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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는 마음
홍기훈 지음 / 득수 / 2024년 12월
평점 :
처음 만나는 작가의 소설인데 첫인상이 좋았습니다. 읽어보니 역시 기대만큼 좋았습니다. 신인작가 홍기훈의 장편소설 <가라앉는 마음>은 2000년 8월에 일어났던 '쿠르스크 잠수함 침몰 사고'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서쪽 지역에 위치한 쿠르스크는 현재 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으로 알려진 지역이지만, 이전에도 쿠르스크 전투 등 많은 사건이 있었던 곳이었더라고요.
작가는 쿠르스크에서 있었던 사고를 재난이나 사건 중심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도서출판 득수에서 제공한 작가 인터뷰에 따르면, 언론은 거시적인 관점에서 뉴스를 다루고 단순히 숫자나 사망자의 수로 이야기를 하지만, 조금 더 중요한 '개인의 이야기'를 다루고 싶었다고 합니다.
어느 부분에서 화를 내야 하는지도 잊어버렸어.
희망이 손으로 떠낸 바닷물처럼 스르르 빠져나가는,
그런 기분을 혹시 알아?
119p
주간지의 기자 '마야 카슨'이 사건을 둘러싼 인물들을 인터뷰하는 방식으로 그려진 소설입니다. 진실을 알기 위해 떠난 여정에서 각자의 사정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며 이야기를 듣게 되죠. 처음엔 그저 시니컬한 태도로 독백을 남기던 주인공에게 감정적 동요가 일어나고, 독자 또한 그러한 광경을 숨죽이며 보게 됩니다.
한국의 젊은 신인작가의 소설이지만 탄탄한 자료조사를 통해 쓰여진 게 느껴졌습니다. 우리에게 생소한 사건인데도 불구하고, 탄탄하고 치밀한 배경 조사를 통해 소설을 읽는 내내 놀라웠습니다. 몰입도가 정말 높은 소설이고, 마지막 여운 또한 상당했습니다.
소설 속에서 펼쳐진 다양한 사람들의 감정선을 통해 진실의 의미를 고민하게 되는 주인공. 누군가의 인간적인 진실과 흔적을 파악해나가는 과정을 통해 사건을 재조명하게 되고, 진실의 가치에 대해 깊은 사유를 남기게 됩니다.
사고의 진실을 숨기려는 어두운 힘들 속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안타까운 비극으로 인해 많은 사망자가 발생하였고, 그 피해는 유족을 넘어 다양한 자리에서 일을 하던 많은 사람들에게 걸쳐져 있습니다. 고위층 장성, 구조 작전에 참여한 사람, 피해자의 유족, 그들의 삶이 사고 이후로 어떻게 변모해갔는지가 관건이겠죠.
한국소설추천 홍기훈 작가의 <가라앉는 마음>, 그리고 쿠르스크의 잠수함 사고. 분명 다른 땅에서 일어난 이야기지만 익숙한 기시감과 함께 다가오는 것은, 우리에게도 비슷한 일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겠죠. 우리가 편안하게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이에, 억울한 죽음으로 이 땅에 사라져 가는 사람들과 '남은 사람들'의 삶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흩어지고 잊히고 있는 역사적 사실과 사건 속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에 관해 질문을 던지고 있는 소설. 진실과 개인의 삶의 무게 중, 어떤 것을 우선해야 하는지 고민하게 만드는 소설. 팩트를 중심으로 능수능란하게 펼쳐지는 멋진 이 소설이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사고 수습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하시오? 사건의 본질? 진실? 아쿠닌이 추리소설을 쓸 때야 개가 묻힌 곳을 찾는 게 중요하겠지만 실제로는 아니지. 혼란을 막는 것, 다시 말해 살아 있는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덜 눈물을 흘리도록 하는 게 핵심인 거요. - P45
비극이 일어나면 우리는 진실을 찾는다. 마치 머리가 아플 때 약국에 찾아가 타이레놀을 사는 것과 같다. 진실은 정부나 시민단체 같은 거시적인 입장에서는 그 효과가 대단하다.
(...) 진실은 내 직업 정신과 내 글을 읽는 독자들을 동시에 만족시켜 줄 수도 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진실이 만능일 수는 없다. - P129
"나는 말이야. 죽음에도 종류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어. 이건 사망 방식이 아니라 가치에 관한 이야기인데. 똑같이 암에 걸려 죽더라도 평생 담배나 뻐끔거린 게 이유인 사람이랑, 원자로 지붕에서 청산인 일을 하다 망가진 사람이랑은 분명 다르잖아. 그래서 내가 보기엔 꽤 견딜 만한, 고개가 끄덕여지는 죽음도 있어. 분명한 의미만 있다면 말이야." (...) "슬프지 않다는 뜻은 아니야. 시간이 지난 뒤 받아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라는 거지."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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