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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잠깐 설웁다 ㅣ 문학동네 시인선 90
허은실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월
평점 :
"그냥 좋아"라는 말이 시집에선 허용될 것만 같다.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좋다는 말 한마디로 충분하다 (때로는 어떻게 말할지 애매해서 쓰질 못하지만). 그러나 여느 때와 다르게 이렇듯 길게 써내리는 이유는 담고 싶은 문장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라고, 애써 핑계를 대본다.
예전, 대학교 강의 시간에 여성적 글쓰기에 대해 잠깐 언급이 된 적이 있었다. 대표적인 작가도 이름만 붙여서 이야기되었다. 교양 수업이라서 깊게 들어가지 않았기에 그리 영향력 있게 다가오지 않았던 설명이었다. 이 시를 읽으면서 그때의 기억이 났다. 만약 지금이었다면 허은실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밀도 있는 여성의 말', 여성이 온몸으로 부딪쳐 살아온 생애가 실려있는 시집이다. 어쩌면 여성만이 쓸 수 있는 시집인 것 같기도 한데, 시인이 하고 싶던 말이 아주 꼭꼭 담겼다. 은은하면서도 고요하면서도, 강하게 흘러나오는 언어들이 마음에 쏙 박혀온다.
"소풍이라 말하려 했는데 / 슬픔이 와 있다 (12쪽, 저녁의 호명)"
"익숙하던 것들이 먼저 배반하지 / 그러므로 어느 날 / 밥 냄새를 견딜 수 없게 되는 것 / 너의 멜로디를 참을 수 없게 되는 것 (50쪽, 입덧)"
이토록 슬픔이 진하게 느껴지는 것도 희한한 일이다. 요즘 부쩍 무던하게 넘기곤 했던 페이지가 느즈막이 넘어간다. 한숨이 쉬어진다. 구름에 손이 닿을 것 같은 언덕에서 붉은빛이 돋았다가 어느새 어둑어둑해지는 석양을 닮았다. 저녁의 붉은 노을. 가슴이 벅차오르는 듯, 가장 행복했던 기억과 어떤 불안한 기억과 장면이 동시에 떠오르는 순간들. '한 생애의 후루룩'이라는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인생의 초입에 있는 나는 일상에서 벗어나 이 시집을 읽었을 느낌을 상상하는데도 그게 무엇인지 알 것만 같다.
"후루룩 입천장이 데이는 시절 / 어둑신한 부엌에 서서 달그락거리는 / 한 생애의 / 후루룩, (70쪽, 후루룩 - 최승자 시인에게)"
'다 자라지도 않았는데 늙어가고 있'는 우리는, 매일 똑같은 장면과 비슷한 소음을 듣는 우리는, 사소하고 익숙한 것들에 다치고 뒹구는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며 견디고 있을까. 구수하게 흘러나오는 추억과 눈물이 핑 도는 어린 시절의 냄새 같은 것들, 그때는 떨쳐내고 싶었던 기억들. 설웁다고 말하며, 최승자를 떠올리는 시인 허은실에게서 깊은 아픔을 보다가, 제목에 붙여진 '잠깐'이라는 말에 안심을 한다. 그래, 우리는 잠깐, 잠깐씩 슬퍼하며 하루를 살아내고 있다. 잠깐, 정도라면 충분히 괜찮다. 어쩌면 이 수식어는 시인이 건네준 찰나의 위로인 것 같기도 하다.
20쪽, 바람이 부네, 누가 이름을 부르네 입안 가득 손톱이 차올라 / 뱉어내고 비워지지 않네 / 문을 긁다 빠진 손톱들 / 더러는 얼굴에 붙어 떨어지지 않네 숲은 수런수런 소문을 기르네 / 바람은 뼈마디를 건너 / 몸속에 신전을 짓고 / 바람에선 쇠맛이 나 어찌 오셨는지요 아흐레 아침 / 손금이 아파요 / 누가 여기다 슬픔을 슬어놓고 갔나요 / 내 혀가 말을 꾸미고 있어요
36쪽, 목 없는 나날 타인을 견디는 것과 / 외로움을 견디는 일 / 어떤 것이 더 난해한가 다 자라지도 않았는데 늙어가고 있다 / 그러나 감상은 단지 기후 같은 것 완전히 절망하지도 / 온전히 희망하지도 / 미안하지만 나의 모자여 /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47쪽, 당신의 연안 나는 당산나무 벌어진 가지 속에 / 돌 하나를 몰래 끼워둡니다 / 당신이 나무를 올려다보며 천천히 한 바퀴를 더 돕니다 /공전은 서로의 둘레를 걸어주는 일
58쪽, 이마 타인의 손에 이마를 맡기고 있을 때 / 나는 조금 선량해지는 것 같아 / 너의 양쪽 손으로 이어진 / 이마와 이마의 아득한 뒤편을 / 나는 눈을 감고 걸어가보았다 이마의 크기가 / 손바닥의 크기와 비슷한 이유를 / 알 것 같았다
84쪽, 바라나시 대답이란 날카로운 물음표 / 아가미를 꿰는 낚싯바늘이어서 가닿지 못할 음역을 / 더듬어볼 뿐 슬픔이라는 타관을 떠돌다 우리는 / 미아가 되어 / 어린 염소를 껴안고 / 오 미아미아 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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