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호위
조해진 지음 / 창비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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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의 호위, 라는 제목을 발음할수록 따스한 기분이 든다. 게다가 책을 다 읽고 난 뒤에 제목을 보면 그 빛은 더욱 밝게 빛난다. 잿빛 세상에서 정처 없이 거닐 때, 혹은 도저히 길을 찾지 못할 때 우연히 빛 - 사람, 목소리, 연결되었다는 마음, 때로는 사물 등 - 의 호위를 받는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인 일이다. 다행이라고만 할까, 때로는 사람을 살릴만한 가장 강한 힘의 빛을 선사하기도 한다.

 작가의 장편소설 『로기완을 만났다』에서 느꼈던 감정은 여전하면서도, 더 깊어진 것도 같다. 작가의 말에서 "이제야 나는, 진짜 타인에 대해 쓸 수 있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고 밝히는 작가는 이번 소설집에서 시종일관 따뜻한 시선으로 타인을 본다. 유대인 등록령으로 지하창고에 은신한 유대인, 불법체류자, 역사적 폭력의 피해자, 직업을 잃은 사람들이 소설의 주인공들이며, 비슷한 사람들이 가느다란 끈으로 만나 서로를 은연중에 다독이고 '호위'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그들은 "두 사람을 태운 전혀 다른 두 척의 배가 똑같은 섬에서, 똑같은 풍랑을 견디며 잠시 표류한 적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빛의 호위')" 서로를 위로한다. 언어를 초월한 교감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용기를 주고 ('번역의 시작'), 사는 게 원래 이렇게 무서운 거냐며 편지로 한탄하기도 하고 ('산책자의 행복'), 만남을 기대하며 서로의 신념을 상상하기도 한다 ('시간의 거절').

  온전히 조해진만의 통일된 감정으로 읽고 싶어서 기다렸던 <산책자의 행복>도 너무 좋았고, 우연히 먼저 읽어본 <사물과의 작별>도 다시 읽으니 더 좋았다. 다른 작품들도 빼놓을 것들이 없었다. 상처를 받아 나약하고 무기력해진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힘들지만, 조해진 작가가 써낸 아름다운 언어들이 그 슬픔과 아픔을 중화시키고 있었다. 빛, 철컹하는 기차 소리, 봄밤의 포근한 기억, 라오슈, 언니, 이름, 노래……와 같은 언어들이 두드러져, 소설의 끝에 가려진 주인공들의 따뜻한 내일을 상상할 수 있을 정도로.

 조해진이라는 작가는 내게 이렇게 다가온다. 작은 (이란 단어를 섣불리 판단하여 불끈! 하는 사람이 없었으면-) 사람들에 집중하여 그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천천히 보듬어 나간다. 그의 시선과 손길이 참 좋아서, 한동안은 그의 이름이 적힌 소설들에 빠져있을 것 같다.

 

 

57쪽, 번역의 시작
그의 머릿속에서 나는 한글을 깨치지 못한 다섯살 아이로 남아 있었다. 그림이라면 어린 딸아이도 해독할 수 있을 거라고, 그는 생각했을지 모른다. 다리의 길이가 제각각인 의자는 불안감, 식품 판매대에 생뚱맞게 놓여 있는 곰 인형은 외로움, 갖가지 모양의 사탕들로 가득한 유리병은 그리움…… 때로는 불확실한 언어보다 형체가 뚜렷한 사물이 그 순간의 감정을 더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거라고, 나는 이 공책을 보며 배웠다.

69쪽, 사물과의 작별
긴 이야기의 끝에서 고모가 나른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렇게나 늙고 병들었는데도, 아침에 눈을 뜨면 내가 있는 곳은 여전히 그 봄밤의 태영음반사야.

114쪽, 동쪽 伯의 숲
그의 말을 듣는 동안, 내 마음속엔 삶의 끝자락에 깃발을 꽂고 어제보다 더 큰 부끄러움을 좇아 욕망 없는 정복자처럼 한걸음 한걸음 혼신의 힘으로 걸어왔을 한 인간의 긴 발자취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가 걷는 곳은 언제나 빈 들판이었고, 투명한 계단을 지나 하늘 끝까지 이어진 그 발자취는 자격을 되묻는 것으로 충만했던 내 작은 웅덩이에서 올려다본 한 인간의 별자리처럼 빛났다. 상상보다 더 환하게, 더 고독하게……

128쪽, 산책자의 행복
라오슈, 오늘 저는 부재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그건, 영원이라는 시작도 끝도 없는 선 위에서 점멸하는 작은 점, 부재함으로써 존재하는 이선을 생각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라오슈는 지금 어디에 계신가요. 어떤 언어가 라오슈의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 걸까요. 행복한가요, 라오슈? 제가 라오슈에게서 듣고 싶은 말은 사실 그뿐인데, 오늘도 저의 타전은 무력합니다.

213쪽, 문주
- 있잖아요, 왜, 사진의 접힌 부분 같은 거, 펴본 뒤에야 중요한 단서였다는 걸 알게 되는…… 내일 그분을 만나는 게 그런 과정일 수도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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