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성의 고리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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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한 번은 만나보고 싶었던 제발트라는 이름. 나는 사실 이 책을 꽤 매끄럽게 읽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종종 변덕을 부리는 그래서 어떤 특징으로 정리할 수는 없지만, 내 독서 취향에 맞을 거라고 생각했다. ‘분위기를 탄다’ 이런 말이 어울릴까. 나는 자주 이런 식으로 책을 읽는다. 딱딱한 책은 싫어하고 책의 느낌에 압도당해서 빠져들어 읽는 것을 좋아한다. <토성의 고리>의 경우, 상실과 폐허와 문명의 파괴에 관련된 줄거리가 평소 좋아하던 주제일뿐더러 발췌된 문장 또한 마음에 들었다. 나는 그렇게 혹해서 제발트의 우주로 발을 딛게 되었다. 그러나 그 큰 우주는 너무도 깊고 험난했다.

책의 갈래는 소설이지만 마치 산문처럼 읽히다가도 백과사전만큼의 딱딱한 역사적 사실들을 접한다. 이야기는 뒤섞이고 사건들은 수시로 방향을 바꾼다. 너무도 많은 지식이 나를 덮쳐온다. 깊은 수렁에 빠져 계속해서 빠져나오려다가 미끄러지는 듯한 독서, 참 오랜만이다. 그럼에도 끝까지 이 책을 읽어야만 했던 이유는, 머리를 쥐어 싸매다가 우연히 발견되던 문장들을 놓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때때로 우리는 이 지구에서 사는 데 결코 적응할 수 없는 종류의 인간들이고, 삶이란 끝없이 진행되는,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실수라는 생각이 듭니다.” (259쪽) 

1990년대 화자인지 작가 자신인지 모를 ‘나’의 도보여행으로 시작되는 사색은 그가 바라보는 장소에 따라 과거와 현재, 미래를 끊임없이 넘나들며 이어진다. 장소에는 당연하게도 수많은 시간과 역사가 스며든다. 화자는 도시의 몰락과, 자연의 황폐화, 동물들의 몸짓, 기계와 노동, 건축물에 새겨진 시간의 흔적 등을 화제로, 관련된 방대한 이야기들을 꺼내놓는다.

온전히 책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함에도, 나는 제발트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종종 감탄을 했다.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다. 우리 인간도, 문명도, 우리가 끝없이 쌓아올린 모든 것들은 이내 사라진다. “우리 자신보다 저급하다고 생각하는, 얼마든지 파괴해도 좋다고 여기는 종에게 거듭하여 떠넘긴다는 뜻이 아닌가?(85쪽)” 인간은 같은 종과 다른 종을 파괴하고, 또 파괴하고 파괴한다. 끊임없는 문명과 파괴의 반복.

종종 세상이 너무나도 아슬아슬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다, 이러다 모든 것이 없어져 버리고, 병들어버리는 것은 아닐지.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는 나도 어느새 일상으로 되돌아가 또다시 이전의 실수들을 반복한다. 인간이라는 게 그렇다.



위대한 종족보다 더 오래 산 떡갈나무는 세 그루도 못된다 어떤 작품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놓았다고 해도 기억될 권리를 확보했다고 할 수 없는 일이다. 최상의 인물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지 누가 알겠는가. 양귀비 씨앗은 어디서나 꽃을 피우지만, 어느 여름날 느닷없이 비참함이 눈처럼 우리 위로 내리면 우리는 이제 잊히기를 바라는 것이다. - P35

꿈에서 본 것이 이상하게도 현실보다 더 생생하게 느껴진다면, 이는 아마도 파묻힌 기억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꿈속에서 다른 무언가를, 흐릿하고 뿌연 어떤 것을 통과하면 역설적이게도 모든 것이 훨씬 더 명료하게 나타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작은 물방울이 호수가 되고, 미풍이 폭풍으로, 한줌의 먼지가 황야로, 유황 입자 하나가 분출하는 화산으로 변한다. 우리가 시인과 배우, 기계 기술자, 무대 미술가, 관객 등의 역할을 한꺼번에 떠맡는 이런 연극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 꿈의 도열을 거쳐가는 데는 우리가 잠들 때 가지고 있던 것보다 더 많은 사유능력이 필요한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 P97

제4의 철학학파의 대표자들은 이미 모든 시간이 지나갔으며, 우리의 삶이란 돌이킬 수 없는 과정의 여운이 비치는 것일 따름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우리는 세계가 이미 가능한 변이들을 얼마나 많이 겪없는지, 그리고 아직 남아 있는 시간들이 있다면 그게 몇개인지 알지 못한다. 확실한 것은 개별 생명이나 생명 전체, 나아가 시간 자체를 상위의 시스템과 비교해보면, 낮보다 밤이 훨씬 더 오래 지속된다는 사실뿐이다. - P183

우리가 고안해낸 기게들은 우리의 신체나 우리의 동경처럼 서서히 작열하는 심장을 갖고 있다. 인간 문명 전체는 애당초부터 매시간 더 강렬해지는 불꽃일 뿐이었으며, 이 불꽃이 어느정도까지 더 강렬해질 수 있을지, 그리고 언제 서서히 사그라들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당장은 우리의 도시들이 빛을 발하고, 아직은 불이 번져간다. - P199

마이클이 말했다. 몇주동안 새 한마리 안 보이네. 마치 만물이 어떤 식으로 파내어진 것처럼 보여. 모든 것이 허물어지기 일보 직전인데, 잡초들만 계속 자라나. 서양메꽃은 덤불의 목을 조르고, 쐐기풀의 노란 뿌리는 땅속에서 앞으로 기어나가고, 다년초 덩굴들은 나보다 머리 하나쯤은 더 크고, 갈색 반점 세균과 진드기가 번져가고, 끙끙대며 단어와 문장을 병렬해놓은 종이조차 진딧물이 짜낸 감로로 칠한 것처럼 느껴지네. 몇날 몇주동안 성과도 없이 머리를 쥐어자지만, 만일 누가 물어보기라도 하면 계속 글을 쓰는 것이 습관 때문인지, 과시욕 때문인지, 아니면 배운 게 그것밖에 없어서인지, 그도 아니면 삶에 대한 경탄이나 진리에 대한 사랑, 절망, 분노 때문인지 말을 할 수 없고, 글을 쓰면 점점 똑똑해지는 건지 아니면 더 미쳐가는 건지도 대답할 수 없다네.

- P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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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가토 - 2012년 제45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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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가지 감정으로만 구별되는 추억은 없다. 좋은 추억, 나쁜 추억, 딱 둘로 나눌 수는 없음은 분명하다. 그 속엔 수많은 복합적인 감정들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추억은 과거의 일, 우리가 살아가는 일들이 모두 그렇다. 과거의 기억은 그저 일부일 뿐이라도 어떻게든 현재에 작용하고, 우리가 거쳐온 수많은 우연들은 끊어지지 않고 인생을 움직인다. 너무도 당연하고 당연한 이야기. 음악의 주법 이외에도 예술은 종종 인생에 비유되기 때문에 어찌 보면 매우 친숙한 주제일 수도 있는 이야기. 이런 이야기를 권여선이 한다. 식상하거나 고루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작가의 문장을 만나 펄떡거리는 생명력을 갖는다.

냉혹했던 유신이 지나고 학생 운동이 열렬히 일어나던 시절이 있었다. 대학 내의 ‘카타콤’이라 불리는 지하 써클에서는 데모와 피쎄일 (전단 돌리기)로 뜨겁게 권력에 대항하고 있었다. 서툴렀고, 두려웠고, 때로는 불굴의 의지와 긍지로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갔던 청년들이었다. 몇 개월, 혹은 몇 년, 너무나도 짧은 시간에 인생을 걸었던 이들이었다. 이후 삼십 년이 지나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동창들에게 어느 날 ‘정연’의 동생이라는 사람이 나타나 언니의 과거를 알고 싶다고 한다. 우연한 기회로, 그들은 소식을 알 수 없이 실종된 정연의 과거를 다시 추억하게 된다. 각기 다른 관계이니만큼 그들의 기억 속 정연의 모습도 모두 다르다. 그들의 추억은 자연스럽게 과거의 사건들과 연결된다.

철없고 서투른 청춘들의 이야기와 위트 넘치는 대화들, 마음이 따뜻해지는 장면들…… 다양한 인물들 만큼이나 풍성한 이야기가 가득한 소설이다. 그러나 사건의 중심이 된 오정연을 둘러싼 이야기를 그리는 방식은 사실 달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선배 ‘박인하’에게 성폭행을 당했고, 학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완전히 달라진 인생을 살아야만 했던 정연이었다. 소설을 읽는 내내 복잡한 감정이었고 끊임없이 의문이 생겼다. 왜 당신은 숨어 살아야 했는가. 왜 당신은 제대로 된 화해조차 하지 못했는가. 이 물음은, 이어 등장한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나름의 답을 찾을 수 있었다. 피쎄일을 하다가 사복경찰과 마주쳐 ‘무섭다’며 떨던 정연은, 광주에서 마치 각성하듯 발 벗고 일어나 총구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다. 남성과 선배라는 권력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었고 당시 풀리지 않았던 분노는 또 다른 ‘권력’에 대한 크나큰 분노로 표출되었던 것일까.

‘앞선 음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다음 음은 이미 시작되는, 그렇게 음과 음 사이를 이어서 연주하는 레가토 주법은 시간에 대한 인식에서도 유효하다’. 책의 마지막 부분, 후기에서 권여선 작가는 과거와 현재가 번갈아 변주되는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읽어주기를 바란다고 썼다. 우려 섞인 말이었을지는 모르겠으나, 걱정할 필요 없이 소설의 몰입감은 상당해서 물 흐르듯 읽어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문장들은, ‘역시 권여선’이라는 탄성이 흘러나오게 만든다.

 

솔직히말해 그는 다시 옛 기억에 깊이 연루되고 싶지 않았다. 늙은 인간이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그럭저럭 꾸려나가다 모자라는 게 있으면 그때 그때 조금씩 조달하며 사는 데 익숙해져버린 존재인 것이다. 갑작스런 기억의 환기로 일상에 작은 혼란이나 번거로움이 초래되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기게 된 존재인 것이다.

 커피를 한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는 정연의 얼굴에 단단한 결기가 서렸다. 그녀는 그날 흘린 한 티스푼의 피를 생각했다. 그러자 한 티스푼만큼의 힘이 났다. 처녀도 뭣도 아니면서 베개를 눈물로 흠뻑 적시거나 툭하면 한숨짓고 입술을 깨무는 일 따위는 이제 그만두어야 한다. 사정이야 어찌되었건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쇠떡심처럼 질기고 염소처럼 힘이 세져야 하며 화전보다 기름지고 먼 길을 떠나는 나그네의 신발끈보다 매섭게 동여져야 한다. 망자를 향해 손수건을 흔들듯,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불붙이지 않은 담배를 까딱까딱 양쪽으로 흔들어 자기 속의 죽은 처녀를 애도했다.

 인하는 손바닥 모서리로 눈가를 누르다 말고 양손으로 바지춤을 잡았다. 흥분했다가도 이 자세로 몇발짝만 걸으며 피가 싸늘히 식으면서 감각이 바위처럼 무뎌지곤 했다. 가장 끔찍한 과거와의 대면을 망각하고 가는 인생도 있지만, 그것을 굳이 환기함으로써 나아갈 힘을 얻는 인생도 있다. 그는 바지춤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정연에게 천 겹의 고통과 슬픔과 능욕을 안겨준 자신을 기억함으로써 퍼펙트한 자술서로 동지들을 팔아먹고 번번이 어머니의 치마폭에 감싸여 사지를 빠져나온 자신을 기억함으로써 그는 또 한번 삶에 단단한 옹이를 짓는다.

 순간 누가 귀에 속삭이기라도 한 듯 그녀는, 지금은 못 간다,고 생각했다. 인하형은 도망치지 않았을 것이다. 오난이도, 재현이도, 진태도, 경애와 명식이도, 주춤거리면서라도 끝끝내 자리를 지켰을 것이다. 그녀는 문득 울고 싶었다. 그녀만이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 게 아니었다. 누구나 다 살아야 할 이유가 있었다. 살아야 할 이유들이 곧 싸워야 할 이유였다. 해산을 마치고 회복된 몸처럼 헝클어지고 혼란에 빠졌던 생각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가슴 깊은 곳에서 울컥울컥 스며나오는 섬뜩한 두려움은 여전했다.

 자신이 운동권이 되고 안되는 것이 전적으로 우연에 달려 있었다는, 어느날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 한때 그를 어리둥절하게 만든 적이 있었다. 신입생 헌터의 역할을 맡은 선배들은 한달 안에 낙점을 끝냈고, 낙점된 신입생들은 대개 한 학기 안에 마음의 결정을 끝냈다. 운동권에 몸담고 지낸 십수년의 기간에 비해 한달과 반년은 얼마나 짧은가. 그 짧은 동안 일어난 몇가지 단편적인 사건들의 우연성이 그후의 기나긴 청장년의 삶을 결정지었다는 사실에 그는 당황했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모든 인생이 그렇지 않나 싶엇다. 하룻밤의 방황이 창녀와 부랑아를 만들고, 한번 발각된 도둑질이 전과로 점철된 인생을 부른다. 편재하는 우연이 새처럼 날아들면 그 순간 인생은 단박에 뒤틀린다. 그런 의미에서 스무살 청춘에게 허여된 한달 또는 반년의 말미는 필연의 첨탑을 쌓기에 충분히 긴 시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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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 스트라이크
구병모 지음 / 창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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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혐오의 사회다. 인간이 같은 인간을 하등한 존재로 취급하며 모욕하고 이용하는 일들이 흔하게 보인다. 서로의 말을 이해하기도 전에 조롱의 말을 쏟아내고, 누군가의 말을 들어보기도 전에 귀를 닫아버리는 일들도 허다하다.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싸움은 늘 벌어진다. 애써 보려 하지 않았을 뿐, 점점 수면 위로 올라오는 일들을 통해 심각함을 인지하는 요즘이다. 다름을 포용한다면 달라질 수 있을까.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나의 영역을 내주거나 누군가가 침투하는 것이 아님을 인지한다면 달라질 수 있을까. 그러면 나는 나와는 다른 사람을 얼만큼이나 포용할 수 있을까.

<버드 스트라이크>는 신비한 상상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다. 날개가 달린 인간 (익인)이 등장하는데, 고원 지대에 모여 사는 익인 무리들은 필요에 의해 날개를 펼쳐 하늘을 날 수도 있고, 다친 대상을 꼭 안아 치유를 할 수도 있다. 생김새도, 사는 모습도, 도시의 사람들(날개를 가지지 않은 보통 인간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그들은 오로지 서로를 존중하며 평화롭게 살기만을 원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들이 도시를 습격하기 시작한다. 무언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고, 그것을 되찾기 위해서 시작한 싸움이다.

이 싸움의 중심에 ‘비오’와 ‘루’가 있다. ‘비오’는 다른 익인들과 비교해 현저히 작은 날개를 가지고 있다. 그는 익인들 무리에서의 소중한 구성원이지만 정작 중요한 행사에는 진정한 익인으로서 참여하지 못한다. ‘루’는 도시 사회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어정쩡한 위치에서 묵묵히 살아가는 소녀다. 우연히 만난 둘은 서로에게 의지하고 마음을 나누게 된다. 수많은 갈등을 넘어 자신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둘의 모습은 경계’에 맞서 싸우는 많은 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성별과 외모, 피부색, 정체성, 가치관, 사랑의 형태, 가족의 형태…… 다수의 억압으로 만들어진, 결코 쉽게 부서지지 않는 경계들을.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죽을 듯이 날갯짓을 하며 앞서 나가던 비오의 모습을 떠올린다. 남들보다 작은 날개로 힘차게 날아오르는 모습 뒤에 숨겨진 수만 번의 날갯짓을 우리는 볼 수 없다. 마찬가지로, 편견과 차별에 맞서기 위해 누군가가 오랫동안 몰두하고 투쟁해온 일들을 우리는 ‘생각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은 우리는 자신이 태어나는지도 모르고 태어났지만 모두가 필요한 존재들이라는 것. 여전히 어디선가 자신의 리스크를 넘어서고 작은 날개로 날갯짓을 하는 이들 앞에서 할 수 있는 건 그저 떨어지지 않길 바라며 응원하고 지켜보는 일이다.

 

 

 

 

 

사람은 누구나 그날그날의 감정에 충실할 권리가 있고, 그 결과로 인한 짐을 제 것이 아님에도 나눠서 져야 할 때가 있지. 그렇다고 해서 비오에게 전혀 미안한 마음이 없다는 뜻은 아니란다. 우리가 짐을 나누는 것은 서로를 향해 마음을 베푸는 일이야. 그리고 나는 내가 데려왔던, 나를 다녀갔던 그 사람에게 베푼 것에 대해 그 무엇도 후회하지 않아. 다른 사람들도 나더러 좀 경솔했다고만 했을 뿐, 다음에 도시 사람 누군가가 우리의 눈앞에서 곤경에 빠져 있다면 그게 어떤 사람이든 모두가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손을 내밀 테고 말이야. - P93

"그러면 그 애는 어디까지 날아갈 수 있을까요."
그 작은 날개를 가지고서.
"어디가 됐든 그곳이…… 여기는 아니겠지. 또한 그렇다고 하여 생각만큼 멀리도 아닐 테고 말일세."
옛사람은 오수에 젖어 드는 듯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러니 그 작은 날개로 어디까지 날겠는지 고민하기보다는……"
이제는 날 수 없는 몸으로 초원조의 부름을 기다리는 옛사람은 이런 결론을 내렸다.
"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지 않겠나." - P122

루가 눈을 떴을 때는 절벽 바깥으로 청년들의 모습이 세 개의 점처럼 멀어져 있었다. 비오는 이미 그 바람을 온몸에 맞으며 앞서 날아간 것이었다. 선천적으로 주어진 날개의 크기가 다른데 그게 가능한 일인지 루는 알기 어려웠으나, 다만 비오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그동안 다른 이들보다 몇 배의 날갯짓을 했을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몸을 으스러뜨리거나 목덜미를 낚아채어 던져 버릴 것만 같은 바람을 향해 비오가 날개를 활짝 펼쳤을 때, 그 앞에 펼쳐진 정경을 루는 결코 해독하거나 형언할 수 없을 것이었다. 루가 아는 어떤 사전을 머릿속에서 넘겨 보아도 이 느낌을 부를 마땅한 이름을 찾을 수 없었으나, 그것이 불안을 밀어 내고 순수한 경탄으로만 루를 감싸 왔다. - P168

혹시 그건 따라오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그가 내려앉을 유일한 땅 한 뼘이 되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나는 가만히 앉아서 누군가의 휴식처로 남을 마음이 없어. 그래서 기다리기보다는 내가 땅을 떠나기로 한 거야. 자신의 한계를 명확히 알고 그럼에도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 유한한 인간이 내릴 수 있는 최선의 결론이라고 생각하니까. - P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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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문 테이크아웃 10
최진영 지음, 변영근 그림 / 미메시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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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십 대였을 때,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어느 정도 생각이란 걸 할 수 있었을 때 했던 말이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자살을 왜 하는지 모르겠어. 그거 너무 무섭지 않아?" 누군가에게 툭 던졌던 그 말은, 생각해보면 생이 무척이나 행복해서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그 반대도 아니었으며, 단지 고통의 정도를 가늠할 수 없었던 어리숙함 때문이었다고 짐작할 수밖에 없다. 삶을 꾸역꾸역 이어나가야 하는 것이 죽음으로 향하는 순간의 고통이나 두려움보다 더 힘든 일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리곤 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자살을 선택한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할 수 있었다. 내 곁엔 없지만 어딘가에 무수히 있는 그들. 그들을 필요로 했던 사람들, 곁에 있던 사람들을 왜 남겨두고 떠났냐고 무책임을 질책하는 말들은 얼마나 날카롭고 무의미한가.

 

'자살'하면 흔히 이유를 찾는다. 실제 상황에서도 그렇고, 픽션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람 사이의 관계, 사회의 폭력, 병 혹은 가난, 온갖 이유를 대어 설명한다. 그래야만 말이 된다. 관계없는 사람에겐 일종의 편의로 작용하고, 관계 깊은 사람에겐 오직 그 방법 밖에는 없기에 이유를 찾는 것에 매달린다. 소설 <비상문>에서 자살한 ‘신우’의 형인 화자도 그러한 이유에 대하여 끊임없이 되묻는다. 특별한 사건도 없었고 짐작이 되는 일도 없는데, 왜 동생은 삶을 끊어내길 선택했을까. 비상구를 지나 옥상으로 올라가 난간에서 잠깐 멈춘 9분 57초의 시간 동안 어떤 생각을 했을까. 떨어지기 전에는, 그 순간에는, 아니 그전의 모든 순간들 속에서는.

 

"빛난다는 건 손실된다는 것(24쪽)" 물리 문제집에 쓰여 있던 법칙에 의미 부여를 하듯이, 화자는 수많은 단서들을 찾는다. 언젠가 '말했을지도 모를' 이유와 겉으로 드러나던 모든 사실들을 되짚어본다. 이를테면 부모님의 불화 같은 것들과 유독 예민하던 신우의 시선들과 그가 했던 모든 말들을 생각한다. 그러나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어쩌면 이유가 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상상하는 것은 아무 소용 없는 일이 아닐까. 삶도, 죽음도, 이유 없고 모르는 것 투성이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이 떠올랐다면 너무 식상한 것일까. 이 짧은 소설에서도 최진영 작가는 그동안의 소설들로 오랫동안 천착해 온 소설의 중심점을 드러낸다. "매우 사랑하면서도 겁내는 것이다. 이 삶을." 소설 끝에 실린 인터뷰에서 언급했듯, 그토록 어지러운 삶이라도 어떻게든 살아보자는 말이다. 설명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 속에서 설명하고 매달릴 수 있는 것들을 발견해보자고. 약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화자가 우울증 약을 복용하는 '서두진'씨와 '이재영'씨와 그다음의 누군가를 끊임없이 찾는 것처럼. 죽은 동생을 투영하며 끊임없이 '생'을 확인하는 것처럼.

 

표지와 내지를 온통 감싸고 있는 따뜻한 파란색의 이미지가 오랫동안 잔상처럼 남는다. 어두컴컴한 계단에 머무르는 비상구의 푸른빛처럼, 순간적으로 쨍하게 시리고 아프다가도 눈부시게 아름다워지는, 그런 소설이다.

 

 

 

 

● 16쪽,
사람마다 시력이 다르듯 존재의 어둡고 습한 부분을 유독 잘 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남들은 찾지도 못하는 얼룩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남들은 듣고도 들은 줄 모르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 감각이 그쪽으로 유별나게 발달한 사람들. 나는 신우가 그런 사람이었다고 믿는다.

● 17쪽,
신우가 죽어서 내 인생이 달라졌는가 생각해 볼 때가 있다. 모르겠다. 신우가 죽지 않은 삶을 내가 어찌 알겠는가. 우습게도, 그리고 끔찍하게도 나는 동생이 자살하지 않은 삶을 상상할 수 없다. 동생이 죽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려 어떤 식으로 상상해도 동생은 죽는다. 내가 화를 내거나 울거나 사정하면 동생은 죽지 않겠다고 나를 안심시키고 결국 죽는다. <최신우가 살아 있다면>이란 가정이 불가능할 정도로 신우의 죽음은 단단한 뼈처럼 내 삶에 고정되어 버렸다.

● 38쪽,
아니다. 신우는 너무 믿었다. 그 정의와 가치를 신뢰했기에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던 거다. 공평하지 않은 것에 공평함이란 단어를 쓰는 것, 기회도 아니면서 기회라는 팻말을 내거는 뻔뻔함에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던 거다. 나는 원래 그렇다고 체념하는 것들을 신우는 따지고 들었다.
그 누구도 완벽한 원을 그릴 수 없어. 똑같은 원을 그리는 사람도 있을 수 없고. 하나하나 다르다고.
나는 신우의 불만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 68쪽,
빛 같은 것? 빗물 같은 것? 신우는 다른 것이 되고 싶었나? 빛과 빗물은 무수하고 최신우는 하나뿐인데 어째서? 태양과 달은 낮과 밤에 보이지만 한 공간에 있다. 행복도 불행도 한 공간에 있고 그것이 유난히 잘 보이더라도, 우리는 굳이 그것을 보지 않아도 된다. 그것 아니라도 별은 무수히 많다. 세상은 점점 더러워지고 엉망진창이 될 것이다. 네가 어디 있고 내가 어디 있는지 모르도록 복잡해지고 어지러워질 것이다. 그게 우주의 법칙이니까. 그런 세상을 같이 살면 좋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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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 제인
개브리얼 제빈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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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와중에도 인터넷 뉴스 기사란은 시끄러웠다. 우연히 타이밍이 맞은 거라 얘기할 수는 없었다. 어제도, 그리고 불과 몇 달 전에도, 많은 사건들이 수면 위로 올라왔기 때문이다. 리벤지 포르노, 불법 유출, 소설 속 내용과 거의 비슷한 정치인 스캔들까지. 이제는 단순히 ‘민감한 사안’이라 이야기할 수는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느샌가 여성 혐오는 일상에 스며들었고, 분노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만큼, 물을 흐리고 꼬투리를 잡고 무조건 ‘까고 보는’ 사람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름은 무조건 여자들의 이름이었다. ‘ㅇㅇㅇ 동영상’, ‘ㅇㅇㅇ 유출 사진’이라는 검색어를 입력하며 혈안이 되는사람들, “자기가 원해서 했는데 왜 난리”냐고 묻는, 사건의 본질을 잊은 무식한 댓글들 투성이었다.

 

<비바, 제인>은 구설수에 휘말리면서도 자신의 삶을 지켜나가는 여성을 응원하는 소설이다. 남성 정치인과 여성 인턴의 스캔들을 축으로 사회의 부조리한 시선들을 꼬집는다. 옷차림과 행실을 이유로 여성에게만 폭력적인 말을 던지는 ‘슬럿 셰이밍’, 분명 ‘둘의 스캔들’인데 남자는 승승장구하고 여자는 이름까지 바꾸고 숨어버려야 하는 현실, 모든 진실을 알지 못하면서 떠들어대는 사람들의 ‘2차 가해’, 여자들이 평생 동안 매달려야만 하는 외모 강박과 스트레스…….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무엇이 옳은 것인지, 잘못된 것인지 고민하게 하는 논점들이 가득하다.

 

페미니즘 입문서라고 말해도 충분할 만큼 꼼꼼하게 쓰인 책이면서도 소설적 재미까지 놓치지 않는다. 사건을 둘러싼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의 시선을 활용하여 다섯 개의 챕터로 소설이 진행된다. 화자에 맞추어 글의 성격이 달라지고, 주인공의 딸 ‘루비’의 시점에선 통통 튀는 십 대의 유쾌함도 함께 담긴다 (이 부분에서 특히 번역가님의 탁월한 센스가 느껴진다!). 각기 다른 시점의 글을 모두 읽고 난 후에, 우리는 마침내 마지막 챕터인 ‘아비바’에 닿는다.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쓰인 마지막 챕터의 글에서 칭하는 ‘당신’이라는 말은 아비바와 제인, 레이첼, 루비, 엠베스, 그리고 세상에 맞서 일어서기를 원하는 수많은 여자들을 향한다. 어느새 제목처럼 “비바, 제인!”을 외치게 된다.

 

작가의 글 솜씨와 역량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 책을 읽고 난 뒤엔 꺼림칙하거나 슬프거나 좌절감과 허무함 같은 감정들만 남지 않는다는 것이다. 위트 있고 여유롭게 논리적으로 반박하며 설명하는 것은, 감정에 호소하고 분노를 내뿜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칭찬 일색이었던 작가의 전작 <섬에 있는 서점>에 대한 기대감이 더욱 커진다.

 

 

● 111쪽,
아무튼, 나는 애한테 컴플렉스를 심어주게 될까봐 몸무게에 대한 얘기는 일절 꺼내지 않는다. 내가 루비 나이였을 때 비만이었고 우리 어머니는 귀가 닳도록 내 체중 얘기를 하고 또 했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그래, 나는 내가 몇 가지 컴플렉스의 당당한 보유자임을 밝히는 바이다. 하지만 누군들 안 그렇겠는가? 생각해보면, 사람이란 기후와 풍토에 대응해 지어진 구조물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닌가?

● 156쪽,
"종종 결혼식이 트로이의 목마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결혼의 현실에서 눈을 돌리게 하려고 내가 열심히 팔고 다니는 꿈. 그들은 딴 사람들과 차별화 하겠다며 이런 것들을 선택해요. 되도록 평범해지지 않겠다며 이런 것들을 선택하죠. 하지만 결혼하기로 선택한 것보다 더 평범한 게 세상에 어딨어요?"

● 181쪽,
그러자 우리 엄마는 사람들이 공직에 출마하면 이따금 ‘지저분하고 진실이 아닌 일들‘이 들리고, 나는 엄마에 대해 들리는 ‘지저분하고 진실이 아닌 일들‘에 대비가 되어 있어야 한대. 엄마가 말하길 나는 (1) 그것들을 무시해야 하고, (2) 상처받지 말아야 한다더군. 내가 "내가 (1)을 하면 (2)에 대해선 걱정할 필요가 없잖아요!"라니까 엄마는 "루비, 엄마는 심각해"라길래, 내가 "엄마, 난 강인해"라고 했지. 난 강인해. 내가 얘기했는지 모르겠는데, 학교에서 난 ‘별로 인기 없는 아이거든. ‘별로 인기 없다‘는 건 ‘점심때 아무도 내 옆에 앉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뜻이야.



● 358쪽,
당신의 수치를 찾아내는 건 클릭 한 번이면 족하다. 다른 사람의 수치도 마찬가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뭐 하나 나아지는 건 없다. 고등학교 때 당신은 『주홍글씨』를 읽었고, 인터넷이 바로 그런 거로군 하는 생각이 든다. 소설 초반부에 보면 헤스터 프린이 오후 한나절 마을 광장에 강제로 서 있는 장면이 나온다. 서너 시간쯤 서 있어야 했나. 얼마가 됐든, 그녀에겐 견디기 힘든 시간이다.
당신은 그 광장에 영원히 서 있게 될 것이다.
당신은 죽을 때까지 주홍글씨를 가슴에 새기고 있게 될 것이다.
당신은 선택지를 고민한다. 선택지가 없다.

● 388쪽,
"시장?" 엄마 목소리는 부드럽고 따스하고 안도감이 묻어나며, 경외감과 자랑스러움이 가득하다. 엄마 목소리는 마치 반딧불이가 한여름 밤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아비바 그로스먼! 그딴 것쯤이야!" "못 이길지도 몰라요." 당신이 말한다. "사람들이 나에 관해 알아냈거든. 시간문제일 뿐이었지만."
"사람들에게 해명했어? 네 입장에서 할말을 했어?"
"항변할 것도 없어. 내가 선택한 일들이었는걸. 내가 했던 이들이고."
"네가 뭘 했길래? 그건 섹스였어. 그 남자는 케케묵은 아저씨였지. 넌 애였고. 나리시케이트 (‘어리석은 짓’을 뜻하는 이디시어) 한 바가지였다. 플로리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애기들처럼 앵앵거렸지."
"그렇다 해도."
"루비 걱정은 하지 마라. 엄마가 말한다. "넌 거기 있어야지. 싸워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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