게 설정한 이유가 있었구나, 하고. 가족이라는 미묘한 관계 속에서 버둥거리는, 가장 예민한 시기에 있는 아이들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동시에, 부모님의 마음 또한 놓치지 않는다. 누구나 겪지만 쉽게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을 침착하고 담백하게 그려낸 소설이다. 이 꾸밈없고 순수한 소설이 주는 감동은 의외로 어마어마하다.

 

 

101쪽,
막상 언니에게 아빠에 대해 말해 주려고 하니까 내가 얼마나 아빠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는지 놀랄 정도야. 아빠만 나한테 노관심인 줄 알았더니 나도 만만치 않았나 봐. 서로에 대해 이렇게 관심이 없는데 우린 어쩌자고 아빠와 딸이 된걸까.

146쪽,
하여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가족이라고 해서 네가 원하는 모습대로 네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란 뜻이야. 어쩌면 가족이라는 존재는 더 많이, 더 자주 이해해야 하는 사람들일지도 모르지.

167쪽,
사실 언니 편지를 보고 나니까 혼란스럽긴 해. 만약 언니가 찾은 엄마가 내가 그리워하고 궁금해했던 엄마의 모습이 아니면 어쩌지? 내가 원하던 엄마의 모습이 아니어서 실망해야 하는 걸까? 잘 모르겠어.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도 드는 거야. 나는 엄마가 꿈꾸던 딸의 모습일까…….

219쪽,
있잖아 언니, 아빠랑 나랑 같은 일직선 위에 서 있는 기분이었어. 양끝에서 서로를 향해 달려오고 있는데, 내가 달리기를 멈춰 버린 거야, 그리곤 투덜거리는 거지. 아빠는 왜 더 빨리 달려오지 않는 거야. 왜 이렇게 멀리 있는 거야. 나는 투덜대기만 하고 달리기를 멈춰 버렸어. 아빠는 내가 달리지 않는 만큼 더 많이 달려와야 했어. 길이 그렇게 멀어졌는데 한 번도 투덜대지 않고 나만 보면서 묵묵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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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은 사람
강화길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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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사소한 의심에서 시작된다. 의심에, 또 다른 의심이 붙어 크게 불어나 드디어 '확신'이라는 것을 할 때까지 의심을 하는 자는 심각한 불안에 시달린다. 이 불안의 정체는 '내가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온다. 그런데 의심을 하는 사람이 이상한 걸까, 아니면 의심을 받는 사람이 이상한 걸까? 그게 아니라면 그가 겪는 상황과 경험들이 이상한 것일까? "이것은 자연스러운가? 그러한가? (「굴 말리크가 기억하는 것」)" 강화길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끊임없이 의심하고 갈등하다가 기어코 비밀의 장막을 걷어내고야 만다. 이를테면 호수 바닥의 기다란 물건을 손으로 더듬거나 ( 「호수―다른 사람」), 참을 수 없는 악취의 그 방을 두 눈으로 확인하게 되는 것과 같은 (「방」).

 

그러나 확인된 실체는 강화길의 소설에서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소설 속 1인칭 화자의 서술을 통해 독자는 주인공의 긴장감을 머금은 채 숨 쉴 틈 없이 그의 발자취를 따른다. 주인공은 의심하는 것에 관한 비밀을 파헤치려 애쓴다. 그러나 그것을 보는 우리에게, 작가는 '왜', '어째서'에 집중하게 한다. 진실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왜 주인공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다. 이러한 장치는 표제작인  「괜찮은 사람」에서 가장 극대화된다. '운 좋게 그런 남자를 만났다'라는 주변 사람들의 말처럼, 주인공은 참 괜찮아 보이는 남자에게 새로운 면을 자꾸만 발견한다. 연이은 의심, 혹은 착각. "하필이면 그의 손이 닿는 곳에 내가 있었"고, 하필이면 차를 세운 곳이 피에 젖은 도축장이고, 하필이면 말다툼이 벌어질 때 실수로 그는 핸들을 꺾었다. '하필'이라는 말 건너엔 무엇이 있었길래.

 

 '하필'이라는 말은 어쩌면 가장 무서운 말인지도 모르겠다. 이는 여성폭력의 문제와 깊이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어떠한 이유도 없이 "상대방이 원했기 때문에" 폭력을 당한 여성들은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 입을 다물고, 보복이 두려워 더욱 조심스러워진다. 하필 그곳에 있어서, 하필 누구와 닮아서, 하필 늦은 시간에 밖에 나와 있어서, 하필 짧은 옷을 입어서……. 소설집 『괜찮은 사람』 속에 다뤄진 다양한 여성 폭력의 사례들은 여성들의 이유 모를 불안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숨겨진 것도, 지나치게 드러낸 것도 아닌 작가의 쓰기 방식은 능수능란하다.

 

그 밖에도, 정당함이 무시되는 사회와 그것을 알면서도 온몸을 부딪히는 엄마의 모습을 그린 「당신을 닮은 노래」는 너무나도 공감이 되었다. 마지막에 배치된 「굴 말리크가 기억하는 것」이라는 소설은 폭력과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멀어지는 두 연인을 그린다. 마치 절정에 올랐다가 사르르 사그라진다. "끔찍한 일이죠. 사랑했던 사람이 불행해져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온다는 건. 그리고 그렇게 되도록 행동한다는 것도 (「굴 말리크가 기억하는 것」)"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 선명한 의도로 그려낸 소설들은 '강화길'의 이름을 분명히 기억하게 한다.

 

 

 

 

 

호수에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강간을 당했다. 두들겨맞았다. 왜냐하면 상대가 원했기 때문이다. 상대가 원했기 때문에 그녀는 원하지 않은 일을 당했다. (…) 그러나 자잘한 돌멩이들이 바닥에 떨어지며 냈던 그 소리에 대해서만, 오직 그 이야기만 사람들의 입에 끈질기게 오르내렸다. 그러니까 조심했어야지. 그랬어야지. 그래. 그랬어야지. 그러게 호수에 왜 갔느냐고? 왜 왔느냐고? (‘호수-다른사람‘中)

이건 끊임없이 계속되는 일종의 제자리 걷기였다. 누구도 이 걷기가 끝나리라고 쉽게 낙관하지 않았다. 언제까지나 이어지리라는 걸 모두 알았기 때문이다. 누구도 자신이 가장 힘들게 살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런 말은 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왜냐하면 사실이 아니었으니까. 모두 힘들고, 그래서 모두의 마음은 함께 가난했다. 단지 나만 견딜 수 없는 것이 있다면 불안이었다. (‘괜찮은 사람‘中)

"정말로 가능성이 있는 사람 말이에요, 선생님."
엄마는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자신의 말이 잘못되지도, 이상하지도 않았는데 마치 부끄러워하는 사람처럼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엄마는 약간 억울했다. 그래서 더욱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당신을 닮은 노래‘中)

괜찮아 기채야.
지금도 가끔, 은영이 글자를 읽는 척했던 모습이 떠오를 때가 있다.
그러면 무언가 느껴진다.
그걸로 충분하다. (‘눈사람‘中)

나는 잘못 기억하고 있었어요. 왜인 줄 아십니까? 그 마음이 사라지면 평화로울 거라 생각했었기 때문입니다. 네. 아니었습니다. 화가 났습니다. 그래요, 분노, 분노입니까? 그것이 다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었습니다. 파업했지요. 체포되었습니다. 단지 화가 나 있던 것뿐인데 당신들은 내가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그러더군요. 혹시 분노와 용기는 같은 말입니까?
또 하나 못 알아든 말이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모르겠습니다.
필요 없는 것과, 대신할 것이 있는 것.
둘 다 같은 겁니까? (‘굴 말리크가 기억하는 것‘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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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
콜슨 화이트헤드 지음, 황근하 옮김 / 은행나무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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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그 땅에 지하 철도는 존재했다. 그것은 노예 탈출 비밀 조직이었다. 그러나 소설과 달랐던 점은 이 지하철도가 비유적 표현이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역장', '기관사'로 칭했고, 도망 노예들을 '승객', 그들을 숨겨주는 이들의 집을 '역'으로 부르는 등 실제 철도 용어를 은어로 쓰면서 10만 명이 넘는 노예들을 자유로 이끌었다 (346쪽)"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그렇다. 수많은 노예들이 지하철도라 불리는, 보이지 않는 희망의 길을 통해 그 지긋지긋한 '남부'를 빠져나왔다. 소설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는 이러한 실화를 바탕으로, '노예들이 자유를 찾아 떠날 수 있는 숨겨진 철도가 있었다면'이라는 상상에 착안해 쓰였다.

 

그러나 상상은 단지 소설의 흡인력을 높여주는 장치일 뿐이며 그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현실'이었을 끔찍한 광경들이다. 19세기 미국의 인종 문제를 다룬 문학들과 마찬가지로, 책은 문자 바깥에서 생생하게 그려지는 참상들을 드러낸다. 사소한 이유와 주인들의 변덕으로 흑인들은 온갖 신체적 폭력과 정신적 모욕을 당해야 했다. 가격이 매겨지고, 팔려간 곳에서 죽을 때까지 막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자유를 찾아 떠났다가 잡혀온 이들의 끔찍한 죽음을 두 눈으로 본 그들에게는 탈출은 곧 죽음이었다. 혹시나 탈출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거대한 감옥이자 지옥이었던 그곳에선 사시사철 불안에 떨어야 했다.

 

주인공 '코라'라는 한 흑인 소녀의 탈출기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는 코라의 시점만이 아닌 그 땅에 있었던 많은 사람들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죽을 때까지 농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목화밭에서 피 흘리며 죽었던 코라의 할머니 '아자리', 딸을 버리고 탈출했지만 어떻게 잘 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코라의 엄마 '메이블', 코라와 함께 새로운 삶을 갈망했던 '시저', 그리고 노예사냥꾼 '리지웨이'까지. 그들의 목소리는 온 평생 자유를 생각했던, 혹은 자유를 생각하지도 못하고 죽어버린 당시 흑인들의 삶을 재현해낸다. 그나마 큰 용기와 희망을 품었던 소설 속 '코라'의 탈출도 예상한 대로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한고비를 넘어 새롭게 밟은 '역'에선 한순간도 긴장을 놓지 않게 하는 장애물들이 펼쳐진다. 끔찍한 것은 그들을 속이는 가혹한 현실들이다. 평화로운 곳으로 여겨졌던 노스캐롤라이나의 '자유의 숲'은 사실 훼손된 시체들이 끊임없이 걸려 있는 죽음의 길인 것처럼.

 

그러나 희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죽음을 무릅쓰고 누군가의 자유를 위해 힘써주는 '지하철도' ― 여기선 비유적 표현 ― 의 정의가 존재하고, 어두운 과거를 인식하고 바로잡으려는 움직임이 있는 한.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가 남겨준 물음은 바로 이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누군가의 자유를 침범하진 않았는가. 그때와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우리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우리는 자유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박진감 넘치는 소설 속의 소중한 메시지가 가슴에 담긴다.


 

82쪽,
여기서 먼 곳, 그렇게 밖에 말해줄 수 없구나. 그 많은 노선이 바뀌는 걸 바로바로 알기는 힘들다. 완행열차, 급행열차, 닫히는 역도 있고, 행선지가 늘어나기도 하고. 문제는 어떤 종착역이 다른 종착역보다 더 마음에 들 수도 있다는 거야. 역이 발각되기도 하고, 노선이 끊기기도 한다. 기차에서 내릴 때까지는 저 위에서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절대 알 수가 없어.

136쪽,
훔친 땅에서 일하는 훔친 몸들, 그것은 피로 가는 보일러, 멈추지 않는 엔진이었다. 스티븐스가 설명한 수술로 백인은 진정한 의미에서 미래를 훔치기 시작했다고 코라는 생각했다. 당신의 배를 갈라서 피를 뚝뚝 흘리는 미래를 들어내는 것. 누군가의 아기를 뺏어 간다는 건 바로 그런 것 ― 미래를 훔쳐 가는 것이었다. 그들이 이 땅에 있는 동안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 괴롭히고, 훗날 그들의 후손이 더 나은 삶을 살리라는 희망마저 앗아 가버리는 것이었다.



203쪽,
자유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바뀌는 것이었다. 숲을 가까이서 보면 나무들로 빽빽하게만 바깥에서, 텅 빈 초원에서 보면 그 진짜 윤곽을 볼 수 있는 것과 같았다. 자유가 된다는 것은 사슬과는 혹은 얼마나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느냐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298쪽,
그 전날 밤 테네시에서, 리지웨이는 코라와 엄마를 미국의 계획의 결함이라고 했다. 그 두 여자가 결함이라면 이 집단은 무엇이란 말인가?

319쪽,
한 가지 착각이 있습니다. 우리가 노예제를 벗어날 수 있다는 착각입니다.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그 상처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어머니가 팔려 가고, 아버지가 매를 맞고, 여동생이 우두머리나 주인에게 능욕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여러분은 쇠사슬 없이, 멍에 없이, 새로운 가족과 함께 오늘 여기 앉아 있으리라고 생각이나 하셨습니까? 여러분이 아는 모든 것이 자유는 속임수라고 말했습니다 ― 하지만 여러분은 여기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달립니다. 저 밝은 보름달 빛을 따라 안식처를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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