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자
아니 에르노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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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존재가 갑자기 큰 폭풍처럼 밀려오는 순간이 있다.

물론 모든 사람의 존재가 그렇게 변하긴 하지만 - 엄마에 대한 마음은 조금 더 각별하다. 엄마는 항상 내 옆에 있다. 작아졌다가 조금 커졌다가 몽글몽글하기도 하면서 옆에 서 있다. 스스로 밥벌이를 하고 온갖 세상 살이를 견뎌낼 수 있는 어른이 되어도 엄마 앞에선 한순간 어린아이로 머무르고 싶다. 엄마 앞에서라도,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려 보고 싶어진다.

최근에 엄마가 아팠다. 웬만한 일도 고통도 꾹 참던 엄마가 진심으로 아프다고 얼굴을 찡그리고 짜증을 내는 모습을 보았다. 처음 드는 감정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엄마를 생각하기만 해도 눈물이 훅, 시작되었고, 한편으로는 솔직해진 엄마가 사랑스러웠다. 아픈 걸 어떻게 위로해야 하는지 몰라서 답답했다. 엄마가 나보다 더 약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아주 가깝게 인식하게 되었다.

2022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아니 에르노의 소설

작가 '아니 에르노'는 '경험하지 않은 건 쓰지 않는다'라는 철칙으로 자전적 소설을 꾸준히 써냈다. 생생하게 경험한 글감이 상상을 해서 만든 것보다 더욱 풍부한 사유를 만들어낼 수 있는 건 분명하지만, '자전적' 요소가 들어간 글은 자신의 내부와 치부를 모두 드러내며 감수한다는 뜻이다. 솔직함, 용감함, 과감함. 작가 '아니 에르노'에게 붙여지는 수식어에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 이 작가의 강점은 이것뿐만은 아니다.

내가 만난 그의 첫 책은 「부끄러움」이었고 이번에 읽은 「한 여자」는 두 번째 책이다. 분량이 꽤 짧은데도 나는 밑줄을 정말 많이 그었다. 어머니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 소설 속에서 화자는 어머니에 대한 진실을 찾기 위하여, 그에게 남은 어머니에 대한 흔적 - 사진, 혹은 기억 - 을 통하여 어머니의 자서전을 써 내려간다. 어머니의 삶 속에서 다른 모습의 실루엣들이 겹쳐진다. 때로는 아름답고, 때로는 거칠고, 때로는 이해할 수 없으며, 때로는 증오하며, 아름답고, 사랑하고 사랑하는 ......

내 마음과 겹쳐지는 순간

"처음에는 내가 글을 빨리 쓰리라고 생각했다. 실제로는, 무슨 말을 어떤 순서로 해야 할지, 마치 어머니에 관한 진실 - 그 진실을 이루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 을 유일하게 보여줄 수 있는 어떤 이상적인 순서가 존재하기라도 하는 양 단어들을 고르고, 그것들을 어떻게 배열할지에 대해 궁리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고,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 내게는 그러한 순서의 발견 말고는 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다." (50쪽)

작가 '아니 에르노'가 책 속에서 여러 번 언급했듯, 짧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문장을 쓸 때 꽤 오랜 시간이 들었을 것 같았다. 또한 독자인 나도 글을 읽는 내내 크게 다가오는 문장들에서 엄마를 향한 생각과 마음이 겹쳐지는 순간 조금 멈칫하곤 했다.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나서 다시 첫 문장으로 되돌아가 둘을 이어 보았다. 다시 한번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책을 읽고 이 글을 쓰면서 나도 모르게 살짝 훌쩍이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러한 상태가 차츰차츰 사라져 가고 있다. 어머니가 아직 살아 계실 때인 이달 초에 그랬듯, 날이 춥고 비가 오면 여전히 만족스러움. 그리고, <이젠 더 이상 그래 봐야 소용없구나> 혹은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구나>(어머니를 위한 이런저런 일)를 확인할 때마다 밀려드는 공허한 순간들. 어머니가 보지 못할 첫 번째 봄이라는 생각이 자아내는 빈틈. (이제는 평범한 문장들, 심지어 진부한 표현들에 담긴 힘이 느껴짐.) - P20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여는 첫 행위는 시간의 관념에서 벗어난 이미지들 속에 어머니를 고정시키는 것 ─ <어머니는 난폭했다>, <어머니는 전부를 다 불사른 여자였다>. 그리고, 어머니가 등장하는 장면들을 뒤죽박죽 떠올리는 것. 그렇게 해서 내가 되찾게 되는 것은 내 상상이 만들어 낸 여자, 며칠 전부터 내 꿈속에 나타나, 스릴러 영화에서처럼 팽팽한 긴장 속에서 다시 한 번 삶을 사는 나이 불명의 여자와 동일한 그 여자일 뿐이다. - P22

보다 정확히는, 내가 쓰려고 하는 것은 가족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접점에, 신화와 역사의 접점에 위치하리라. 나의 계획은 문학적인 성격을 띤다. 말들을 통해서만 가닿을 수 있는 내 어머니에 대한 진실을 찾아 나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진들도, 나의 기억도, 가족들의 증언도, 내게 진실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문학보다 아래 층위에 머무르길 바란다. - P23

사진 속 얼굴들이 움직인다는 착각이 일 정도로 아무리 오랜 시간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어 봤자, 내 눈에 보이는 건 그저 1920년대 영화 속 의상을 빌려 입은 듯한, 반짝반짝 윤이 나는 웬 아가씨뿐이다. 장갑을 쥐고 있는 넓적한 손과 고개를 꼿꼿하게 쳐들고 있는 자세만이 그것이 내 어머니라고 말해 준다. - P42

두 달 전, 종이 위에 <어머니가 4월 7일 월요일에 돌아가셨다>라고 쓰면서 이 글을 시작했다. 그 뒤로, 그것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문장이고, 심지어 만약 그 문장이 누군가 다른 사람이 쓴 것이라면 내가 그 문장을 읽으면서 느낄 감정과 전혀 다르지 않은 감정을 품고서 읽어 낼 수 있는 문장이다. 하지만 병원과 노인 요양원이 위치한 구역으로 가는 것이나, 어머니가 살아 있었던 마지막 날에 대한 기억들이 잊고 있는 줄 알았는데 불쑥 솟아오르는 것은 견디지 못한다.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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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 (무삭제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38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김운찬 옮김 / 현대지성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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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너무나 익숙하지만 한 번도 읽어볼 생각을 하지 못했던 책. 「군주론」은 수백 년이나 지난 지금에도 '악마의 책인가, 리더들의 정치적 교과서인가' 하는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분열되어 외세에 침략에도 번번이 속수무책이었던 1500년대 이탈리아의 상황 속에서 '마키아벨리즘'으로 대표되는 이 책이 탄생했고, 혼란스러운 상황은 지금의 우리나라도 별반 다르지 않다. 장기간으로 지속되는 코로나 시대, 각 정당의 대립, 세계 속 외교적 방향 속에서 우리는 어떤 리더를 뽑아야 할까 하는 의문이 계속되고 있는 중,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읽기 전 생각했던 것보다 「군주론」은 짧고 세분화된 항목으로 글이 구성되어 있었다. 세습, 혼합, 시민, 교회 군주국 등 다양한 국가의 모습을 살폈고, 새 군주국을 어떤 방식으로 획득했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리더의 방향성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 군주가 갖추고 있는 한 국가의 군대, 그리고 그를 보좌하는 관리들에 대하여도 다방면의 시각으로 설명된 글이 돋보인다. 마키아벨리는 당시 이탈리아의 역사 속 인물들을 사례로 들어 자신의 이론을 탄탄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국가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이나 방법도 허용해야 한다'는 '마키아벨리즘'의 기본적인 토대와 같이 책 속에 표현된 리더의 조건은 '막강하고 권모술수에 능한' 모습으로 대표된다. 민중과 관리에 대한 시각도 약간은 부정적인 면이 있으며, 여성을 폄하하는 대목도 읽기 편하지는 않았다(시대가 시대인지라 거의 대부분의 작품들이 그러했다고 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다). 특히나 이 책의 집필이 국가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려는 '정의'에 따라 시작된 것이 아니라, 마키아벨리 본인이 공직에 복귀하기 위해 헌정한 글이라는 점은 약간의 아이러니한 부분이 있다.

그러나 과거를 넘어 현재에 있어서도 받아들일만한 주장들이 여럿 존재한다. 혼란스러운 시기에 군주의 자리는 분명 아슬아슬하기에 굳건한 중심이 필요하다. 이 책의 나온 내용들을 누군가가 악용하진 않길 바란다. 좋은 것은 취하고, 옳지 않은 것은 배제하여 적용하는 지혜를 발휘할 리더가 나타나기를.

군주는 혼란스러운 시기에 믿을 만한 사람을 찾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군주는 시민이 나라를 필요로 하는 평온한 시기에 보여준 모습만 믿고 그들을 의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현명한 군주는 시민이 어떤 시기에도 자신과 나라를 필요로 하면서 자신에게 충성하도록 만들 방법을 고안해야 합니다. - P78

모든 일을 고려할 때 어떤 것은 미덕처럼 보이지만 그것을 따르면 자신이 파멸할 수도 있고, 또 어떤 것은 악덕처럼 보이지만 그것을 따르면 안전과 번영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 P112

그렇지만 믿고 행동할 때 신중해야 하고, 자기 자신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고, 신중함과 인간애로 절제 있게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지나치게 믿어 경솔해지지 말고, 과도하게 불신해서 아무도 견뎌낼 수 없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 P119

군주가 만약 사랑을 얻지 못한다면, 증오를 피하면서 사람들이 자신을 두려워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증오를 받지 않으면서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 P120

자신을 다시 일으켜줄 사람이 있으리라 믿으면서 넘어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으며, 혹시 그렇게 되더라도 당신의 안전을 보장해줄 수는 없습니다. 그런 방어책은 비열할뿐더러 자신에게 의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훌륭하고 확실하며 지속적인 유일한 방어책은 발로 자신과 자신의 역량에 의존하는 것뿐입니다. -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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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쓴 것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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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우리가 쓰지 않은 것들'. 작가가 표지 뒤쪽에 남긴 사인에 덧붙인 문장이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82년생 김지영》 이후에도 작가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소설을 계속 써왔다. 우리가 쓴 것, 우리가 (아직) 쓰지 않은 것들 속에서 꿋꿋이 자리를 지켜온 것이다. 페미니즘 소설로 대표되는 '김지영'이라는 이름이 작가의 이름만큼의 무게감을 가지는 상황에서, 작가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꾸준히 해온 것에 대해서 일단  응원을 해주고 싶다.


《우리가 쓴 것》은 다양한 지면에 수록된 단편들을 모아놓은 소설집이며 몇 편의 작품은 이미 만나본 적이 있어 눈에 익었다. 총 8편의 소설의 전체적인 느낌은 의외로 몽글몽글하고 따뜻하다는 것이었고, 그다음에는 '이 작가라서' 이런 이야기를 쓸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물론 「현남 오빠에게」와 같은 공격적인 소설도 있었다. 가스 라이팅을 소재로 한 편지식 소설이고 주인공은 처음부터 끝까지 비슷한 어조로 항변하다 마지막 문장에서 폭발하듯 소리친다. 「미스 김은 알고 있다」는 부조리한 사내 환경 속에서 언제까지나 '미스 김'으로 남아있어야 했던 상황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강한 소설이 중간에 위치하고 있지만 작품들의 구성에 따라 따라가는 독서는 꽤 격하지 않고 부드러운 편이다. 마지막에 수록된 「첫사랑 2020」는 소설집의 분위기를 잔잔하게 마무리하듯 어루만진다.


소설 속 에피소드가 모두 작가의 경험담은 아니라고 밝혔지만, 페미니즘이라는 프레임 속에 갇히거나 숱한 오해로 "소설이 납작한 퍼즐 조각으로 잘려 끼워 넣어진 일은 셀 수도 없다(75쪽, 오기)"라는 문장 속에서 작가의 현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여성문제와 시대의 변화, 세대 간의 첨예한 대립을 그린 소설 속에서 "그러니까 엄마, 업데이트 좀 해(293쪽, 여자아이는 자라서)"라는 아이의 말은 우리가 직면한 과제를 떠올리게 했다. 노년의 삶과 회한('매화나무 아래)'을 다룬 장면을, 가출한 아버지의 결제 흔적을 가만히 지켜보는 ('가출') 식구들의 마음을 보며 작은 위로까지 받았다.


「오로라의 밤」이라는 단편이 좋았다. 가족 내에서의 역할 갈등이 소멸된 상황에서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적당한 온도로 서로를 의지하며 지낸다. 함께 오로라를 보기 위해 떠난 여행에서 둘은 각자의 소원을 큰 목소리로 빈다. 손주 보기 싫어서 울부짖는 며느리, 세상에 오래오래 숨 붙이고 싶다는 시어머니, 둘의 인생은 달라졌고 앞으로도 달라질 것이다. 그들의 모습을 보며 수평적 관계 속에서 서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가족 관계를 희망적으로 상상할 수 있었다.


맨 마지막 페이지, 작가의 수록 작품과 집필 연도를 살펴보며 비슷한 느낌의 소설들끼리 묶어 떠올려 보았다. 장편 소설의 엄청난 성공과 왕관의 무게, 함께 따라오던 비판과 수많은 논쟁들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꾸준하게 자신만의 목소리를 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9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의 소설은 조금씩 변해왔고 그만큼 성장한 듯 보였다. 다음 소설이 기대된다. 




글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믿었고 책임감을 가지고 써야 하는 글도 있다고 생각했다. 두렵고 외롭고 허탈할 때가 많았지만 읽고 생각하고 질문하고 기록으로 남기려고 애썼다. 하지만 적의는 호의보다 훨씬 힘이 셌다. 내가 하지 않은 말들이 따옴표 안에 들어가 인터뷰 기사에 실렸고, 내 소설에 있지도 않은 문장과 에피소드가 인터넷 리뷰에 올라왔다. 결국 내가 졌다. 이용당한다는 생각, 절대 가지지 않으려던 그 마음이 드는 순간, 내가 망가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가지 않아도 되는 파티에 초대받았다. 초대 명단엔 내 이름이 틀리게 적혀 있었다. - P57

창문과 새로 단 도어록과 보조 걸쇠까지 몇 번이나 확인했다. 따뜻한 차라도 마시면 마음이 가라앉을까 싶어 주전자에 물을 붓고 가스레인지에 올리는 순간 옆방에서 뭘 떨어뜨렸는지 쾅 하고 바닥이 울렸다. 그 소리에 심장이 크고 빠르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도 가라앉지 않았다. 내가 지금 무서워하고 있는 것이 그저 스토커나 강도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보다 좀 더 근본적인 것. 특정한 사고나 사건이 아니라 나를 에워싼 상황 같은 것. 이를테면 젊은 여자가 스스로를 오롯이 책임지며 혼자 사는 일. - P139

사람이 할 수 없는 영역이 분명 있다. 그럼에도 할 수 있는 일은 기다리는 것, 준비하는 것, 완전히 절망해 버리지 않는 것, 실낱같은 운이 따라왔을 때 인정하고 감사하고 모두 내 노력인 듯 포장하지 않는 것. 눈물이 멈췄다. - P250


피해 학생을 쫓아다니며 합의를 종용하는 성폭행 가해 학생의 부모, 내 아이 학교 옆에 특수 학교를 짓지 말라는 학부모들, 논문의 공저자로 미성년 자녀의 이름을 올리는 대학교수, 자녀의 취업을 청탁하는 고위 공직자…… 이런 뉴스를 볼 때마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한다. 나빠지지 말아야지, 내 아이에게만 매몰되지 말아야지, 나빠지지 않고도 아이를 무사히 키울 수 있다고 계속 나를 다잡는다.

- 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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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라와 태양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홍한별 옮김 / 민음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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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생각하는 존재를 본다. 상황에 맞는 적절한 행동을 떠올리고, 인간을 관찰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존재를. 그는 감정을 느끼고 대화하며 소통한다. 반쯤, 아니 그 이상 인간과 닮았다. 인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딱 현재 갖고 있는 모습으로 태어나 매장에 진열된다는 것이고, 태양광 합성을 통해 양분을 얻는다는 점이다. AF(Artificial Friend), 지금보다 더 발전된 세상의 인공지능 로봇은 아이들의 친구가 되었다. 아이들은 부모님의 손을 잡고 쇼윈도에 진열된 로봇 친구를 구매하기 위해 매장을 방문한다.

주인공 ‘클라라’는 AF중에서도 인간에 대한 관심이 특화된 개체다. 유리창 바깥을 구경하며 인간들의 행동을 관찰하고 파악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한 병약한 아이 ‘조시’를 만났다. 둘은 유리 너머 짧은 대화를 통해 마음을 나눈다. 클라라는 수많은 AF 중에서도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며 꼭 데리러 오겠다는 조시와의 약속을 위해, 다른 손님을 거부하는 표현을 할 정도로 지능적인 모습을 보인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조시는 어머니와 함께 매장을 방문해 클라라를 찾는다. 어머니는 클라라의 관찰력과 표현력을 시험해본 뒤, 함께 살자는 결정을 내린다.

‘인간처럼’ 사고하려고 노력하는 로봇과의 동행이 어떤 위기와 결과를 불러올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방면으로 상상을 하게 되는데, 이는 로봇을 소재로 한 수많은 영화, 책에서 나온 클리셰를 따르진 않아 더욱 흥미롭다. 작가인 ‘가즈오 이시구로’는 전작인 <나를 보내지 마>에서 이미 로봇의 시점으로 다룬 소설을 펴낸 바 있고, 그 내용은 잔잔하면서도 폭발적인 슬픔으로 다가왔었다. <클라라와 태양>은 전작에 비해 조금은 가볍고 따스하며 희망적인 내용을 그리고 있다. 작가가 소설을 구상할 때 아이들을 위한 동화가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을지도.

소설 속 눈에 두드러지는 점이 있다면, 인물들의 성격이 뚜렷하게 규정되진 않는다는 것이다. 선인과 악인 또한 완벽히 구분되지 않는다. 병약한 아이와 함께 사는 어머니는 놀라운 비밀을 안고 있고, 해맑아 보이는 조시는 친구들 앞에서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인다. 모범적인 아이들로 보이는 조시의 친구들은 자신과 동반자인 로봇을 비하하기도 한다. 인간을 파악하기 좋아하는 클라라에게, 조시의 삶은 놀랍고도 새로운 데이터를 축적하는 환경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장면을 따라가는 독자인 우리들은 인간이 갖추고 있는 것, 갖추지 못한 것, 갖춰야 하는 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

공상보다 빠른 과학 발전의 시대다. AI는 벌써 우리에게 익숙한 기술이 되었고, 어떠면 빠른 시일 내에 인공지능은 더욱더 발전해서 상상을 뛰어넘을지도 모른다. 인간처럼 사고할 수 있는 로봇의 등장,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맞이하게 될까. 그들이 인간과 완전히 닮게 되는 순간, 우리는 어떤 면모로 인간됨을 확인할 수 있을까? 많은 생각이 뒤따른다.

"네, 조시는, 좀 더…… 이렇게 앉을 거예요."

어머니가 테이블 위로 몸을 숙이며 눈을 가늘게 떴고 어머니 얼굴이 폭포를 담은 가장자리 상자만 빼고 상자 여덟 칸을 채웠다. 한순간 상자마다 어머니 얼굴 표정이 다르게 느껴졌다. 어떤 상자에서는 눈이 잔인하게 웃는데 바로 옆 상자에서는 눈에 슬픔이 어려 있었다. 폭포 물소리, 아이들과 개의 소리가 줄어들었고 나는 고요한 가운데에서 어머니가 하려는 말을 기다렸다. - P159

"그냥 희망이야? 아니면 네가 기대하는 뭔가 구체적인 게 있는 거야? 우리가 아직 모르는 거?"

"제 생각에는…… 그냥 희망인 것 같아요. 하지만 진짜 희망이에요. 저는 조시가 곧 좋아질 거라고 믿어요."

그 뒤로 한동안 어머니는 말없이 창밖을 멍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나는 어머니가 우리 앞에 있는 도로를 과연 볼 수 있을까 의문이었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조용히 말했다.

"너는 똑똑한 에이에프야. 어쩌면 우리가 못 보는 걸 보는 지도 모르지. 네가 희망을 갖는 게 맞는 일일 수도 있지. 네가 옳을지도
- P165

헛간 안쪽이 점점 어둑해지고 있었지만 다정한 어둠이었다. 이내 부분 부분 쪼개진 것들이 사라지더니 이제는 실내 공간이 나뉘어 보이지 않았다. 나는 해가 떠나갔음을 알았고, 그래서 점는 의자에서 일어나 처음으로 맥베인 씨 헛간 뒤쪽으로 걸어갔다. 거기에서 나무가 울타리처럼 죽 늘어서 있는 곳까지 펼쳐진 풀밭과 해가 그 뒤로 피곤한 듯 이제 흐릿한 빛을 내며 땅으로 가라앉는 모습을 보았다. 하늘이 밤으로 물들며 별이 보이기 시작했고 나는 해가 쉬러 내려가면서 나를 향해 다정하게 미소 짓는 걸 느꼈다. - P247

"(…) 우리는 감상적인 사람들이죠. 어쩔 수가 없어요.우리 세대는 여전히 과거의 감정을 지니고 살죠. 마음 한편에서 그걸 붙들고 버리지 않으려고 해요. 우리 내면에 가닿을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고 계속 믿고 싶어 해요.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없는 고유한 무언가가 있다고. 하지만 그런 건 없어요. 누구나 아는 사실이죠. 당신도 알고요. 우리 세대 사람들은 무언가 있다는 생각을 놓기 힘들어요. 하지만 그 생각을 버려야 해요, 크리시." - P308

"(…) 너는 인간의 마음이라는 걸 믿니? 신체 기관을 말하는 건 아냐. 시적인 의미에서 하는 말이야. 인간의 마음. 그런 게 존재한다고 생각해? 사람을 특별하고 개별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
- P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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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서 한아뿐
정세랑 지음 / 난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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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랑 작가의 책을 시작할 땐 마음이 편안하다. 부담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 집중력, 이야기에 몰입하다 보면 자연스레 따라온다. 추리력, 사실을 검증하고 정체를 밝히려는 호기심 또한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닌 것 같다. 이런 것은 팩트고 저런 것은 거짓이다,라는 명제는 던져두자. 왜 저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느냐고 따지지도 말자. 오로지 필요한 것을 하나만 정하라면 ‘사랑’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다 아는 사랑의 감정, 그리고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라면 될 것이다.

아, 그런데 이쯤에서 약간의 실수를 한 것 같다. 소설 <지구에서 한아뿐>에서는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의 범위를 조금 더 넓혀야 한다. 조금이 아니라 우주적으로.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 아니면 무언가쯤으로 말해야 할까. 등장인물은 자그마치 외계인이다. 게다가 권태기가 와 떠나버린 전남친의 몸을 빌려 변신했다. 여러 의미로 괴상망측한 존재인 외계인은 주인공 ‘한아’를 이용하거나 농락하러 온 것이 아니다. 단지 지구 저편에서 바라본 한아의 모습이 놀랍도록 사랑스러웠을 뿐. 세계를 파괴하기를 넘어 서로를 파괴하기까지 하는 인간들의 모습 속에서, 함께 공존하는 우주의 질서를 이해하며 살아가던 한아의 모습이 눈에 선명하게 띄었던 모양이다. 한아의 삶의 방식은 그의 직업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환생’이라는 빈티지 샵을 운영하며, 누군가의 삶이 맞닿은 옷들을 섬세하게 살펴 추억을 보존한 채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다.

소설 속에는 주인공 한아를 비롯해 특별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등장한다. 지구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사람들 속에서 지구를 살리려 노력해보는 사람, 더 넓은 세상이 궁금해 마땅히 도전을 감행하는 사람, 나만의 영원한 우상을 위해 평생을 사는 사람, 지구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면 유별나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들은 누구보다 행복하다. 누구도 그들을 나무랄 권리는 없으니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소설 속에 가득 담겨 있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럼 왜 경민이 얼굴로 왔어? 물론 처음에 널 봤으면 꽤 놀랐겠지만…… 정우성 얼굴로 올 수도 있었잖아!”

기발한 상상력과 표현력도 물론이지만, 정세랑 식 유머는 작가의 책을 계속해서 읽게 되는 데 한몫을 한다. 현실에서 전혀 일어날 수 없을 법한 일들을 재치 있게 펼쳐나가는 뻔뻔함에 되려 기분이 좋아진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난 뒤 미소가 지어지는 그런 소설. 요즘 이런 소설은 정말 많지 않다. 비슷한 온도와 가득 힘을 준 문장들로 개성을 찾기 힘든 한국 문학 속에서 일관성 있게 자신만의 문학을 밀고 나가는 정세랑 작가는 한아의 모습과 닮아 있는 듯하다.

사람들은 왜 너 자신에 집중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느냐고 묻는다. 끝내는 아무것도 남지 않고, 아무도 고마워하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건전한 절대 명제, ‘누구나 하나의 세계를 이룰 수 있다’는 역사상 가장 오래 되풀이된 거짓말 중 하나일 거라고 주영은 생각했다. 세계를 만들 수 없는 사람도 있다.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탁월하고 독창적인 사람들이 만든 세계에 기생할 수밖에 없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똑같이 기여하는 것이 아니다. 거인이 휘저어 만든 큰 흐름에 멍한 얼굴로 휩쓸리다가 길지 않은 수명을 다 보내는 게 대개의 인생이란 걸 주영은 어째선지 아주 어린 나이에 깨달았다.

어찌되었건 내가 본 너는 엄청나게 일관된 사람으로, 혼자 엔트로피와 싸우고 있는 거 같았어. 파괴적인 종족으로 태어났지만 그 본능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지. 너는 비오는 날 보도블록에 올라온 지렁이를 조심히 화단으로 옮겨주고,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고래를 형제자매로 생각했어. 땅 위의 작은 생물과 물속의 커다란 생물까지 너와 이어지지 않은 개체는 없다는 걸, 넌 우주를 모르고 지구 위에서도 아주 좁은 곳에 머물고 있었는데도 이해하고 있었어. 나는 너의 그 선험적 이해를 이해할 수 없었어. 인간이 인간과 인간 아닌 모든 것을 끊임없이 죽이고 또 죽이는 이 끔찍한 행성에서, 어떻게 전체의 특성을 닮지 않는 걸까. 너는 우주를 전혀 모르는데, 어떻게 우주를 넘어서는 걸까.

나 때문이 아니었어. 날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던 거야. 다만 오로지 그 사랑만으로는 안 되는 일이었던 거지. 질량과 질감이 다른 다양한 관계들을 혼자 다 대신할 수는 없었어. 역부족도 그런 역부족이 없었던 거야.

그랬으면 좋겠다, 다들 날아가서 부딪치면 좋겠다. 한아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경민이 와준 건, 왠지 대놓고 인정하긴 싫었지만 행운이었다. 우주적 행운. 한 반광물 생명체의 획기적 진화. 대단한 희생을 기반으로 한 기적. 뭐라고 이름 붙이든 간에 한아는 망원경 앞의 저녁들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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