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색 히비스커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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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은 종종, 변화를 위한 누군가의 작은 노력에 대해 폄하하곤 한다. “뭐 그렇게까지 해, 너 하나 바뀐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아, 헛수고야, 세상은 그리 쉽게 바뀌지 않아. 그냥 가만히 있으면 잊힐 텐데 뭣하러 건드려서는.” 그들은 과정을 비웃고, 작은 실패가 있더라도 모든 변화가 끝난 것처럼 여긴다. 다시는 성공이 다가오지 못할 것처럼.

엄격한 가톨릭 교리와 가부장제 속에서 살아가는 한 가족이 있다. 아버지는 마을에서 큰 사업체와 진보 성향의 언론사를 소유하면서도 독실함과 베풂을 잃지 않아 사람들에게 추앙받는 사람이다. 그러나 가정에서는 엄격한 독재자와 다르지 않다. 자신의 이념과 종교적 교리를 세뇌시키고,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행동을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끔찍한 폭력을 휘두른다. 그는 폭력을 휘두른 다음, 마치 자신이 하지 않은 것처럼 가족을 보듬기도 하는 이상한 행동을 보인다. 오랜 시간 ‘길들여진’ 어머니는 순응하고, 주인공 캄빌리와 오빠 자자 또한 대부분의 상황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지만, 우연히 고모가 사는 ‘은수카’를 방문한 후 달라지는 마음을 느끼게 된다.

​여기까지는 여타 성장소설과 비슷한 플롯이라 여겨진다. 화자인 ‘캄빌리’는 마음으로는 극적인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으면서도, 쉴 새 없이 자신의 행동의 옳고 그름을 점검하고 판단한다. 계속해서 예상외의 행동을 보이는 오빠의 모습 또한 긴장하며 살핀다. 아버지의 존재는 늘 소녀의 뒤에 있다. 변화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듯 보인다. 또한, ‘나이지리아’라는 우리에게 생소한 국가의 상황은 그리 녹록지 않다. 폭력의 피해를 당하면서도 일시적인 도움만 받을 뿐, 결국엔 아버지의 아래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무기력한 상황 속에서 이야기는 예상 밖의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소설 <보라색 히비스커스>는 앞에서 언급한, ‘작은 실패를 실패로만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마치 완벽한 실패담처럼 보일 수도 있는 소설이다. 곳곳에 사회적 한계가 존재하고, 결말은 시원치 않다. 이를테면, 그나마 진보적이라 보였던 이모의 언어에도 뿌리 깊은 관습이 있고, 아버지의 품에서 벗어난 캄빌리는 새롭게 인연을 맺게 된 신부님의 말을 마치 하느님의 말씀인 것처럼 무조건적으로 따르기도 한다. 조금의 변화를 띈 어머니와 오빠, 캄빌리의 미래 또한 불투명하다. 노력 끝에 비자를 받아 미국이라는 새 땅에 정착한 이모 가족의 미래도 어떠할지 상상할 수 없다.

주인공들은 시시각각 갈등한다. 자유를 부르짖다가, 수그러들고, 웅크렸다 다시 일어난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을 그저 부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소설 속 가족의 모습은 그저 개인의 이야기일 수도 있으나, 과하게 말하면 조금 더 확장된 시민의 모습을 떠올리게도 한다. 주저하고, 고민하고, 망설이는 작은 마음은 하나하나 모여 언젠가 큰 불꽃이 된다. 무엇보다 특별한 빛과 색을 띄는 히비스커스가 된다.

“지금 내게 오빠의 반항은 이페오마 고모의 실험적인 보라색 히비스커스처럼 느껴졌다. 희귀하고 향기로우며 자유라는 함의를 품은. 쿠데타 이후에 정부 광장에서 녹색 잎을 흔들던 군중이 외친 것과는 다른 종류의 자유. 원하는 것이 될, 원하는 것을 할 자유.” (27쪽)

내가 꿈꾸는 것이 아님을 확인하려고 검은 미사보 밑으로 손을 집어넣어 콘로 한 가닥을 잡아당겼다. 왜 그들은, 오빠와 어머니는,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사람들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왜 아버지는 방금 오빠가 말대꾸를 하지 않은 것처럼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는 것일까?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려서 나들이용 빨간 원피스를 갈아입으러 위층으로 향했다. - P18

"누니에 음." 이페오마 고모가 부르자 어머니가 돌아봤다.

몇 년 전 이페오마 고모가 우리 어머니를 "누니에 음"이라고 부르는 걸 처음 들었을 때는 한 여자가 다른 여자를 ‘내 아내’라고 부른다는 데 경악했다. 내가 묻자 아버지는 그것이 불경한 전통, 결혼은 남자 혼자 하는 게 아니라 가족 전체가 하는 것이라는 생각의 잔재라고 말했다. 나중에 어머니는, 내 방에 단둘이 있을 때였는데도, 이렇게 속삭였다. "나는 아버지의 아내이니까 고모의 아내이기도 한 거야. 그 호칭은 고모가 나를 받아들인다는 뜻이란다." - P96

그리고 벨트가 멈추자 아버지는 자기 손안의 가죽을 가만히 쳐다봤다. 얼굴은 구겨졌고 눈꺼풀은 축 처졌다. "왜 죄악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거야?" 아버지가 물었다. "왜 죄악을 좋아하는 거야?"

어머니가 아버지에게서 벨트를 받아 식탁에 놨다.

아버지가 오빠와 나를 홱 끌어안았다. "많이 아팠니? 살갗이 터졌니?" 아버지가 우리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나는 등이 욱신거렸지만 아니라고, 아프지 않다고 말했다. 죄악을 좋아하는 것에 대해 얘기하며 고개를 흔드는 아버지는 마치 뭔가에, 떨쳐 낼 수 없는 뭔가에 짓눌린 듯한 모습이었다. - P132

"겁낼 것 없어, 은네. 재밌을 거야." 이페오마 고모가 말했고 나는 여전히 멍한 눈빛으로 고모를 돌아봤다. 고모의 코는 뾰루지처럼 작은 땀방울로 뒤덮여 있었다. 너무나 행복하고 편안해 보이는 고모를 보고 어떻게 내 주위에 저런 기분인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지금 내 속에는 불길이 타오르는데, 공포와 희망이 뒤섞여 내 발목을 움켜잡는데. - P215

하지만 고모도 어머니와 나한테는 편지를 보낸다. 두 개의 직업, 전문대의 일자리와 약국 또는 (미국인들 표현에 따르면) 드럭스토어의 일자리에 대해 쓴다. 커다란 토마토와 값싼 빵에 대해 쓴다. 하지만 대개는 그리운 것과 희망하는 것에 대해 쓴다. 과거와 미래에 살기 위해 현재는 외면하는 사람처럼, 때로는 고모의 편지가 한도 끝도 없이 계속되다가 잉크가 번져서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을 때도 있다. 한 번은 이렇게 썼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몇 번 시도했다가 실패했기 때문에 민주 정치를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다. 마치 오늘날의 민주 국가들은 처음부터 잘했던 것처럼. 그것은 걸음마를 떼려다 엉덩방아를 찧는 아기에게 가만있으라고 하는 것과 같다. 마치 그 아기를 앞질러 가는 어른들은 기어 다녔던 시절이 없는 것처럼. - P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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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오마가린 왕자 도난 사건
필립 스테드 지음, 에린 스테드 그림, 김경주 옮김, 마크 트웨인 원작 / arte(아르테)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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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동화를 읽습니다. 예전에 동화를 잘 몰랐을 땐 편견이 있었어요. 이야기 흐름이 비슷하게 흘러간다던가 결말을 예상할 수 있다던가 하는 것이었죠. 그러나 세상에 수많은 가지각색 책들이 있는 것처럼, 동화도 생각보다 꽤 다양한 방식으로 쓰인 것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권선징악에 맞춰진 행복한 동화도 있었고, 어린이들이 봐도 괜찮을까 싶은 어두운 동화들도 있었고, 역사적 사실을 가감 없이 다룬 동화들도 있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지 못했을 뿐, 아이들의 상상력을 풍부하게 발달시켜줄 수 있는 책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이 책 또한 꽤 독특한 느낌이 드는 동화입니다. 마크 트웨인 원작이라고 적혀 있지만 리메이크나 재출간이 아니라, 미완성된 동화를 현재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이 완성한 방식이에요. 1879년에 작가 ‘마크 트웨인’이 두 딸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는 대략 16쪽의 스토리로 과거를 건너 현재로 오게 되었습니다. 매력적이고 신비스럽지만 완성되지 못했던 동화는 이야기의 얼개를 유지하며 두 작가들에 의해 아름다운 그림책으로 다시 만들어졌지요. 이러한 사연에 따라 이 동화가 갖고 있는 독특한 점은 책의 중간중간 과거의 작가 (마크 트웨인)와 현재의 작가 (필립, 에린 스테드)가 가상으로 대화하며 해설하는 장면이 들어가 있다는 것입니다. 원작자에게 존경을 표하는 동시에, 툭툭 던지며 장난스레 대화하는 말투 덕분에 그림책의 이야기가 더욱 산뜻하고 독특한 느낌을 자아냅니다.

동화의 초반을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가난하고 불행한 소년 ‘조니’에게 갑작스럽게 슬픈 일이 닥쳤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유일한 친구였던 닭 ‘전염병과 기근’을 시장에서 팔아오라는 할아버지의 호통이었습니다. 포악한 왕이 지배하는 세상은 치열하고, 어른들은 각자의 삶만 바라보았지요. 퉁명스럽고 불친절한 사람들 사이에서 치이고 치이던 조니는 눈물을 흘렸고, 그 앞에 우연히 한 노파가 나타나 ‘한 푼만 달라’며 구걸을 하게 됩니다. 허름하지만 그 속에 숨겨진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얼굴을 발견한 소년은 그의 친구 ‘전염병과 기근’을 행복하게 해주는 조건으로 노파에게 닭을 선물하지요. 소년과 진정한 친구 닭에겐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책 제목에 쓰인 ‘올레오 마가린 왕자’는 또 왜 등장하는 것일까요.

“세상은 아름답고도 위험해 / 기쁘기도 슬프기도 해 / 고마워할 줄 모르면서 베풀기도 하고 / 아주, 아주 많은 것들로 가득해 / 세상은 새롭고도 낡았지 / 크지만 작기도 하고 / 세상은 가혹하면서 친절해 / 우리는, 우리 모두는 / 그 안에 살고 있지” (99쪽)

이야기의 중반, 큰 그림으로 표현된 노랫말이 머릿속에 깊이 각인됩니다. 무척이나 현실적이면서도 신비스러운 동화 <올레오 마가린 왕자 도난 사건>의 느낌을 한눈에 보여주는 것 같아요. 곧이곧대로만 살 수는 없는 세상, 누구에게나 불행과 행복이 찾아올 수 있는 모순된 삶의 무게를 보여주기에, 이 책은 약간 무게감이 있는 편입니다 (아이들은 행복하게만 볼지도 모르겠지만요). 몽글몽글하게 예쁜 그림들이 가득 차있는 책이지만 글밥도 많은 데다가 현실과 이상을 생각할 수 있는 동화라서 초등학생 고학년 자녀와 어른이 함께 생각하며 보면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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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저드 베이커리 - 제2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구병모 지음 / 창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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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 마법은 일어나지 않는다. 오직 비유적 표현으로만 존재할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절하게 마법을 기도해야 할 때가 있다.

여기 한 소년이 있다. 객관적으로 생각해도 엄청나게 큰 불행에 휩싸인. 열여섯살의 소년은 지하철역에 버려졌고, 운좋게 집으로 돌아갔으나 또한번 엄마의 죽음을 바라보아야 했다. 유일하게 남은 가족인 아버지는 단지 자신의 필요에 의해 새엄마와 의붓여동생을 데리고 왔고, 처음엔 상냥했던 그들은 점차 소년을 경멸하기 시작한다. 말을 더듬고, 구박을 받고, 가족들과 함께 있는 시간을 피하며 살아오던 소년은 어쩔 수 없이 꾸역꾸역 살아왔으나, 성추행을 당한 의붓여동생의 손가락이 자신을 향한 순간 그는 집을 뛰쳐나와 버린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소년이 갈 수 있던 것은 종종 끼니를 때우던 ‘위저드 베이커리’. 무뚝뚝한 빵집 주인과 상냥한 알바생의 도움을 받아 빵집의 비밀 공간에 겨우 겨우 숨었다. 그런데 여긴 정말 수상한 구석이 한두군데가 아니다.

왠지 모르게 평범하면서도 의미심장한 파티시에 마법사, 그리고 파랑새로 변신하는 소녀 직원, 원하는 마법을 선택할 수 있는 갖가지 맛의 빵. 이토록 신비스러운 마법 빵집에서 내가 원하는 환상을 모두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빵집에서는 이러한 우주의 논리 아래, 사소한 마법이라도 충동적으로 쓰면 안된다고 재차 강조한다.

“따라서 저편에서 누군가가 뒤틀어놓은 물질계와 비물질계를, 이편에서 다른 힘으로 붙들거나 되돌려야 한다고. 세상의 마법사들은 모두가 함께 존재하지 않거나, 모두가 같이 존재해야만 하는 딜레마를 안고 살아간다고. 그것은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소망이라는 게 없어지지 않는 한 ― 궁극적으로 인간이라는 존재가 남아 있는 한 계속되는 현상이라고.”

소원을 빌면 뾰로롱, 원하는 것을 모두 이루어주는 램프의 요정 지니는 소설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악한 사람은 불행하고 선한 사람은 행복한, 무조건적인 법이란 없다(사실 한국에서는 대부분 이 반대인 것 같기도). 주인공이 고난을 하나 하나 시원하게 해결하고, 훈훈한 교훈을 주는 누군가를 만나 성장하는 스토리 또한 따라가지 않는다. 이성적이고 시니컬한 소설이 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위저드 베이커리>는 다양한 청소년 소설들 사이에서 분명 다른 색을 띈다.

작가는 약간의 마법(도움)을 가미하며 이 이야기를 통해 ‘선택’과 ‘책임’을 강조한다. 당신의 선택으로 무엇인가를 바꿀 수 있고, 그 선택에 대한 믿음과 책임감을 가진다는 것. 누군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줄 ‘환상’을 줄 수 없다면, 어쩌면 이런 따끔한 충고도 약이 되지 않을까.

 

 

그러나 그리 말하는 이들도 실은 알 거다. 이상과 철저히 거리를 둔 현실을,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상이 주는 무게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필요한 최소한의 금전적인 지원을.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조금은 감수해야 할 여러 유형의 폭력이 있다는 체념적인 단정. 일단 닥치고 집을 나와 청소년쉼터에서 미래를 준비하는 아이들은 아마도 생명의 위협에 가까운 폭력을 피해 도망쳤거나, 견뎌본들 나중에라도 얻을 것 없는 가난한 집에 미련을 버렸거나 둘 중의 하나이리라는 폭 좁은 편견. 기타 강간이나 임신 절도 등의 문제는 가난과 폭력의 별책 부록 같은 것이리라고.

때로는 한없이 어리석지만 그것밖에는 선택할 수 없는 남들의 바람을 이루어지게 도와주면서, 정작 자기 자신은 소원이 없는 사람. 남들의 감사만 받아도 모자랄 마당에 단지 뒤틀린 결과 때문에 비난을 받아야 하는 사람. 사람들은 아마 이렇게 탓할 상대가 있어서 편할 것이다. ‘당신이 그런 수상쩍은 물건을 만들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면 손대지도 않았을 금기를…….’

옛이야기에서와 달리 지금 사람들이 마법의 과자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건 당장의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필요보다는 대체로 추상적이고 감정적인 문제 때문. 과열된 감정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수소를 가득 담은 풍선만큼이나 끝없이 상승할 수 있다. 감정과 풍선의 공통점은 비가시권의 높이에서 제풀에 폭발해버린다는 것.

그에 비하면 현실이란 그넷줄이나 위로 튀어오르는 공과 같이 얼마나 건조하고 절망적인지. 언제나 눈에 보이는 것까지박에 오르지 못하며, 땅이 잡아당기는 힘을 뿌리치지 못하고 다시 내려오니까.



…… 무엇보다도 사람의 감정은 어째서, 뜨거운 물에 닿은 소금처럼 녹아 사라질 수 없는 걸까. 때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참치 통조림만도 못한 주제에.

그러다 문득 소금이란 다만 녹을 뿐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다. 어떤 강제와 분리가 없다면 언제고 언제까지고 그 안에서.

― 언제나 옳은 답지만 고르면서 살아온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당신은 인생에서 한 번도 잘못된 선택을 한 적이 없나요?

― 틀린 선택을 했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게 아니야. 선택의 결과는 스스로 책임지라는 뜻이지. 그 선택의 결과까지 눈에 보이지 않는 힘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너의 선택은 더욱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갈 거란 말을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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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맨션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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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주 작가의 신작 장편소설이 디스토피아를 주제로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보다 더 잘 어울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궁금했다. 새롭게 SF를 그려낸 작가는 그때보다 더 나아갔을까. 어떻게 변화했을까.

이제 한국의 대표 페미니즘 소설이 된 <82년생 김지영>의 이름은 작가의 곁에서 늘 떨어지지 않는다. 누군가는 책 제목을 대며 많은 기대를 하고, 때로는 불평을 하고, 책을 읽어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깎아내리려 용을 쓴다. 종종 이런 글들을 보며 한숨을 쉬면서 새 책을 집필하는 부담감이 어마어마할 거라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작가는 최근 출간 인터뷰에서 ‘페미니즘 작가로 불리는 것에 대해 부담감은 없다’고 밝혔다. 그저 쓰고 싶은 주제를 쓰는 것이라고. 꽤 단단하고 믿음직한 말이다.

2012년부터 구상했고 조금씩 수정해나갔다는 신작 <사하맨션>은 오랫동안 작가가 품고 있던 문제의식이 촘촘히 들어차있다. 소설 속의 사회는 ‘타운’이라는 이름의 기괴한 도시 국가다. 기업의 인수로 탄생한 ‘타운’은 안전이라는 명목하에 엄격한 통제로 유지된다. 공동 총리제를 도입하고, 무분별한 밀입국을 막기 위해 계급을 두었다. 일정 수준 이상의 경제력과 전문 지식 혹은 기술을 가진 L, 자격심사를 통해 2년 동안의 체류권을 가지는 L2, 그리고 그 둘에 모두 속하지 못한 사람들은 ‘사하’라는 이름의 맨션에 숨어들었다. 각자의 상황을 가지고, 맨션의 이름을 따 ‘사하’라고 불리며 배척당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연작 소설처럼 펼쳐진다.

현재 한국의 상황에 모조리 귀 닫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 작은 도시국가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기시감을 무시하고 지나칠 수는 없을 것이다. 거대 기업은 거대 권력과 결탁하고, 주민이라는 이름 아래 보이지 않는 계급이 존재한다. 타운의 주민권을 획득하기 위해 2년마다 검사받는 L2의 인생은 비정규직의 일상과 닮았다. 전염병으로 인해 죽어가는 선한 사람들, 수상한 배의 침몰,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은 나비 혁명, 임신 중절이라는 이슈가 등장한다. 소설의 이야기는 격렬하지 않지만 그것을 읽는 내내 마음은 소용돌이친다. 사실 이러한 문제의식은 현대 사회를 비판하는 여타의 한국 소설에서 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조남주의 소설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런 부분들이다.

“우리,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서로 미안하지? 나한테 진짜 미안해야 할 사람은 누구지? 아무도 내게 사과를 안 해. 누군지도 모르겠어. 그래서 나는, 요즘 분해서 자꾸 눈물이 나.” (117쪽)

사하 맨션에 정착한 사람들은 ‘몰려난’ 사람들이다. 폭력에 대항하다가 죄인이 되고, 누군가를 도와주려다가 죽음을 맞거나 사고를 내고, 조금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 이용당하고 버려지기도 한다. 그들은 사회 속 어디에나 존재하는 약자들이다. 약자들에 대한 억압과 혐오는 소설 속에서도 현실에서도 생생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밖으로,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은 서로에게 의지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매정하게 내치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에게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정작 사과를 해야 할 사람들은 따로 있는데. 그리고 당연히 그 사람들은 사과를 할 생각도, 사과를 해야 한다는 사실조차도 인식하지 못하는데도.

작가는 사하맨션에 들어온 사람들의 각기 다른 사연을 들려주면서 사회의 부조리함을 조용히 고발한다. 연작소설처럼 시점이 바뀌는 소설의 흐름이 익숙하지 않을 수도 있을 테지만, 닫히지 않는 결말에 불만을 가지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이야기의 큰 굴곡보다는 대화나 장면 속에 숨겨진 분노들을 응시하며 읽기를 바란다. 그들은 ‘틀리지 않았다’.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누굴까. 본국 사람도 아니고 타운 사람도 아닌 우리는 누굴까.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성실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면 뭐가 달라지지? 누가 알지? 누가, 나를, 용서해 주지?"
진경은 계속 입을 다물고 있었고, 도경은 길게 한숨을 내쉰 후 등을 돌려 누우며 덧붙였다.
"나도 타운 주민이 되고 싶어." - P51

"위로는 받았어요. 위로라고 생각하고 받았어요. 위로와 배려를 받고 나니 그걸 준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따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결국 팔아먹은 게 됐어요. 그러니까 진경 씨, 살면서 혹시 위로받을 일이 생기더라도 받지 말아요. 위로도 배려도 보살핌도 격려도 함부로 받지 말아요."
아니요. 위로받아도 됩니다. 위로와 배려를 받게 되면 받는 거고 받았더라도 따질 게 있으면 따지는 거고 그리고 더 받을 것이 있다면 받는 게 맞아요. 진경의 머릿속에 이아의 노랫소리가 맴돌았다. - P163

원장은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결정은 아이를 낳겠다는 결정만큼 소중하고 존중받아야 하고 그래서 아이를 낳는 곳은 아이를 낳지 않는 곳도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사람은 잘 모를 수도 있고 부주의할 수도 있고 상황이나 생각이 바뀔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한 번의 실수로 한 사람의 인생이 무너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 P227

"차마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쁘지 않아. 어떻게든 둘러대는 사람들이 주로 나쁘지." - P240

― 당신을 보기 전에는, 막연한 책임감? 죄책감? 그런데 지금은 나도 같아요. 당신이 안쓰러워서.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마음이 사람을 움직이죠. 신념은, 그 자체로는 힘이 없더라고요. - P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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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 - 권여선 장편소설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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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누군가가 죽는다. 그의 죽음을 못 견디게 슬퍼하다가, 언제까지나 절망에 빠져있을 수는 없어서 (사람이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그의 죽음을 비로소 인지하며 애도를 시작한다. 시작한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나, 애써 붙잡고 있던 것을 내려놓거나 마음의 일부를 조금씩 떼어놓기 시작하는 시점을 생각한다면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미처 애도조차 시작할 수 없는 죽음이 있다. 어떤 이유도 밝혀지지 못하고, 무의미한 이유들로 진짜 이유가 숨겨지고, 더 이상 대답조차 할 수 없는 누군가의 죽음에 부조리가 더해진 때. 바로 권여선의 소설 <레몬>에서 등장하는 여고생의 죽음 같은.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꼬이고 꼬여버린 해언이라는 소녀의 죽음 앞에서, 작가는 남아있는 사람들의 심리를 자세히 그리는 데 집중한다.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건 단연 소녀의 가족들이다. 언니의 유별나고 위태로운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봤던 ‘다언’은 이제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만 들으면 경기를 일으킨다. 자신의 얼굴에서 언니의 모습을 속속들이 찾는 엄마를 보고 성형을 결심한다. 수년, 더 오랜 시간이 지나도 죽음이 압도한 삶의 무게는 결코 가벼워지지 않는다. 한편 사건이 발생했을 때 마지막 모습을 보았던 동급생 ‘태림’은 그때의 기억을 잊기 위해 신에게 매달린다. 사건과는 관련이 없지만 자매의 고통을 지켜본 ‘정희’는 죽을 만큼 괴로워하는 ‘다언’의 모습에 또 한 번 자신을 돌아보기도 한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저마다 잡을 수 있는 것들을 붙잡고 꾸역꾸역 살아간다. 

사건의 진실은 명확하게 밝혀지진 않는다. 의뭉스러운 채로 넘어가는 것이 결코 시원치는 않으나, 세상엔 종종 이런 일이 발생한다. 누군가는 입을 닫고, 누군가는 보지 않았다고 세뇌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또 누군가를 위해 비밀을 만든다. 때로는 이 모든 것을 관망한다는 신에게 책임을 돌리기도 한다. 신은 있는가, 어쩌면 신의 존재는 중요하지 않을지도.

그동안 작가의 장편소설을 생각하면 사실 이 소설은 조금 느슨한 감이 있다. 이전의 소설들이 울먹이며 꽉꽉 채워진 느낌이라면, 이번 <레몬>은 하고 싶은 말들을 조금씩 삼키는 느낌이었고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생략된 부분을 읽어내는데 약간의 수고가 들어가는 책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마지막 줄을 넘기고, 작가의 말을 읽는 순간 한꺼번에 모든 답답한 가슴이 품어졌다고 이야기한다면 과장일까. 소설 속에서 삼켜진 모든 말들을 다시 은은하게 채워 넣는 ‘작가의 말’ 전문을 나는 책상 한편에 베껴 적어 놓고 종종 읽어보려 한다.

“사람이 평범하게 태어나, 평화롭게 살다, 평온하게 죽을 수 없다는 걸,
그게 당연하다는 걸 아는데,
저는 그게 가장 두렵고,
두렵지만, 두려워도
삶의 실상을 포기할 수는 없어서,
삶의 반대는 평(平)인 것인가,
그래서 나는 평하지 못한 삶의 두려움을 쓰고 있는 것일까, 생각합니다.” (‘작가의 말’ 중에서)


그러나 우리는 천천히 제자리를 찾아갔다. 눈앞에 임박한 대입시험의 생생하고 폭력적인 부담감이 모든 정서적 충격을 녹여버렸다. 그래, 몇명이 사고를 당하고 유학을 가고 전학을 가고 이런저런 이유로 떠난 것뿐이야. 그래도 우리는 여기 그대로 남아 있잖아? 죽을 맛이야. 아무것도 변한 게 없어. 사는 게 이게 뭐냐. 이게 사는 거냐. 그런 식으로 그 사건은 우리에게서 끝이 났다. - P57

다언은 내가 계속 시를 써으면 했다고 말했다.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다언만이 뭔가를 잃어버린 게 아니었다. 나 또한 뭔가를 잃어버렸다. 오히려 더 치명적인 쪽은 나일 수 있었다. 다언은 자신이 뭘 잃어버렸는지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는 데 반해 나는 무엇을 잃어버렸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살고 있었다. 그런 주제에 다언을 관찰하고 다언의 말을 들으며, 이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고 저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라고 관대한 척 고개나 끄덕이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다언에게 내 속을 들키자 발끈하여 그녀를 공격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나는 자문했다. 나 또한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가. - P67

나는 사물들을 누르거나 밟거나 던지곤 했다. 필연적으로 그 사물들은 보드랍고 물렁하고 깨지지 않는 것들이어야 했다. 그 이유는 내가 부딪치거나 깨지는 소리를 도저히 듣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콱, 퍽, 와작하는 소리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끔찍한 공포에 휩싸였다. 나는 그 소리를 귀로 들을 뿐 아니라 눈으로 보았다. 무엇인가 단단한 것이 단단한 것과 부딪쳐 깨지는 소리를 들으면 저절로 눈에 힘이 들어가고 눈가에 경련이 일었다. 눈앞에 파열음과 굉음들이 만들어내는 타는 듯한 지옥도가 펼쳐졌고 그 한영을 보는 내내 피처럼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 P93

결국 죽음은 죽은 자와 산 자들 사이에 명료한 선을 긋는 사건이에요,라고 다언은 진지하게 말했다. 죽은 자는 저쪽, 나머지는 이쪽, 이런 식으로 위대하든 초라하든, 한 인간의 죽음은 죽은 그 사람과 나머지 전인류 사이에 무섭도록 단호한 선을 긋는다는 점에선 마찬가지라고, 탄생이 나 좀 끼워달라는 식의 본의 아닌 비굴한 합류라면 죽음은 너희들이 나가라는 위력적인 배제라고, 그래서 모든 걸 돌이킬 수 없도록 단절시키는 죽음이야말로 모든 지속을 출발시키는 탄생보다 공평무사하고 숭고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다언은 책을 읽듯이 담담하게 말했다. 오래 다져진 땅 같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죽음에 대한 다언의 관념은 곱씹고 또 곱씹어 어떤 날도 들어가지 않는, 그래서 오히려 노인들의 그것보다 더 무섭고 더 죽음에 가까운 듯 보였다. - P179

나는 궁금하다. 우리 삶에는 정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걸까. 아무리 찾으려 해도, 지어내려 해도, 없는 건 없는 걸까. 그저 한만 남기는 세상인가. 혹시라도 살아 있다는 것, 희열과 공포가 교차하고 평온과 위험이 뒤섞이는 생명 속에 있다는 것, 그것 자체가 의미일 수는 없을까. - P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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