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와 빨강
편혜영 지음 / 창비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오래전 편혜영 작가의 『선의 법칙』 (비교적 최근 소설이다)을 읽고 나서 나는 리뷰에 이렇게 썼다. "어딘가 텁텁한 맛은 있어도, 파국으로 치달아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정도로 어둡지는 않다." 잔잔한 느낌의 소설임에도 왠지 모를 꿉꿉함이 느껴졌었는데 그 꿉꿉함이 견딜만했던 모양이었다. 파국을 그리고 있음에도 살아간다는 느낌을 주어서 희망적이긴 했었다. 그러나 『재와 빨강』을 읽고 나자, 내가 만났던 책이 편혜영 소설의 전부가 아니며 한편으론 그의 새로운 시도였고, 원래 그가 추구하던 것이 바로 이런 문학이었구나 싶었다.

 

 우연히 맨손으로 쥐를 잡는 능력을 인정받게 되어 전염병이 창궐한 국가로 발령 난 주인공. 거리는 쓰레기와 소독약 연기로 매캐하고, 그가 맞는 상황들에는 늘 불운이 감돈다. 본사로 출근하기로 하여 기다렸는데 담당자에게는 연락도 없다. 설상가상으로 아내의 끔찍한 죽음과 그 죽음에 자신이 용의자로 지목되었다는 소식까지 듣게 된다. 그는 결국 길바닥과 지하 하수도까지 내몰린다. 추락의 연속이다.
 주인공의 아내가 왜 죽었는지, 밝혀진 죽음의 시점이 왜 그의 출국 시점과 닿아 있는지, 칼을 쥐는 찰나의 느낌이 왜 익숙하게 남아있는지 소설은 구태여 차례대로 설명하진 않는다. 오로지 주인공이 나락으로 떨어지면서도 꾸역꾸역 살아남으려 애쓰는 광경을 따라갈 뿐이다.

 

 그런데 그의 모습은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가. 도시에 빠르게 전염병을 퍼뜨리는 더럽고 끔찍한 쥐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는 것 같다. 가장 후미지고 어두운 곳에 들끓는 쥐는 주인공의 인생과 연계되어 끊임없이 등장하는데, 마치 짜인 것처럼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되는 상황 속에서도 그렇다. 쥐는 그에게 때로 살기 위한 방편이 되고, 반대로 또 다른 파국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며, 때로는 궁지에 몰린 인간들보다 차라리 해롭지 않은 존재감을 과시한다. 모든 것들 중에서도 가장 웃기는 건, 주인공이 쥐를 때려죽이는 일을 하게 되면서도, 쥐의 엄청난 생존능력을 본받아 어떻게든 살아간다는 점이다.

 

 소설 전체에 퍼져 있는 불쾌감과 아이러니 속에서 맞이하는 마지막 장면은 일품이다. - 여기서 불쾌감은 소설이 아닌, 소설 속 세계에 깔린 것을 말한다 - 죽음의 냄새 대신, 그의 몸이 소독약과 약품 냄새로 뒤덮인 장면 속에선 오히려 한껏 처참한 기분이 든다. 온 세상에 있는 향기와 독한 냄새를 끼얹는다 할지라도, 그의 몸에 뒤덮인 재와 피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가 기억을 모두 잃어버리지 않는 한.

 

 공중전화에서 그가 아는 모든 이름을 부르는 장면도 비슷한 느낌을 준다. 어떻게든 살아간다 하더라도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을 잃어버린 그의 생은 허울뿐이다. 구석으로, 구석으로 내몰리면서도 어떻게든 살아가려 발버둥 치는 모습이, 자신과는 이제 아무 의미 없는 이름들을 부르짖음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과정이 도통 낯설지 않다.

책을 다 읽고 난 뒤, 작가는 왜 이런 소설을 세상에 내보이려 했을까 생각했다. 그것도 무지무지하게 살벌하게까지 써 내려갔는지 궁금했다. 그러다가 현실과 맞닿은 지점이 있을 거란 생각에 약간 소름이 끼쳤다. 부조리한 세계, 인간성의 상실, 추락한 인간의 본성, 끔찍한 전염병이 퍼져도 금방 회복하는 일상성 (혹은 불감증) 등, 그에게 영감을 준 장면들이 진짜 있을 것만 같아서.

 

 

104쪽,
바닥에 떨어진 칼이 그의 얼굴처럼 굳어 있었다. 그는 아무것도 쥐지 않은 손을 여러 번 쥐었다가 폈다. 칼을 쥔 느낌이 익숙하다고 해서, 손에 그런 느낌이 남아 있다고 해서, 손이 그 감각을 고스란히 기억한다고 해서 그가 전처를 찔렀을 리는 없었다. 칼의 손잡이는 대체로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에 어떤 것이든 일단 쥐면 익숙한 느낌이 들 것이다. 그러나 진위와는 상관없이 칼을 쥐었다 놓는 순간, 낯설고도 익숙한 떨림이 자신을 관통하는 순간, 그는 세계가 칼날만큼이나 차갑고 칼자루만큼이나 울퉁불퉁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104쪽,
바닥에 떨어진 칼이 그의 얼굴처럼 굳어 있었다. 그는 아무것도 쥐지 않은 손을 여러 번 쥐었다가 폈다. 칼을 쥔 느낌이 익숙하다고 해서, 손에 그런 느낌이 남아 있다고 해서, 손이 그 감각을 고스란히 기억한다고 해서 그가 전처를 찔렀을 리는 없었다. 칼의 손잡이는 대체로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에 어떤 것이든 일단 쥐면 익숙한 느낌이 들 것이다. 그러나 진위와는 상관없이 칼을 쥐었다 놓는 순간, 낯설고도 익숙한 떨림이 자신을 관통하는 순간, 그는 세계가 칼날만큼이나 차갑고 칼자루만큼이나 울퉁불퉁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168쪽,
그 일들로부터 수년이 흐른 지금, 그는 덥고도 더웠지만 계속해서 아내를 안고 싶게 한 파란 날개 선풍기 때문에 울 것 같았다. 건반을 누를 때마다 음이 떨려 좋은 줄도 모르고 들은 쏘나타 때문에, 지붕에 던져올린, 새가 물어갔는지 쥐가 물어갔는지 알 수 없는 부러진 앞니 때문에, 빨간색 매니큐어가 발라진 발톱 때문에 울 것만 같았다. 지나간 생애가 너무나 사소하고 볼품없어서, 그런 인생에 회한이 느껴져서는 아니었다. 사소하고도 사소한 일로 채워진 현실의 시간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234쪽,
좁은 사각형의 유리상자 안에서 그는 공연히 떠오르는 이름들을, 전처의 이름이나 유진의 이름 혹은 자신의 이름을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 동전을 넣지 않으면 어떠한 신호음도 떨어지지 않는 수화기는 묵묵히 그가 부르는 이름을 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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