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일기
이승우 지음 / 창비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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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년 전 우연히 그의 강연회를 참석하게 되었을 때, 나는 이승우 작가를 이렇게까지 좋아하게 될 줄 몰랐다. 그때는 고작 그의 책 한 권만 읽은 게 다였고, 그의 신작 장편 소설 출간을 기념하는 자리에 나는 대학생 기자단의 일원으로 참석했을 뿐이었다. 이를테면 어떤 목적 때문에 그를 처음으로 만나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자리에서 아주 놀라운 사실을 경험했다. 작가의 이름을 건 강연회에 모인 독자들은 광적일 정도로 '이승우' 문학에 취한 것 같았다. 그의 수없이 많은 작품을 나열하고, 작품에 나온 일부 문장을 읊는 독자들에겐 극진한 존경과 사랑이 느껴졌다. 아주 열띤 광경이었다. 그 시기에 갔던 강연회 중에서 독자들이 동질감과 작가에 대한 애정으로 똘똘 뭉친 모습이 제일 돋보였다. 지금에 와서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그런 마니아층에 끼고 싶었다. 나도 그의 문학에 빠져 보고 싶었다.

 ​그때의 내 생각은 누군가를 사랑하기도 전에 사랑하게 될 거라고 선포하는 어처구니없는 말과도 같았다. 그런데, 웃기게도 나는 자연스럽게 그의 문학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한 권을 읽을 때마다 만족감이 충만하게 채워졌다. 그의 문학은 '당연히', 그리고 '무조건'이라는 단어가 언제든 붙었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 세상에 태어나는 한 편의 소설은 그 소설이 탄생하는 순간까지의 그 작가의 삶의 총체"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결국, 소설가에게 소설이란 '다른 방식으로 쓰는' 일기장과도 같다고 표현한 것인데 이승우의 소설들은 더 비밀스럽게 들어가는 느낌이라 말할 수 있다. 가장 밝히고 싶지 않은, 가장 숨기고 싶은 내밀한 마음들, 이를테면 마음의 짐, 부끄러움, 죄책감, 죄의식과 같은 것들을 아주 샅샅이 긁어내는 것이다. 『오래된 일기』라는 책은 이러한 작가의 특징을 여실히 보여주는 소설들을 담았다. 그래서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오래전에 땅속에 깊이 파묻어두었던(33쪽)" 죄의식 같은 것들이 어떤 예기치 못한 일 때문에 분출되고 마는 상황들을 그렸다. 아마도 누구에게나 익숙하지만, 쉽사리 꺼낼 수는 없었던 그런 일들을 일기장 속에 풀어놓은 듯이 말이다. 이는 <오래된 일기>와 <무슨 일이든, 아무 일도>, <실종사례>와 같은 작품에서 강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눈여겨볼 점은 작가 죄의식의 정체가 조금 특이하다는 점이다. 때로는 자신도 이해할 수 없고, 타인도 의도하지 않은 죄의식이 마음 깊은 곳에 깃든다. "끼어든 것들이 삶을 이룬다. 아니, 애초에 삶이란 게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18쪽)"라는 말처럼, 어느 순간 뜨거운 기운을 감지할 때, 그것에 대응하는 방식들이 이 소설에 아주 다양하게 펼쳐진다. 그리고 <정남진행>이라는 제목의 연작소설 두 편은 작가가 중요한 소재로 내세우는 '죄의식'과 같은 것들을 궁극적으로 어떻게 다루고, 어떻게 용서하는지에 대하여 풀어내기도 했다.


 좋은 문장을 음미하고자 하는 욕구와 이야기적인 재미 (놀라움에 기반을 둔)을 동시에 충족시켜주는 이승우 소설의 특징은 『오래된 일기』 속에도 여전했다. 또한, 이 소설의 또 다른 재미는, 이야기 중간중간 '쓰는 행위'에 대한 작가의 깊은 고민이 드러나 있는 ('오래된 일기', '전기수 이야기', '방') 부분들을 포착하는 것이었다. 작가에게 애정이 깊은 독자로서 다락방 깊은 곳에 숨겨놓은 일기장을 꺼내보는 느낌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던 독서였다.

 


 

29쪽, 오래된 일기

그는 언제나 내 문장의 첫번째 독자였다. 그 독자는 대개 표정으로 말했다. 표정의 변화가 또렷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의 의중을 헤아리기 위해 온 신경을 다 기울여야 했다. 나는 미세한 표정의 변화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썼고, 마침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었다. 어떤 문장은 지우고 어떤 문장은 비틀었다. 그러니까 원하는 대로 한 것은, 사실은 그였다. 내 문장은 자주 그가 원하는 대로 씌어졌다. 독자는 사실상의 작가였다.

​72쪽, 타인의 집

그는 종잡을 수 없는 기분에 빠져들었는데, 그 순간 자기가 걸치고 있는, ‘보석싸우나‘라는 글자가 박힌, 목둘레가 늘어나고 색깔이 누렇게 바랜 티셔츠에 눈길이 갔고, 울컥 치밀어오르는 뜨거운 기운을 참지 못하고 딸꾹질을 했다. 그의 감정상태가 상당히 정확하게 전화기 너머의 그녀에게 전달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157쪽, 실종 사례

여전히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심지어 악수를 할 때도 그랬다. 그나 나나 그것이 서로에 대한 예의이고 배려라고 간주했던 것 같다. 그가 쏟아지는 폭우 속으로 서두르지도 않고 걸어갈 때 나는 잠깐 내 양복 안주머니에 들어 있는 봉투를 떠올렸다. 그의 운동화가 저벅저벅 소리를 냈다. 아니, 그것은 빗물이 내는 소리였던가. 흠뻑 젖은 옷이 달라붙어 드러난 그의 몸은 앙상하고 왜소했다. 나는 쏟아지는 비가 그의 몸을 흐릿하게 지워 없앨 때까지 막연히 서서 바라보았다. 의외로 감정이 평평했다. 무대를 가리는 막처럼 검은 비가 세상을 닫았다. 비로소 그의 빚을 갚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78쪽, 방

나는 비로소 의자에 앉아 노트북을 꺼내놓고 전원을 켰다. 이제 글을 쓴다! 글을 이제 쓴다! 선언문을 벽에 붙이는 기분으로 그 말을 몇번이나 했다. 그것은 나 자신을 향한 나의 주문이었다. 나는 이제 링에 올라가라고 종을 치고 있었다. 종소리는 머릿속에서 웅웅거리는데 몸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계속 링 바깥에 머물러 있었다. 역겹거나 친근하거나, 아니면 차라리 역겨우면서 친근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부터 방향제를 뿌리지 않은 까닭이다.


​203쪽, 정남진행(行)

아무리 훌륭한 산 사람도 훌륭하지 않은 죽은 사람에게 떳떳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어쩔 수 없는 것은 어떻게 해도 어쩔 수 없다. 그러니까 그 남자는 그냥 흐느껴야 하고, 나는 그냥 내버려두어야 한다. 내가 그의 넋두리 상대가 된 것은 공교로운 일이고, 그것조차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비록 시시하고 늘 삐걱거리는 연애였다 하더라도 그녀와의 1년 남짓한 인연을 감안하면 이 정도는 감당해야 한다고 나는 마음을 다잡아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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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가게
너대니얼 호손 외 지음, 최주언 옮김 / 몽실북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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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달엔 (내 기준에서) 꽤나 심각한 독서 슬럼프를 겪었다. 책을 잡고 있어도 제대로 읽히지 않고 글자만 그대로 보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중단한 책도 여러 권이었다. 소파 팔걸이와 테이블에는 중간만 보고 놓아버린 책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아무리 취미라 하더라도 개인적으로는 큰 보람을 갖고 있는 독서 활동이라, 이대로 꾸역꾸역 읽어야 하는지 아니면 그냥 중단해버려야 하는지 혼자서 심각한 고민을 했다. 결국엔 9월은 '조금 느렸던 달'로 남겨두고 다음 달의 첫날, 활기차게 독서를 시작하기로 했다. 10월의 첫 책은 그래서 더더욱 중요했다. 조건은 이랬다. 첫 번째, 재밌어서 끝까지 읽어내릴 수 있는 책. 두 번째, 너무 무겁거나 가볍지 않은 책. 산뜻하게 읽힌다면 두말할 나위 없다는 것. 이에 눈에 딱 들어온 책은 『마술가게』였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샛노란 표지의 이 책에는 총 여섯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굵직한 SF 작품을 남긴 '허버트 조지 웰스, 『지킬 박사와 하이드』를 쓴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등 이름과 저서를 연결해 들으면 "아-" 하고 무릎을 칠만한 익숙한 작가들이다. 그러나 작품들은 아주 생소하다. 보통 유명한 고전 동화를 읽으면 어릴 때 자투리 글을 읽어본 것 같은, 아니면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묘한 기시감이 느껴질 때가 많은데, 이 책에 수록된 단편들은 개인적으로 처음 만나본 이야기여서 설레는 마음이었다.


 작품은 전체적으로 판타지 동화의 느낌이었다. 새롭고 신선하며, 알듯 모를듯한 기분이 좋았다. 책 속에 펼쳐진 예쁜 일러스트가 아니더라도 글 속의 환상적인 이미지를 눈앞에 그려낼 수도 있었다. 온갖 신기한 것들의 천국인 '마술가게', 내 앞에 나타난다면 어쩔 수 없이 손잡이를 당길 것만 같은 '초록문', 딱하디 딱한 '페더탑', 그리고 옥색 바다와 목소리 섬의 진기한 풍경……. 동화라는 이름에 걸맞게 아름답고 감성을 자극하지만, ​그저 아름답기만 한 느낌이면 아쉬울지도 모른다. 그래서 각각의 작품은 미스터리하고 약간은 오싹한 기분까지 선사한다. 마지막까지 맘을 졸이게 하고, 그 마지막을 접했을 땐 비로소 한숨을 푹 내쉬게도 하는 스릴있는 이야기들이랄까. 특히나 재밌게 읽었던 <눈먼자들의 나라>는 인생의 중요한 선택에 발목을 잡을 '고정관념'에 대하여, 아주 강렬한 인상으로 전해주기도 한다. <초록문>은 어린 시절과 환상에 대한 진한 노스텔지어를 느끼게 해주기도 했다.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작가의 작품들이지만 비슷한 분위기로 묶여, 바쁜 일상 속에 동심과 환상의 세계에 푹 빠지게 해주는 책 『마술가게』. 그저 그렇고 뻔한 이야기거나 권선징악의 교훈만을 안겨주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의 상상과 여운을 맛볼 수 있었다. 특이하고 진한 여운을 주는 매력적인 동화들이었다.

 

 

 


65쪽, 마술가게

마술 점원이 "얏!"이라고 말하니 녀석도 "얏!"이라고 외쳤다. 하지만 나는 다른 것들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이곳이 얼마나 어마어마하게 기묘한지 새삼 깨닫고 있는 중이었다. 말하자면 여기는 기묘함으로 점철된 곳이었다. 설치물에도, 천장에도, 바닥에도, 아무렇게나 놓인 의자에도 약간 기묘함이 묻어 있었다. 똑바로 쳐다보고 있지 않을 때면 삐딱하게 움직이면서 내 등 뒤로 조용히 자리뺏기놀이를 하는 것 같은 묘한 느낌이 들었다. 천장돌림띠는 가면을 쓴 뱀 모양이었는데, 가면은 순전히 석고로 만들어졌다기에는 너무 표정이 생생했다.

79쪽, 초록문

어릴 적 기억이 계속 재생됐다. 월리스는 그 문을 보자마자 첫눈에 특이한 감정을, 이끌림을, 가서 문을 열고 들어가고 싶다는 욕구를 느꼈다. 그리고 동시에 이 이끌림에 굴복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거나 잘못된 처사라는 확신이 분명히 들었다. 월리스는 기억이 요상한 마술을 부린 게 아닌 이상, 저 문이 닫혀 있지 않으며 마음만 먹으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게 참으로 신기하다고 주장했다.

149쪽, 눈먼 자들의 나라

그녀는 시각이 가장 시적인 환상이라고 생각했고, 누녜스가 별과 산, 백색광을 켜 놓은 듯한 그녀의 사랑스러운 아름다움을 설명해 줄 때마다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탐닉하며 들었다. 이 말들을 믿지도 않고 완전히 이해하지도 못했지만 묘하게 기쁨을 느꼈고, 이런 모습을 보고 누녜스는 그녀가 완전히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183쪽, 얀 강가의 한가한 나날

존재하는 모든 신에게 바치네.

신은 무엇이든 들으시리.

키잡이가 기도하고, 고요가 흘렀다. 선원들은 잠을 청하려고 몸을 뉘였다. 고요함은 짙어졌다가 얀 강이 가볍게 뱃머리에 와 닿을 때만 살짝 깨졌다. 강에 사는 짐승이 이따금 기침을 할 때도 있었다. 고요함의 물결, 물결과 고요함의 연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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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명
김숨 지음 / 현대문학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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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숨 작가는 『L의 운동화』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다.

 ​"아직까지는 쉰한 분이 살아 계시지만 다들 연세가 있으시니까 한 분 한 분 세상을 떠나시겠지요? 한 분, 한 분 그렇게 세상을 떠나, 한 분밖에 살아 계시지 않는 날이 오겠지요? 단 한 분 밖에 살아 계시지 않는 날이…… 그리고 결국 단 한 분도 살아 계시지 않는 날이 오겠지요? 그분들이 다 돌아가시면 누가 증언을 할까요?"

​그리고 한 달이 지났을까, 잊지 못할, 너무도 오싹했던 '한 명'이라는 제목의 책이 출간되었다. 왠지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잔혹한 역사를 '르포' 형식이 아닌 '소설'로 담는 것은 꽤 민감한 일이다. 소설이라는 틀 너머에 그보다 더 끔찍하고 적나라한 현실이 있고, 건드려야 할 것이 있고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소설가는 모든 것을 알아야 하고, 알고 있는 진실을 허구의 바탕 속에 적당히 녹여내야 한다.

 그리고 상상에는 한계선이 있다. 경험해보지 못한 끔찍한 일은 그 한계선까지의 거리가 매우 짧다. 경험해본 사람을 통해 보고 들은 것만을 상상하고, 더불어 이해할 수 있다. 이를테면 나는 '위안부'라는 말을 떠올릴 때마다 어떤 영상에서 본, 문신으로 가득한 할머니의 배를 떠올렸다. 너무도 아팠고, 끔찍했고, 죽여버리고, 죽고 싶었던 할머니의 마음을 상상했다. 하지만 그 뒤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그녀가 12살 어린 소녀를 보고 하는 생각들을, 신발을 신을 때마다 발가락에 힘이 들어가는 이유를, 끝끝내 살아 돌아왔어도 자신이 어딜 다녀왔는지 말할 수 없던 상황들을 말이다. 『한 명』이라는 소설은 내가 알지 못했던, 그리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모든 일을, 아주 조심스럽고 섬세하게 설명한다.

 "죽을 수가 없어. 내가 죽으면 말할 사람이 없다는 생각을 하면……." (237쪽)

 세월이 흘러 단 한 명밖에 남지 않았을 때를 그리는 '소설의 현재'에는 '그녀'가 살고 있다. 위안소에서 한시도 제 몸뚱이가 아니었던 몸을 끌고 간신히 살아남았다. 참혹한 과거를 잊으려고 노력해도 잊히지 않는다. 제 몸뚱이가 아니었던 몸이, 이제는 과거의 기억을 불러낸다. 그녀는 TV에서 (공식적인) '한 명'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본다. 그녀는 증언을 어떻게 하는지도, 하고 싶지도 않으며, 그저 행복하게만 살고 싶어 조용히 삶을 지켜왔다. 그러나 "순덕, 향숙, 명숙 언니, 군자, 복자 언니, 탄실, 장실 언니, 영순, 미옥 언니……."와도 같은 '한 명'의 존재를 이제는 만나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때 불현듯 자신의 이름을 찾는다. 강가에서 다슬기를 잡던 열세살 소녀의 이름을…….

 


 굳게 다물어졌던 입을 열고 버스에 오르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지금 살아계신 할머니들이 목소리를 내기까지의 고통스러운 마음을 생각했다. "모든 걸 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기억했으면 오늘날까지 살지 못했으리라."(151쪽)라고 말하면서도, 지우고 싶은 기억들을 죄다 끄집어낼 수밖에 없는 그녀들의 현실이 끔찍하게 다가왔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일본 정부와의 '불통'과 우리 정부의 괘씸한 처사에도 꿋꿋이 뜻을 표하고 있는 할머니들의 모습이 존경스럽고, 눈물이 났다.

 이 책의 문장에는 수없이 많은 숫자가 붙어 있다. 이는 뒷페이지의 참고자료와 이어진다. 참고자료에는 작가가 참고한 책들과, 증언한 피해자 할머니들의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이것이 정말 현실이냐며, 치를 떨고 경악을 금치 못했던 숫자들이다. 이 숫자와, 기록과 기억의 역사가 잊혀지지 않기를, 더 많은 사람에게 이 책이 읽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18쪽,
검푸른 곰팡이가 만발한 담벼락을 집요하게 응시하던 그녀는 한순간 발작적으로 숨을 토한다. 마흔일곱 명이라고 들은 게 엊그제 같은데 어떻게 한 명밖에 안 남았을까 싶다.
꽃잎이 방사형으로 퍼진 꽃을 그리듯, 두 발을 번갈아가면서 조금씩 옆으로 옮긴다.
그녀가 발을 뗄 때마다 장판지가 슬쩍 들뜬다. 밀크캐러멜 색깔의 장판지는 뾰족한 것에 찍힌 자국, 뜨거운 것에 덴 자국, 밀려 주름진 자국, 날카로운 것에 긁힌 자국 등으로 지저분하다.
한 생을 등지듯, 그녀는 그렇게 창문에서 천천히 돌아선다.

88쪽,
소녀들은 자신들 몸에 다녀가는 군인들 명수로 일요일인지 알았다. 그곳에는 달력도 없어서 소녀들은 날짜도, 요일도 몰랐다. 모든 날들은, 모르는 날들이었다. 모르는 날들이 흘러가는 동안 소녀들은 폭삭 늙었다.

90쪽,

이제 여기서 죽는가 보다 하면서도, 이런 데 있다가 집에 가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한탄하면서도. 고향집에 돌아가면 뭐라고 말해야 하나 막막할 때가 있었다. 실공장에 있었다고 해야 하나? 비단공장에 있었다고? 아니면 그냥 좋은 공장에.



132쪽,

"저기, 젊은 양반…… 20만 명 중에 2만 명이면…… 10분의 1이 맞지요?"
"20만 명 중에 2만 명이요?"
"20만 명 중에 2만 명이면……"
"20만 명은 뭐고, 2만 명은 뭐래요?
전기검침원이 대답은 않고 도리어 그렇게 물어서 그녀는 당황한다. 그녀는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입을 다물어버린다.
"2만 명 뽑는데 20만명이 몰리기라도 했대요? 20만 명이면 웬만한 중소도시 인구하고 맞먹는 숫잔데……."
그녀는 괜히 물었다 싶어 입을 다문다.
"주먹은 왜 그렇게 꼭 쥐고 계세요?"
"다슬기들이 달아날가봐……."

​236쪽,
그녀는 티브이 받침대 서랍을 열고, 그 안에 넣어두었던 백지를 꺼낸다. 반으로 접힌 백지를 펼치자 또박또박 힘을 주어 쓴 글자들이, 억눌려 있던 스프링처럼 앞다투어 튕겨 오른다.
나도 피해자요.
그 한 문장을 쓰기까지 70년이 넘게 걸렸다.
그 문장에 이어서 뭔가 더 쓰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갑자기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녀는 그럴 수만 있다면 말을 하는 대신, 한쪽으로 돌아간 자궁을 꺼내 보여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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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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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에는 이상야릇한 힘이 있다. 그래서 주체할 수 없이 콸콸 들이붓지만 않는다면야, 술은 적당한 이용가치가 있기도 하다. 누군가에게는 노래를 부르며 기쁨을 만끽하게 한다. 누군가에게는 평소에 하지 못할 일들을 기꺼이 하게 만들기도, 자신의 속 깊은 이야기를 부끄러움 없이 꺼내놓게도 한다. 한 잔, 그리고 또 한 잔. 술자리에서는 세상사 많은 희로애락이 펼쳐진다. 취기는 불안을 잠재우고, 가려진 진실을 밝혀내게도 한다. 오직 술이 있어야만 허용될 것 같은 진실한 이야기가 바로 술자리에서 나오기도 하는 것이다.


​ 『안녕 주정뱅이』는 실제로 쓰디쓴 술을 삼키고 삼키면서 들어야 할 것 같은 이야기다. 첫 잔이 가장 독하고, 마지막 잔까지 비릿하다.

 소설은 예상치 못한 순간들과 비밀, 그로 인해 벌어진 결과들을 담는다. ​목적지가 다른 두대의 자동차가 나란히 달리다 같은 휴게소에서 잠깐 들렀다 간 정도('층')의 우연들이 반복된다. 번갯불의 찰나 ('삼인행')처럼 아무것도 아니었던 일들이 쌓여, 어떤 결과를 불러오고, 그 결과로 이들은 위태로운 일상을 살아간다. 불안을 잊기 위해 사랑에 취하고, 여행길에 취하고, 분노에 기대기도 하며, 오히려 그 기억을 지워버리기도 한다.


 ​인생의 고통을 함께 견디는 「봄밤」의 수환과 영경은 얼마나 처절하고 아름다운가. 「이모」는 살아온 날들의 증오를 이겨내기 위해 얼마나 앓았을까. 이 격렬하고 치열한 이야기는 가슴을 세차게 흔든다. 나머지 이야기도 만만치 않다. 「카메라」와 「실내화 한 켤레」의 소설은 아무렇지 않은 날들을 그리는 것 같지만, 온통 불안으로 가득하다가 마지막이 돼서야 불안과 위험을 한 번에 터뜨려버린다. 당최 끝까지 안심할 수가 없다.

 

​"우리는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으니 됐지 않냐고. 뭘 더 바라겠냐고 ('봄밤')"

​ 그래도 이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멀쩡히' 살아있으려고 애쓴다. 비틀비틀 걸음을 온전히 하려 애를 쓰는 주정뱅이처럼 보일지언정, 어떻게든 자신의 일상을 안정시키려 노력한다. 그들에게 연민 어린 시선이 간다. 가장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들은 술자리처럼, 다음날, 그다음 날까지 이들의 이야기에 관한 기억이 또렷하다. 작가는 어떤 삶을 살았길래 이런 소설을 썼을까. 어떤 사랑을 하고, 어떤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을 겪어보았길래…….

 


 



25쪽, <봄밤>

"내가 생각해봤는데 이 비유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시킬 수 있을 것 같아. 분자에 그 사람의 좋은 점을 놓고 분모에 그 사람의 나쁜 점을 놓으면 그 사람의 값이 나오는 식이지. 아무리 장점이 많아도 단점이 더 많으면 그 값은 1보다 작고 그 역이면 1보다 크고."
"그러니까 1이 기준인 거네."
수환이 말했다.
"그렇지. 모든 인간은 1보다 크거나 작게 되지."
"당신은 너무 똑똑해서 섹시할 때가 있어."
영경이 씩 웃었다.
"그래? 너무 간헐적이라 탈이지. 그런데 우리는 어떨까? 1이 될까?"

93쪽, <이모>

언제였을까. 그의 자취방에서 과도로 참외를 깎아 쪽을 내고 참외씨를 미세하게 바르며 그의 등허리를 바라보았던 그 봄은, 그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병아리 빛깔의 수채화 같던 그 봄날의 오후는, 그리고 …… 그녀는 현관 구석에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장갑 낀 양손을 번갈아 쥐었다 놓았다. 당장이라도 과도를 움켜쥐고 무엇을 찌를 듯이, 장갑 속의 언 손가락들을 바르르 떨게 만드는 이 붉고 어두컴컴한 증오는 무엇인가. 그걸 알 수 없어 그녀는 오른손으로 왼손을 쥐었다 놓고 왼손으로 오른손을 쥐었다 놓았다.

134쪽, <카메라>

"내가 무능해서 그런지 몰라도,"

관희가 고개를 옆으로 늘어뜨렸다.

"나쁜 사람이 되는 건 참 힘이 드는 일이에요, 문정씨."

76쪽, <실내화 한켤레>

그 만남이 행이었는지 불행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떤 불행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만 감지되고 어떤 불행은 지독한 원시의 눈으로만 볼 수 있으며 또 어떤 불행은 어느 각도와 시점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불행은 눈만 돌리면 바로 보이는 곳에 있지만 결코 보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239쪽, <층>

그는 아파트 정면 베란다에 서서 가로등 불빛이 부드럽게 L자를 그리는 차도 너머에 있는 도서관 진입로와 어두운 나무들에 가려진 건물을 내려다보았다. 당신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가. 초추의 양광, 돈데 보이 같은 것 말고, 안톤 슈나크나 띠시 이노오사 같은 것 말고, 이 밤 도서관에서, 까페에서, 연구실에서, 오래전 당신이 살던 이곳보다 훨씬 더 넓은 아파트 거실에서, 당신은 내가 할 수 없는 어떤 낯선 생각을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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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살해자
윤재성 지음 / 들녘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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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외로움을 없애고 싶었다." (17쪽)
 소설은 현대사회에 뿌리내린 '외로움'을 완벽히 뽑아낼 수 있을까, 하는 물음에서 시작된 것 같다. 그런데 대체 이 '외로움'의 정체는 무엇일까. 어디서 어디까지를 외로움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일까. 외로움의 증세는 다양할 것이다. 홀로 있는 시간을 두려워하는 것, 사람들의 관계에 목매는 것,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도 갈증을 느끼는 것…… 이런 가벼운 증세도 외로움이라 말할 수 있을까? 나는 평소 '외로움'을 많이 느끼지 않고, 오히려 가끔 찾아오는 '외로움'을 즐기는 사람이라며 자신을 추켜세워왔다. 하지만 종종 느끼는 가벼운 외로움이 진짜 '외로움'일까 하는 의문이 문득 든다. 내게 주어진 모든 소유물과 남아있는 사람들이 없어진다면, 나는 진정 외로움을 견뎌낼 수 있을까 하는 무시무시한 상상과 함께 말이다.

 

 

 그러나 이 소설 속에서 다뤄지는 외로움은 내가 상상하던 정도를 넘어선 무게를 갖고 있다. 이것이 '진짜' 외로움과 고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친구들과 술 한 잔, 아무도 없는 옥상에서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고 나서도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완전히 다른 외로움. 이미 닳고 닳아진, 묵직한 순간들이 돌처럼 얹힌 아주 지긋지긋한 외로움. 아마도 내가 전혀 겪어보지 않았을 지독한 외로움이 책을 온통 감싸고 있다.

 

 

 이런 외로움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최후의 수단이 소설에 등장하는 '외로움 살해자'다. 살해자라는 이름 때문에 판타지나 스릴러를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소설 속) 현대 사회에 새롭게 생겨난 '직업'이다. 엄청난 경쟁률로 뽑힌 그들은 외로움으로 고통받는 고객들과 시간을 보낸다. 회사에서 제공된 정보를 바탕으로, 더 깊숙한 곳에 있는 고객의 마음을 캐낸다. 외로움이 발생하고, 그것이 커지고, 손쓸 수 없을 정도가 된 지점들을 파악하고 위로한다. 성공률은 높은 편이다. 간혹 고객의 외로움에 전염되는 살해자가 있기는 해도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외로움 살해자'를 '카사노바' 혹은 '애인 대행' 서비스라고 힐난하기도 하지만, 고객들은 그들을 필요로 한다. 고객에게 그들은 썩은 동아줄이라 해도, 마지막 구원자이기 때문이다.

 

 

 양날의 검이자, 고객에겐 구원인 '외로움 살해자'의 세계. 소설은 '우수 외살자'와 반송된 (한번 서비스를 신청했다가 실패한) '의뢰인'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외로움의 본질에 관해 추적하기 시작한다. 누군가가 느끼는 외로움은 어디서부터 왔을까. 어떤 경험에서, 어떤 경로로 그에게 찾아왔을까. 외로움은 '외로움 살해'라는 시스템으로 정말 소멸할 수 있을까. 손쓸 수 없는 외로움이란 존재할까. 건드리지 않아야 할 외로움도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수많은 질문이 책을 읽으면서 머릿속을 맴돌게 된다. 그러다가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난 다음에는, 이 세상 자체가 외로움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곳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가벼운 외로움일지라도, 그것을 잊기 위해 안간힘을 써도 공허함이 밀려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일 거라며.

 

 

 찝찝하고 끈적이는 외로움을 책 속에서 온몸으로 겪고 나니, 조금은 피로하고 힘이 들었다. 그러나 외로움의 문제를 현실적으로 풀어낸 이 책이 마음에 들었다. 개인적인 바람은 지독한 외로움으로 허덕이는 사람들이 있다면, 약간의 틈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소소한 것들 - 조금씩 모이면 '외로움'이라는 것을 짓누를 수 있는 - 이 들어갈 수 있는 아주 약간의 틈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바라게 되었다.

 

 



171쪽,
"저는 그럴 수 없어요. 지금을 버티기도 힘드니까. 끝을 떠올린 순간 연애나 사랑, 삶의 모든 의미는 허무하게 퇴색돼버려요. 그래서 저는 매일같이 생각을 지워서 현실을 살아갔어요. 그러다 보면 언젠가 내가 나의 존재마저 지워버릴 걸 알면서도."
미는 잠깐 말을 멈췄다. 필은 앞자리의 대리기사가 귀를 기울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안경 낀 눈이 룸미러에 비치는 중이었다.
"가끔은 그런 생각도 해요. 사랑의 유한성만큼 가혹한 게 또 있을까 하는. 그건 하루를 살기 위해 일 년 치 독약을 삼키는 짓이에요."
필은 외로움살해자로서 답했다.
"인간은 태어난 순간부터 죽어가는 생물입니다. 우리가 사는 땅 위에 영원한 것은 없어요."
"하지만 외로움은 영원해요. 죽음이란 완성에 이르기 전에는."



221쪽,
"보통은 1개월에서 2개월, 많게는 3개월, 서비스를 연장한다면 반년가량. 그 기간이 끝나면 우린 사라집니다. 고객의 옆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은 두세 달에 불과해요. 우리가 필사적으로 고객을 파악하고, 원인을 찾아내고, 외로움을 없애려드는 이유도 그겁니다. 그들이 전화를 걸어 온 순간부터 모래시계는 흘러내리기 때문에."



265쪽,
그는 주의 깊게 유도신문을 시도했다.
"죽는다는 뜻은 어떤 의미인지 궁금한데요."
"말 그대로예요.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 더 이상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 것, 남겨질 누군가에게 잊지 못할 기억을 심는 것."
미는 거기서 말을 잠시 멈췄다. 검은 동공은 허공에 멎었다. 그녀는 필을 보면서 필 뒤의 어떤 것을 함께 보는 중이었다.
"우리는 왜, 살아남지 않으면 사랑조차 할 수 없는 존재들일까요"




290쪽
"그럼 무엇을 기대했습니까? 지금이 2116년이고, 외로움살해자들이 최첨단 주사액과 미래형 권총으로 고독을 제거하는 줄 알았나요? 그런 것은 현실에 없습니다. 외로움 제거는 우물 청소나 다름없어요. 더 깊고 오래된 때일수록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오직 수작업으로만 이끼를 닦아내야 하는, 고여 있는 유독가스에 중독되지 않길 바라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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